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25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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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을 어렵게 빠져나온 제네르는 번화가인 주작대로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 중간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손목이 잘린 채 울부짖고 있는 웬 젊은 아가씨와, 얼굴과 옆구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한 손에 피묻은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소름끼치는 모습에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켜! 비키란 말이야!”
고통스러운 얼굴의 제네르가 거칠게 팔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샤자한 공이 태자를 배신했다! 샤자한 공이 또 태자를 배신했어!”
제네르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고함을 지르며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모여든 사람들은 슈트란 종가 안에서 튀어나온 이 심상치 않은 사람들의 미친 듯한 발악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다!”
갑주를 벗어던지고 종가 안에서 가까스로 쫓아나온 경비병들이 사람들 중간을 가로질러 걷고있는 제네르와 아메스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난 슈로 기사단장 제네르 하크로딘이고, 이 아가씨는 페로 경의 딸인 아메스요! 샤자한 공이 태자와 페로 경을 배신했단 말이요! 샤레이를 지켜주었고 동부를 도와주겠다던 태자를 버리고 못된 근위대와 또 손잡았단 말이요!”
손목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아메스를 겨드랑이에 낀 채 제네르가 계속 목청을 높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사람들이 질겁을 하며 옆으로 비켜났다.
“저년 입을 당장 다물게 해!”
제네르를 쫓아오던 경비장교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골목으로 뛰어든 제네르는 주작대로 동쪽의 초원 쪽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베아트릭스가 자신을 따돌리고 달아나기도 했던 바로 그 초록빛 초원이 제네르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잠시 제네르를 놓쳤던 경비병들이 다시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이, 이런......”
고개를 든 제네르는 종가 동문 쪽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대여섯기의 기병들을 발견하고는 절망의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 때, 제네르의 눈에 그들 기병들의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는, 얼룩무늬 말, 아타르가 들어왔다. 저 기병들은 자신이 아닌, 마구간에서 달아난 제네르의 말을 쫓아 달려오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
말을 향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긴 제네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와 준 이 고마운 말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빨리! 올라타!”
비틀거리는 아메스를 먼저 밀어 올린 제네르는 말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박차를 가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팔로 아메스를 꽉 껴안은 채 몸을 바싹 낮춘 제네르는 자신이 베아트릭스를 놓쳤던, 바로 그 길을 따라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종가의 경비기병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는 그의 뒤를 큰 함성을 지르며 따라붙어왔다.
“제기랄!”
뒤를 돌아본 제네르가 고함을 내질렀다. 혼자 타고있다면 제네르 정도의 기마술과 아타르의 주력으로 저들을 따돌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말은 가까스로 추적자와의 거리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는 제네르도, 손목이 잘려나간 아메스도 이미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차려! 아메스! 제발! 벨트로 상처 위를 동여매란 말이야!”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아메스가 비단벨트를 끌러 잘려나간 손목 윗부분을 감아 이로 물고는 있는 힘껏 조였다.
“꽉 잡아!”
펜스를 발견한 제네르가 능숙하게 몸을 낮추며 박차를 가하자 말은 그 낮지 않은 펜스에 서슴없이 돌진해 훌쩍 뛰어넘었다. 뒷발굽 끝이 약간 걸렸지만 어쨌든 제네르의 말은 그 너머의 초원을 계속해 달리고 있었다. 뒤쪽을 휙 돌아본 제네르는 세 기 정도의 기병이 펜스에 걸려 진행을 못한 채 서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제네르의 뒤를 쫓은 건 두 기의 경비기병들 뿐이었다.
말고삐를 움켜쥔 제네르는 거친 숨을 내뿜는 아타르를 그 날카로운 목소리로 계속 독려하며 이 심야의 초원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셔틀만 안 달라붙으면 되는데!”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재촉하던 제네르는 순간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지독하게도 후회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날아온 흰색의 큰 셔틀이 제네르의 뒤를 쫓으려는 듯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 더럽게도 운 없는 년!”
제네르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만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듯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가슴에 안긴 채 몸을 벌벌 떨고있던 아메스가 그의 손목을 꼭 붙들며 중얼거렸다.
“힘내세요......저도 있잖아요.....”
결국 앞뒤가 가로막힌 제네르는 말을 멈춰 세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앞에 내려선 흰 셔틀에서 거의 이십여기는 되는 기병들이 우루루 내려서고 있었다. 제네르는 떨고있는 아메스의 얼굴을 품에 꼭 껴안았다.
“못 지켜줘서 미안하다......저승에서 전하를 뵐 면목이 없겠구나......”
팔을 뻗은 제네르는 안장 옆에 달려있던 자신의 장검과 방패를 집어들며 앞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뒤를 쫓아오던 2기의 슈트란 가 경비기병들이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이렇게 죽는 수밖에.......”
제네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때, 제네르의 정면을 막아선 기병들 중 중앙에 있던 한 명이 창을 쥐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네르가 그쪽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순순히 잡혀주지는 않겠다!”
