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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336화 (335/1,132)

< -- 336 회: Part 16.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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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기병들과 함께 하지즈 장군의 낙타병부대를 덮친 베흔은 적들이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기지 안으로 퇴각을 시작하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낙타병부대는 기지 입구를 지키는 장갑보병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쏟아지는 투창 속을 꿰뚫고 서둘러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영내의 자기 와이어가 파괴되었습니다! 적들이 퇴각을 시작하려나 봅니다!”

“에이, 썅!”

베흔이 대뜸 욕을 내뱉었다. 동부기병들로 적 낙타병부대 후미를 결사적으로 몰아치고는 있었지만 서부연합군을 이번 한번에 궤멸시킨다는 목표 자체는 이미 달성하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다 죽어버려!”

창을 치켜든 베흔은 남부 근위기병들과 함께 적 낙타병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하며 적 기지로 돌진했다. 그가 탄 명마 ‘비전’의 희고 아름다운 털은 어느새 서부연합군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오랜만에 제 세상 만난 제롬 공 역시 그 나서는 성격을 참지 못하고 근위기병들과 함께 이 사냥감들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남부 기사단에 이어 몰려온 동부기병들에 휩쓸리면서 기지 외곽은 적어도 천 명은 훨씬 넘는 낙타병들의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펜스를 돌파해! 다 부숴버려! 놈들을 단 한 놈이라도 더 죽이란 말이다!”

흥분한 제롬 공이 헤즈를 불러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남부 중장보병대와 서부 장갑보병들간의 피 말리는 힘겨루기가 계속되던 ‘중립지대’ 부근도 서부 보병들이 스스로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기세가 오른 남부보병들이 그들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샤드니와 하지즈 장군의 견고한 통제하에 나머지 병력들의 철수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코리온을 계속 감시하던 플레렌 가 장교가 셔틀에 훌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이륙하라는 명령이다. 학장님을 모시고 서부 수베르로 돌아간다! 가문 별장으로 가!”

“알겠습니다.”

장교의 지시를 받은 셔틀 조종사가 셔틀 문을 닫았다. 코리온과 라스, 그리고 그를 지키던 십여명의 용병들과 장교를 태운 셔틀은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향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사령관 샤드니 공은 어찌되었는가.”

코리온이 장교를 째려보며 물었다.

“무사하십니다. 수송선을 타고 탈라스 다른 곳으로 이동해 새 숙영지를 마련하실 겁니다.”

샤드니가 무사하다는 말에 그나마 안도한 코리온은 남부제후군과 동부기병들에게 무자비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키타이의 서부연합군 기지를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코리온이 머리를 싸쥐었다. 그 오랜 기간 오직 머릿속으로만 전쟁터를 떠올려왔던 코리온이었지만 그 실상을 이렇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육각형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졌던 서부연합군 기지 주변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수천의 시체와 피로 뒤엉켜 있었고, 적군이 퇴각하는 서부연합군을 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퇴로를 지키기 위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미리 퇴각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이던 수송선들과 수많은 병력수송셔틀, 승용셔틀들이 코리온의 셔틀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적 셔틀이 많다. 적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튀어나가지 말고 일단 퇴각행렬을 따라가고 적들이 안보이면 그때 빠져나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장교의 지시에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은 망원경으로 밑을 바라보던 코리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헬리오스 셔틀이구나.”

“예?”

“대기권내 최고속도는 부스터를 사용하면 951이다. 이것도 고속셔틀이지만 이걸로는 떨굴 수 없을 거다. 튜닝 상태로 보아서 근위대장의 전용셔틀같다.”

코리온 말마따나 서부연합군 기지 부근에 착륙했던 베흔의 검은색 헬리오스 셔틀은 몇 사람을 태우고 다시 공중으로 이륙하고 있었다. 스코프로 그 상황을 확인한 장교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느 셔틀에 누가 타고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숨을 내쉰 코리온은 막판까지 이 퇴각행렬을 지키며 기지를 사수하고 있는 보병들과 낙타병들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르키스 세호 경이 적 기지에 결사대와 함께 자살공격을 성공시켜 가까스로 퇴로를 뚫었습니다.”

코리온이 눈을 감으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목젖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전사했다는 말인가......”

“귀환했다는 보고가 없으니 아마도.....그럴 겁니다.”

“정체불명의 셔틀이 접근합니다. 속도를 내서 떨굴까요?”

