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74 회: Part 1. 두 그루의 월계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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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161년의 어느 날, 플레렌 종가 헤네랄리페 옆에서 가진 만찬은 꽤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은 19살 어린 시절에 만난 정든 남편 바니샤드를 끔찍하게 잃고 외로움 속에서 힘든 날을 지내 온 마하 부인이 자식들의 성화에 남부 호지 가 남자와 상견례를 가지고 돌아온 기분좋은 날이었다. 10년이 넘게 우울한 나날을 보내 온 어머니의 모습에 걱정이 태산이던 장남이며 서부최고제후 브라코 발 플레렌 공에게는 상견례가 성공적이었다는 소식이 정말로 기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돌보느라 다른 곳에 눈돌릴 새 없이 지내온 어머니에게 내심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딸 네페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21살의 어엿한 파예드 아카데미 생도로 자라난 그는 어머니를 능가할 정도의 빼어난 미모와 정숙한 행실로 벌써부터 이런저런 가문들에서 때 이른 상견례 제안이 들어오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결혼이 아닌 약혼이라지만 이제 갓 파예드에 진학한 이 어린 딸에게는 너무 성급한 것임을 가족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이건 뭐건 다 집어던진 그들의 열성적인 구애 정도면 어머니인 마하 부인과 오빠인 브라코가 아버지의 저 귀한 선물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게 하기는 충분했다.
“솔직히 격이 맞아야 말이지.”
오늘 세호 가에서 들어왔던 ‘제안’ 이야기를 꺼내며 브라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종장 맏아들도 아니고, 셋째아들하고 제안이라니,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냐고요.”
“진짜 해도 너무하구나, 벨리크 그 여자 제정신이냐.”
딸의 예쁜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마하 부인 역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브라코가 손을 저으며 큰소리를 쳤다.
“제가 다짐하는데요, 얘는 황실에 들어가서 태자빈 아니면 내명부 4비빈 중에 하나가 되던가, 아니면 최고제후 부인이던가 그 적장자 부인. 이 넷 중에 하나 아니면 절대 약혼 안 해줄 겁니다.”
“최고제후 부인은 해도 너무했다. 그 늙은이들 말이냐?”
“어, 그런가?”
브라코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140살 남짓의 젊은 브라코를 빼면 나머지 세 지역 최고제후인 테번, 투르케스크, 샤자한 모두가 중년 혹은 노년에서 수명개조된 사람들이었다.
마하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명부 4비빈도 지금 황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잘 살고 있는 이상은 힘들겠고.......로노 장태자도 이미 부인 4명을 다 채워버렸으니 그 후대도 힘들겠구나. 그러니......”
순간 눈을 번쩍 뜬 브라코가 이 예쁜 여동생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맞다, 주페 태자 어떠냐? 너 진짜 배다른 여동생처럼 예뻐해 주고 있다며? 생기기도 그 정도면 특별히 흠 잡을 데 없고, 천재에다가 성격도 좋으니 그만한 사람이 어딨냐. 그 정도면 나중에 파예드 아카데미 학장은 따놓은 당상일거다. 그리고 황제가 로노 장태자를 썩 미더워하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다음번 황제가 될 지도 몰라. 너만 생각 있으면 내 한번 추진해보마.”
오빠의 진지한 말에 갑자기 네페티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은 그냥 친절한 오빠로.......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살래요. 그분은 어릴 때부터 친오빠같이 지내서 그런가 별로 그런 감정은 안 들어요.”
“쳇.”
브라코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럼 뭐야. 오넬론 그놈은 뭐하나 볼 것 없으니 집어치고, 아직 결혼 안한 게 모디아크 태자하고 타니토 태자? 뭐, 여자끼리도 못할 건 없다만 그쪽이 생각이 있으려나? 너 이 오빠 꿈을 이렇게 산산조각 낼래?”
“그냥 다른 쪽으로......”
딸의 얼굴이 내내 붉어져있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마하 부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이미 맘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브라코는 각 지역을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하나하나 세어갔다.
