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21화 (420/1,132)

< -- 421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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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휩쓸고 있는 1번 도시와는 대조적으로, 사오시안트 별궁이 있는 2번 도시는 여전히 평온했다. 이곳 내각의 사람들 중 자신들이 곧 황궁을 탈환하고 멋지게 개선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연합군의 욱리하 도하가 멀지 않았다는 소식에 당장이라도 황궁에 돌아갈 수 있을 듯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사실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은 현재의 상황에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마누엘 그 미친 새끼.”

3군이 이암성의 완전함락을 포기하고 남진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쿠베로부터 전해들은 베흔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황궁에 뭐 보물단지라도 숨겨놨어? 도대체 그 빌어먹을 남부 놈들은 왜 그리 황궁을 빨리 못 찾아서 안달들인 거야? 병력에 동원력, 경제력까지 모두 우세한 우리가 왜 이리 시한에 쫓겨 안절부절 못해야 하는 건데?”

더 심한 욕을 늘어놓으려던 베흔은 그 ‘빌어먹을 남부 놈들’의 수장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 나이만큼이나 쓸데없는 똥고집으로 똘똘 뭉친 마누엘 델루지 경은 베흔의 설득이라고 들을 인물이 아니었다.

“씨발,”

베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잔뜩 격앙되어 있는 그에게 쿠베가 두 번째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류한 경이 마자리크 경에게 정식으로 이혼을 통지했다고 합니다. 반역자와 한 가족이 되어 델루지 가를 먹칠할 수는 없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물을 들이키던 베흔은 소스라치게 놀라 입에 있던 물을 침과 함께 쏟아내고 말았다. 델루지 가 출신의 상급귀족인 류한 델루지 경은 얼마 전 동맹군 쪽으로 붙어버린 남부 5제후 마자리크의 남편이었다.

“그 새끼가 미쳤나! 누구 멋대로 이혼을 해!”

“이그나토 가 내부 사정이 적 쪽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방향으로 기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의하는 차원에서.......”

“항의는 빌어먹을 항의! 지가 곤란하니까 도망친 거지!”

베흔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싸쥐었다. 쿠베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전 후에 이그나토 가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있을 것 같아 미리 몸을 빼려는 것 같습니다.”

“그놈까지 빠져버리면 이그나토 가를 어떻게 견제하라고!”

베흔이 엄한 쿠베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의 말대로, 류한 델루지 경은 이그나토 가를 통제하기 위해 종장 마자리크와 정략결혼을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그나토 가의 중요 정보들을 모두 빼내 델루지 가에 제공하고, 영지인 일리안의 ‘친 델루지파’ 인물들의 수장이 되어 종장 못지않은 영향력을 휘둘러오고 있었다. 지난번, 제롬이 마자리크를 처형하고 그 적장자 윌더 델루지 이그나토를 새 종장으로 삼으려 했던 것도 그런 간접지배를 더 강화하려는 속셈이 없지 않았었다.

“이번에 마자리크 경이 의심스런 행동을 저지르면서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지레 놀라 이혼을 선언해버린 모양입니다.”

쿠베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뭐, 공식적인 연좌제는 없지만, 반역죄로 처형당한 종장이나 가장은 배우자와 자식들까지 ‘비공식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관례니까요. 재빨리 내빼서 살아남은 좋은 예도 있지 않습니까.”

베흔이 쿠베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가 말하는 ‘좋은 예’가 누군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네포프 그놈을 아직까지 살려둔 건 그저 홍보 목적이었을 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쿠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일단 긍정의 몸짓을 보냈다. 하지만 291년, 오르마즈가 죽기 20분 전 ‘속 보이는’ 이혼을 선언했던 네포프 경을 아직까지 살려둔 건 홍보라기보다는 베흔 특유의 쇼맨쉽과 잘난체하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야 나름대로 쓸모가 많았죠."

쿠베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네포프 경은 살아남은 대가로 근위대의 각종 행사에서 ‘북부 정벌의 정당성’을 홍보해야 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죄책감과 후회에 폐인으로 전락한 이후로는 그 정도의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새끼, 지 몸 하나 살리자고 일을 다 꼬아놓는구나.”

