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6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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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서 받은 1만의 노예를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투모카프의 계획이 조금씩 실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코나 시디크를 새 지도자로 한 서부의 노예폭동은 조금씩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칼림을 사령관으로 하는 7만의 서부 진압군 역시 별다른 전과도 얻지 못한 채 계속 헛된 돈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칼림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사령관 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서부 상급제후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예외를 인정해서 상중이지만 최고제후의 혼인을 황상께 함께 주청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입니다.”
플레렌 가 원로들이 발 가와 세호 가에서 들어온 의견서를 칼림에게 내밀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종가가 약탈당하면서 겪게 된 심각한 재정난은 물론이고 가문의 명예까지 곤두박질친 상황에서 이젠 2, 3제후까지 최고제후의 혼인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판이었다.
아니, 종가가 약탈당한 건 접어두고라도 당장 코앞의 노예폭동 진압에서도 이 한심해진 최고제후가는 그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네페티의 거듭된 재촉에도 칼림은 전장에는 나갈 생각도 않은 채 빈둥거리고 있었고, 연합군에 병력을 보내놓은 다른 제후들이 저 한심한 사령관을 좀 어떻게 해 달라며 탄원을 올린 건 이미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이제 참다못한 하위제후들이 ‘서부의 원수’ 오르마즈라도 끌어들여 상황을 진정시키자고 나설 정도였으니 가문의 곤두박질친 위상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황상께서 인정만 해 주신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일단 우리라도 나서서 윤허를 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미친 소리.”
칼림이 두 가문의 제안서를 옆에 동댕이치며 버럭 신경질을 부렸다.
“오르마즈 그놈은 절대 안 돼.”
“어차피 지금이건 3년 후건 들어올 놈 아닌가. 그럴 바에는 이렇게 정말로 필요한 때에......”
“21살짜리 꼬마가 최고제후라고 앉아있으니 저 세호 가하고 발 가 놈들이 우릴 완전히 무시하는 거야. 이건 순전히 저 무능한 네페티 때문이라고.”
칼림의 얼토당토않은 억지에 같은 원로들조차 얼굴을 찡그렸다.
“솔직히 네페티가 나이는 어리지만 저 정도면 야무지지 않은가. 학교까지 쉬면서 나름대로 꽤 열의도 보이고 있고.”
“그래봤자 꼬마일 뿐이야!”
칼림이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신경질을 냈지만 이들 원로들은 그가 네페티의 존재에 왜 이리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직의 연령 하한선인 20세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21살의 저 꼬마가 가족들과 함께 죽어주었다면, 아니 나이가 두 살만 어렸더라도 최고제후라는 명예는 바로 칼림의 것이 되었을 터였다.
“다 네페티 그년 때문이야.”
칼림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최고제후는 결정됐으니까 미련 따위는 접어두라고.”
함께 있던 원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풀죽어있는 칼림을 달래주었지만 그의 분노는 쉽게 사그러질 줄 몰랐다. 그는 저 꼴보기싫은 네페티만 없앨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실권에서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종장 바니샤드의 당당한 적생자이며, 성년에 달했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저 조카를 몰아낼 구실이 없었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그 때, 칼림의 비서가 문을 열며 급히 뛰어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의 부인이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황실 조문사절 자격으로 비엔에 찾아온 베흔은 거실에 무감각하게 앉아있던 테번 공에게 형식적인 위로의 말 몇 마디를 던지고는 뒤로 물러났다.
기원 59년, 베흔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세나우스 1세를 세워 제국을 선포했을 때 코메트부대 사령관으로 있던 것이 바로 이 눈앞의 늙은이였다. 한때 적이었던 코메트 부대는 그들의 고용주였던 교단에 배신당해 버려지면서 제니안, TSG와 전격적으로 협력해 제국을 성립시키는데 일조를 했고, 바로 이자가 그 주역이었다.
그때 이후로 베흔과 각별한 친분을 가져온 이 남자는 타르서스 망명정부시절 잠시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정치적인 동반자로서, 옛 동지로서 남아있었다.
