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72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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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부에서 황궁 장악에 성공하면 근위대는 어차피 물러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공성을 해서 무고한 병력을 손실하느니 밖에서 지켜보며 위협만 하고 있는 편이.......”
제네르의 물음에 페로가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
“황궁은 유학자 폭동으로 장악한 것이 아니고 전사단과 내 가디언부대의 공격으로 장악한 것이 되어야 해. 알겠는가?”
페로의 다분히 협박조의 말투에 유학자인 제네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 역시 황권강화를 지지하니 내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싶네만.”
페로의 언질에 제네르는 유학자이면서 무장인 자신이 처한 조금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깨달아야만 했다. 유학자 세력을 등에 업지만 결코 그들에 끌려 다니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어찌 보면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지금의 공성전을 벌이는 이유였다.
“성벽 위의 근위대 수비병은 현재 5천여명! 나머지 병력은 내부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킵이 성문만 열어주면 끝이군.”
페로가 말고삐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500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잠입한 킵의 임무는 소요사태를 이용해 동문과 동북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성 내부에 익숙한 아메샤 스펜타가 이미 두 문앞에 대기중이었다.
“차대전을 사용해 성벽의 시설물을 공격할까요?”
함께 온 서부연합군 사역병단 장교가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페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부제후군의 유명한 사역병단이 운용하는 차대전은 웬만한 성의 방어시설은 물론이고 남부의 밀집대형도 단 몇발로 산산조각내 버리는 강력한 무기였다.
“성의 방어시설을 건드리지 마라. 인명피해는 어쩔 수 없으니 무조건 공성탑과 몸으로만 공격해.”
페로의 조금은 잔혹한 명령에 장교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성탑 접근합니다!”
보병부대를 맡은 조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 까마득한 높이의 황성은 공성탑이 아닌 발판과 같은 다른 수단으로는 사실상 공성이 불가능한 정도였다. 서부연합군에서 사역병단과 함께 보내준 공성탑 35개 중 근위대의 방어시설로 중간에 전복된 것은 무려 20개에 달했다. 하지만 무사히 접근한 15개가 굉음을 울리며 저 어마어마한 높이의 황성 성벽에 충돌했다.
“공성탑에 있는 에키트 족 보병대와 가디언부대 진입합니다!”
페로가 알았다며 손짓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성벽에 닿은 15개의 공성탑의 발판이 일제히 열리면서 얼굴에 온통 붉은 늑대의 피를 칠한 에키트 족 보병들이 도끼 하나씩을 쥐고 악을 쓰는 괴성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함께 공성탑에 오른 가디언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그 기세에 놀란 근위대 병사들이 공성탑 입구를 향해 마구 창을 내질렀지만 그 육중한 체구의 그 호전적인 야만족들은 방패와 도끼로 창을 때려 부수며 성벽 위로 무작정 몸부터 돌진해 들어갔다.
“리프트 설치! 성벽에 제일 먼저 올라 교두보를 확보한 병사는 2계급 특진이다! 빨리! 빨리!”
공성탑에 뒤이어 성벽 밑에 도착한 북부보병대 지휘관들이 선두열의 병사들에게 크게 팔을 휘저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투창과 통나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사방에 시체를 만들어 냈지만 내렸지만 복수심에 사무친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깨에 지고 온 리프트를 성벽 꼭대기에 쏘아올린 이들은 근위대들이 새카맣게 장악하고 있는 성벽 위를 향해 리프트 케이블 하나에 의지해 차례대로 솟구쳐 올라갔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라! 물러나지 말고 뒤에 올 전우의 자리를 벌란 말이다!”
보병들과 함께 리프트를 타고 성벽에 직접 뛰쳐오른 조페가 덤벼드는 근위대 가디언의 목을 힘껏 쳐내며 악을 썼다. 셈의 5천 근위대가 지키는 황성의 동쪽 성벽 위는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전사단과 근위대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면서 황도는 제국 개국 이래 두 번째의 피로 물든 하루를 기록하게 되었다.
“의사 어딨냐고!”
단상에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카렐의 가슴에 코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묻었다. 희미하나마 그의 온기가 카렐의 목과 가슴에도 전해져왔다.
“미안하다는 말......꼭 하고 싶었고......”
“미안할 것 하나 없으니 제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시오!”
“춥군.......정말 추워.......”
