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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23화 (422/1,132)

< -- 423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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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덤벼!”

베레트라는 자신을 향해 생각없이 돌아선 적병의 턱을 그 쇳덩이로 사정없이 올려쳐 조각내버렸다. 턱을 움켜쥐며 쓰러진 적병을 한쪽 발로 짓밟아버린 그는 뒤이어 덤벼드는 적 분대장의 목을 방패 모서리로 힘껏 찍었다. 보통의 방패 공격이었다면 부러뜨리거나 넘어뜨리는 것이 고작이었겠지만 이 괴력의 전사가 휘두른 방패는 상대의 경갑을 부수고 목젖 살점까지 갈가리 찢어냈다.

“이런 니미럴!”

베레트라는 한쪽이 쪼개져 덜렁거리는 방패를 쳐다보며 다시 욕을 내뱉었다. 3명의 병사 중 2명은 이미 적에게 난도질당해 숨이 끊어져 있었고, 마지막 한 명도 양 팔이 잘리고 몇 군데나 찔린 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퇴각! 퇴각!”

어디선가 들려온 헨지의 외침에 베레트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후미를 지키던 가디언들을 위해 성벽 위의 수비병들이 케이블을 던져주고 있었다. 베레트라는 바닥에 쓰러져있던 산 병사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케이블 중 하나를 붙든 그는 반쯤 부서진 방패를 뒤에 짊어지고 병사의 벨트를 자신의 벨트와 연결시켰다.

“빨리 올라오십시오! 빨리요!”

성벽 위의 수비병들이 바싹 애가 타는 얼굴로 베레트라에게 함성을 질러주었다. 일제히 물러나 케이블을 붙든 가디언들은 거의 뛰어오르듯 빠른 속도로 성벽을 우루루 기어올랐다. 하지만 시민인 데다가 부상자 한 명을 매단 베레트라에게는 상황이 녹록치를 않았다. 그는 일부러 미끌미끌하게 만들어 놓은 성벽을 위험천만하게 짚고 한손한손 악을 쓰고 짚어 올라갔다.

“끌어올려!”

수십의 수비병들이 달려들어 케이블을 위에서 힘껏 잡아당겼다. 밑에 있던 남부 경보병들 역시 질세라 그를 향해 수십 발의 창을 날렸지만 베레트라는 병사의 몸을 가린 채 케이블을 결사적으로 붙들었다.

“아악!”

창 한 발이 그의 왼팔을 스치며 성벽에 요란스레 부딪혔다. 케이블을 쥔 한 손을 놓치고 비명과 함께 움찔거리던 그의 대퇴부를 또 한발이 뚫었다.

“빨리! 빨리!”

중상을 입은 그의 모습에 당황한 수비병들이 케이블을 더 빨리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체중을 한 팔에 받친 채 케이블에 매달린 베레트라가 고통스러운 듯 큰 고함소리를 질렀다.

“저, 저를 풀어주시면.......”

부상병이 잘려나간 팔로 베레트라의 가슴을 더듬으며 마치 신음소리처럼 흐느꼈다.

“닥쳐, 이 새끼야. 악!”

누군가 집어던진 칼이 부서진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온몸 곳곳의 상처에서 오는 지독한 고통 때문인지 도대체 어디에 박혔는지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케이블을 힘겹게 쥔 그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벽 꼭대기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조금씩 멀어지는 의식을 붙들기 위해서라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올려! 이 새끼들아! 빨리!”

“여기요! 여깁니다!”

성벽 위의 수비병들이 내민 몇 개의 손이 그의 팔뚝을 덥석 움켜쥐는 것을 느끼며 베레트라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에 안긴 병사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과,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는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서성 방어책임을 맡고 있는 대대장 대리 타슈카 라코타 중랑입니다.”

타슈카는 지원군을 이끌고 온 헨지에게 경례를 올리며 바로 자기소개부터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슈카가 남문 밖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성벽 밖에서는 보급품 트럭 중 7대가 여전히 붉은 불길을 내뿜으며 타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전사한 병사와 노예들의 시체 수십 구가 남문 밖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피해는 좀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군. 캐빈 절반이나 들어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헨지는 남문 안쪽에 일렬로 늘어선 23대의 캐빈을 내려다보며 피묻은 손을 툭툭 털었다.

“병사들이 큰 힘을 얻었으니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타슈카가 하나같이 밝아진 수비병들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감사하지 말고 이분께 감사드리게나.”

헨지가 잘 봉인된 문서 하나를 타슈카에게 내밀며 쫑긋 눈웃음을 지었다.

