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5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
.
.
어머니 세네피스 황태후와 함께 황실 유전자은행을 찾아온 카렐은 이곳 특별보관실에 나란히 서 있었다. 오늘은 카렐에게서 채취한 세포에 ‘세나우스 4세 카렐 카파키 리쿠’라는 라벨을 붙여 이곳에 공식적으로 보관시키는 작은 행사 아닌 행사가 벌어지고 있던 차였다.
원래대로라면 난자를 채취해야 했겠지만 이미 10살에 완전히 거세당해 생식세포가 없는 카렐은 상피세포를 조작해 인위적으로 만든 2종류의 생식용 세포핵과, 응급시를 대비한 조혈모세포를 대신 보관시키고 있었다.
모렌 박사가 카렐에게 이 3개의 튜브를 내보이며 말했다.
“붉은 튜브에는 조혈모세포가, 검은 뚜껑에는 아들을 합성하는 데 쓸 세포들이, 흰 뚜껑에는 딸을 합성하는 데 쓸 세포가 들었습니다. 불완전한 부분이나 파충류 형질로 치환된 부분은 세네피스 폐하와 주페 태자저하의 세포로 일부 복구했습니다.”
“정말 수고했네.”
카렐은 며칠을 샌 탓인지 핼쓱해진 모렌 박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프로모터의 복제방지코드를 풀어 재조합하느라 5일간을 철야로 작업했습니다. 이게 없으면 아무도 황상의 자손을 가지지 못할 겁니다.”
세네피스 황태후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정식 황후가 함께 들어와야 했을 터였지만 아직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은 아메스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를 못했다.
“그러고 계시니 황태후 폐하께서 황후 같으십니다.”
3개의 튜브를 집어넣은 금빛 캡슐을 벽 한쪽에 걸며 모렌 박사가 나란히 서 있는 둘에게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그런가?”
세네피스 황태후가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새 캡슐에 담았습니다. 벽에 새겨진 이름도 바꿨습니다.”
제대로 된 이름으로 바꿔단 주페 태자의 세포 역시 그의 평생의 유일한 여자였던 세네피스 황태후를 사이에 두고 동생인 황제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제 황실 계보는 주페 리쿠 태자와 세네피스 카파키의 사이에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르 언니는 여전하시군.”
샤미르 리쿠와 나란히 걸려있는 오르마즈의 캡슐을 올려보며 세네피스 황태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싸움도 끝나고 상황이 안정되는대로 저분의 유지에 따라 시신을 황실 묘지로 이장해야겠습니다. 샤미르 리쿠님의 묘실은 지금 그분만 홀로 묻혀계시니 그 옆에 합장해드리고 절영의 마묘도 함께 옮겨와야겠습니다.”
세네피스 황태후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는 것을 눈치 챘지만 카렐은 짐짓 못 본 척 하며 이곳 특별보관실을 나섰다.
“그분 시신은 계속 그곳에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상.”
“하지만 그분 유언장에 명백히 남아있으니......”
“그건 기원 80년 무렵에 쓰신 유언장에 있는 것이고, 하임달의 결전에 출정하기 직전에 쓰신 마지막 유언장에는 시신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합장은 부부사이에만 함이 원칙이나 두 분은 그냥 절친하신 군신지간에 불과했고.......그분의 묘소는 이미 북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시신을 가져옴은 재고해보심이 좋을 같습니다.”
기뻐할 줄 알았던 어머니의 뜻밖의 반대의사에 카렐이 잠시 당혹스러워했다. 황족이 아니면서도 황실묘지에 묻히는 건 제국의 시민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르마즈의 유해에 관한 권리는 그 친동생이며 카파키 가의 현 종장인 어머니에게 있었으니 함부로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이 둘을 따라오던 모렌 박사가 무슨 이유엔지 꽤나 난감한 표정으로 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돌렸다.
“동쪽 별관 120층에 가보셨습니까? 어머님의 새 처소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가보려는 참입니다. 하지만 이 어미의 동의도 받지 않으시고 그리 성급하게 결정하시다뇨.”
