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23화 (322/1,132)

< -- 323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

.

.

요동의 슈트란 종가 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상경보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상이 걸렸는지를 말하는 방송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결사적으로 움켜쥔 채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던 제네르에게 당장은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안채로 들어가는 조금 큰 문이 보이고 있었다.

“하크로딘 단장님 아니십니까?”

안채 경비장교 역시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는지 평소같은 모습으로 제네르에게 아는 척을 했다. 보벤 경이 제네르가 종가 밖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해 바깥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지, 아니면 이곳 책임자인 다히르 경이 아직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안채 경비장교는 얼굴과 옆구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다가오는 제네르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창을 집어던지고는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세상에!”

순간 머리를 굴린 제네르가 그 장교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서쪽에서 가문 반란일세, 지금 한참 교전중이니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정식 책임자 다히르 경 외에는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말아! 알겠나?”

“예에?”

다히르 경이 종가의 정식 책임자임을 잘 알고 있는 경비장교는 제네르의 그럴싸한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교를 뿌리치고 안채 안에 뛰쳐든 제네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메스! 아메스!

“누구세요?”

안에서 문을 연 아메스는 마루 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제네르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맨발로 급히 달려나왔다. 제네르가 아메스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빨리, 빨리 달아나야 돼, 빨리 나와, 시간 없어,”

“왜요?”

“시간 없다니까! 할룩스하고 무기만 갖고 나와!”

제네르의 호통에 방으로 허둥지둥 달려들어간 아메스는 할룩스와 칼, 그리고 카렐에게서 선물받은 분재만을 품에 껴안고 급히 달려나왔다. 비틀거리는 제네르를 어깨로 부축한 아메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뭐예요? 뭐냐구요?”

“남문, 남문으로 가자,”

“남문은 평상시엔 문이 아니라구요, 대제례 때 아니고서는 항상 닫혀있는데......”

“알아! 그러니까 아무도 안 지킬 거 아냐!”

아메스에게서 할룩스를 빼앗듯이 집어든 제네르는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알 수 없는 코드-사용불가’라는 표시에 또 한번 절망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시면 안됩니다, 아가씨.”

경비장교가 제네르와 함께 나서는 아메스에게 말했다.

“제기랄! 환자가 생겼으니 의무실에 가야 할 것 아냐!”

순간 기지를 발휘한 아메스가 길을 막는 경비장교에게 되레 호통을 쳤다.

“의무실은 이쪽이 아니고......의료진을 부르겠습니다. 그냥 안에 계십시오, 저희가 지키고 있으니......”

“시끄러! 너흰 자리나 지켜!”

아메스의 호통에 움찔 하던 경비장교는 갑자기 종가 안에 울려 퍼지는 방송소리에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모든 경비병에게 알린다. 나는 종장의 장손자이며 후계자인 보벤 슈트란이다. 동부의 배신자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슈로 기사단장이 지금 부상을 입은 채 종가 안에 숨어있다. 녀석을 보는 즉시 경비대에 신고해라, 다시 알린다......”

순간 멍한 표정이 되어버린 경비장교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제네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얼굴로 조금씩 뒷걸음질치는 장교의 손이 할룩스로 가고 있음을 눈치챈 아메스는 잽싸게 칼을 칼집째 치켜들고는 장교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제네르만 경계하고 있다가 아메스의 느닷없는 기습을 당한 녀석은 뒤통수를 움켜쥐며 앞으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네놈도!”

뒤에서 창을 치켜들려는 경비병에게 무작정 돌진한 아메스는 그 병사의 옆구리에 악을 쓰며 칼을 박아넣었다.

“빨리! 빨리!”

제네르를 다시 부축한 아메스가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빠졌던 경비장교가 더듬거리며 할룩스에 집어들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는 안채! 안채 동쪽 문으로 제네르 하크로딘과 아메스 자이센이 도망치는 중이다! 반복한다!......”

