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8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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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를 객실까지 직접 가져온 도스트 바얀의 뜬금없는 친절에 코리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 역시도 전에 나오던 꿀꿀이죽 수준의 형편없는 것들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꽤 구하기 힘든 과일과 야채, 고급 치즈와 부드러운 빵 등이 섞인, 코리온을 위해 제대로 차려진 음식들이었다.
“조카 놈이 손님한테 각별히 잘 대접해주라고 연락했더군요. 이따가 밤중에 도착할 거라구요.”
“조카라니?”
코리온의 경계 섞인 질문에 도스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라손 바얀이라고, 그 망할 놈, 덩치는 콩알만 해도 옛날에 카나 가 중장기병대에서 잘나가는 중대장이었는데......요즘은 도대체 뭐하나 모르겠어요. 손님하고 어떤 사이유?”
“푸훗,”
코리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런데......내 노예 녀석 혹시 봤나?”
“마구간에서 말 돌보고 있던데......보거든 올라오라고 하죠.”
라스가 말을 돌보고 있다는 말에 코리온이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충성스러운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한 녀석은 부러진 한쪽 다리에 코리온이 직접 매 준 엉성한 부목을 댄 채로 놀랍게도 평소처럼 코리온을 수발하고 있었다.
“면천시켜 줘도 지금 같을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잠시 빠져든 스스로를 나무라며 코리온은 혼자 식탁에 앉았다. 천한 노예 놈이야 어차피 먹고 난 찌꺼기나 던져주면 되는 일이니.
“저 백마요, 털 빗겨주고요, 여물도 새로 줬어요.”
긴 막대기를 짚고 마구간에서 돌아온 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창가에 서 있던 코리온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생각 없이 식탁 앞에 앉은 라스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을 올려보았다. 반 개 남은 빵과 치즈, 그리고 꽤 많이 남은 양젖과 야채는 지금껏 기껏해야 찌꺼기나 남겨놓았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거.......저 먹어도 되는 건가요?”
“그래.”
라스가 주인의 눈치를 있는 대로 보며 빵과 치즈를 입에 넣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던 라스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저어......저 아래층에요, 남부군인들 와서 술 먹고 있거든요.”
“......알았다.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
“근데요......그 사람들이 그러는데......서부하고 전쟁은 이제 끝난 거 아니냐고......그런 말 하고 있더라구요.”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 코리온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주인의 갑작스런 시선에 깜짝 놀란 라스는 하마터면 먹던 것을 체할 뻔 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다니?”
“그저께요......누굴 사로잡았다고......그러던데요?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그 이상은 못 들었어요.”
“무어야!”
순간 정수리를 때리는 아찔한 기운이 코리온의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를 할 정도라면 서부에서 극히 중요한 누군가, 어쩌면 샤드니가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샤드니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당황하던 카렐의 표정을 머릿속에 떠올린 코리온은 어쩌면 샤드니에게 변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불안감에 온몸을 떨며 서 있었다.
동부 상급제후들 절반 이상이 어차피 배신해버린 이상, 더 이상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카렐은 베아트릭스와 우베, 네피 등 믿을만한 직속부하들에게도 자신의 혈통을 숨김없이 모두 밝혀주었다. 제네르나 하심의 예상대로, 주페 태자의 혈통으로서도 제위 계승권을 주장할 명분은 충분한 이상 조직이 흔들릴 우려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어쩌다가?’ 라는 한 가지에 온통 쏠려있었다. 그들의 호기심에 어머니의 불륜까지는 차마 밝힐 수 없던 카렐은 ‘선대폐하가 결함이 많아 우량한 형질로 바꾼 모양’이라며 일단 둘러대 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전하가 북, 서부 피가 모두 섞이셔서 미인이셨군’ 하며 넋두리를 늘어놓은 우베나, ‘주페 태자가 미남이셨냐’고 제일먼저 물어본 자이납의 주책에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지만.