카렐의 질문에 황태후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황태후가 이렇게 발끈하는 것도 당연했다. 황궁 내명부가 있는 138층부터 꼭대기까지의 그 많은 방들 중 희한하게도 황태후의 처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언뜻 설계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보이는 이 문제는 사실 이곳을 세운 세나우스 2세의 심술 때문이었다.
타르서스 별궁의 초안설계에서 당시 테나스 태후가 황제 처소를 빼버린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세나우스 2세는 자신이 직접 지은 이 황궁에서는 보란 듯 태후처소를 빼버린 것이었다.
세나우스 3세 때도 황제의 부친이던 데오도스 호지 대공이 아들의 대관식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태후위인 그의 처소를 두고 벌이던 실랑이가 간단히 일단락되어버렸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세나우스 4세인 카렐에게는 친모인 세네피스 황태후는 물론이고 실리페 태후와 5명의 사촌 공주들까지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당초 세네피스 황태후는 황후 처소인 149층을 자신이 쓰고 아메스를 148층으로 내려 보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황궁을 차지하기가 무섭게 옛 하렘이 있던 동쪽별관 상층부를 개조해 두 태후의 처소로 만들라며 지시를 내려버렸던 터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황태후가 내명부를 뒤집어엎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던 것을 150층과의 직통 엘리베이터를 놓아 주겠다며 일단 달래놓기는 했지만 황제의 사생활을 통제할 수 없게 된 황태후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150층과 특별엘리베이터로 직결되어 있으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내일까지 공사를 마무리 짓겠다 했으니 내일부터는 그곳에서 머무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다른 볼일이 있으니 그곳을 구경하시고 오늘은 150층 6번 침실에서 쉬십시오. 저녁에 다시 문안 올리겠습니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선 카렐에게 모렌 박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마즈 경의 시신, 아니 그 무덤의 흙이라도 반드시 이곳에 합장해드리십시오. 이곳 황실묘지 최상위에 함께 합장되실 자격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그래야겠지.”
카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 궁금한 게 있네만.”
“예?”
모렌 박사가 지레 화들짝 놀랐다. 카렐이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내 아버님이 주페 태자시라면 아메스는 내 6촌 재종형제가 되니 당연히 근친이 될 진데.......나와 아메스 사이에 아무 혈연이 없다고 나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혹시 아는바가 있는가?”
바로 자신이 작성했던 ‘비교표’ 내용을 떠올린 모렌 박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대답을 못했다. 그의 태도에서 이상한 것을 눈치챈 카렐이 계속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자네가 유전자은행 책임자로 있었으니 당연히 알지 않겠는가? 태자가 태어났으면 황제이신 할머님께서 당연히 그 친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셨을 것이니.......”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렌 박사의 불확실한 태도에 눈을 가늘게 치켜뜬 카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말이야.......라바니 세호 경이 아버님의 친부가 아니신가?”
난감한 표정의 모렌 박사가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내 조부는 누구시지?”
황제의 계속된 질문에 모렌 박사가 어쩔 줄 몰라했다. 카렐이 그의 대답을 재촉하듯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바니샤드 대공이신가? 처음 알려졌던 대로?”
카렐의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던 모렌 박사가 다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아뇨, 그분도 아니십니다.”
“그럼?”
무어라 더 물어보려던 카렐은 뒤에서 달려온 우베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백해진 얼굴의 우베가 숨을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 베아트릭스 플라칼 대장군님께서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베아트릭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이틀 후에 열린 회의에는 카렐은 물론이고 부상을 입고 긴급히 후송된 베아트릭스, 특별히 참석한 코리온까지도 함께 앉아있었다.
평소 ‘정말 약혼자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던 카렐과 베아트릭스는 그의 부상 덕분에 처음으로 연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카렐은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서는 베아트릭스의 곁을 단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었다.
궁기병대장 달리가 이번에 노획해 온 적 투창병 장비를 내보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궁기병의 투창보다는 크기도 작고 그 위력에서 떨어집니다. 하지만 집결해 사격한다면 돌격해오는 기병의 전투력을 현저히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실험 결과 경기병은 0.8스타디아, 중장기병은 0.5스타디아 거리에서 갑주를 관통해 부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보병은?”
