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9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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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공의 1군은 평소처럼 출발했다는 보고입니다. 내일 저녁이면 주류성 동남방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시로의 보고에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문반 무반 대신들이 모두 황궁 대회의실에 모여 곧 벌어질 수성전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 중에 있었다.
“주문한 보병용 투창장비는?”
“오늘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투창 25만발과 사이클롭스 4천벌, 그리고.......오늘 오후에 추가분으로 투창 15만발과 사이클롭스 2천벌이 더 도착할 겁니다. 북부 쿠트라스 상공조합 산하 금속연맹에서 다른 모든 작업을 제쳐놓고 총력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아트릭스가 새벽에 입고되어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사이클롭스와 투창 한 꾸러미를 카렐에게 올렸다.
“사이클롭스 2천벌과 투창 20만발은 가장 급한 주류성에 지급될 것이고 이암성과 탄현성에도 2천벌씩과 투창 10만발이 오늘 중으로 배급될 겁니다.”
기초훈련만 겨우 끝난 동부지원병 1진 3천을 주류성에 배치시킨 카렐은 앞으로 도착할 동부지원병들과 각 요새에 주둔한 전사단 경보병들에게 투창병을 겸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서둘러 진행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장비는 지난번 북부에서 받은 돈과 길지 않은 시간이면 해결될 수 있지만 문제는 아직 한심한 훈련 상태였다. 물론 아주 민간인을 병력화하는 것이 아닌, 전역병들 혹은 현역병들에 추가훈련을 시키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며칠 만에 ‘투창병부대’가 뚝딱 만들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베아트릭스가 바친 투창을 뜯어 꼼꼼히 살펴보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북부 상공조합 운영위원 중 한명이 황궁에 상주하면서 앞으로 발주와 공급 상황을 직접 관리해주기로 했습니다.”
전사단에서의 이어 아직 ‘지원업무’를 맡고 있는 군수부장 아메스의 보고에 카렐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후가 겸직을 금하고 있으니 조만간 이 일도 그만둬야 할 테지만 아직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해 계속 맡고 있었다.
“지금 회의실 밖에 와 있습니다.”
우베가 한마디 덧붙이자 카렐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와 있다고?......그럼 잠깐 들여보내보겠나? 얼굴이라도 봐야겠지.”
우베의 손짓에 문이 열리더니 조금 마른 여자 한 명이 회의실에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 여자의 얼굴과 마주친 아메스가 순간 움찔했다.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 카렐이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호, 이거 구면인걸.”
여인이 상석에 앉아있던 카렐에게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다시 뵈올 수 있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여자의 검은빛 눈동자에 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역시 북부미녀가......”
“닥쳐.”
제네르가 넋 나간 듯 중얼거리는 우베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여자가 카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북부 상공조합 운영위원 밀리타 레즐린입니다.”
“잘 와 주었네. 아스탈 레즐린 위원장은 별 탈 없고?”
“걱정해주신 덕에 건강히 잘 계시옵니다. 아버님의 명으로 폐하 군대의 군수지원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각 업체들과 연락책 역할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밀리타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할룩스로 연결되어 있던 네피가 갑자기 손바닥에 침을 발라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에 카렐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마리안의 죽음 이후, 여자들에게는 줄곧 냉담하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내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줄 아네만, 간단한 소개 좀 해주겠는가?”
카렐의 느닷없는 질문에 내심 기겁을 한 아메스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눈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밀리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기원전 37년에 태어났으니 현재 453살이옵고 평민 신분이옵니다. 북부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의학과 경제학, 정치학, 경학을 박사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상급 회계사와 상급 법률사 자격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쿠트라스의 중앙조선소와 헤켈 차량사업소, 샤디스 병기창에서 최고경영자로 재직하였고 노에누스 가 재무장관을 거쳐 지금은 조합에서 수주부서 지배인으로 있사옵니다.”
‘평민’이라는 신분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경력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상급제후가의 재무장관이면 4품인 황실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관이었다.
“대단하군, 한 분야도 아니고 그런 여러 분야를......”
무언가 생각에 잠긴 카렐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그와 동시에 밀리타의 입꼬리 역시 살짝 치켜올라갔다. 카렐이 네피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결혼은 했고?"
"아직 미혼이옵니다."