“지난번 슈트란 가의 배신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동부에서 최근 입수한 정보들을 가져온 우베가 ‘전사단 동맹군’ 지휘부가 모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샤자한 공의 차남 다히르 경과 그 직계 일가가 요직에서 모두 숙청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는 외지로 좌천되었고 특히 다히르 경과 3남 네자드 경은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6번 행성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제롬 공이 네자드 경을 근위대에 넘겨 달라 요구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네자드 경 이야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는 제네르에게서 애써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조용히 손을 뻗은 카렐이 우울해져있는 그의 손을 꼭 붙들어주었다. 고개를 갸우뚱 한 2제후 제르베 경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제롬 그놈이 네자드 경을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간 가문의 내치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차남 다히르 경 계보가 무너지면서 장손자 보벤 경을 정점으로 한 아르군 경 계보가 문무 양면에서 사실상 가문 전권을 장악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카렐이 가늘게 뜬 두 눈을 씰룩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그가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는 옆에 앉은 제네르와 페로 정도만 가까스로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늙은이가 황궁 앞 광장에서 지 꼴을 탄식할 날이 오겠지.”
우베가 보고를 계속했다.
“그리고......하크로딘 단장님께 계속 안 좋은 소식인데......그저께 플로브 경이 단장님 일가를 공식적으로 파문했다고 합니다.”
“별것도 아니군. 언제는 가문 사람 취급했나.”
제네르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서부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지금 샤드니 경이 생포된 지 2일이나 지났는데 희한하게도 플레렌 가에서 그 반환협상을 전혀 시도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우베의 말에 어깨를 으쓱 한 페로가 즉시 입을 열었다.
“희한할 것도 없지. 칼림 플레렌 그녀석정도 성격이면.”
“샤드니 다음번 최고제후 계승권자는?”
“칼림 자신.”
카렐의 질문에 냉큼 대답한 페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리쿠 학장이 살아서 돌아오면 그때 가서 반환협상을 시작하겠지. 만약 그놈이 죽었다면 자기들이 제위경쟁을 이어나갈 명분이 없어지니 그냥 포기하고 자기가 최고제후에나 오르는 게 상책일 테고.”
“하여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카렐에게 우베가 한 장의 서류를 말없이 내밀었다. 황제령의 본부에서 근위대에 대한 공작업무를 맡고 있는 가디언 루토가 보내온 이 길지 않은 메모에는 ‘아메샤 스펜타 군단 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경이 어제 해임되었음’ 이라는 짧은 문장만이 들어있었다. 옆에 앉은 제네르와 페로를 한 번씩 바라본 카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리쿠 학장 구해오는대로 바로 황제령에 가봐야겠군. 이젠 우리가 반격할 때 아닌가.”
자정도 한참 넘어간 시각에 목적지인 바얀 시에 도착한 라손 일행은 바로 도스트의 여관으로 길을 재촉했다. 자이납에게 바깥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려두고 여관 안으로 달려 들어간 그들은 도스트가 알려준 객실로 서둘러 올라갔다.
“학장님!”
문을 열어젖힌 하심은 안에서 말없이 기다리던 학장의 모습에 감격해 급히 자리에 꿇어앉았다. 하지만 코리온은 자신을 보며 기뻐하고 있는 하심의 모습에도 검은 수염으로 거뭇거뭇해진 입가를 떨며 무표정하게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무슨 일......있으십니까?”
“샤드니 공이 남부에 생포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
학장의 첫 마디에 하심은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뒤이어 들어온 라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 전하께서 정보를 입수하시고 샤드니 공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셨으나......그분이 난전 중에 갑자기 학장님 시신을 찾겠다며 전선을 이탈해버리셔서 저희도 미처 손쓸 수가 없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학장님. 플레렌 가에서 지금 반환협상을 하고있을테니......”
하심이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지만 돌아온 것은 코리온의 불호령에 가까운 한마디뿐이었다.