“자, 잠깐! 슈로 기사단의 제네르 하크로딘 단장님 맞으십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내 칼이나 받으란 말이다!”
“잠깐! 종장님 명으로 단장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이젠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겠군,”
말에 박차를 가한 제네르가 칼을 번쩍 치켜들며 그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깜짝 놀란 그 기병이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흰 눌레딘 가 북부용병들입니다! 나람 부인께서 단장님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 오라 명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네르는 그들의 행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검은빛의 특이한 라멜라 갑주는 물론이었고 유난히 긴 그들의 창끝에 달려있는 배너는 틀림없는 눌레딘 가에 고용된 북부 기병대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네놈들을 믿지?”
제네르가 눈을 부릅뜨며 묻자 기병대장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탈라스에서는 토로 경께서 태자 전하를 구해내시고 전사하셨습니다. 태자전하는 중상을 입고 탈출하셨지만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번 반역모의에 거부의사를 분명히 한 트라티누스 가와 눌레딘 가 병력은 방금 전 나지크로 급히 이동했고 가말라 카잔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가 탈출하신 태자전하를 수색중에 있습니다!”
“토, 토로 경께서 돌아가셨다고?”
“지금 저희 북부보병대가 토로 경의 시신을 수습해 운구중이고 중상을 입은 가디언 카토도 구해냈습니다! 빨리! 이제 단장님만 모셔가면 됩니다!”
카렐의 소식을 전해들은 제네르는 목이 메는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장교의 억양이나 생김새는 틀림없는 북부인의 그것이었다.
“빨리 저희 셔틀에 타십시오! 요동을 당장 떠나야 합니다!”
용병장교가 악을 쓰며 그를 재촉했다. 그새 슈트란 종가 쪽에서 또 다른 셔틀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손목이 잘린 채 신음하는 아메스를 한 번 내려다본 제네르는 결국 이들 북부 용병들을 따라 급히 셔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친 옆구리를 치료받던 제네르는 옆에서 잘린 손목을 응급처치받는 아메스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셔틀에 함께 탄 기병장교에게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베아트릭스 경도 그곳에 있었을 텐데......그 친구는 전하를 구하러 시도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장교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바툴 가 역시......샤자한 공 측에 가담한 것으로 압니다.”
제네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아트릭스마저 카렐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제네르와 아메스가 탄 셔틀은 이곳 연합군 후방기지를 급히 빠져나가는 트라티누스 가와 눌레딘 가 지원병력 수송선단에 급히 합류하고 있었다. 어쨌든, 사지를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제네르는 병상에서 맥없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상급제후들이야 모르지만 우리 같은 하급제후는......최고제후에게 눈밖에 나면......언제든 ‘제후’라는 이름까지도 잃을 수 있는 처지지.”
탁자에 혼자 앉아 독한 술잔을 들이키며 카이두 경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의 검은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그런 식으로 멸문당한 하급제후가들이 10개가 넘어. 날보고 비겁한 놈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제르베 경이나 나람 부인처럼 거기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으니......”
겔 안쪽에 말없이 쭈그려 앉아있던 베아트릭스 역시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 나도 이게 옳지 않은 길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쩌겠냐. 순간의 욱하는 감정으로 300명이 넘는 가문 사람들과 수백만의 복속민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지 않냐 말이다.”
카이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술을 훌쩍 들이켰다.
손녀의 우울한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두는 술잔을 그쪽으로 내밀며 말을 건네 보았다.
“너도 한 잔 하려무나.”
“......괜찮습니다.”
베아트릭스가 목멘 소리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가.......가문의 뜻을 받아들여줘서 너무 고맙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역시 우리 바툴 가 사람이로구나.”
“......”
“결혼이 깨져버린 건 미안하다. 내 곧 다른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마. 우리 가문 사령관 정도 지위라면 다른 괜찮은 남자를 충분히 구할 수도 있을 거다. 네가 기죽어 사는 것보다야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베아트릭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상으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다니 태자도 얼마 달아나지 못했을 거다. 제발 다른 사람 말고 탈란이 태자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래야죠......”
베아트릭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탈란 이모가 찾아야죠.....”
눈물에 젖은 고개를 치켜든 베아트릭스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할아버지 카이두를 문득 올려보았다. 카렐을 그리도 연모해 쫓아다녔고, 심지어 그와의 잠자리까지 함께했던 탈란이 부상을 입고 쫓기는 카렐을 공격할 턱이 없었다. 아니, 직접 구출해 전사단에 집단 투항해 버리리라는 게 그의 당연한 예상이었다. 하기사, 연애라는 것을 단 한번도 해본 일이 없이 각 부족에서 보내온 10명이 넘는 부인과 정략혼으로만 만난 그가 그런 것을 제대로 알 리가 없겠지만.