“범인 수사에 근위대와 황실도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수사는 얼어 죽을 수사. 폭도들한테 죽었는데 뭘 어쩌려고.”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테번의 모습에 베흔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사실 베흔은 이번 사건의 범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분께서 2세라도 남기셨다면 좋았으련만......”
베흔이 뼈있는 말을 툭 던지며 테번의 눈치를 살폈다.
테번보다 나이가 3살 더 많았던 전 부인은 73세에 수명개조된, 말 그대로 노파였다. 하지만 70세의 몸을 가진 남자인 테번이 아직 아이를 갖게 할 능력이 있었던 반면, 73세의 몸을 가진 그 부인이 아이를 갖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체세포를 이용해 인공수정이라도 하자는 부인의 의견에 이 늙은 고집덩어리 남편 테번은 첫 번째 소실 예레니가 낳은 서자를 입양시켜 후계자로 삼자며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게다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테번의 여색과 무관심,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부인의 거친 성격으로 이 부부는 어차피 최악으로 치닫던 차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부인이 이혼을 조건으로 과하다 싶을 만큼 거액의 재산을 요구하면서 이미 남남, 아니 원수나 다름없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테번이 부하들을 폭도로 위장시켜 부인을 살해했다고 해도 베흔으로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제후가 미혼으로 남아있음은 가당치않으니 빨리 재혼하셔야 하겠군요.”
조문 온 손님이 재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우습지만 그 말에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남편은 더더욱 이상한 인간이었다.
“괜찮은 여자 있으면 소개나 해주게.”
“이 여자 어떻습니까?”
베흔이 기다렸다는 듯 카드 한 장을 내놓았다. 생각 없이 카드를 들쳐본 테번이 순간 움찔했다.
“이, 이 여자는......”
“어떻습니까? 죽여주지요? 최고의 미모에, 유순한 성격에, 공의 훌륭한 2세를 직접 낳아줄 수 있는 21살의 젊고 건강한 몸까지 가지고 있죠.”
“네페티 공 이 여자는 이미 오르마즈 녀석하고 약혼한 걸로 아는데?”
“결혼은 아니죠.”
베흔이 어깨를 으쓱 하며 즉시 대꾸했다.
“그 잘난 오르마즈가 이 나이어린 여자를 앞세우고 서부까지 장악하는 꼴을 보고 싶으신가요?”
“그래서, 이미 약혼한 걸 어쩔 거야.”
“지금 플레렌 가가 어렵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종권을 빼앗긴 원로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있죠.......20억 골드 현금지원 정도면.......서부를 먹어치우는 대가치고는 거의 거저가 아닐까 하는데요. 덤으로 제국 최고의 미녀도요.”
그제야 테번의 눈에서 조금씩 광채가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은 베흔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칼림 녀석을 만나보십시오. 틀림없이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겁니다.”
히죽거리고 있는 테번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베흔의 눈가에 음흉한 눈웃음이 감돌았다.
네페티와 오르마즈의 혼인은 저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하려는 자신의 꿈이 영영 불가능해진다는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언뜻 바람둥이로 보이는 오르마즈였지만 배우자에게까지 홀대할 무책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자에게 네페티를 절대 빼앗길 수는 없었다.