조종사의 보고에 장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빨리 행렬에 따라붙어라. 빠져나가는 게 더 위험하다.”

1차 퇴각행렬을 이룬 십여 대의 수송선과 백여 대가 넘는 셔틀들이 북쪽을 향해 대오를 이루고 키타이 사막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때, 덜컹 하는 소음과 함께 가벼운 진동이 셔틀을 흔들었다.

“뭐냐?”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석으로 가려는 코리온을 장교가 거칠게 밀어 도로 앉혀버렸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조종석에 절대 접근하지 못하시도록 하라는 사령관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코리온이 셔틀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샤드니가 코리온이 행여 셔틀을 이용한 탈출을 시도할까 미리 손을 써 둔 모양이었다. 굳어진 표정의 코리온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 셔틀이 계속 이쪽으로만 따라옵니다.”

조종사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눈치챈 장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조종석으로 달려갔다.

“빨리 퇴각행렬에 따라붙어라.”

조금 앞서가고 있는 퇴각행렬에 합류하기 위해 조종사가 셔틀에 속도를 더 붙였다. 속도 때문인지, 셔틀의 이상한 진동은 조금씩 더 커져가고 있었다.

“주, 주인님......”

코리온의 의자 밑에 앉아있던 라스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긴장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던 코리온은 이 불쌍한 노예를 문득 바라보았다.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자리에도 감히 앉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라스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빈 좌석을 끌어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대로 셔틀에 안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대로 밖으로 튕겨나가  죽음을 맞을 건 뻔한 일이었다.

“내 옆에 앉아라. 라스.”

“예?”

“내 옆 좌석에 앉으란 말이다.”

잠시 쭈뼛거리던 라스는 코리온이 앉아있는 상석 옆의 조그만 보조의자에 쭈그려 앉으며 잔뜩 고개를 숙여붙였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저, 전......아, 악!”

코리온에게 더듬거리며 무어라 말하려던 라스는 결국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놀란 라스가 지르는 비명과, 고막을 찢는 폭음이 뒤엉키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셔틀이 거세게 흔들렸다.

“에익! 썅!”

조종석에 서 있던 장교는 충격에 한참을 뒤로 밀려나 뒤쪽 벽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함께 탔던 용병들도 넘어져 뒤엉킨 채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코리온의 팔을 끌어안았던 라스가 붉어진 얼굴로 급히 손을 떼었다.

바닥에 넘어졌던 장교가 피가 흐르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기랄! 뭐야!”

“모, 모르겠습니다! 엔진 세 개중에 하나가 꺼진 것 같습니다! 하나도 출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뭐야? 추락하는 거야?”

잔뜩 겁에 질린 장교의 고함소리에 조종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한쪽만으로 조금 더 갈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불시착할 수 있을 정도겠지.”

코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조종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하지만......사령부에 연락해서 다른 셔틀을 부르겠습니다!......일단 적군에게서 최대한 떨어져서 착륙하겠습니다!”

코리온이 입술을 깨물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기관부가 손상되면서 방향조정이 잘 되고있지 않은지 조종사가 당혹스런 얼굴로 쩔쩔 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셔틀의 진로는 퇴각행렬이 향하는 정북쪽에서 조금씩 동쪽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속력과 고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셔틀은 어느새 누런빛 사막 위를 당장이라도 스칠 듯 가까스로 날고 있었다.

“젠장! 쫓아오고 있는 저건 또 뭐야!”

스캐너로 뒤쪽을 살피던 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화면을 확대시킨 그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갔다. 바로 조금 전 코리온이 말했던 베흔의 헬리오스 셔틀이 이 뒤를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쫓아오고 있었다.

“사령부! 지금......근위대 셔틀에 쫓기고 있다! 빨리 구조셔틀하고 지원병력 보내! 학장님께서 위험하시다!”

“위치가 어디인가?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무슨 소리야! 아군셔틀 위치를 왜 못 잡아! 방금 정북에서 진로를 조금 이탈해서......조종사! 여기 좌표가 어디야!”

사령부측의 뜻밖의 대답에 장교가 벌개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0133, -8903입니다.”

“그 위치에 아군셔틀 포착되지 않는다.”

“제기랄! 포착되든 말든 빨리 보내란 말이야!”

