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2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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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우스 2세의 앞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침통하게 꿇어앉아있는 투모카프 자이센의 얼굴에는 부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까지 어처구니없이 잃어야했던 그의 슬픔과 분노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내 그대에게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들에 참으로 위로의 뜻을 표하는 바이네.”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세나우스 2세 황제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내 근위대를 시켜 그곳 본진을 기습공격하게 하여 가족들의 시체를 찾아왔으니 돌아갈 때 가져가도록 하게.”
“폐하의 넓으신 은혜에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투모카프가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3번 도시에 적당한 집을 마련해놓았네. 내 약간의 돈도 내려줄 것이니 한동안 그곳에서 모든 걸 잊고 쉬도록 하게나.”
황제의 말에 갑자기 정색을 한 투모카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은혜 하해와 같으오니.......소인 그 은혜에 보답을 드리고 싶사옵니다. 소인 휘하에 이번 면천의 은혜를 받은 부하 4백여명이 있사옵니다. 그들 중 절반은 장교출신이옵니다. 소인 그들을 이끌고 저 잔학무도한 노예폭동 무리를 직접 응징하여 폐하께 보답하고 가족의 원수를 갚고 싶사오니, 부디 허락해주시옵소서.”
황제에게 간곡하게 청하는 투모카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부탁에 황제가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복수심에 사로잡힌 저 거칠고 잔인한 남자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황제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겨우 4백으로 저들 무리를 어찌 진압한다는 말인가?”
황제의 질문에 투모카프가 즉시 대답했다.
“노예들 중 반골의 기질을 지닌 자들이 이번 폭동에 끊임없이 뒤를 따를 것이니, 그런 종자들을 싹 절멸시키고 말 잘 듣는 질 좋은 노예들만 남을 때까지 수십만을 죽여야 할 것이며, 그 기간 또한 일이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국민들의 의식 속에 노예와 시민간의 구별이 뿌리박힐 십년, 이십년간 저들은 끊임없이 저항을 시도할 것입니다.”
장기적이고 정치적이기까지 한 의견을 내놓는 투모카프의 모습에 황제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저 폭도들은 제대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옵니다. 저들은 분노와 오기, 그리고 사기만 충천한 오합지졸들일 뿐입니다. 저런 쓰레기들을 상종하는 데 폐하와 제후들의 잘 훈련된 시민 정규군들을 동원하는 건 헛된 인명낭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투모카프의 단호한 말투가 마음에 드는지 황제가 입가에 다시 웃음을 지었다.
“보검으로 목을 치나, 작두로 목을 치나 죽기는 매한가지이옵니다. 저들 오합지졸이나 그 식솔들을 잡아 죽이는 데는 오합지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병사들이면 충분하옵니다. 소인에게 1만의 노예와 그들에게 기본적인 무장을 시킬 자금을 하사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진압 성공 후 면천을 약속해주시오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폐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그편이 5만의 정규군을 동원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고도 효율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사료되어 감히 말씀 올리옵니다.”
“후훗,”
황제가 사뭇 밝은 표정으로 투모카프를 내려다보았다.
“내 자네의 제안보다 자네의 그 확실한 태도가 더 마음에 드는군. 아무렴 어떤가. 좋아, 자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내 1만의 노예군을 모아 자네에게 주겠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폭도과 발칙한 노예들의 씨를 말려주게.”
“폐하의 은혜에 저 노예들의 피로 반드시 화답하겠사옵니다!”
드디어 ‘발톱’을 얻게 된 투모카프의 잔혹한 표정 속에는 앞으로 다가올 황실의 공포정치시대와 신흥 중앙귀족 ‘자이센’ 가의 용틀임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앙관료층을 이루는 황제령의 귀족들, 궁극적으로는 황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세나우스 2세의 목적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르마즈와 아들 주페를 결국 손아귀에서 잃은 세나우스 2세에게는 자신의 앞에 홀연히 등장한 이 젊은 무장의 능력을 시험해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투모카프를 내보낸 황제는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갑자기 나가라 눈짓을 보냈다. 그들과 함께 나가려는 베흔을 손짓해 불러들인 황제는 병사들이 다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대뜸 이 큰 키의 가디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일이시온지......”
지은 죄가 있던 베흔은 황제의 심상치 않은 시선에 지레 놀라 움찔했다.
“이 개새끼!”