카렐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떨고 있는 코리온의 몸을 급히 감싸주었다.
“학장 치료할 의사를 배치해 두랬잖아! 어디갔어!”
카렐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단하를 둘러보았다. 2만의 유학자들에 뒤이어 수만의 군중들까지 이 소요사태에 휩쓸리면서 황궁 앞 광장은 사방에서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진압하던 근위대 손에 죽은 시체들이나 부상자들, 포박해놓고 도망간 사람들까지 수백이 사방에 흩어져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전하! 전하! 여기 갑니다!”
자이납의 너무도 반가운 고함소리와 함께 큰 구급낭을 멘 전사단 군의관이 허둥지둥 모습을 나타냈다. 함께 온 의사는 아니었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코리온의 바이탈 사인을 살핀 의사는 즉시 구급낭 속에서 혈액앰플을 꺼내들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응급수혈합니다.”
순간 깜짝 놀란 카렐이 의사의 팔을 덥석 붙들며 따지듯 물었다.
“수혈이라고? 지금 미쳤나!”
“예에?”
코리온의 팔에 새겨진 ‘수혈불가’라는 문신을 본 군의관의 표정이 순간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럼 당장은 다른 방법이......”
“썅! 같이 온 의사놈은 어디 갔어! 그놈이 학장 피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애가 탄 카렐이 악을 썼다. 의사가 약이 들은 앰플을 설치하고 상처들을 급히 지혈했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코리온은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발현자의 운명인가.......”
“닥치시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냉랭하게 쏘아붙인 카렐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듯 구급낭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안에 들어있던 가는 튜브를 즉석에서 잘라 그 양끝에 굵은 주사바늘을 꽂았다. 코리온의 감은 눈썹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카렐이 코리온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눕혔다.
“그분을..... 뵙고 싶네......이젠......”
“그 양반은 거기서 오라버니 보고 싶어하지 않으실 거요.”
갑자기 자기 팔을 걷어 올린 카렐은 그 한쪽의 선명한 핏줄에 그 굵은 바늘을 서슴없이 꽂았다.
“전하! 뭐하시는 겁니까! 모렌 박사님 경고를 잊으셨습니까! 피를 다시 흘리면 생명이 위험하시다고......”
순간 당황한 자이납에게 카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입 닥쳐,.......넌 빨리 그 의사나 찾아오란 말이다!”
이를 꽉 악문 카렐은 자신의 붉은 피가 차오르기 시작한 튜브의 반대편 끝을 코리온에게 가져갔다. 이미 의식이 희미해진 코리온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카렐은 그의 팔을 억지로 끌어당겨서는 바늘을 푹 찔러 넣었다. 굵은 튜브를 타고 카렐의 피가 코리온의 몸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너까지......위험에 빠뜨릴 수는......”
코리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팔이 져려오기 시작한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군의관의 물통을 대뜸 빼앗아든 카렐은 그 한통을 벌컥벌컥 모두 들이켜 버렸다. 카렐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코리온의 얼굴에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코리온의 몸을 추스려 품에 꽉 껴안으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주고받는 거요, 오라버니 피 가져오면 혼자 다 먹지 말고 나도 좀 나눠주시오. 썅! 아무거나 먹을 거 가져와! 빨리!”
군중들을 해산시켜 돌려보내려던 베흔의 계획은 그들 중 일부가 유학자들의 난동에 합류하면서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었다. 이미 2, 3천명의 유학자들을 체포했지만 광장에서 난동을 피우는 사람은 도리어 더 늘어나 있었다. 특히나 도시의 에너지장벽을 작동시키면서 다른 도시에서 이곳까지 온 수만의 사람들까지 놀란 나머지 공황상태에 빠져 엉겁결에 유학자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있었다.
황궁이 북부에 점령당했던 기원 97년 이래 1번 도시가 이런 혼란에 휩싸인 일은 여지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새 4만을 헤아리게 된 성난 유학자들과 군중들을 진압하는 데 이미 2만에 달하는 근위대 병력이 동원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4, 5천은 됨직한 페로가디언들까지 이들과 합류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광장을 뒤로하고 황궁을 향해 몰려가는 1만여명의 유학자들의 모습에 2천의 근위대 가디언들과 3천의 정규군들이 황궁에서 몰려나왔다. 그들은 주변에 스크럼을 짜고 몰려드는 유학자들을 향해 방패를 세우고 창끝을 겨누었지만 흥분에 사로잡힌 유학자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들을 향해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들 유학자들을 방패삼아 후미에서 몰려온 3천의 전사단과 페로가디언들이 무기를 들고 몰려들면서 이들 근위대들을 당혹스러운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목표는 황궁이다! 황궁을 점거한다!”