장교가 사령부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검은색 헬리오스 셔틀은 뒤에 점점 가까이 달라붙고 있었다. 한쪽 엔진이 꺼진 채 가까스로 날고 있는 이쪽 셔틀은 키타이 사막 북동쪽 외곽의 험준한 바위계곡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능한 놈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코리온이 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팔을 거칠게 떨구며 조종석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서 장교도 더 이상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스캐너 앞에서 장교를 거칠게 밀어낸 코리온은 계기판과 스캐너를 직접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침통한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 셔틀의 아군 인식코드는 아예 작동하지도 않고.......누군가 셔틀을 손을 댔구나......”

침통한 표정의 코리온이 부조종석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렇게 걸려들다니......”

이마를 싸쥔 코리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셔틀의 정면 멀리로 까마득하게 높은 누런빛 절벽과 그 중간에 군데군데 갈라져있는 깎아지른 바위계곡들이 셔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계속 날아간다면 저 절벽에 셔틀이 정면충돌할 상황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출력이 너무 떨어졌습니다! 당장 착륙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까스로 ‘비행’을 유지해온 조종사가 코리온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지원셔틀은 당장 안 오는가!”

코리온의 호통에 장교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고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저희 셔틀 위치를 자동으로 찾지 못해서......스캐너만 사용해 육안으로 오다보니 시간이......”

“착륙합니다!”

조종사의 고함소리와 함께 셔틀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수직으로 내려앉지를 못한 랜딩보드가 자갈바닥에 끌리면서 요란스런 소음과 진동으로 셔틀 안에는 또 한번 난장판이 연출되었다. 거의 앞으로 꼬꾸라질 듯 요동치던 셔틀은 뒤로 반 바퀴를 돌아서야 가까스로 바닥에 멈춰섰다.

“이......이걸.......”

플레렌 가 장교가 함께 탄 십여명의 용병들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일단 셔틀은 안전하게 멈춰 세웠지만 이 뒤를 악착같이 쫓아오던 검은색 근위대 셔틀 역시 기다렸다는 듯 조금 옆에 착륙하고 있었다.

“문을 지켜라,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장교가 칼을 뽑아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크가 열린 헬리오스 셔틀에서 이십 명이 넘는 기병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화려한 금빛 갑주 차림의 거구의 무사와 눈에 확 띄는 백마에 오른 녀석까지 두 명이 앞장서고 있었다.

“문 잡아뜯어!”

제롬과 베흔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함께 온 델루지 가 근위기병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했다. 미리 준비해온 절단기를 가지고 달려든 그들은 그다지 튼튼하지는 않은 이 승용셔틀의 앞뒤 양쪽 출입문을 거칠게 뜯어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문을 지키고 있던 수베르 용병들이 셔틀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려는 이들 남부 근위병들에게 무기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젠장! 시간 없다. 모두 비켜.”

칼을 뽑아들고 대뜸 근위기병들의 선두에 뛰어든 베흔은 앞쪽 문을 지키고 있던 세 명의 용병들을 눈깜짝할 새 두동강내 버리며 셔틀 안에 뛰어들었다.

“이놈!”

칼을 내지르는 플레렌 가 장교의 목을 한 손으로 그대로 비틀어 내버린 베흔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있는 용병들이 무기를 자진해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나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서부 병사들이라면 코리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몰살당할 때까지 베흔에게 덤벼들었겠지만 이들에게 이 생판 모르는 학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무기를 내던진 용병들은 부조종석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코리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친절까지 발휘했다. 칼을 도로 꽂아 넣은 베흔은 입가 가득 웃음을 지으며 코리온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입니다. 리쿠 학장님.”

베흔이 코리온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함께 가 주셔야겠군요.”

자신의 어깨에 뻗어오는 베흔의 피묻은 손을 거칠게 쳐낸 코리온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내 발로 갈 테니 붙들 것 없네. 근위대장.”

굳은 표정의 코리온이 셔틀에서 내려서는 모습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롬 공의 입가가 확 일그러들었다.

“저 망할 새끼가 이제야 내 손에 걸려들었군.”

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이 서부에서 치욕스럽게 쫓겨난 이래로 저 망할 학장에게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제롬은 베흔을 따라 헬리오스 셔틀로 걷던 코리온의 앞을 확 막아섰다. 제롬의 어마어마한 거구가 막아서자 꽤 큰 키의 코리온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볼 수밖에 없었다. 제롬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잘 만났군, 자알 생기신 매력적인 학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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