“그럼 최고제후 적장자 남는데, 남부에 테번 그 늙은이는 자식이 없고.......샤자한 그놈 맏아들은 이미 결혼 했잖아? 뭐, 그래도 동부에 시집보내는 건 영 찝찝하다. 그럼 뭐야? 하나도 없잖아?”
브라코가 허탈한 얼굴로 혀만 끌끌 찼다. 오빠의 마지막 말에 내심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네페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어 부, 북부 남았는데요.......”
“엉?”
브라코와 마하 부인이 동시에 소리를 꽥 질렀다.
“너.......지금 설마 오르마즈.......그놈 말하는 거냐?”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잔뜩 숙여붙인 네페티는 연신 물만 들이키고 있었다. 마하 부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천하에 바람둥이 놈을? 그리고, 그놈이 우리 서부의 원수라는 것도 몰라? 너 그 인간 보기라도 하고 그러는 거냐?”
“며칠 전에.......라마단 학회에 태자저하 따라갔다가 카파키 가 종가에 잠깐 들렀거든요.”
네페티가 마치 죄인처럼 다 죽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자 이번에는 브라코가 경악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미쳤구나! 갈 데가 없어서 그 망할 놈의 가문에 가!”
“주페 태자저하께서 거기 들리시길래.......그분이 저도 같이 가자고 그러셔서요. 거기서 주페 태자저하가 그분 소개해 주시길래......”
“그래서? 가서 도대체 뭐 한 거야? 그 집안 놈들이 너한테 뭐라고 안 해? 해코지 안했어?”
발끈한 오빠의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네페티가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뇨, 집엔 하인들뿐이었고요, 오르마즈 그분 혼자 계셨어요. 저 이쁘다고 선물로 머플러 핀도 하나 주셨고......”
가슴에 꽂은 오팔 머플러 핀을 더듬으며 네페티가 입가가득 뜬금없는 미소를 지었다.
“선물!”
‘오르마즈의 보석선물’이라는 말에 마하 부인이 기겁을 하며 머플러핀을 빼앗으려 했지만 네페티는 핀을 꽉 쥐고 놔 주지 않았다.
“너 그놈이 지 금고는 바닥나도 애인 선물만 죽어라 챙겨주는 것도 모르냐!”
마하 부인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국 제일의 절륜아답게 오르마즈는 이 나이어린 생도의 마음까지도 결국 홀랑 빼앗아간 모양이었다.
“태자저하께서 그분하고 제가 참 잘 어울리겠다고 그러셨어요.......말에도 태워주셨어요. 그 절영인가 하는 까만 말에요. 태자저하께서도 그러셨어요. 그분 안 그래도 가택 연금중이라 힘드실 텐데 저라도 곁에서 힘이 되어드리면 좋겠다고......”
“맙소사, 태자는 뭣 하러 그런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대!”
마하 부인이 답답한 듯 이마를 싸쥐었다.
“그 바람둥이 놈이 설마 너한테 몹쓸 짓 한 거 아니지? 응?”
“아니에요, 그냥 말 같이 타고 산책한 것밖에......”
“뭐, 뭐? 그럼 당연히 네 몸도 더듬었을 거 아냐!”
“그거야 당연히 떨어질지 모르니.......”
그때, 브라코가 한참 흥분한 어머니를 얼른 가로막았다.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른 듯 여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어머니,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고요. 솔직히 그놈 인물은 인물이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오르마즈는 나이도 너무......”
“161살이겠죠. 기원 원년에 태어났다니까.”
“세상에.......140살 차이라니 말이 되냐!......게다가 지독한 바람둥이라던데.”
브라코가 어머니에게 냉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직 총리대신에, 그 정도 알아주는 무장에, 학력도 남극성당까지 졸업했으니 흠 잡을 데 없고. 생긴 것도 말 할 필요 없고, 성격도 호방하고.......게다가 최고제후 적장자 아니에요? 지금이야 가택 연금중이지만.......몇 년 더 조용히 지내고 나면 가문 사령관으로 다시 등용되던지 할 거라고요. 네페티도 어차피 그동안은 학업 때문에 정식 혼인은 할 수 없으니.......솔직히 인물만으로 보자면야 제국에서 그만한 사람 없죠. 뭐 바람둥이라고는 하지만 배우자를 구박할 사람 같지는 않던걸요?”