가디언부대의 선두에는 황궁사정에 밝은 시로와 루토, 그리고 2백여의 근위대출신 전사단 가디언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스크럼을 짠 근위대 정규군들과 1만의 유학자들의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새 루토와 네피가 지휘하는 1천의 가디언들이 근위대 중앙본부와 주기장이 있는 100, 101층을 겨누어 일제히 리프트를 쏘아 올렸다.
“돌격!”
1천여명이 일제히 리프트를 작동시키며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자 거의 동시에 나머지 2천여 가디언들도 황궁 1층을 향해 돌격진형으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지독한 서생놈들!”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150층으로 가까스로 도망쳐 온 베흔이 어깨에 감은 붕대를 움켜쥐며 탄식을 내뱉었다. 흥분한 유학자들을 교묘히 이용해가면서 공격해 들어오는 저들 가디언들의 술책에 근위대가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유학자들 살상해도 좋다는 극단적인 명령까지 내렸지만 저들의 죽음을 불사한 돌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00층과 101층에 네피와 루토가 지휘하는 적 가디언들이 진입했습니다! 1층에도 시로가 이끄는 페로가디언 2천명이 진입했습니다!”
아리엘의 보고에 베흔이 머리를 싸쥐었다. 전사단에는 황궁의 구조와 근위대 내부사정을 훤히 꿰고있는 카렐과 시로, 조페와 루토와 같은 가디언들이 널려있었다. 바로 그들이 이 모든 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했음에 틀림없었다. 황궁 내부를 경비하던 3천여 가디언들 중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내보낸 녀석들을 제외하면 이제 겨우 1천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황궁 전체가 이제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때, 그보다 더 충격적인 보고가 셈에게서 들어왔다.
“동문이, 동문이 열렸습니다!”
반사적으로 황성 동쪽을 바라본 베흔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던 동쪽 성벽 중앙의 거대한 성문이 수백의 페로가디언들과 그보다 몇 배는 되는 유학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마치 밀물이 들이치듯 아메샤 스펜타의 크샤트라 연대 전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적병들을 상대하며 치열한 저항을 벌이는 셈의 수비군은 순식간에 사면초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어깨의 상처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쉬던 베흔이 등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수우와 제롬을 돌아보았다. 이들을 호위하고 이곳까지 따라온 릴라크는 베흔이 다음에 내놓을 말을 이미 짐작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일단 황궁을 버리고 2번 도시의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피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어?”
“어차피 녀석들은 이곳을 계속 점령할 수가 없습니다. 녀석들이 무리를 해서 이곳에 타격을 가한 건 57만의 대군을 맞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수작이니 우리는 차라리 이곳을 미끼로 내주고 녀석들을 끌어들여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겁니다.”
제롬이 이를 악물며 뒤로 휙 돌아섰지만 애써 웃음까지 지은 베흔이 그를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내일 오후면 30만의 남부연합군과 동부기병대가 황제령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의 근위대 병력도 건재하니 일단 전략적 후퇴를 하고 차후에 근위대와 남부연합군을 총동원해 이곳을 포위해버리면 녀석들은 도리어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인근 4번, 5번, 6번, 8번 도시에 각각 만여 명씩의 근위대가 주둔중이니 녀석들은 죽을 구멍을 찾아들어온 셈입니다.”
그간 지내온 황궁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 제롬이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내며 주변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이 황궁만 내주는 거야? 아니면 1번 도시권역을 다 내주는 거야? 6개의 성들은? 이곳으로 오는 육로를 봉쇄하고 있지 않나?”
“그 성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임시구조물들입니다. 현재는 각각 3백명 정도씩의 소부대밖에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다. 황궁에서 그곳의 방어체계를 통제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황궁을 내주면 그것도 일단 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롬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얼굴을 감싸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 썩을 놈들.......내 지금은 물러나지만......”
곧 이곳으로 올 30만의 남부연합군이 있다는 사실에 애써 스스로를 위로한 제롬이 어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황궁을 계속 저들의 손에 놔둘 생각만은 추호도 없었다.
