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0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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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의 큰 승전으로 플라칼 가에 넘어간 키타이 기지에서는 아침부터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령관 헤즈 플라칼 경을 마치 쳐들어오듯 방문한 경기병단장 루코프 플라칼 장군의 얼굴에는 지독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 어려 있었다.
“저희 부대 부상자들은 왜 후순위로 밀린 겁니까!”
경례마저도 잊어버린 루코프는 사령관 헤즈 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덤빌 듯 언성을 높였다. 지난밤 전투에서 서부 낙타병 부대에 거의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펼쳤던 경기병대는 절반이 넘는 어마어마한 병력에 손실을 입으면서 사실상 ‘경기병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무색한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 치료순위에서까지 뒤로 밀리면서 그들의 불만은 거의 극에 다달아 있었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중한 부상병이 200명이 넘습니다. 모두 응급패치만 붙이고 수술순위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까지 기사단하고 중장보병대에 양보하라뇨! 그네들 수술 끝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할 텐데 저희 병사들은 다 죽으라는 겁니까!”
“지금 항명하자는 것인가?”
얼굴을 찡그린 헤즈가 이 당돌한 젊은 무장을 매섭게 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루코프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원칙대로 위중한 순서에 따라 수술순위를 잡아야 할 것 아닙니까!”
“경기병단은 당장은 전장에 복귀할 필요가 없으니까 후순위로 미룬 것 뿐이다. 이젠 동부 경기병들이......”
‘동부 경기병’이라는 말에 루코프의 입술이 순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남부 경기병단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철저하게 망가져 버린 루코프는 두 주먹을 움켜쥠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알았으면 당장 나가. 다음번에 와서 같은 소리 또 하면 항명으로 처리해버릴 테니.”
헤즈의 눈짓에 근위병들이 루코프를 밖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거의 쫓겨나듯 사령부를 나선 루코프는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에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하고 말았다.
그가 억울한 것은 단순히 수술순위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전 이래 지금껏 가장 효율적인 운영을 펼쳐온 경기병단이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저 잘난것도 없는 기사단 녀석들에게 매번 ‘싸구려 기병’ 취급을 받는 수모를 몇 달째 당해오고 있었다. 심지어 카렐의 장태자선언 직후 병사들에게 지급된 ‘특별상여금’조차 평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대의 절반도 받지 못하면서 이들의 기병으로서의 자존심도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돈 한두푼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단장님, 어찌되었습니까? 9중대에서 한 명이 또 죽었습니다.”
경기병단 막사에 돌아온 루코프에게 중대장 한 명이 급히 달려와 물었다. 그의 곁을 말없이 스쳐 ‘병동막사’에 발을 들여놓은 루코프는 의무관들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수백의 부하들을 붉어진 눈으로 빙 둘러보았다. 루코프 스스로도 왼팔 한쪽을 깊이 베이는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터져 나오는 끔찍한 부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 앞에서는 차마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조치해준다고 했으니......”
병사들에게 차마 이 말밖에 해줄 수 없던 루코프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가를 애써 감추며 뒤로 휙 돌아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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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로노에 있어서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황제의 ‘핏줄장사’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첫째를 낳고 난 5년 후인 108년에 둘째아들 주페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황제는 첫째 로노 태자 때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 이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었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 아버지가 바니샤드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요즘 들어 하렘 출입이 부쩍 뜸해진 황제는 근 1년여간 하렘에 있는 남자들을 침소에 들인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서부를 두 동생들에게 맡겨둔 채 1년여간 황궁에 살다시피 하고 있는 바니샤드 대공과 황제와는 혼인이래 가장 금슬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신하들이나 시종들 사이에 ‘폐하께 하렘 이외의 숨겨둔 애인이 또 있으신 모양’이라는 소문도 알게 모르게 떠돌았지만 어쨌든 이 둘째 태자를 임신했던 바로 그 시기에 황제는 남편 바니샤드 대공 외의 남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인 일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 둘째 태자가 바니샤드 플레렌의 아들임은 별 의심 없이 세간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로노의 탄생과 동시에 거금을 싸들고 황실을 찾았던 동부와는 달리 남편 바니샤드 대공은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땜질한 것이 고작이었고, 서부에서도 각 가문 차원의 축하성명을 발표한 것이 이 불운한 둘째 태자가 받은 출생선물의 전부였다.