갑자기 이를 악문 황제는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도 넘게 큰 이 가디언의 사타구니 급소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베흔은 계속해 쏟아지는 황제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그대로 얻어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 폐하, 왜 이러시옵니까, 소인......”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네놈이 4일 전 내 명도 없이 북부에 몰래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것 같느냐?”
황제가 베흔의 얼굴을 꽉 밟으며 이를 갈았다. 순간 베흔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오르마즈가 술집에 가 술을 좀 먹었다고? 네놈 아주 신이 났겠구나? 열흘이나 죽어라 미행한 소득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나서 오르마즈를 죽어라고 패? 정말 시나리오 한번 형편없구나!”
황제는 옆에 있던 화병을 무작정 집어 베흔의 얼굴에 냅다 집어던졌다. 얼굴에 화병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베흔이 비명을 내질렀다.
“네깟놈이 뭔데 감히 전 총리대신에 개국공신을 다른 사람 다 보는 앞에서 개망신시켜! 네놈이 제정신이냐! 이 미친 새끼! 씨발 뒈지려고 환장했냐!”
베흔의 부서진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황제는 아랑곳없이 그를 걷어차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네 부하들 앞에서 이렇게 패줄까 하다가 봐줬다! 어떠냐? 기분 엿 같지? 말해! 이 새끼야!”
“폐하, 제발, 용서해주시옵소서, 소인은 다만 규정대로......”
“이놈이 쓸데없는 개소리로 매를 버는구나! 규정? 상급귀족을 네 멋대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두들겨 패는 게 규정이냐!”
베흔의 사타구니를 또다시 걷어찬 황제가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씩씩거렸다. 엉망이 된 채 바닥에 나동그라진 베흔에게 이를 드러내보인 황제가 그 매서운 도끼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네놈 다시 오르마즈를 들볶았다가는 그때는 네 부하 놈들 앞에서 내손에 얻어터질 줄 알아라. 알겠냐!”
“예.......명심하겠사옵니다......”
끙끙대며 자리에 꿇어앉은 베흔이 처절한 표정으로 가까스로 대답을 뽑아냈다.
사람들 눈앞에서 오르마즈를 폭행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틀림없이 규정을 어겼고, 베흔도 황제가 저렇게까지 격노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것도 무사도 아닌 저 콩알만한 황제에게 저항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베흔은 분하고 억울했지만 저 무서운 황제에게 감히 대들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절대군주, 세나우스 2세는 그 자존심강한 베흔에게도 이젠 까마득하게 높아져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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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도시에서 이암성을 향해 남진하고 있는 마누엘 경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중장보병 7만에 경보병 2만까지, 9만의 전투병에 1만의 사역병, 2만의 노예까지 합치면 12만의 대 행렬 선봉에 있었지만 그를 비롯한 3군의 지휘부는 연신 부근을 둘러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3군은 제롬의 1군처럼 소문난 동부기병들이 주변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었고, 기병으로만 조직된 2군처럼 기동성이 탁월한 것도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중장기병이래야 중랑급 이상 지휘관과 장교들이 고작이었다. 경기병도 160기 정도의 정찰기병이 전부였다.
어렵게 제롬을 설득해 호지 가 소속 중장기병 1개 연대 1천기를 억지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 역시도 적 기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 기병들의 기습이라도 받는다면 치명적인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저 놈들이 쓸모나 있으려나?”
마누엘은 본대 한쪽에서 함께 전진하고 있는 특이한 외모의 경보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병용 경투창보다도 짧고 가벼운 4척 정도 길이의 길지 않은 투창 십여 개씩을 등에 지고 보병들과 함께 행군하고 있는 저들은 세닉 가에서 온 1만의 투창병들이었다. 몸통만 가린 경갑주에 희한한 모양의 스코프와 사이클롭스, 부무장으로 창과 짧은 검 하나씩을 지닌 저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제후군들에게도 단연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저놈들 어딘지 미덥지를 않아.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저런 걸로 어떻게 사람을 죽인다는 거지?”
“그래도 그 잘난 부마님께서 꼴에 비장의 무기라고 공성전 전에는 절대 투입하지 말라 하시지 않습니까?”
함께 가는 케세크 경이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비장의 무기는, 개뿔.”
마누엘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재촉했다.
“또 초소야?”
마누엘은 강 건너편에서 또다시 나타난 적 초소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번 진격로 왼쪽을 따라 굽이쳐 내려오는 비류수는 욱리하같이 어마어마한 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자그만 냇물도 아니었다.
폭이 3, 4스타디아쯤 됨직한 이 강 건너편에는 30스타디아 정도마다 하나씩 얄미울 정도로 초소 하나씩이 자리잡고 강을 따라 내려오는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제기랄, 성질만 같아서는.......”
