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55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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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핵심지역인 슈트란 가 종가로 진입하는 초입에 위치한 이곳 ‘영성자산’은 이 초원지대에서 보기 드문 산맥의 한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산’이라고 해봤자 말이 충분히 달려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약간 가파른 언덕일 뿐이었지만 궁지에 몰려있는 이들 동부사람들에게는 가히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이 산의 정상에 집결한 북-동부연합군 15만 보병과 8만의 기병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22만의 보병과 13만의 기병, 낙타병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중군 보병대를 맡은 오르마즈는 양익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대기하고 있는 샤자한과 마굴루 경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이번 전쟁 들어 처음으로 연합군을 이루어 회전을 벌이게 된 그들 동부기병대가 서부 낙타병부대와 남부 중장기병대를 상대로 얼마나 분전해 줄 수 있을지 그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북-동부 사령관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 빌루이나 동부의 암바카이 모두 그다지 군문에 밝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이 전투는 보병사령관인 오르마즈와 기병사령관인 샤자한 이 두 야전지휘관의 개인기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휴우.”
입술을 잘근 깨문 오르마즈는 자신만을 바라보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등 뒤의 보병들을 빙 둘러보았다. 언뜻 보기에 전열에 동부보병, 후열에 북부보병들을 배치한 듯 싶어보였지만 실제로는 보병의 사각형 진형을 가로지른 대각선을 사이로 우익에는 동부보병, 좌익에는 북부보병이 배치되어 완벽한 눈속임을 하고 있었다.
“적 지휘부입니다. 장군님. 주페 태자도 있군요.”
오르마즈의 부관인 마에두 트라티누스 경이 걱정스레 말했다. 동부 2제후 마굴루 부인 남동생인 32세의 이 젊은 무장은 ‘오르마즈 경에게 한 수 제대로 배워 와라’는 그 누나의 당부 때문인지 오르마즈의 지시라면 불을 들고 기름통에 뛰어들라고 해도 말없이 따를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꽃과 나무, 시를 유난히 좋아하는 식물학도 출신의 이 선한 청년은 오르마즈 보기에는 거친 무장이 되기에는 너무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였다.
스코프를 작동시킨 오르마즈의 시선은 적 중군 대오의 선두에 서 있는 마누엘 델루지, 브라코 발 플레렌 공을 한 번씩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황실 문장인 황룡이 새겨진 금빛 갑옷을 입고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자 주페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떨군 오르마즈는 그 자신만이 알아들을 희미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꼭 이러셔야 했습니까.......폐하.”
요동의 넓은 평원을 가로질러 양쪽 지평선 끝까지 긴 전열을 이룬 남-서부 연합군의 위용을 바라보며 오르마즈가 탄식을 내뱉었다.
절영의 검은빛 갈기에 이마를 기댄 오르마즈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발끝까지 몸을 감싼 검은빛 갑옷을 갖춰 입고 선봉에 선 그의 당당한 모습은 뒤에 선 15만의 북-동부 연합군 보병대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다보니 탄식과 함께 갈기에 머리를 파묻은 그의 모습을 병사들은 지휘관의 승리에 대한 기원 정도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적 주력인 남부보병들의 가장 큰 약점은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이니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고개를 천천히 치켜든 오르마즈가 투구를 눌러쓰며 휘하 지휘관들에게 입을 열었다.
“적 중군 보병대의 우익을 남부보병대가 맡고 있다. 적의 진격과 동시에 동부보병은 우익으로 밀집해 서부보병을, 훈련 상태와 체력이 우수한 북부보병은 좌익으로 밀집해 남부보병을 상대한다.”
돌격과 함께 진형을 사실상 90도 회전하는, 이런 보병전술은 여지껏 아무도 써 본 일이 없는 변칙에 가까운 전술이었지만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지닌 적들을 기만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모험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달려 올라올 적군에 비해 내리막을 달려 내려가는 이쪽 보병들의 속도상의 이점 역시 머릿속에 고려했음은 물론이었다.