“이 녀석은 눈빛이 특별해. 정말 특별해.”
백일이 넘어 사람들에게 공개된 아기의 뽀얀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황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했지만 이 아기는 이미 5살이 된 형 로노와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오똑한 코와 움푹 패인 눈, 그리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큰 암갈색 눈동자는 두말할 나위 없는 서부 혈통의 특징이었다. 동그랗게 뜬 아기의 큰 눈 주변을 어루만지며 황제가 아쉬운 듯 짧게 덧붙였다.
“나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았다면 훨씬 더 예뻤을 텐데......”
문득 고개를 치켜든 황제는 옆에 앉은 남편 바니샤드 대공과, 주변을 둘러선 오르마즈, 베흔 등의 측근 대신들을 죽 둘러보았다. 씁쓸한 얼굴로 아기를 번쩍 안아든 황제는 그 반짝이는 눈 주변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사람들의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의 시선은 너무도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미남자 바니샤드 대공을 향했다.
“대공 폐하의 눈동자 색깔이 원래 열성이시오니......”
누군가 잘난 체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사람들의 무서운 눈길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야 어쨌든, 황제의 엄명에 의해 아기의 아버지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서는 안되는 사항이었다.
“이 아이가 역사상 두 번째로 발현자가 된 것도 그 사람 덕분일지 모르지.”
“예에?”
황제의 한마디에 갑자기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솜털이 송송 돋아난 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황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모렌 박사 말이 아이가 발현자일 확률이 높다는군. 7살은 넘어가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누군가의 선창에 자리의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큰 소리로 별궁 대전 안을 울렸다. 모렌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는 샤미르 리쿠에 이어 사상 두번째의 ‘발현자’로 역사에 남을 터였다. 자신과, 이 어린 태자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 신하들을 빙 둘러보며 황제가 조금 씁쓸한 듯 한 표정으로 아기의 눈 사이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래, 정말 경사스런 일이지. 정말로. 그 사람도 너무나 기뻐할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황제는 아기를 옆에 앉아있던 남편 바니샤드 대공의 품에 넘겨주었다.
“세상에, 발현자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황제에게서 아들을 받아든 바니샤드가 입가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모인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아기를 안아들고 입을 한 번 맞춰 준 바니샤드는 옆에 서 있던 유모의 팔에 바로 넘겨주며 짐짓 환한 웃음을 지었다.
모임이 끝난 후, 남편 바니샤드를 동행한 황제는 대전을 빠져나가 42층의 황제 침소를 향하고 있었다. 침소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던 황제는 침실인 42층에 도착하자 갑자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분수와 색색의 모자이크 타일, 아름다운 벽화가 새겨진 돔 천장까지, 완벽한 서부풍으로 꾸며진 이 화려한 침실과 별궁은 함께 있는 남편, 바니샤드 플레렌 대공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아직 몸도 다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웃음지은 바니샤드가 황제의 머플러와 용무늬 비단포를 벗겨주며 말을 건넸다. 여전히 말이 없던 황제에게 바싹 다가선 바니샤드는 몸을 조금 낮추고 이 키 작은 황제의 이마에 키스를 해 주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황제의 얼굴과 귀, 목을 자극적으로 어루만지던 바니샤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밤은 제가.....”
“그대 전 부인이 브라코 녀석을 낳았을 때도 이러셨소?”
나름대로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려던 바니샤드의 표정은 황제의 싸늘한 한마디에 파랗게 굳어버렸다.
“예?”
움찔 한 바니샤드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당혹한 표정의 바니샤드를 매섭게 올려본 황제가 다시 물었다.
“대공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매정하게 굴었냐는 말이요.”
“그게......”
황제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당황한 바니샤드는 대답조차 못한 채 어물거리고 있었다.
“품에 안겨줘도 예뻐하는 척만 하다가 항상 유모에게 줘 버리고, 산책이라도 하라고 하면 시종들 손에 내버려둔 채로 한눈이나 팔고 있고. 아기 옷을 직접 고르라 했더니 아랫사람에게 시켜버리지를 않나.....대공 맏아들 브라코 그놈 어렸을 때도 지금 주페를 대하듯 그러하셨소?”