가문 전사 한 명이 겔의 플랩을 걷고 불쑥 모습을 나타낸 건 그때였다.
“탈란 바툴 대장님에게서 연락입니다. 계곡 북쪽에서 도망치는 태자의 혈흔과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베아트릭스가 카이두 경의 얼굴을 휙 돌아보았다. 카렐이 아직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베아트릭스의 가슴속이 울컥 해 오고 있었다. 술 한 모금을 들이킨 카이두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누가 죽였는지 증거를 남기라고 일러라.”
말을 꺼내는 카이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전사가 겔을 나서자 베아트릭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탈란 이모는 그분을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다, 탈란 그 애가 누군데.....”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카이두에게 베아트릭스는 무어라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탈란 이모에게 그분을 구하게 해서.......우리 가문이 전사단에 투항하는 의사를 밝히면......제발, 할아버님......지금이라도 상황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문만 결정을 내리면......”
베아트릭스의 설득에 카이두가 대뜸 이를 드러내며 이 손녀딸을 노려보았다.
“네년은 아직도 그쪽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거냐!”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베아트릭스가 카이두의 무릎을 붙들며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제발, 할아버님, 어차피 탈란 이모는 그분을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그 역시 샤자한 공의 진노를 살 것이 뻔합니다. 그럴 바에는 지금이라도 가문이 아예 결단을 내려서.....”
“이 망할 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카이두가 그 무지막지하게 큰 손으로 베아트릭스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말았다. 충격을 받아 카펫바닥에 뒹군 베아트릭스의 입과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런 소리하면 네년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내 지난번 공을 생각해서 너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샤자한 공께 얼마나 빌었는 줄 아냐! 내가 너 하날 살리려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 노인네 신발에 입까지 맞추고 흙바닥에 머리까지 처박았는데 뭐가 어째?”
“할아버님, 제발......늦으면 안됩니다......그분의 진노를 산다면 나중에 더 큰 화를 맞게 될 겁니다. 토로 경이 눈앞에서 그리 돌아가셨으니 그분의 한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경비병!”
분노한 카이두가 겔 밖에 대고 큰소리로 외치자 밖을 지키던 가문 전사 두 명이 급히 뛰쳐들어왔다.
“이년을 마구간에 가둬놓도록 해!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음식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주지 말고!”
“할아버님! 제발, 탈란 이모는.....”
버둥거리던 베아트릭스는 건장한 전사들의 손에 두 팔을 붙들린 채 카이두의 겔에서 강제로 끌려나오고 말았다. 거칠게 울부짖으며 경비병들의 손에 끌려가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을 종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가문이 멸문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기운 센 베아트릭스를 가까스로 마구간까지 끌고 온 경비병들은 나무문을 힘껏 발로 걷어차 열었다. 그 때, 발악을 하던 베아트릭스의 눈에 들어온 건 한쪽 구석에 마구를 모두 갖추고 세워져있는 말 한 필이었다. 말 주인인 듯한 기병은 그 옆의 물탱크 밑에서 수통에 한참 물을 채우고 있었다.
“에익!”
문을 여느라 중심을 잃고 있던 경비병은 베아트릭스의 느닷없는 발길질에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며 뒤로 한참을 밀려나 쓰러지고 말았다. 겨드랑이를 붙들고 있던 경비병마저 힘껏 메쳐 바닥에 쓰러뜨린 베아트릭스는 물을 담던 기병이 어어 하는 새 세워져있던 말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비켜!”
무서운 속도로 치고 나오는 베아트릭스의 말을 보고는 종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양옆으로 일제히 흩어졌다.
“문 닫아! 빨리!”
종가 입구의 경비병들이 가로대를 끌고 와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랑곳없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몸을 바싹 붙인 베아트릭스는 경비병들이 1차로 걸어놓은 제법 높은 쇠파이프를 그대로 훌쩍 뛰어넘으며 계곡 밑을 향해 거칠게 달려내려갔다.
“쫓아가! 경기병! 빨리 쫓아가!”
베아트릭스의 놀라운 기마술을 멍 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종가 내의 경기병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일제히 말을 돌려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망할! 제길! 이게 또 뭐냐구!”
베아트릭스는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황당한 처지를 또 한번 미치도록 저주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었다.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그날 밤 탈란과 함께 한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과 탈란이 힘을 합쳐 카렐을 구해내고, 그를 따르는 가문 궁기병들과 함께 전사단에 집단 투항해 버린다면 입장이 난처해지는 카이두 경은 결국 샤자한 공을 따르는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게만 한다면 카렐의 목에 걸린 4억 골드의 어마어마한 거금도---바툴 가 전체를 몇 년은 먹여 살리고도 남을---, 탈란에게 약속된 ‘수우 황제’의 황빈 자리도, 누구든,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카렐을 죽인 용사에게 영광스럽게 주어질 ‘상급귀족’이라는 신분도 어차피 모두 허사가 되어버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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