< -- 431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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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대로 돌진한 전차대가 후속부대의 지지부진한 움직임으로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후방에서 전해들은 베흔은 적들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녀석들, 전차대를 미끼로 후속병력을 축차 소모시키려는 수작이군.”
잠시 갈등하던 그는 스캐너로 전장의 상황을 살피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제파, 전차대 잔여병력을 이끌고 퇴각해서 가디언부대를 공격하는 경기병들을 쳐라. 가망 없는 전차는 포기해라. 가디언 1여단은 그사이 남쪽 골짜기로 올라 적 투창병들을 제압하고 3여단은 예비대로 대기한다.”
전차대를 사실상 포기하라는 베흔의 재빠른 지시에 제파는 적이 놀랐다. 전차대의 대부분은 이미 기동력을 상실한 채 적들에게 완전히 묶여있었다. 그들을 모두 버린다면 전차대는 부대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규모로 줄어드는 셈이었다.
베흔의 지시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과정이야 어쨌든, 적 보병들을 밖으로 다 불러냈으니 공성전까지 들어갈 것 없이 야전에서 다 끝낼 수 있다. 적들에게 수성전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보병대로 몰아치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빨리 탄현성을 점령할 수도 있어. 그러니 전차대에 연연할 필요 없다.”
전차대까지도 포기하고 돌진해오는 근위대 본대를 쳐다본 카렐은 서슴없이 명령을 내렸다.
“야전에서의 승리는 포기한다. 모두 성으로 퇴각한다.”
“예?”
“잡을 놈은 잡았으니 이제 수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최대한 빨리 퇴각한다. 적들은 야전에서 끝내려 하고 있으니 그렇게 당해줄 수야 없지. 도박판에서도 적당히 벌었을 때 손 털고 빠지는 게 고수 아니겠는가.”
조금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지시에 조페가 깜짝 놀랐다. 상대의 빠른 결정과 마찬가지로, 카렐 역시 그에 못지않게 빠른 결정을 내렸다.
“적 전차대를 사실상 궤멸시켰으니 이젠 됐다. 아직은 적 본대와 충분한 거리가 있으니 지금 물러나. 근위대들은 공성전을 유달리 싫어하는 경향이 있으니 수성전으로 적의 발목을 이틀만 잡고 있으면 돼. 이 정도 지체시켰으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조페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카렐이 손짓으로 동부 경기병대를 가리켰다.
“경기병대는 보병대가 퇴각할 동안 엄호 사격을 하고 제일 마지막에 물러나오도록.”
마치 장기 말을 움직이듯 차근차근 지시를 내린 카렐은 함께 있는 2백여 가디언 근위기병들에게 뒤를 따라오라며 수화를 보내고는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이런 말씀 드리면 언짢아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조페가 카렐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에 박차를 가하려던 카렐이 문득 그의 영상을 향해 돌아섰다.
“이런 때 보면 폐하께선 근위대장과 은근히 비슷한 면이 있으십니다.”
“나도 아네.”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근위대에 들어왔을 때 사실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 말에 정말 길길이 날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카렐 스스로도 이 말을 별 느낌 없이 들어 넘기고 있었다.
조페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그보다는 아랫사람들을 훨씬 잘 헤아리십니다.......돌아가신 오르마즈 경처럼.”
전열을 대강 정리한 베흔은 골짜기에 진입한 보병대와 가디언부대가 동맹군을 무섭게 쓸어버리는 호쾌한 장면만을 기다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보물 같은 전차대를 포기했으니 이제 그만큼의 대가를 적에게서 돌려받는 일만 남아있지.”
몇 안 되는 전차를 급히 추슬러 곁에 돌아온 제파에게 베흔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차 400대를 쏟아 부어서 기껏 보병 1천 조금 넘게 쓰러뜨렸다면 솔직히 본전도 못 건진 거야. 하지만 적 보병들을 다 끌어내서 한판 붙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아주 한 것이 없는 건 아니지. 그래, 애초부터 전차대를 미끼로 주고 탄현성을 먹을 계획이었다고 생각하지 뭐.”