오빠의 말에 잔뜩 기대가 부푼 네페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홀딱 반해버린 것이 고작인 이 나이어린 아가씨와는 달리, 브라코의 관심사는 훨씬 더 실질적인 면에 있었다.
같은 패전지역이지만 거의 황폐화의 지경까지 간 동부와는 대조적으로, 북부는 내부적으로 건재한 상황이었고, 항복 직전 잔여병력의 퇴각에도 성공하면서 군사력 역시 막강한 남부에 비해 손색없는 정도였다.
처형당한 아버지 빌루이의 뒤를 이어 최고제후에 오른 투르케스크 카파키 공 주변에는 그 장녀를 비롯한 흠잡을 곳 없는 인물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었고 짐작컨대 10년 이내에 전흔을 완전히 지워낼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번 승전을 발판삼아 독주체제를 갖추고 점점 오만해져가는 남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옛 감정 따위는 떨쳐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무섭게 다시 성장하는 북부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생각해보니 그거 괜찮네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브라코는 결심을 굳힌 듯 여동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오르마즈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그 막강한 북부와 관계개선까지 할 수 있다면 서부로서는 더 이상 좋은 상황이 없었다.
“아무리 그런 것도 좋지만 네 여동생을 사랑해 줄 사람을 고르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냐.”
마하 부인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을 누비던 오르마즈의 그 놀라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브라코는 비록 적이었지만 ‘자신의 곁에도 저런 사람 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마음에 밤잠도 이루지 못했던 터였다.
그는 동생의 등을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카파키 가에 공식적으로 약혼 신청을 해 보죠.”
* * *
카파키 가와 플레렌 가 양가의 이번 만남은 단순한 가문간 상견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종전 직후부터 계속된 남부의 독주에 제동을 걸려는 서부와, 패전의 때를 벗고 다시 전과 같은 제국의 주도지역으로 부상하려는 북부의 야심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네페티를 오르마즈에게 소개시켜주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용히 추진한 주페 태자 입장에서는 원수가 된 두 지역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카파키 종가의 널찍한 응접실에 마주선 양가 최고제후들이 서로를 향해 공손하게 맞절을 올렸다.
“북부 최고제후 투르케스크 하비브 카파키요.”
“서부 최고제후 브라코 발 플레렌입니다.”
맞절을 끝낸 그들은 서로의 가문에서 온 사람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번 상견례가 단순히 혼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방문 성향이 짙은지라 다른 혼인 상견례와는 달리 ‘사절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수십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적장자 오르마즈 외에도 남극성당 직제학으로 있는 막내딸 세네피스, 가신인 푸아킨 케레부스, 구완 슈벨, 토로 로버넬 등의 측근들까지 모두 종가로 불러온 투르케스크는 브라코의 두 숙부들과 그 일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문 따로, 운영 따로’의 전통대로 혈통을 그다지 깊게 따지지 않는 북부는 몇몇 핵심들 외에는 ‘가신’이라 부름직한 일반 관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가족주의 경향이 강한 서부는 웬만한 직책은 모두 최고제후가와 직간접으로 혈연을 가진 사람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들을 살피던 투르케스크의 매서운 시선은 그 중간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네페티를 향했다.
“저 아가씨군요.”
순간, 아버지의 뒤에 서 있던 날카로운 회색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온 막내딸 세네피스의 거의 잡아먹을 듯 살기어린 시선이 저 자그만 아가씨의 선한 얼굴을 눈 깜짝할 새 스쳐지났다.
“그쪽 주인공은 어디 있습니까?”