“죄송합니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당황한 바니샤드가 황제의 앞에 얼른 무릎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본디 아이 다루는 법을 잘 모르옵고......아기에게 그다지 다정다감한 성격이 못되옵니다.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앞으로 고치도록 애쓸 것이오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쩔쩔 매며 용서를 구하는 그의 태도에 성이 조금 누그러든 황제는 마지못해 침대로 다가가 입고있던 옷을 직접 벗어 던졌다.
“오늘밤은 피곤하니 그냥 자겠소. 대공께서도 처소에 가 주무시오.”
“총리각하께서 웬일이십니까.”
아기를 목욕시키고 데려나오던 유모와 시녀 일행을 호위하던 근위장교는 퇴청했어야 할 이 시간에 황실 내명부 숙소인 41층 계단 부근에서 마주친 오르마즈의 모습에 깜짝 놀라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수행원 하나 달지 않은 행색으로 한 손에 웬 파일 하나만 궁색하게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오르마즈는 장교에게 갑자기 반가운 척을 하며 그다운 넉살좋은 웃음을 지었다.
“요즘 운동부족인 것 같아서 근위대가 있는 43층까지 달려 올라가는 중이네.”
“그런데 땀도 안 흘리시고......체력이 정말 좋으시군요.”
장교의 짓궂은 한마디에 오르마즈가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눈치껏 속아넘어가 주지도 않고.”
43층까지 달려 올라간다는 오르마즈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은 황실 안 사정에 능통한 근위장교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천하의 바람둥이로 소문난 이 매력적인 총리가 별궁에서 미남미녀들이 가장 넘쳐나는 내명부 부근에서 밤중에 어슬렁거린다는 사실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사실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는 내명부의 미남미녀 구경하러 온 이 바람둥이 총리의 주책 정도로 생각되리라는 것을 오르마즈도 잘 알고있었다.
“오오, 주페 태자 저하시군.”
갑자기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린 오르마즈는 입가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 자그만 아기의 고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강보에 싸인 채 작은 수레에 누워있던 아기는 기분이 좋은지 아직 젖살이 도톰한 입가에 줄곧 웃음을 품고 있었다.
아기를 바라보며 무언가에 홀린 듯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오르마즈는 장교를 따라오던 유모와 시녀 일행에게 잠시 비켜달라 눈짓을 보냈다. 그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오르마즈가 장교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내 한 번만......이분을 안아봐도 되겠나?”
“곤란하옵니다. 각하. 5살이 되실 때까지 외부인과의 접촉은 금지되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장교가 정색을 하며 아기와 오르마즈 사이를 막아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오르마즈가 다시 간곡하게 입을 열었다.
“내 깨끗하게 목욕도 했고 손도 다 씻었으니 별 문제 없을 걸세. 그냥.....”
“아무리 총리 각하의 부탁이시지만......”
무어라 더 대답하려던 남자장교는 움찔 하며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닿을 듯 바싹 나가선 오르마즈의 한쪽 손이 어느새 그의 허리를 돌려안고는 그 옆구리에 살짝 얹혀 있었다.
“딱 한번만이네.”
장교의 귓가에 바싹 붙은 오르마즈의 입술에서 부드러운 숨결과 함께 그 특유의 약간 갈라진, 자극적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 매력적인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산뜻한 비누 냄새와 엷은 향수 냄새에 취했는지 장교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저, 정말로 목욕 하셨군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 장교가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연하지. 확인하고 싶은가?”
눈을 반쯤 가리고 흘러내린 다갈색 머리칼 밑에서는 오르마즈의 무지개빛 매혹적인 시선이 그 특유의 빛깔을 돌변해가며 장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속삭임에 잠시 어쩔 줄을 몰라하던 장교는 주변을 얼른 두리번거리고는 계단실 한쪽 구석의 어두컴컴한 곳으로 오르마즈를 급히 데려갔다.
“그, 그러시다면......”
오르마즈의 가슴에 살짝 기대며 미소를 띠어 보인 장교는 결국 강보에 싸여있는 이 아기를 그의 품에 내주었다.
“세상에......”
아기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오르마즈는 숨소리까지도 멎은 채 그 보드라운 얼굴을 너무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아기를 바라보는 오르마즈의 무지개빛 눈동자와, 얇은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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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연재는 월요일 저녁에 있습니다. ^^ 아낌없는 리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