어딘지 배배 꼬인 베흔의 힐책에 전차대를 이끌었던 제파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때,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며 전의를 다지고 있던 동맹군 보병들이 느닷없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순간, 베흔의 표정에 스친 믿기지 않는 허탈함은 눈치없는 제파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적들은 경기병들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탄현성으로 우루루 퇴각하고 있었다.
“조페 저놈이 감히 나하고 수 싸움을 벌여?”
베흔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전차대를 무너뜨리고 ‘알맹이’만 쏙 빼먹은 적들은 기껏 한판 붙자고 힘겹게 달려온 근위대를 마치 놀리듯 탄현성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껏 전의를 다지고 있던 근위대 보병대의 장병들 역시 멍한 표정이었다.
“이런 제기랄!”
베흔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적들의 재빠른 퇴각 때문에 야전에서의 승리는 너무도 허무하게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게다가 이번 전투로 공성전 없이 성을 차지할 것이 본래 계획이었다 보니 공성장비는 후방의 본진에서 미처 출발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공성구 다 챙겨오려면 얼마나 걸려!”
베흔이 후방의 사역부대를 불러내서는 괜한 화풀이를 하듯 소리를 꽥 질렀다.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그럼 내일 쓸 걸 지금 묻겠냐!”
베흔이 화를 버럭 내자 겁에 질린 사역부대 장교가 자료를 살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발리스타는 이번 전투를 위해 조립해 놓았었는데 다시 해체해서 이동한 후에 재조립해야 됩니다, 공성탑과 운제는 이번 전투에는 당초부터 사용 계획이 없었습니다. 포장을 풀고 처음부터 조립하려면 적어도 10시간 정도.......”
베흔이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정말로 원치 않았던 공성전 때문에 하루를 또다시 허비해야 할 상황이었다.
탄현성에서 베흔과 카렐이 두 번째 사투를 벌인 그날 밤에도 대륙 반대편의 사오시안트 별궁은 바깥세상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 아닌 황제 수우와 그 약혼자 구르베스에게도 바깥세상의 일은 그들 손 밖의 일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도리어 생병나겠어.”
구르베스가 뻐근해진 어깨를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산책 정도 외에는 가능한 움직이지 말라는 수우의 당부가 있었지만, 워낙에 활달한 구르베스에게 그런 답답한 생활은 도리어 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낮 내내 자리에 누워만 있어서인지 뻐근해진 몸도 풀어줄 겸 그는 별궁 위쪽 수우의 처소로 몰래 향했다.
“황상께선 자료실에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각까지?”
구르베스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잠이 유달리 많은 수우는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공부하러 가셨나.”
허탕을 친 구르베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난 며칠간 수우는 태교니 출산에 관한 책만 붙들고 계속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늦은 이 시각까지도 여전히 자료를 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았다.”
처소로 다시 돌아와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을 손수 탄 그는 행여 식을까 뚜껑으로 잘 덮고는 직접 손에 들고 이번엔 자료실로 향했다.
“아, 화, 황비 전하, 이 시간에.......”
문 앞에서 졸고 있던 자료실 사서가 입에 묻은 침을 허겁지겁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께선 어디 계신가?”
“시청각실에 계십니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무도?.......그럼 어쩔 수 없지.”
구르베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직접 만들어 온 뜨거운 코코아를 사서에게 내밀었다.
“내 다녀갔다고 전해 올리고 이거는 식기 전에 가져다드리게나.”
구르베스는 ‘너무 늦게까지 계시지 말고 빨리 침소에 드시어 옥체를 보하소서.’라는 짧은 메모를 그 자리에서 적어 코코아 잔 위에 얹었다.
“네, 알겠습니다. 황비 전하.”
구르베스가 섭섭한 얼굴로 돌아가고 난 후, 사서는 그가 주고 간 코코아잔을 들고 수우가 있는 구석진 시청각실로 향했다.
“폐하.”
“내 다가오지 말라하지 않았는가!”
평소답지 않게 잔뜩 화가 난 수우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움찔한 사서가 다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황비 전하께서 방금 다녀가셨습니다. 폐하께 간단한 마실 것을 두고 가셨습니다. 당장 드려야 할 것 같기에......”
“황비가?”