브라코의 질문에 투르케스크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신 중 한명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린 오르마즈가 아버지의 눈짓에 네페티에게로 다가왔다. 상견례에 참석하는 사람답게 그는 발목까지 오는 단정한 실크원피스 위에 흰 비단포, 카파키 가를 상징하는 현무가 새겨진 검은빛 머플러를 두른 단정한 모습이었다. 전장에서 짧게 밀어버렸던 갈색 머리칼은 그간 어깨 아래까지 길게 자라나 있었고 전보다 여위어진 얼굴은 3년간의 연금생활이 편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궁 앞에서 태형을 받고 가까스로 목숨만 건졌던 오르마즈는 황제로부터 무려 30년의 가택연금을 선고받아놓고 있었다. 이곳 종가와, 그 부근 4개 컴플렉스 바깥으로의 출입을 엄격히 봉쇄당한 그는 그 기간 동안 일체의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당한 상황이었다. 이번 상견례가 분위기나 환경도 그다지 좋지 않은 카파키 종가에서 열린 것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오르마즈 때문이었다.
“북부 최고제후 카파키 가와 서부 7제후 레즐린 가의 피를 받은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요. 161살이고 카파키 가의 적장자요. 남극성당 십경과정을 졸업했고 TSG 민병대 사령관과 제국 제1개국공신, 제국 초대 내무대신, 황실 비서실장과 총리대신, 북부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바 있소.”
오르마즈의 화려한 전적에 카파키 가 사람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 어느 누구도 이만큼 화려한 전적을 읊어댈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 자리의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사실 오르마즈의 수려한 외모와 당당한 모습에 지금 이 순간 가장 넋을 놓고 있는 건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있는 어린 네페티가 아니고 그 어머니인 마하 부인이었다.
“듣던 대로 정말......”
얼마 전까지 ‘천하의 바람둥이 날도둑놈’이라고 뇌까리던 바로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입가가득 미소를 품은 마하 부인은 난생 처음 눈앞에 마주한 그의 매혹적인 모습에 너무도 마음에 드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나이만으로 보자면 오르마즈는 네페티보다는 자신과 겨우 2살 차이 나는 마하 부인과 도리어 더 어울릴 상황이었다.
브라코가 아직까지 머뭇거리고 있는 여동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서, 서부 최고제후 플레렌 가와........3제후 발 가의 피를 받은 네페티 발 플레렌입니다.......21살이고 파예드 아카데미 경학과정 생도로 있습니다.”
네페티의 미모와 선한 인상을 확인한 투르케스크 공이 옆의 오르마즈를 돌아보았다.
투르케스크 역시도 자신의 후계자이기도 한 이 망아지같이 통제 불가능한 자식이 자의든 타의든 꼼짝없이 묶여있는 지금 이때를 혼인의 최적기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의 ‘수준’에 맞춰줄만한 영웅이 제국에 기왕 없는 이상은 오르마즈의 말을 잘 듣고 훌륭히 내조 잘 해줄 미모의 저 정숙한 아가씨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서부 최고제후의 유일한 친여동생이라는 그 지위가 더 중요했지만.
“둘 사이에는 별 이의가 없는 듯 하군요.”
오르마즈를 드문드문 올려보며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여동생의 모습에 브라코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투르케스크는 미리 준비해 온 약혼서를 브라코에게 내밀었다.
“그러면 관례대로, 내일 양가 종장이 약혼서에 서명하도록 합시다.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이 아이가 북부로 와서 살게 되어야 할 것 같으니 지참금은 우리 북부에서 부담하겠습니다. 5천만 골드의 군수품과 승용셔틀 200대, 그리고 플레렌 가 직계 구성원 모두에게 드릴 보석 선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최고제후 여동생’ 수준의 지참금으로는 크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패전지역이 되어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부 형편을 고려해보면 카파키 가도 나름대로 적장자의 혼인에 정성을 다한 셈이었다. 사실 체면만 아니라면 브라코는 공짜로라도 동생을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뭐, 내일까지 갈 것이 있습니까. 그냥 오늘 결정하죠.”
즉시 붓을 집어든 브라코는 약혼서 밑에 서부 최고제후이며 종장인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 약혼이 자신의 생각대로 잘 진행되어 여동생은 행복한 배우자를, 서부는 믿음직한 동반자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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