적 보병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경은 1열에 선 약체 동부보병들을 손쉽게 무너뜨리고 후열의 북부보병을 차례로 격파하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진격!”
남-서부연합군 쪽에서 동시에 울려온 거대한 나팔소리와 함께 그 꿈틀대는 거대한 진형이 이곳 영성자산의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려 2배 가까운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적군들의 위용과, 22만의 적병들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지진에 가까운 진동에 전열 동부보병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요하지 마라! 너희 뒤엔 나 오르마즈와 북부보병이 있다!”
오르마즈가 벌써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동부보병대 앞을 거세게 말달리며 팔을 휘저었다. 보병대 선두에서 적군과의 거리를 계속 어림하던 오르마즈는 옆에 선 기수의 보병대 깃발을 빼앗아들며 두 팔로 힘껏 휘저었다.
“진격!”
오르마즈의 함성과 동시에 전열의 동부보병들이 일제히 오른쪽을 향해 집결하며 돌격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열의 북부보병들 역시 왼쪽을 향해 집결하며 내리막을 세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동부보병들과의 1차 조우를 예상하고 전열에 상대적으로 약한 보병들을 배치했던 마누엘 델루지 사령관은 적 보병의 느닷없는 돌격과 진형변경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지휘부와 함께 급히 후방으로 물러났다.
영성자산의 가파른 내리막을 이용해 걸음에 탄력을 받은 북-동부 보병들은 거의 질주하듯 빠른 속도로 상대를 향해 내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놈들을 맞받아쳐야 됩니까?”
일선 보병지휘관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남-서부 보병사령관 마누엘 경은 아무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
“후미에 정예부대들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전열을 뒤로 물리고.......”
“지금 바꾸면 대오 전체가 다 무너지는 것도 모르나!”
참모의 말에 마누엘이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했다. 사실 이제와 그로서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북부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후위에 두었던 강병들을 계획에도 없이 뒤늦게 불러내는 것도 진형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르막을 헐떡이며 달려 올라가는 남부와 서부 보병들은 이미 숨이 턱에까지 닿아 있었지만 가만히 서서 적들, 아니 정확히는 남부보병들의 심장을 향해 돌진해오는 북부보병들의 저 무서운 돌격을 멍 하니 서서 받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속보 정렬!”
북부의 각 단위부대 지휘관들의 명령에 그들 북부보병들은 미리 치밀하게 훈련한 듯 1백 명, 혹은 2백 명 단위의 쐐기꼴을 눈 깜짝할 새 형성하며 적들의 심장을 뒤흔들 정도의 우렁찬 함성소리로 돌격준비 완료를 알렸다.
“거창!”
북부보병대를 맡은 바스토프 장군의 명령에 북부보병들의 상징과도 같은 긴 장창이 가뜩이나 겁에 질려있는 남부 중장보병들의 심장을 향해 빽빽하게 겨누어졌다. 그리고 비탈을 달려 내려온 그 어마어마한 충격력으로 남부 중장보병대 전방을 거세게 타격했다. 첫 충돌과 함께 피어난 먼지와 부러진 창, 칼들, 부서진 방패와 째지는 비명소리가 초원을 뒤흔들었다.
“맙소사,”
지휘부와 함께 후방으로 물러나던 주페가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거의 3열까지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남부의 전열과 짓밟혀 죽어가는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이었다. 전열의 남부보병들은 제대로 접근전 한번 못해본 채 적들의 힘에 밀려 대오 자체가 산산조각 나버린 상태였다.
“후열 확인사살! 확인사살 확실히 하란 말이다!”