베흔이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롬에게 다시 연락해, 이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고! 종장이니까 힘 좀 써 보라고 해.”

“하지만 그러면 마자리크 그 자가 반역자가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제후들이란 다 잠재적인 반역도들인데.”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쿠베가 잠시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잠시 후, 베흔의 앞에 놓인 할룩스에서 3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 있는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입니다. 지금 막 마누엘 경이 3군 병력 7만을 이끌고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베흔이 이마를 싸쥐며 대뜸 불평을 뱉어냈다.

“빌어먹을 개새끼.”

“적들이 움직입니다!”

이암댐 서성 위에서 더러운 담요를 대강 몸에 두른 채 졸고 있던 타슈카와 베레트라는 탑에서 경계를 서던 대수의 고함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번쩍 뜨고 성벽 모퉁이로 달려갔다.

“정말이네.”

타슈카가 눈곱이 잔뜩 붙은 눈을 비비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려 10만을 헤아리며 호안을 꽉 채우고 있던 연합군 3군은 서성 서쪽으로 새로 낸 우회로를 따라 계속 남하하려는 듯 숙영지를 거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허, 어제는 당장 죽이겠다고 덤벼들더니.”

베레트라가 어젯밤 다친 팔을 주무르며 입을 씰룩거렸다.

지난밤의 공세에서 연합군은 첫날 무너졌던 서쪽 성벽을 목표로 삼아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가해 왔다. 서쪽 성벽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발리스타의 개수는 헤아리기도 어려웠지만 그 탄탄하던 성벽의 기초마저 산산조각난 것을 보아 적어도 500발은 넘게 쏟아 부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파편에만 50명이 넘는 수비병들이 갈가리 찢겨 죽었다.

그러더니 오늘 물러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앞으로는 덤비지 말라’며 마지막으로 가한 협박성 공세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서쪽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린 적군은 부서진 성벽 파편을 붙들고 성 위까지 기어올라와 그곳을 맡고 있던 베레트라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새 성 위로 기어오른 남부 보병들과 수비하는 동맹군 북부보병대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지면서 베레트라는 그 특유의 거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해 선두에서 혼자 20명이 넘는 남부 보병들의 머리를 해머로 쪼개며 사역병들이 성벽을 응급 보수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3명이나 되는 적병들에 얼떨결에 둘러싸여 난투극을 벌이다가 팔에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지난밤 최대의 공훈을 세운 건 어쨌든 베레트라였다.

“어젯밤 네가 잘한 건 날 서쪽 성벽에 세운 거야. 네가 갔어 봐. 5명이나 죽였겠나.”

베레트라가 피로 범벅이 된 전투해머를 성벽에 툭툭 털며 타슈카에게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그래, 너 쌈박질 솜씨야 천하일품이지.”

별 이의도 없는 듯 피식 웃어보인 타슈카는 서성의 누대에 뛰어올랐다. 어젯밤 150명이 넘는 병사들이 죽었고, 이제 서성에 남은 건 600명 정도의 그럭저럭 성한 병사들과 200명이 조금 넘는 중상자들이었다. 그들은 누대에 뛰어오른 자신들의 고집스런 지휘관을 올려보며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들은 10만이 넘는 적 3군을 무려 이틀간이나 이곳에 잡아두고, 이곳을 지켜낸 용사들이었다.

“적들이 도망간다! 황상께서 보내주신 지원군도 곧 도착할 것이다! 우린 승리했다! 알겠나! 우린 고작 1천 명으로 10만명을 이겨냈단 말이다! 우리가 승리했단 말이다!”

그는 손에 든 타바진 도끼로 방패를 탕탕 두들기며 우렁찬 함성을 올렸다. 지원군이 올지 안 올지는 사실 그도 별 확신이 없었지만, 일단 병사들에게는 믿든 안 믿든 상관없는 저 거짓말을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다. 승리를 깨달은 1천여의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이암댐과, 조금은 억울하게 물러나는 연합군 병사들의 억장을 뒤흔들었다.

“고작 우리도 꺾지 못한 겁쟁이들이 감히 황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가!”