곧바로 밖으로 달아날 줄 알았던 제네르가 안채로 가서 아메스를 데리고 달아났다는 놀라운 소식에 보벤 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샤자한 공의 계획에 따르자면 카렐과 그 패거리는 제거하되 앞으로의 동부를 위해 페로와의 관계만은 절대 악화되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간파한 교활한 제네르가 페로와 카렐 사이의 연계선 역할인 아메스를 함께 데리고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이 망할 것들.”

결국 힘으로 숙부를 제압해버린 보벤이 씩씩대며 코피를 닦아냈다. 아버지 샤자한 공의 명령에도 끝까지 저항하던 다히르 경은 결국 조카 보벤과의 몇 분간의 난투극 끝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배를 두 번이나 찔린 다히르 경은 아들 네자드의 가슴에 기댄 채 거칠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를 악문 보벤은 꽁꽁 묶여있는 이 부자(父子)를 원망스럽게 한번씩 바라보았다.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되어있던 네자드가 보벤에게 대뜸 침을 뱉었다.

“네 이 망할 놈! 네놈이 할아버님의 눈을 흐려놓았구나!”

“입 닥쳐. 이 배신자 같으니.”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 보벤은 다시 방송에 대고 알렸다.

“제네르 하크로딘을 보는 즉시 사살해라! 사살하는 자에게는 2계급 특진과 10만 골드의 큰 포상금이 주어질 것이다! 다만 아메스 자이센은 절대 해쳐선 안된다! 알겠나! 아메스 자이센은 절대 해치지 말고 체포해야 한다!”

“전하는.....그분께선 무사하신 건가요?”

제네르로부터 상황을 설명들은 아메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나도 몰라......연락도 할 수 없고......제발 살아 계시기만 바랄 수밖에,”

계속해서 피를 흘린 제네르는 몸에서 조금씩 기운이 빠지는지 벌써 몇 번이나 넘어지고 난 후였다. 이 거대한 미로 같은 저택 안에 사방팔방 흩어진 경비병들은 제네르를 잡기 위해 온통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구석진 곳들을 빙빙 돌아 남쪽으로 꾸준히 나아가던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남문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남문 밑에 문 여는 노예들이 기어서 드나드는 작은 쪽문이 있었어, 지난번에 대제례 때 봤어,”

제네르가 입에 가득 찬 피를 뱉어내며 쇳소리같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틀거리며 남문 앞에 거의 도달한 아메스는 제네르의 예상 그대로, 평소에 전혀 사용되지 않는 폐쇄된 이 거대한 철문을 올려보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 거대한 구조물은 문이라기보다는 그냥 높은 벽에 가까웠다.

“누구냐!”

남문 옆 초소에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이 이 둘을 발견하고는 창을 집어들고 즉시 달려나왔다.

“에이 썅!”

칼을 치켜든 아메스가 먼저 달려나온 병사에게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 상대가 다름아닌 ‘아메스’라는 것을 확인한 병사는 창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 아메스는 상대의 창을 왼팔로 힘껏 내리누르며 칼을 서슴없이 내질렀다.

“아앗!”

배를 찔리며 주저앉는 병사 바로 뒤에서 다른 경비병이 뻗어오는 창의 서슬퍼런 날이 아메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으악!”

그 예리한 창날이 아메스의 뺨과 귀를 차례대로 베어내며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피가 흐르는 얼굴을 감싸쥐며 아메스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놈!”

쓰러진 병사의 창을 재빨리 집어든 제네르가 아메스를 다시 찌르려던 그 경비병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충격을 받고 잠시 비틀거리는 병사의 무릎을 걷어찬 제네르는 신음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은 병사의 등에 온 체중을 실어 창을 힘껏 내리찍었다.

“그아악!”

치명상을 입고 꿈틀대는 병사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제네르가 아메스를 급히 일으켜 세웠다.

“빨리! 빨리 쪽문 찾아!”