떨고있는 코리온을 단단히 안은 채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카렐은 이미 세 통째의 물을 마셔댄 후였다. 약기운이 퍼지면서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한 코리온과는 달리 카렐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자이납이 근위대 병사에게서 빼앗아온 그 맛없는 비상식량도 이미 열 개가 넘게 먹어치운 후였지만 카렐의 얼굴에서는 이미 핏기가 거의 사라져 조금씩 휘청대고 있었다.
“공중 에너지장벽이 꺼지는데요!”
하늘을 올려본 자이납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성공했구나......”
카렐이 코리온의 얼굴을 품에 꼭 안으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새 혈액앰플의 공수를 청하는 군의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카렐은 코리온의 긴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궁 별관의 프리깃 주기장 쪽에서 떠오른 근위대의 퇴각 수송선이 하나둘씩 1번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고 황궁 쪽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가디언들과 유학자들의 기쁨에 찬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왔다.
더듬거리며 팔을 뻗은 코리온은 카렐의 목을 꽉 껴안으며 그의 거칠어진 뺨에 그 아름다운 입술을 가져갔다.
“자네가.......그분을 닮았다는 대제학 말이.......이제 이해가 되는군.”
코리온의 뜨거운 입김을 느낀 카렐은 힘이 조금씩 빠져가는 팔에 다시 힘을 주었다. 지금 이 둘을 잇고 있는 건 서로의 혈관을 이어주는 튜브 뿐만은 결코 아니었다.
“전사단입니다!”
자이납의 외침에 카렐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직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군중들을 뚫고 대오를 맞춰 정렬한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과 에키트 보병대의 피묻은 도끼 깃발이 제일 먼저 모습을 나타냈다. 정연하게 행군해오는 그들의 모습에 아직까지도 이곳 광장에서 우왕좌왕하던 군중들과 유학자들이 마치 강물이 갈리듯 양옆으로 갈라서며 조용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처형단 아래 광장에 일렬로 도열하는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카렐은 수혈해주던 바늘을 뽑아 옆에 내려놓고는 부축하려는 자이납을 애써 뿌리치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나의 인민들에게 알린다!”
한 팔을 번쩍 치켜든 카렐은 단하의 전사들을 내려다보며 광장이 떠나가라 그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리 리쿠의 후손인 나 카렐 카파키 리쿠는 이 순간부터 땅을 딛고 선 가장 존엄한 존재이며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세나우스 4세임을 선언한다!”
순간 숨죽이고 있던 단하의 병사들 사이에서 폭발하듯 함성이 터져 올랐다. 카렐은 그때까지 목판에 꽂혀있던 베흔의 플람베르주를 힘껏 뽑아 공중에 치켜들며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광장을 다시 울렸다.
“제국의 황제로서 나의 전사들에게 명한다! 거역하는 자에게는 죽음과 치욕을 선사해라! 개국의 뜻을 어기고 황권을 농락해온 이 쓰레기들은 이제 황제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카렐은 뒤쪽 당상에 꽂힌 근위대의 문장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근위대의 용 문장을 단번에 산산조각내며 날아간 그 칼은 그 뒤에 세워져있던 수우의 옥좌마저도 부수고 그 뒤의 벽에 푹 박혀버렸다.
“콜로니의 정복자이시며, 사교(邪敎)를 무너뜨린 영웅이시며, 쿠트라스와 비엔과 요동과 아켐과 코윈을 지배하시는 리쿠 가의 존엄하신 황제와 그 혈통에 아메샤 스펜타를 대표해 충성을 맹세하나이다!”
선창과 함께 제일 먼저 엎드린 케레사스 솔로스 경을 시작으로 각 부대 지휘관과 전사들의 우렁찬 울림이 서로 경쟁하듯 사방에서 터져 올랐다.
전사들의 승리의 함성이, 군중들의 놀라움이, 유학자들의 남은 분노가 1년 반만에 진짜 주인을 맞은 황성을 넘실대며 마치 메아리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곧 이곳을 향해 진군해 올 35만의 남-동부연합군과 아직 건재한 근위대를 맞아 갓 켜진 촛불 같은 새 황실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운명이 이들 모두에게 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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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 제1부 Up To The Heart 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부 후기와 2부 예고편을 다음회에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