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5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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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크에서 하지즈 장군이 전투를 막 시작했을 그 시각, 이곳 슈카른 계곡에서도 양측 주력군들이 긴장된 탐색전을 시작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즈 장군이 나지크의 적 본진 부근에서 적 경기병대 슬레이프니르와 조우했다고 합니다.”
부장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인 총사령관 샤드니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남-서 연합군 주공부대 전체에 큰 소리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나지크에서 카렐 녀석과 하지즈 장군이 한판 붙었으니 이곳에서는 페로 녀석과 자신이 또 한판 붙을 차례였다.
전방에 산개한 3천 5백여 남부 경기병들이 전위대로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단단한 밀집대형을 이룬 무려 5만의 남부 중장보병이 느리지만 강력한 추진력을 과시하며 계곡에 한 발 한 발 접근해 들어갔다.
“녀석들 본진 뒤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남쪽과 북쪽은 약간의 경사가 있는 언덕입니다. 적 주력인 기병의 기동에는 큰 무리가 없는 경사입니다만 보병들이 장거리를 우회기동하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진격해 들어갈 동쪽은 완만한 경사로입니다.”
“지키기도 좋고, 전멸하기도 딱 좋은 지형이군.”
샤드니의 냉소 섞인 한마디에 먼저 말을 꺼낸 헤즈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선봉에 전위대로 나가있던 경기병대 쪽에서 연락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적 선봉으로 탈라스 궁기병 5천기입니다.”
“휴, 그 망할 거인괴물 놈이 또 있겠군.”
헤즈가 휘파람을 불며 방패를 쥔 왼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사르키스 경.”
샤드니가 양쪽 산악을 따라 이동해오고 있는 서부 보병대장 사르키스를 불러냈다.
“예!”
“계획대로 실시한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르키스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휘하의 8천여 정예 장갑보병들을 급히 불러냈다.
남부의 중갑주에 맞먹는 강력한 방호력을 제공하는 특수한 갑주와 양손검, 위력적인 할버드로 무장한 이들은 모두 10년 이상의 실전경험을 지닌 정예병들로, 비교적 느슨한 대형으로 전투를 치르는 경보병 위주의 서부 보병대에서 뼈대를 맡고있는 녀석들이었다. 무려 8천이나 되는 이 병력에 스캐너를 피할 수 있는 비싼 방호복을 모두 입혀놓은 것도 ‘엘리트군과 비 엘리트군의 확실한 구분’을 중시하는 돈 많은 서부제후군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남부의 헤즈 사령관이 묘한 부러움인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격력과 기동성까지 겸비한 이들은 현재로서는 근위대만 제외한다면 제국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보병이었지만 그 까다로운 자격요건과 비싼 무장 때문에 서부를 다 통틀어도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사르키스는 이들 8천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본대와는 떨어져 어딘가로 급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적 전위대인 궁기병대와 아군 경기병대가 각각 사정권에 접근해갑니다. 어떡할까요?”
히르직스의 질문에 샤드니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장보병들 접근할 동안 시간 벌라고 해. 그거 시킬려고 앞에 내놓은 것 아니었나?”
케세크가 큭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헤즈 때와 마찬가지로 샤드니 역시 경기병대를 ‘소모품’ 정도로 그다지 중요치 않게 취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소속 지휘관이 무려 둘이나 적에게 투항해버린 데 대한 감정 섞인 응징이던가.
잠시 후, 경기병단장 루코프 플라칼의 다급한 보고와 함께 양쪽 궁기병들이 날리는 수천발의 투창이 이곳 지휘부의 눈에 들어왔다.
“볼만하군.”
케세크가 멀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병과 적 궁기병대와의 싸움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1천 명의 남부 궁기병들이 날리는 투창공격과 탈라스 궁기병 5천이 날리는 공격이 공중에서 교차하며 꽤 볼만한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양쪽 모두 빠르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기병들간의 싸움인지라 정작 별다른 희생자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경기병들 수준은 동부와 남부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싸우는 스타일도 비슷하고?”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던 샤드니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말했다. 함께 있던 헤즈 경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우리 경기병들도 동부 놈이 동부 방식으로 길러낸 것이니까요. 배신자긴 하지만 능력하나는 정말 쓸만한 놈이었죠.”