“축하하네. 라코타 교위.”

화려한 비단끈으로 봉인된 문서를 조심스레 뜯어 본 타슈카는 환해진 얼굴로 성 중앙의 누대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호기심어린 얼굴로 그를 올려보는 수비병들을 내려다보며 문서를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제국의 지배자이며 리 리쿠의 피를 물려받은 황제 카렐 카파키 리쿠는 불굴의 충성심으로 남부의 반역도에게서 성을 지켜낸 이암성 서성의 모든 용사들에게 1계급 특진과 제12공신의 영광을 부여한다! 짐은 그대들을 믿으며, 짐의 치세에서는 아무리 이름 없는 용사라도 결코 버려지거나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명심할지어다!”

폭발하는 함성이 다시 서성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목구멍을 막고 선 이 작고 끈질긴 성은 또 얼마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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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입각한 투모카프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비서실장이 된지 단 7년만에 부총리로 전격 발탁되었고, 황제의 전적인 신임을 받으며 사실상 총리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거만하고 잔혹했지만 비슷한 성격이면서도 황제의 눈앞에서는 무조건 순종하고 상황에 따라 옷을 바꿔입는 베흔과는 달리 주관도 뚜렷했다. 베흔이 자신의 잔혹함과 음흉한 속내를 철저히 숨기고 사는 능구렁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스로의 잔혹함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도리어 무기로 삼는 남자였다.

그렇다보니 두각을 나타내기도 쉬웠지만 반면 적을 만들기도 쉬웠다.

황제가 예스맨 베흔에게 진절머리를 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나대는 투모카프를 최측근에까지 중용한 것은 어찌보면 조금 기이한 일이었다.

즉위 이후 조금씩 독단적으로 변해 간 이 황제는 말대꾸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고, 고집 센 사람 역시 혐오했다. 투모카프는 굳이 말하자면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이 되었지만, 그런데도 그가 황제의 철저한 믿음을 받은 것은 둘의 주장이 어긋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부총리 투모카프와 황제의 ‘기묘한 동거’는 둘의 의견이 어긋나거나 약간의 충돌만 벌어지면 바로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거 영 조짐이 좋지 않군요.”

황궁 101층 자신의 집무실에 서서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베흔은 평소 친분이 있는 황실 법무부 대부 아리아노 경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보기는 좋지 않겠소.”

베흔은 한참 기초공사가 진행 중인 황궁 주변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그동안 황도 중심에 마치 독불장군처럼 서 있던 황궁 주변에 이제 동서남북 각 방향마다 하나씩 별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리아노 경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솔직히 대전에서 목숨걸고 따질 정도의 충신과는 거리가 머니 가만히는 있지만 말입니다,”

“대신들 사이에서 이번 공사가 너무 무리가 아니냐고 뒷말 오간다는 거 말이요?”

“황상이시라고 흙 퍼서 돈 만들지는 않으실 테고, 3년 연속으로 재정이 적자로 기울면서 군데군데 걱정하는 말들이 나오는 모양이던데.......지금 이것 말고도 쌓여있는 국책사업이 한둘인지 아십니까.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뭐 법무부야 이번에 새로 생기는 별관에 근사하게 입주 예정인데 그냥 그걸로 위안을 삼으시구려. 재정 걱정은 재무부 친구들한테나 맡겨두고. 지방출신 귀족들이야 어차피 황제령에는 화장실 한 칸 지어도 벌벌 떠는 놈들 아니요.”

“농담 하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은.......”

“폐하께선 현재의 권위에 만족치 못하고 계신다오. 중앙귀족인 그대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요, 폐하께서 지난번 전쟁으로 기껏 지방귀족들을 눌러놓으니 이젠 중앙귀족들의 부패가 문제가 되고있지 뭐요. 이럴 때가 최고통치자에겐 위기이면서 기회이기도 하지요.”

베흔의 말에서 행간의 뜻을 눈치챈 아리아노 경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 이젠 중앙귀족들이 철퇴를 맞을 차례라는 뜻입니까?”

베흔은 그의 질문에 가타부타 직접적인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대신 별관 공사현장을 돌아보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부총리 투모카프 녀석이 공사 총 책임을 맡았다죠.”

“녀석이 발안자니까요.”

“비난을 떠안을 당사자이기도 하고.”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공사가 끝나는 대로 녀석을 총리로 삼으시겠죠. 제후들을 잡기 위한 사냥개가 오르마즈였던 것처럼, 녀석도 비슷한 역할을 떠맡겠죠. 그러니 경도 한동안은 몸을 사리고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아리아노 경이 흑인종 특유의 도톰한 입술을 대뜸 씰룩거렸다.