좌중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카렐이 옆에 선 페로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메스 후임으로 어떨 것 같아? 군수부장 역시 황실 4품이니까.”
“난 또,”
밀리타가 들어온 이후 줄곧 뾰로통해져 있던 페로가 그제야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꾸 사람 놀래게 하지 마.”
“내가 뭘?”
“몰라서 묻냐?”
페로가 눈을 흘기며 바로 대꾸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귀엣말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꽤나 중대한 사안 논의 정도로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카렐이 우베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황실 공직자로 삼는 데 다른 문제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저, 저기, 폐하.”
회의실을 막 나선 카렐을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우베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정말 관심 없으세요? 정말이요?”
“관심 없다니까. 지금 4명도 충분히 피곤하다는데 왜 너희들 멋대로 넘겨짚고 그러는 거냐?”
카렐이 짜증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데 넌 왜 그리 관심이 많은데? 베이라 놔두고 꼬셔보려고?”
“아, 아니, 물론 그건 아니고.......장수들이나 대신분들이 워낙에 궁금해 하셔서......”
우베가 이를 드러내면서 웃어보였다. 밀리타가 아직 미혼이라는 말에 녀석들이 황제의 진짜 의중을 떠보라 우베에게 시킨 모양이었다.
“정확히 누가? 네피?”
“네피 대장군님하고.......갈라크 도비치 장군하고, 이브라힘 재무장관님하고.......저, 저기 사르키스 세호 경하고 베나지 나하스 장군하고......”
“풋, 네피하고 베나지야 신분이 그렇고, 다른 놈들이야 북부 출신이라 그럴 법도 하지만.......사르키스 녀석은 서부 상급귀족이 웬일로 평민 여자한테 관심을 다 둬?”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 상급귀족이 같은 상급귀족하고 결혼하지 않는 이상은 자식은 하급귀족이 되긴 매한가지죠 뭐. 뭐, 첩실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우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네피 녀석은 뭐라고 그러든?”
“뭐랄 것도 없고요, 그냥 넋이 나가 계신 것 같던데요?”
“녀석 이제야 임자 만났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자 숙소가 어디냐?”
카렐의 질문에 우베가 앞서가는 그를 의심어린 눈으로 힐끔 올려보았다.
“영빈관 32층입니다.”
“전담 경비병 2명 붙여주도록 해. 아직 공직자는 아니지만 자칫 적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우베가 내민 자료를 뚫어지게 살피던 카렐은 사진에 보이는 이 여자의 유난히 검은빛 눈동자가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을 문득 받았다.
“옷이 많이 더러워지셨습니다. 폐하.”
두 시간 가까이 수우와 함께 말을 타고 사오시안트 별궁에 돌아온 구르베스가 황제의 어깨에 앉은 뽀얀 먼지를 털어주며 말을 건넸다. 어깨를 만져주는 그의 손길에 수우가 참으로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둘이 약혼한 이후 한 달이 넘게 흐른 뒤였지만, 구르베스가 이렇게 직접 그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도 이렇게 같이 말을 탄 둘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서로의 모습에도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시종에게 말을 넘긴 둘은 누가 먼저 뭐랄 것도 없이 황비 처소에 함께 올라와 있었다. 구르베스 역시도 자신의 처소까지 함께 올라와 준 이 황제의 모습에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을 지었다.
“그쪽도 먼지가......”
생각 없이 손을 뻗어 구르베스의 몸을 털어주려던 수우는 잠시 멈칫거렸다. 여자의 눈을 절대 보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또다시 깼음을 깨달은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당당해지세요, 폐하. 황상께서 일개 황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계시면 어쩝니까.”
구르베스가 수우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수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구르베스의 까만색 맑은 눈동자를 올려보았다.
“그래.......그래야겠지......”
수우에게 힘을 주려는 듯, 구르베스는 그에게서 한 발 물러나며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사실 이 둘의 모습은 많은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마르고 유약한 황제 수우에 비한다면, 상무적인 동부귀족 출신으로 기병장교까지 지냈던 구르베스는 그보다 조금 큰 키에 잘 다져진 단단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응?”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듯, 구르베스가 허리춤의 칼을 재빨리 움켜쥐며 수우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잠시 긴장했던 구르베스는 커튼 너머 구석진 곳에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웬 그림자를 그제야 발견했다. 어둠 속에 말없이 서 있던 베흔이 밖으로 한 걸음 나서며 공손하게 경례를 올렸다.