마치 마술처럼 부드러워진 수우의 목소리에 사서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낸 수우는 들어갈 때보다 훨씬 피곤하고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본 사서는 시청각실 안의 테이블에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과 임신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 그리고 황제와 마주앉아있던 내의원 주치의를 발견했다.
“이거냐?”
사서의 손에 들려있는 코코아잔을 빼앗듯이 받아든 수우는 그 위에 얹혀있는 구르베스의 메모에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치빠른 사서는 그렇게 환히 미소짓는 황제의 눈가에 무슨 이유엔지 눈물이 맺혀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 보거라.”
수우가 젖은 눈가를 얼른 가리며 뒤로 돌아섰다.
시청각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방음장치를 켠 수우는 주치의와 다시 마주앉았다. 그는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느끼며 잠시 평온한 미소 속에 빠져들었다.
눈치없는 주치의가 그의 이런 짧은 행복감을 다시 깨뜨렸다.
“자료에 따르면 넘겨주신 그 속옷 샘플에는.......”
“설명 안 해 줘도 알아. 이 정도 비교표는 이제 알아볼 수 있으니까.”
수우가 작은 행복감과 절망의 눈물이 뒤섞인 기이한 표정으로 코코아 한 모금을 다시 삼켰다. 그의 앞에는 이런저런 난해한 코드가 적힌 유전자 비교표가 잔뜩 구겨진 채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 수우의 입술이 어느새 잔뜩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넘겨주신 두 개의 체모에서 공교롭게도 동일한 Y염색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수우가 머리를 싸쥔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석 결과, 가디언이 나머지 한 쪽의 생물학적인 아버지 같습니다.”
수우는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베흔, 그리고 제롬의 그 숨겨진 혈연과, 그 대담한 근위대장이 아들인 제롬을 시켜 구르베스를 범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 테번 공을 죽인 것 역시 아마도 근위대장이었으리라는 사실까지.
텅 비어버린 수우의 코코아잔에 대신 그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수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그래, 그것까지는 다 알겠다. 그럼.......이제 말해 봐라. 황비는 대체 누구의 아이를 가졌는지. 그래, 당연히 내 아이는 아니겠지?”
수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구르베스가 설사 형 제롬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그는 이 사실을 알려서 약혼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생각은 없었다.
“아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냥 말하지 마라. 모르는 게 낫다.”
수우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주치의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정말 드문 경우였으니까요.”
“뭐?”
수우가 눈가를 닦아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비 전하의 배란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던 모양입니다.”
수우의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주치의의 입술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아의 Y염색체는 폐하의 것과 동일합니다. 황비 전하께선 폐하의 피를 직접 물려받은 건강한 아들을 생산하실 것이옵니다.”
“내.......아들?.......”
순간 수우는 순에 코코아잔에 얼굴을 가져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의 손끝과 입술은 어느새 짭조름한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이 자료들의 사본은 없겠지?”
“예. 모두 소인이 직접 처리했고, 사본은 절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됐다. 넌 돌아가도록 해.”
주치의가 사라진 뒤, 수우는 빈 코코아잔을 더듬으며 시청각실 안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런저런 책들과 서류들이 여전히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로서도, 누군가의 남편으로서도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죽은 아버지 테번 공의 빈 자리가 지금의 수우에게는 너무도 간절하게 다가왔다.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아들을 얻는다는 기쁨과, 구르베스와 아들을 형과 근위대장의 손에서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첫 번째 태자가 수우의 혈통임이 밝혀진다면 그들이 이번에는 무슨 흉계를 꾸미려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구르베스 뱃속의 아들은 제위 후계자였고, 동시에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을 이은 유일한 적계 혈통이었다. 그리고 종권을 ‘훔쳐간’ 그들에게는 목줄을 위협할 비수였다.
수우는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긁어모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인사를 올리는 사서를 뒤로하고 그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따라 들어오려는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혼자 방에 든 그는 한쪽의 벽난로를 켰다. 그리고 가방에 가져온 서류들을 그 안에 한 장씩 던져넣었다. 노란 불꽃 속에서 타들어가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며 그는 이런 진실조차 밝힐 수 없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했다.
“그래, 내가 지켜야 돼, 내가.......다른 걸 다 버리더라도.......”
수우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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