전열의 창병들이 쓰러진 남부보병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지나간 그 자리에 다시 몰려든 후열의 보병들은 신음하는 남부보병 생존자들을 머리를 도끼로 마구 부수며 뒤를 따랐다. 죽은 병사들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수와, 쏟아진 피, 살점으로 온통 도배된 초원은 그 원래의 푸른빛이 아닌, 뻘겋고 누런 빛깔이 온통 뒤엉킨 끈적한 늪으로 변해갔다. 난생 처음 확인한 그 끔찍한 모습에 주페의 얼굴은 순간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내가 여기 있다! 나 오르마즈가 바로 너희 옆에 있다! 4천만을 학살한 저 적들에게 자비 따위는 내버려라! 한명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북-동부보병대 1선의 바로 옆을 거칠게 내달리는 검은 갑주 차림의 무사를 따라 북부 보병들이 마치 파도치듯 무기를 치켜들며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이 ‘검은 사신’의 앞에 운 없이 동댕이쳐진 몇 남부보병들은 금속빛 궤적을 남기며 공중을 휘젓는 창에 혼비백산하며 거의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오르마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어물대던 남부장교에게 서슴없이 달려든 오르마즈는 적이 달아나려 방향을 돌리는 그 짧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측면, 사각에서 비스듬히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불쌍한 희생물의 목을 뒤에서 꿰뚫은 창은 경동맥과 목의 질긴 근육을 순식간에 끊어내며 피와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또 한 명의 적을 쓰러뜨린 오르마즈는 투구 사이트에 엉겨 붙은 적의 피와 살점을 닦아내며 잠시 가빠진 숨을 가다듬었다.
주페는 그때까지도 멀리 서 있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저하! 빨리 물러나십시오! 위험합니다!”
호위하는 X기병이 거칠게 잡아당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페가 스코프를 끄고 허둥지둥 말에 박차를 가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북부제후군의 거대한 현무군기를 든 군기병을 데리고 전장을 가로질러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는 오르마즈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남부제후군의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샤자한이 이끄는 8만의 기병이 13만의 남-서부 기병과 조우한 건 북부보병들과 정면충돌한 남부보병 전열이 완전히 붕괴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맥없이 무너진 자신들의 보병대의 모습을 보며 이미 기세가 한풀 꺾여있던 남부기병대는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는 투창공격을 앞세우고 돌격해온 ‘바람의 군대’ 동부기병들에게 먼저 공격해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섣불리 튀어나갔다가 저들 무서운 북부보병에게 언제 뒤가 막혀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기병은 위치를 절대 사수해! 후방의 보병 예비대를 중군에 당장 투입하고 북부 보병놈들 돌격만 일단 막아보란 말이야!”
가까스로 후방으로 도망 온 마누엘 델루지 사령관이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바락바락 언성을 높였다. 좌익의 서부보병대는 빈약한 동부보병들을 그럭저럭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걷잡을 수없이 무너지는 남부보병 전열의 상황을 보아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대로 전황을 뒤집기는 불가능해보였다.
주페가 마누엘 경의 팔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마누엘 경, 적의 1차 돌격은 몇 열까지가 무너졌든 일단 받아냈으니 반격을 해야하지 않겠나. 적 장창보병대의 약점은 측면이니 정예군인 예비대로 중군 보병대를 강화할 게 아니라 북부와 동부의 경계지점에 전격투입해서 그 둘 사이를 갈라놓고 측면을 치는 게......”
온갖 욕설과 명령, 고함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는 이 와중에 주페가 마누엘에게 목소리를 한껏 높여 말했지만 당장이라도 이곳 사령부까지 육박해올 듯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북부보병의 기세에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그의 귀에 들어갈 턱이 없었다.
“너희! 도망쳐온 놈들 빨리 수습해서 전열을 정비해! 시간을 벌어야 한단 말이다!”
“델루지 사령관, 이대로는.......”
“가만히 계십시오! 명령권은 제게 있습니다! 지금 사령부가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게 제정신입니까!”
옆에서 자꾸 말을 거는 주페에게 극도로 격앙되어있던 마누엘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망연자실한 얼굴로 전장을 둘러본 주페는 이미 두 군대의 차이를 너무나 확연히 깨닫고 있었다. 기수 한 명과 부관, 십여 명의 호위기병만을 동반한 채 보병 제1선을 종횡무진 누비며 부하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 알리고 있는 오르마즈와, 적들의 초반돌격에 놀란 나머지 뒤로 숨어 자신 앞에 보병들의 시체로 산을 쌓는 데 급급한 못하고 있는 이들 남-서부 지휘부는 틀림없는 다른 모습이었다.