“칼림 플레렌 그자가 반환협상을 할 것으로 보이는가.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근위대가 그에 응하겠는가?”
고개를 휙 돌려버린 코리온의 눈시울이 붉게 변해 있었다.
“학장님......”
입술을 악문 채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있는 코리온의 모습에 하심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보다 못해 나선 라손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그 문제는 돌아가서 전하와 상의하십시오. 10분 내로 출발하겠습니다. 갈 때는 자기와이어 영역만 벗어나면 부근에 대기하던 셔틀이 달려올 수 있을 테니 3시간 정도 후면 바로 셔틀을 타실 수 있을 겁니다.”
유목민의 복장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선 코리온은 등자를 딛고 말에 오르려는 자신의 발밑에 누군가 불쑥 손을 대 주자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다.
“정말 이 말과 제 처지를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 그런가요? 학장님?”
“자이납. 너한테 그런 말 안 어울린다. 전하께서 뭐라셨냐.”
먼저 말에 오른 라손이 코리온에게 대놓고 치근덕거리는 자이납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하지만 남의 잔소리 따위에는 애당초 귓구멍을 틀어막아버린 자이납에게는 소용도 없는 말이었다.
“제가 말 대신 학장님을 모시고 갈 수만 있다면......”
“그래, 사막 어딘가에서 갑자기 사라지겠지.”
라손이 혀를 쑥 내밀며 말머리를 돌렸다. 혼자서도 말에 잘 오르고도 남을 코리온을 억지로 끌어안고 부득불 자기 손으로 밀어올린 자이납은 기가 막혀 하는 코리온의 표정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그의 허벅지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뭘 오자마자 가냐.”
도스트 바얀은 바로 가버리는 이 조카의 모습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마지못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자이납과 함께 낙타 등에 오른 라스는 그 엄청난 높이에 놀라 잠시 비명을 질렀다. 길에 밝은 라손을 선두로 다시 북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일행은 희미한 달빛만을 길잡이삼아 길 같지도 않은 ‘캐러반 루트’를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날 구한 걸 서부에 알렸는가?”
행렬의 중간에서 한참을 말없이 걷던 코리온이 결국 입을 열었다.
“기르기트에 도착하는 대로 서부에 알릴 예정입니다.”
하심에게서 그간의 정세변화에 대해 설명을 들은 코리온은 북쪽을 향해 가는 도중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샤드니가 사로잡힌 일을 카렐이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코리온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카렐에게 가 버린다면, 샤드니의 목숨을 대가로 근위대장이 자신에게 모종의 협박을 해 오리라는 것은 말하나마나한 일이었다.
물론 그는 약혼자의 목숨 때문에 스스로 다짐한 대의를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카렐을 탐탁지 않아하는 서부제후들이 현직 최고제후의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카렐을 따르라는 자신의 의지를 받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나 샤드니의 탐욕스런 양아버지 칼림은 이 사실을 안다면 바로 가문을 뒤집어엎고 자신과 샤드니, 둘 모두를 배신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코리온 자신은 서부의 ‘정신적 지도자’ 일지언정 실권을 가진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그는 샤드니가 죽는다는, 그것도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사실은 차마 머리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샤드니......”
마치 스스로 빛을 뿜듯,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이 ‘조황비전’의 하얀 갈기를 쓰다듬으며 코리온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뿜어 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비록 자신을 억류했고, 뜻을 저버렸지만, 그는 200년이 넘는 기간을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 온 든든한 반려자였다. 샤드니를 살리고, 동시에 서부제후들 역시 카렐을 새로운 황제로 받들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결정이라도 내릴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 같다고 말할 지도 모를 그 어떤 선택이라도.
갑자기 하심을 돌아본 코리온이 입을 열었다.
“종이 좀 있는가?”
“아, 예.”
하심에게서 작은 수첩과 펜을 받아든 코리온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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