제네르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어둠 속에서 문을 더듬었다. 일단 이 문만 나서면 이 앞으로는 동부 최고의 번화가인 거대한 주작대로---남부와 동부와의 전쟁이 시작되는 도화선이 된 베아트릭스의 암살사건이 벌어졌던---가 펼쳐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1백 명 가까운 노예가 달려들어야 겨우 열던 이 거대한 문은 이 둘만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제네르가 어둠 속에서 문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며 결사적으로 쪽문을 찾았다.

“저기 있다!”

함께 쪽문을 찾던 아메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십여 명의 경비병들이 달아날 길을 찾아 헤매는 이 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떡하죠!”

칼을 뽑아든 아메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쪽문을 찾던 제네르가 고개를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다!”

바닥에 주저앉은 제네르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쪽문의 가로대를 사력을 다해 잡아당겼다. 끼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쪽문을 잠그고 있는 크고 굵은 가로대가 미끄러져 바닥에 굴렀다. 가로대가 빠지면서 동시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저들에게 들킨 판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빨리 와!”

벌떡 일어나며 아메스를 향해 몸을 돌린 제네르는 보병들이 하늘을 향해 힘껏 내던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제네르의 얼굴의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이미 전장에서 몇 번 마주했던, 그런 투창공격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말도, 방패도, 갑주도 없었다. 그는 방패 역할을 해줄 아메스와 떨어져 있던 스스로를 처절하게 원망하고 있었지만 이젠 별 도리가 없었다. 혼자 기어다니며 쪽문을 찾던 제네르는 저들에게 훌륭한 투창 표적일 뿐이었다.

보병이 던진 투창인 덕에 속도와 위력이 그나마 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제네르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교수님!”

또 한번 그 무모한 기질을 그대로 발휘한 아메스가 제네르를 구하겠다며 대뜸 달려들었다. 제네르가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지 마! 피해!”

하지만 제네르의 어깨 옷자락을 덥석 움켜쥔 아메스가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겼다.

“아악!”

큰 비명을 지른 아메스가 무언가에 맞아 튕기듯 철문에 거세게 부딪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제네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발견한 건 아메스의 손을 관통해 문설주에 꽂혀있는 투창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일어서서 아메스의 칼을 빼앗아든 제네르가 투창을 급히 잘라내고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웬일인지 손이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손이 끼었어요!”

고통에 겨운 아메스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투창에 맞은 충격으로 그의 왼손이 문설주와 문 사이의 좁은 틈새에 말려들어가 있었다. 몰려오는 경비병들은 이제 그들의 무기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해 있었다. 순간 숨이 탁 막혀온 제네르는 그들 경비병들과, 아메스를 한번씩 돌아보았다.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부릅뜬 제네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아메스의 턱을 확 움켜잡으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메스......너.....황후가 되고 싶냐?......아니면......”

제네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깨달은 아메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턱을 따닥거리며 떨던 아메스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조금 머리를 디밀고 있는 작은 소나무 분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를 악문 제네르는 왼손으로 아메스의 눈을 덥석 가리며 오른손으로는 시미터를 높이 치켜들어 힘껏 내리찍었다.

“아악!”

제네르의 칼에 손목이 잘려나간 아메스가 눈물을 흩뿌리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왼팔을 붙들고 울부짖는 아메스의 허리를 거칠게 나꿔챈 제네르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쪽문을 힘껏 걷어차 열고는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한 사람이 몸을 비틀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 크기의 자그만 문을 빠져나온 제네르는 안에 있는 아메스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밖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손, 손!”

고통에 겨운 아메스가 고개를 저으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붉은 피가 잘린 손목으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안 죽어! 걱정 마!”

아메스를 질질 끌고 기어나온 제네르는 대로를 휙 돌아보았다. 여하간에, 이 둘은 슈트란 종가를 빠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는 초원 중간을 꿰뚫고 지나가는 넓고 거대한 주작대로와 그를 따라 펼쳐진 휘황한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메스를 일으켜 세운 제네르는 품속에서 작은 호출기를 뽑아들었다. 주인의 이 고유한 호출신호가 동문 마구간에 매여있는 자신의 말 아타르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