“벌써 결판났군.”
‘고문관’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직감한 주페가 힘없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말없이 전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 뒤로 죽어가는 남부 보병들의 처절한 비명과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북부보병들의 기세에 찬 함성, 군데군데 오르마즈를 연호하는 환호성이 메아리치듯 울렸지만 그는 도저히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저 자를 반드시 죽여야 돼. 저자만 죽이면 돼.”
주페가 한 번 쓴 일도 없는 창을 손에 꽉 움켜쥐며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자를......”
주페가 무기력하게 떠난 후에도 그 상태로 계속되던 영성자산 전투는 결국 그의 예상 그대로 남-서부 연합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남부제후군은 12만의 보병 중 절반이 넘는 7만의 어마어마한 전사자를 기록했고 남부보병들이 갑자기 물러나면서 후방을 포위당했던 서부보병들 역시 절반 가까운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보병간의 대결에서 사실상 결판난 이 전투는 한 번의 격돌에서 무려 10만 이상이 죽고 5만 이상의 포로가 나온, 2차 혼란기 사상 최대의 격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둔 북-동부연합군은 잠시나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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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토, 시로를 동반한 제네르는 망토로 온몸을 가린 채 수에니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바삐 걷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타르서스의 북쪽 끝을 이루는 이 사막 휴양도시의 뒷골목은 해변의 고급스런 서부풍 고급주택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방으로 다닥다닥 이어 붙은 공동주택들이 마치 미로와도 같은 소굴을 이루고 있었고 범죄 또한 꽤나 횡행하는 곳이었다.
은밀하고도 중요한 만남을 위해 몇 번이나 약속장소를 바꾸어가며 힘들게 가고 있지만 이 인물은 이런 위험을 감수라고도 남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주변을 재빨리 살핀 루토는 제네르를 지하의 한 작은 양조장으로 안내했다.
“누군가?”
양조장의 어두침침한 그늘 밑에는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술잔 하나를 놓고 앉아있는 웬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잠시 굳었던 그의 표정은 제네르와 함께 들어온 시로의 모습에 금새 환하게 풀어졌다.
“케레사스 솔로스 경, 오랜만입니다.”
“자네도 좋아 보이는군.”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표정에 애써 웃음을 덧씌우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어색해보였다. 시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케레사스 경은 시로와 함께 들어온 제네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은 사라진 원 슈로 기사단과 함께 황실의 2개 독립부대 중 하나를 이루던 아메샤 스펜타 군단의 사령관, 아니 사령관이었던 케레사스 솔로스 경은 서부혈통 특유의 검은빛 큰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 위험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때 오르마즈의 휘하에서 민병대 지휘관으로 있던 이 억센 사내의 표정에는 의심과 걱정이 온통 뒤엉켜 있었다.
“슈로 기사단장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입니다.”
“알고 있소.”