타슈카가 성을 우회해 남진하는 적군의 행렬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의 함성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수비병들이 적군의 행렬에 대고 ‘겁쟁이들’이라는 야유를 계속해서 퍼부어댔다. 1천 명 가까운 수비병들이 일제히 퍼붓는 야유에 연합군 병사들의 어깨가 조금씩 처져갔다.

“적 우회로는 우리 발리스타 사정권 이내입니다. 어떡할까요?”

사역병단 장교의 물음에 타슈카가 바로 알았다며 손짓을 보냈다.

“한 20발만 선물로 보내 줘라.”

사실 성에 남은 발리스타는 100발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과욕을 부리기로 했다.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그리고 상대방에게 아직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눈앞에 빤히 보이는 먹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발사!”

서성 쪽에서 갑자기 날아든 발리스타에 우회로를 돌아 막 행군을 시작한 연합군 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누엘 역시 곁을 지키던 근위보병들 중 몇이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서성은 앞으로도 저렇게 살아남아 이 길을 지나는 후속병력과 보급대를 괴롭힐 것이 뻔했다.

“저래 봤자, 며칠 내로 싹 다 죽을 놈들이.”

7만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남진을 시작한 마누엘이 동맹군들의 야유에서 애써 관심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지금 저렇게 무력시위를 하고는 있지만 아리엘과 함께 이곳에 남을 3만의 병사들이 어차피 공성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어젯밤 성벽까지 반쯤 무너진 데다가 고립까지 된 저들로서는 채 이틀을 버티기 어려우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저곳에 지원군을 보내줄 리가 없었다.

“젠장, 길이 뭐 이 지경이야.”

마누엘이 진창에서 휘청거리는 말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며 투덜거렸다.

서성의 서쪽, 가파른 산악을 빙 돌아 남진하는 우회로는 아직도 사역병들의 작업이 계속 중이었다. 원래 있던 도로를 동맹군들이 모두 무너뜨린 덕에 길이 좋지 않아 대형 수송차량은 본대와 함께 출발할 수가 없었다.

대신 보병과 기병, 소형차량으로만 이루어진 본대도 아직 험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산길을 지나느라 시작부터 애를 먹고 있었다.

이틀 정도 후, 이곳 임도가 완전히 뚫리는 대로 케세크가 후발대가 되어 5천 정도의 병력으로 중차량들을 호위하고 뒤를 따라올 예정이었다. 사실 후발대로 올 중차량들의 중요성은 본대에 못지않았다. 40스타디아가 넘는 어마어마한 강폭의 욱리하에 놓을 부교 자재와 건설기계가 1군과 반반씩을 나누어 그 중차량들에 실려 있었다. 3군이 서성을 우회해서라도 빨리 남하해야 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2일 후에 수송대를 이끌고 뒤따르겠습니다.”

케세크가 마누엘을 배웅해주며 말했다. 마누엘은 저 단순무식한 무장을 바라보며 어딘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아리엘이 함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대치하고 있던 연합군 3군 본대를 내려보낸 타슈카는 여전히 호안을 지키고 있는 3만여의 병력에 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어마어마한 그 숫자를 자랑하듯, 적들은 거의 3만 가까운 병력을 이곳에 놔둔 채 남진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적의 남진을 늦추었을 뿐, 막아낸 것이 아니었다.

“계속 버티어낼 수 있을까.”

그는 거의 무너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서쪽 성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남아있는 적들이 한 번만 더 쳐온다면 그도 지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부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성벽을 지켜 온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욱리하의 남쪽 수평선 너머,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건 적 3군 본대를 내려보낸 직후,수비병들이 막 허탈해하던 그 순간이었다.

“중대장님! 남쪽에서 배입니다! 배가 보입니다!”

경계병의 고함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베레트라는 환호성을 올리려는 병사들을 일단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배?”

“그냥 바지선인 듯.......아니, 지금 깃발을 바꾸고 있습니다.......검은 바탕에 금색 깃발입니다!”

순간 서성 위의 동맹군 병사들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이암호를 전체를 들썩이게 할 정도의 그 함성에 중앙성을 차지하고 있던 연합군 병사들이 놀라 성 밖으로 뛰어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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