이암성 수비대장을 맡은 네피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3군이 남하한다면 바로 그들과 마주해야 할 당사자였다.
“경보병은 1스타디아, 중장보병은 0.7스타디아 거리면 역시 부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0.3스타디아 이내 지근거리, 혹은 급소가 아니면 즉사시키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대오를 무너뜨리기는 충분합니다.”
“1스타디아면 공성전에 엄호사격하기에 충분한 거리로군. 공성탑에서 쏜다면 더 위력적일 테고. 네피, 이암성에서 마주할 적군들이니 각별히 유념해두게.”
카렐의 당부에 특별히 중랑급 이상의 부하들까지 함께 데리고 회의에 참석한 네피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리가 말을 이었다.
“경기병의 사이클롭스에서 일부 무거운 부품을 없앴고 소재도 바꿨습니다. 분석 결과 경기병용 사이클롭스에서 절반 정도의 단가에 제작 가능합니다. 투창 역시 절반 정도 가격이면 대량생산 가능하다는 추산이 나왔습니다. 1만을 단기간에 양성할 수 있던 것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훈련이 더 큰 문제였겠지만.”
달리가 바친 사이클롭스를 만지작거리며 카렐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번 자리에 특별히 참석한 코리온에게도 힐끔 시선을 주었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아시겠소? 리쿠 학장?”
“제게 줄 선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코리온이 여전히 그 특유의 뻣뻣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코리온의 대답에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린 카렐은 언제 작성했는지 손으로 마구 휘갈겨 쓴 종이꾸러미를 지휘관들 앞에 툭 던져놓았다.
“적 투창병부대가 그 정도로 위력적이라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전쟁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저걸 베껴서 투창병부대를 결성함세.”
“예에?”
자리에 모인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멍해진 얼굴로 카렐을 올려보았다.
“아, 아니.......장비야 어떻게 베껴서 조잡하게라도 만든다고 치고.......훈련은.......그리고 운용비도 상당히 많이 들 텐데.......”
“우리에겐 이미 투창을 어느 정도는 던질 줄 아는 동부 보병 수만과 대량생산력은 제국 최고인 북부 군수단지가 있지 않은가? 내 보긴 그네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대의 실체를 숨기려고 한 게 우리 쪽에 도리어 더 큰 잠재력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은걸? 지난번 즉위식날 들어온 돈이 있으니 일단 어느정도 감당할 수 있네.”
카렐이 옆에 앉은 베아트릭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뭐, 저격수를 키워내자는 것도 아니고 수성전에만 일단 급하게 써먹자는 거니까 남부 놈들보다 좀 못 던져도 제 발등만 안 찍으면 상관없어. 안 그래도 부딪혀 싸우는 데 유난히 약한 동부 보병들 제대로 써먹을 데가 생긴 것 아니겠나?”
“이건.......뭡니까?”
제네르가 종이꾸러미를 들쳐보며 묻자 카렐이 다시 한 번 코리온을 바라보았다.
“포로가 가지고 있던 사이클롭스를 이용해 내 베아트릭스 경과 일단 몇 가지 분석 자료를 만들어 봤소. 날림으로 베꼈으니 몇 년 투자해서 만든 저네들만큼 성능이야 나지 않겠지만 아예 새로운 물건도 아니고 있는 것을 개량하는 것이니 상관 없을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학장께서 검토해주셨으면 좋겠소. 발현자가 달래 발현자겠소?”
카렐이 능글거리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코리온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폐하께서도 발현자이십니다. 왜 그걸......”
코리온은 자료를 받아들며 여전히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카렐이 그의 입을 막으려는 듯 더 빨리 떠들어댔다.
“학장께선 의학박사에 수학박사에 물리학박사에 화학박사시니, 정규교육 제로에 머릿속엔 꽃 이름이나 잔뜩 들어찬 짐보다는 뭐가 나아도 낫지 않으시겠소.”
“거, 참.”
불편한 손으로 카렐이 내민 노트를 더듬거리며 펼쳐든 코리온은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6시까지 돌려드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