강 건너편 초소 지붕에 올라 보란 듯 엉덩이를 까고 놀려대는 적 초소병의 모습에 마누엘이 이를 꽉 악물었다. 남쪽에서 제롬의 1군이 만나고 있는 산자락 초소들과는 달리 이곳 비류수의 초소는 건너편 강둑 위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거리도 말로 전력질주하면 채 30초면 다다를 정도였다.
“젠장, 스코프로 보면 저놈들 코털까지 보이겠군.”
마누엘이 겅 건너편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중얼거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기병이라도 들여보내 저 망할 초소를 싹 쓸어버렸으면 딱 좋겠건만 스코프를 통해 알아본 이곳 수심은 무려 10척이 넘었고, 유속도 겁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진격로상에서 아무리 ‘맛난 먹이’가 나타나더라도 절대 건드리지 말고 무조건 행군만 하라는 베흔의 특명까지도 받고 온 상황이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요.”
함께 가는 케세크 경이 기가 막힌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보이는 초소 옥상에서는 전사단 병사 5명이 둘러앉아 연기를 풀풀 풍기며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앞쪽에 저 초소들의 상급부대로 보입니다.”
케세크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마누엘이 스코프로 확대시켜 바라보았다. 양변 1스타디아정도씩 됨직한 부대 하나가 건너편 강둑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4개 정도의 감시탑과 20개 정도의 막사, 연병장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는, 말 그대로 ‘부대’였다.
“중대규모정도 되겠군요. 보병 4, 5백정도?”
“쳇, 그림의 떡이군.”
입을 삐죽거린 마누엘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래저래 분통해하던 마누엘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그 기분 나쁜 적 ‘부대’를 보고나서 10분정도 지나고 난 후였다. 오른쪽에서 접어드는 개천과 비류수가 만나면서 한 지점의 강폭이 윗부분의 2배 이상으로 일시 넓어진 곳이 그의 눈에 퍼뜩 들어왔다.
“부교 설치작업이 아직 덜 끝나서 30분 정도 지체될 것 같습니다.”
선발대로 출발했던 사역병부대 장교가 마누엘에게 달려와 알렸다. 그 와중에도 후미부대는 계속 꾸역꾸역 몰려들면서 이곳 강변은 일시에 숙영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한 열병장이 되어갔다.
“이거 재밌는걸.”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마누엘이 함께 가는 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기 수심 좀 확인해봐.”
“......3척에서 5척 정도 됩니다.”
마누엘이 함께가는 케세크 경을 바라보며 갑자기 키득거리고 웃음을 지었다. 케세크 역시도 그의 웃음의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중장기병 1개 대대만 불러와. 저 새끼들 매운맛 좀 보여줘야겠다.”
“하지만 진격중에는 교전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이.......”
“닥쳐. 내가 근위대도 아닌데 근위대장 말을 왜 듣냐?”
부장의 참견을 한 귀로 흘려버린 마누엘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강 건너 초소들과 적 부대를 빙 둘러보았다.
“건너가!”
마누엘의 지시를 받은 5백여 중장기병들이 매섭게 돌진해 얕아진 비류수를 건너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른 허벅지 정도 올 깊이의 넓지 않은 강물은 덩치 큰 말에 오른 중장기병들에게는 건너는 데 그다지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다 박살내버려!”
마누엘이 마치 운동경기라도 구경하는 사람마냥 손을 번쩍 치켜들며 대대장을 재촉했다.
중장기병들의 돌격에 혼비백산한 강변 초소의 동맹군 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숲으로 달아나는 모습에 마누엘의 남부보병들이 간만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비어버린 초소를 눈 깜짝할 새 휩쓴 중장기병들은 그 눈엣가시 같은 초소에 인화물질을 끼얹고 불을 질러버렸다. 시커먼 연기가 남부기병들의 이 작은 승리를 축하하듯 하늘로 뭉게뭉게 치솟아 올랐다.
“속이 다 후련하네.”
마누엘이 키득거리며 할룩스를 작동시켰다.
“북쪽으로 6스타디아만 올라가면 적 상급부대가 있다. 건넌 김에 그것도 박살을 내고 돌아와.”
“예! 모두 북쪽으로 돌격!”
멀리 보이는 적 ‘기지’를 눈으로 확인한 중장기병대 대대장이 힘 있게 대답하며 즉시 북쪽으로 돌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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