어떡해서든 둘을 갈라놓고, 저 형편없는 자와 네페티를 혼인시킨다면 그 나이어린 여인이 기댈 곳은 결국 자신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오르마즈는 주당에 바람둥이에 철면피이기는 했지만 이미 결혼한 남부최고제후 부인에게 찝쩍대면서 정치적인 위험까지 감수할 생각없는 인물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일단 싸움판을 제대로 벌려놓았으니 이제 베흔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느긋하게 구경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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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가문에서 보내온 15명의 ‘손님’들과 만찬석상에 함께 앉은 카렐은 황제가 되고서도 여전히 형편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절감해야만 했다. 잔뜩 얼어붙어있는 그들은 황궁 143층의 내명부 접대실 큰 원탁에 카렐과 함께 앉아 서로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이들 15명에게는 명목상 ‘황실 파견 연락관’이라는, 알쏭달쏭한 직책이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사실상 ‘인질’이라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들 모두는 종장의 직계자녀 혹은 손녀들이었고, 관직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 있는 인물들이 상당수였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황궁 내명부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처사 밑에는 단순히 ‘관리상의 편의’를 넘어선 카렐의 속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곳에 그대들은 각 가문을 대표해 짐의 개인적인 손님 자격으로 와 있는 것이니 아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142층의 그대들 숙소에는 짐이 드나들 일이 없을 것이고 사생활도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이니, 편히 쉬는 기분으로 머물다가 제국이 안정되거든 각자의 가족에게 돌아가 이곳 실상을 알려주게나.”
웃음띤 얼굴의 카렐은 그들이 이곳에 온 것에 절대 다른 뜻이 없음을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카렐도 자신의 그 말을 이 15개 가문들이 믿어 주리라고 생각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저들은 황제가 인질 겸 첩실을 구한다고 믿었을 것이고, 이번에 온 15명 모두가 그 조건에 정확이 부합하는 사람들이었다.
‘연락관’ 파견을 명한 카렐의 칙서에는 ‘독신’ 혹은 ‘미모’를 못 박은 일이 없었지만 이들 7명의 여자들과 8명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흠잡을 데 없는 수려한 외모와 학벌, 경력은 물론이었고, 당연히 모두 독신들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4명의 비빈 간수하기도 벅찬 카렐이 더 이상의 첩실을 맞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가망 없는 미끼에 기댄 충성경쟁을 시키는 것이 그의 속내였다.
“내 눈에 익은 얼굴들도 있어 반갑군.”
카렐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들 중 몇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세네피스 황후의 꼬임에 빠져 술에 취했던 카렐과 어둠 속에서 거의 잠자리를 할 뻔까지 했던 북부 2제후 펠머슨 가의 금발머리 딸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상견례를 가졌던 북부 아가씨들 중 유일하게 카렐에 호기심을 보였던---물론 그때는 거꾸로 종장이 기겁을 해서 상견례가 박살났지만--- 북부 5제후 이쟈크 가의 손녀딸 에스더가 그나마 밝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했지만 어딘지 눈에 익은 청년 한 명이 구석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다갈색 머리칼에 유난히 까만 눈동자를 지닌 그 청년은 선해보이는 긴 눈꼬리에 작고 도톰한 입술의, 마치 소년같이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렐이 우베를 손짓해 불렀다.
“내가 애는 데려오지 말라 하지 않았나? 18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저런 애를 데려오다니.”
“예? 그렇게 어린 애는 없었던 것 같은데.......확인해보겠습니다.”
당황한 우베가 얼른 파일을 뒤적거렸다. 그새 카렐은 그 소년인지 청년인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파일을 확인한 우베가 큭 하고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귀엣말을 건넸다.
“흐음, 폐하, 잘못 보셨습니다. 저 청년은 125살이나 됐습니다.”
“뭐??”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이 청년을 다시 돌아보았다. 솜털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앳된 얼굴의 소년, 아니 청년은 아무리 많이 보아줘도 성년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우베가 파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 북부 3제후 노에누스 가 종장 안도 경의 조카이고 양자입니다. 황실 예술원 회화과 교수로 있는 이라즈 레즐린 노에누스 박사, 하급귀족이고 현재 125살입니다.”
“자, 잠깐, 이라즈? 지난번 기부금을 가져온 아스탈 레즐린의 아들?”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종장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만 부인이 출산과 동시에 사망해서 갓난아기 때 입양되었다고 합니다. 화가 겸 해부학 박사이기도 하니까 상당히 똑똑한 청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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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회면 2부 준비단계인 파트1은 끝이군요. 400회에서 딱 맞아떨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