“근위대장?”
“두 분께서 다정하신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사옵니다.”
베흔이 어색해보이기까지 한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르베스가 칼에서 손을 떼며 일단 물러났지만 이 음흉한 근위대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에서는 여전히 경계가 잔뜩 서려있었다.
“근위대장이 내 개인 처소에 무슨 일로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는가?”
“아, 황비 전하와 긴한 상의를 드릴 것이 있어 왔사옵니다. 제롬 공과 샤자한 공께서 이끄시는 1군이 주류성 인근에 도착했다는 연락입니다, 내일 저녁이면 주류성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 그런가. 이제 전투가 시작되겠군.”
수우는 자신과 구르베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능글능글하게 웃음짓는 베흔의 눈빛에 잠시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베흔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성까지 길을 뚫어야 하니 본격적인 공성은 아직 조금 더 있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도 적들의 작은 저항은 있겠지만 일단은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구르베스 슈트란 전하.”
구르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빛내는 이 근위대장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씽긋 미소를 지은 베흔이 한마디 덧붙였다.
“원정이 길어지면서 아버님이신 샤자한 공께서 알리야 부인과 따님을 많이 뵙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입니다. 안 그래도 모레 그쪽으로 가는 근위대 가디언 지원군이 있습니다. 위문도 드릴 겸 전하께서 내일 숙영지에 한번 다녀오심이 어떨까 합니다. 이번에 1군이 개척한 진격로를 따라 갈 것입니다.”
“아버님께? 내가 말이요? 근위대장?”
베흔의 느닷없는 친절에 구르베스가 잔뜩 의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구르베스를 안심시키듯 베흔이 한마디 덧붙였다.
“소인이 직접 호위를 맡아 그곳까지 함께 모실 것이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내일 오후에 떠나서 하룻밤만 머무시고 다음날 돌아오시면 될 것이옵니다. 철저한 보안 하에 진행하겠습니다.”
베흔이 직접 호위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구르베스도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에게 씽긋 미소를 지어보인 베흔은 다시 인사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수우는 이곳을 나갈 생각도 않은 채 잠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목욕을 하러 들어가려던 구르베스는 도무지 자리를 떠나주지 않는 이 황제 때문에 자리에 어색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수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 실은.......부탁이......”
“말씀하십시오. 폐하.”
“오늘.......내 여기서.......자도.......되겠소?”
어려운 말을 내놓으며 수우의 얼굴이 어느새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 여자와 함께하는 숫총각 같은 모습이 어찌보면 수우에게 퍽이나 안 어울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르베스는 한때 방탕아로 낙인찍혔던 그의 이런 모습이 결국 또 다른 차원의 ‘긴장’ 때문이라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현명한 여인이었다.
구르베스가 잔뜩 긴장한 얼굴의 수우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선 소녀에게 그런 질문을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구르베스의 쌀쌀맞은 대답에 수우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움찔했다.
“아니, 그게.......”
“전 폐하의 배우자인 황비가 될 몸이고, 폐하께서는 만인의 꼭대기에 서 계신 황상이시온대, 그런 것을 왜 제게 일일이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구르베스의 명료한 대답에 수우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의 주변에서 황상임을 계속해 깨우쳐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 여인이었다. 지난 162년의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품어보지 못했던 묘한 긴장감이 어쩌면 남들이 흔하게 말하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에 들었다.
“나의 좁은 가슴은 오직 한 사람 몫밖에 되지 못하니, 그가 들어와 준다면 천하를 얻음과 다름이 없도다.”
마치 연극의 대사를 말하듯 속삭인 수우는 긴장된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구르베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구르베스는 다른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 본인조차도 그저 ‘운 좋게 황제로 추대된 그저 그런 청년’ 정도로 치부하고 있던 이 남자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어떤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래서는 악당은 절대 못 되시겠군요. 폐하.”
수우의 상기된 뺨을 말없이 어루만지던 구르베스는 그의 움츠러든 어깨를 먼저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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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수) 현재 아침시간인데도 디비상태가 정말로 안좋습니다. 403회를 올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정도 되지 않기에 다시 지웁니다. 유조아 개편이 끝나는대로 2회분을 한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