여전히 의심어린 표정으로 대답한 케레사스 경은 허름한 탁자를 가리키며 제네르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경질적으로 술 한 잔을 벌컥 들이킨 케레사스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메샤 스펜타는 사실상 해체작업에 들어갔소. 3천에서 7천씩 이루어진 각 연대별로 해체되어 근위대에 배속되어서 ㅤㅋㅞㄹ크 토벌군이나 제후지역 파견군에 각각 재편성될 것 같소. 결성시부터 있었던 원 멤버들의 저항이 있지만 북극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데다가 우리 부대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는 황실 내무부에서 일체의 예산집행까지 중단시킨 상황이라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소이다.“
케레사스 경의 눈가에 깊은 아쉬움이 감돌았다. 성전의 해부터 함께해온 열성 민병대 출신 혹은 그 후손들로 조직된 이들 아메샤 스펜타 군단은 세나우스 2세를 제후들의 손에서 지켜낸 주역이었고 한때 근위대의 중추를 이루었던 기간부대였다. 하지만 4차 혼란기 당시 로노 장태자를 지지해 집단이탈하면서 베흔의 눈 밖에 나 버렸고, 세나우스 3세의 즉위 이후 세네피스 황후 덕에 가까스로 부대의 목숨만은 건져냈지만 그나마 황후의 몰락 이후로는 베흔의 끊임없는 견제로 예전 같은 명성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도력 위주로 훈련받은 X-6세대의 초기 가디언들과 노련한 베테랑 보병으로 결성된 이들의 조직력과 전투력 하나는 제국 최강임을 아무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황실에 대한---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전이나 세나우스 2세 당시의 영광을 잊고 있지 못하는---가히 열성적인 충성은 ‘적당한 수준의 황실에 대한 충성’만을 원하는 베흔의 입맛에는 그다지 들어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초급, 중급지휘관을 맡고 있는 2천명의 6, 7세대 가디언들은 부대원들과 별도로 쪼개서 가디언부대로 보내겠다는 거요.”
“소부대별 저항을 예상해서 아예 조직을 와해시키겠다는 심산이군요.”
제네르의 대답에 케레사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보내지면 그 수모와 핍박은 불을 보듯 빤하니.......그들의 걱정 또한 말할 수 없는 지경이요. 물론 더 큰 걱정은......”
“걱정은?”
케레사스 경이 또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가디언들을 먼저 보내고 난 후에 시민출신 부대원들을 푸엘 숲에 일단 대기시키겠다는데.......지금 그 저의가 의심스럽단 말이요.”
입술을 굳게 깨문 케레사스 경이 손에 있던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3500급의 2중 에너지장벽으로 굳게 폐쇄되어있는 그곳 푸엘 숲은 한때 카렐이 키워졌고, 지난해에는 베흔이 페로의 암살을 시도했을 만큼 은밀한 곳이었다. 그리고 베흔이 필요 없어진 부대를 마지막으로 보내 ‘처리’하는 용도로 쓰여 온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우리도 어쩌면.......GOE부대 꼴이 날지도 모른단 말씀입니다.”
케레사스 경의 붉어진 눈에서 이 거친 사나이의 모습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음직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을 애써 부릅뜬 그가 제네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미 부대에서 쫓겨났지만 내 새끼 같은 병사들이 그런 구렁텅이로 끌려가도록 보고있을 수는 없구려. 전하께서 우리 부대원들을 구해주시기를 간청하겠소.”
“전하께서는 확실한 충성의 서약을 원하시오. 그분을 황제로 받들고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할 용사 말이요.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없소.”
제네르가 마주앉은 이 억센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케레사스 경이 입술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분께서 정당한 피를 물려받으셨다 리쿠 학장님께서도 선언하셨으니, 우리가 왜 충성을 망설이겠소.”
케레사스 경의 말에 제네르는 일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살피던 그는 루토와 시로에게도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거짓투항일 가능성은?”
‘전하께 경의 충성을 고해 올리겠다.’는 말로 일단 대화를 마무리짓고 양조장을 나선 제네르는 뒤따르는 두 명의 가디언들에게 잔뜩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시로가 냉큼 대답했다.
“저 부대나 지휘관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을 듯 합니다.”
“제가 여러 가지 다른 루트를 통해 조사한 아메샤 스펜타 부대의 내부문건들입니다. 예상 질문과 함정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모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일단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만 만일을 대비해 계속 사실여부를 추적하겠습니다.”
근위대 보안국 부국장 출신답게, 루토가 이번 대화 내용과 그 분석을 빠짐없이 정리해 놓은 빽빽한 자료를 내밀며 말했다. 이 두 가디언의 극단적인 평가방법 차이에 제네르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아메샤 스펜타 3만까지 곧 손에 넣으실 테니......이제 걸림돌은 하나밖에 안 남았군.”
제네르는 황궁이 있는, 멀리 북쪽 하늘을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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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회는 좀 길군요.....다음회는 좀 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