“글쎄, 문제는 투모카프 그놈이 오르마즈처럼 폐하의 폭주에 적당한 브레이크 역할까지 겸할 수 있느냐겠지. 개혁이 되느냐 폭정이 되느냐는 결국 거기서 결정되는 것 아니겠소?”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아리아노 경을 돌아보았다.

황제령에 조금씩 공포정치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을 동안, 북부에서는 나름대로 경사라고 할 만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연금중인 오르마즈의 혼인 소식은 그의 무너진 정치적 위상만큼이나 세간에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마즈는 혼약된 남자와 별다른 약혼식조차 올리지 않았고, 남자들의 지위 또한 세간의 관심을 이끌 만큼 대단치도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린 것도 가문 후계자나 적장자의 혼인에서는 어차피 흔한 일이었다.

첫째 남편이 된 마에두는 2차 혼란기에 오르마즈의 부장 역할을 잠시 한 것을 빼면 별다른 무공도, 관직 경력도 없는 평범한 식물학자였고, 둘째 남편인 네포프 칼리 경도 중앙귀족 칼리 가 출신의 그저 그런 중도파 유학자였다.

사실 오르마즈에게는 약혼을 청해 온 강력한 가문과 인물들도 많았고, 마음만 먹었다면 훨씬 좋은 혼처를 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서부 세호 가에서는 가문 장남과의 혼인을 청해왔고, 발 가에서는 이에 질세라 종장 사우드 부인이 아예 직접 혼인을 청해오기도 했다. 동부 최고제후 슈트란 가에서도 샤자한 공이 넷째아들과의 혼인을 청해왔고, 중앙귀족가 중 가장 막강한 쉐너 가에서도 장남과의 혼인을 청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투르케스크 공은 그들 모두를 거절하고 이 둘을 사위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려 가문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물론 오르마즈가 강력한 시가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각하, 각하, 황궁에서 사람이 오셨습니다.”

조촐한 결혼식이 있은 다음날, 오르마즈를 잠에서 깨운 건 가문 집사의 목소리였다. 그는 전날 결혼식의 피로로 녹초가 되어 잠들어 있는 마에두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말아요.”

아침까지도 오르마즈를 꼭 안고 있던 마에두는 품 안이 빈 것을 느꼈는지 침대 위를 더듬으며 어눌하게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오르마즈가 베고 있던 베개를 더듬더듬 끌어안고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오르마즈는 전신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알몸을 새삼스레 돌아보았다. 늘씬한 팔다리, 날렵한 몸은 마치 누군가 세심하게 설계한 기계처럼 완벽한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힘과 순발력을 지닌 단단한 근육이 그의 온몸에 고르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무지개빛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얼굴 위에서 반짝였다.

“불쌍한 남자 같으니.”

오르마즈가 마에두의 따뜻한 뺨을 살짝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오르마즈의 벗은 몸을 처음 본 마에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눈앞에 펼쳐진 그 아름다운 몸이 정말로 자신과 결혼한 사람의 것인지 의심했을 터였다. 서로의 옷을 벗기던 그 긴장된 순간부터, 침대에 지친 몸을 눕히던 나른한 시간까지, 모두가 오르마즈의 주도였고 입맞춤과 가벼운 손길 외에는 별다른 애무도 없었지만 그는 너무도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과분하기까지 한 배우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사랑하다는 말을 열 번도 넘게 반복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그렇지 못했다.

오르마즈는 가운을 대강 챙겨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궁?”

침실 문을 연 오르마즈는 집사가 내민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분홍빛 촌스런 포장지로 장식된 그 상자는 금색 끈과 누군가 서투르게 직접 만든 작은 조화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다.

“황궁에서 누가 보낸 건가?”

“모르겠습니다. 시종장이 직접 가져왔습니다. 누군지는 받으시면 아실 것이라 했습니다.”

“알았다.”

상자를 받아든 오르마즈는 문을 닫고 상자를 조심조심 풀었다.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연 순간, 오르마즈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자 안에는 잘 포장된 크로커스 몇 송이와 곱게 접은 하얀 실크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손수건은 새것이 아닌 듯, 군데군데 젖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직도 절 버리지 못하셨습니까......”

오르마즈가 꽃잎을 더듬으며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황제의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그 작은 손수건 위로 오르마즈의 눈물 한 방울이 다시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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