샤드니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서부제후군에는 사실 저나마 전력을 지닌 경기병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남부마저 경기병을 키운다면, 그로서도 대응책을 미리 생각하야 할 상황이었다.
남부 경기병들이 탈라스 궁기병들과 어울려 어지럽게 싸우는 동안 남부 중장보병들과 기사단들은 서서히 양쪽의 간격을 좁혀가고 있었다. 앞서 적들의 원거리공격을 모두 받아내고 있는 경기병들 덕에 적 궁기병들의 매서운 공격을 전혀 받지 않은 진격해 들어가면서 남부 중장보병대의 사기 역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적 유목민 경기병 1만 3천기가 전방에서 접근해옵니다. 적 보병 3만은 후방대기중이고 그 뒤에 예비대로 보이는 보병대가 1만 정도 있습니다. 중장기병 5천과 정규경기병은 7천은 양익에 대기중입니다.”
“꽤 수세적인걸.”
샤드니가 지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무려 2만에 가깝게 늘어난 동부 유목민 경기병대가 탈라스 궁기병대와 교전중인 남부 경기병대 3천기를 향해 하늘을 빽빽하게 덮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투창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5천명을 상대하며 속도 하나로 버티어온 경기병들이지만 저 정도의 살인적인 밀도로 날아오는 투창 공격에는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다. 놀란 남부 경기병대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생각 외로 꽤 많은 기병들이 투창에 명중하며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샤드니의 귀에 경기병단장 루코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 퇴각을 명해 주십시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3분만 더 버텨라. 보병대가 접근하고 있으니.”
샤드니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낙마한 경기병 4백여기 중 그럭저럭 상태가 좋은 녀석들은 자기 말을 찾아 다시 뛰어오르고 있었지만 그럴 형편이 못되는 대다수는 바닥에서 거친 신음을 토하며 아군 보병대가 도착하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또 한번 공중을 날아오른 일제사격에 경기병들은 훈련받은 대로 사방으로 확 흩어졌지만 그 어마어마한 물량공세 앞에서 그 역시 별 효과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제발, 재고해주십시오! 3분이면 저희부대 절반은 죽어나갑니다! 아니면 기사단만이라도 조금 앞서 보내주시면 적들이 알아서 도주할겁니다!”
루코프의 애원소리에 대뜸 얼굴을 찡그리며 그와의 통신을 끊어버린 샤드니는 히르직스의 조금 뚱한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경기병은 장기적으로 효용이 큰 부대입니다. 쉽게 길러낼 수 있는 부대도 아니고.....소모품으로 쓰기는......”
“내 다음에 고려해보지.”
중장보병대 우익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진격하던 히르직스는 자신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리는 사령관 샤드니의 태도에 대뜸 이를 드러냈다. 플라칼 가에서 경기병의 가치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지휘관 중 하나인 그에게 지금 샤드니의 결정은 무언가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눈을 부릅뜬 히르직스는 갑자기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망할 서부 놈, 경기병대 씨를 말릴 참이군.”
히르직스가 앞으로 나서면서 1기사단 전체가 갑자기 속도를 붙이며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인가!”
아니나다를까 그 기생오래비 사령관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히르직스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익 전방에 적 중장기병대 전위대가 보이고 있습니다. 1기사단과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물론 적 중장기병 전위대의 존재는 히르직스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4천 5백여 1기사단이 일제히 속도를 붙이며 앞으로 치고 나가자 루코프의 경기병대를 몰아붙이던 2만여 유목민 경기병대의 공격이 순간 주춤 해졌다. 하지만 그사이 거의 천 명 가까운 병력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경기병대는 거의 붕괴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잠시 시간을 벌은 루코프는 신음하는 부상병들을 급히 추스르며 한편으로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다.
동부 유목민 경기병대를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위협적으로 달려나가던 히르직스는 다시 속도를 늦추며 샤드니에게 태연하게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오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히르직스의 속셈을 빤히 아는 샤드니였지만 그가 그다지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니었고 저 정도의 사령관 재량권도 인정치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기병들이 시간을 벌어 주면서 남부 중장보병대는 그 사이 경기병대에 꽤 근접해 있었다. 히르직스의 기지 덕에 가까스로 살 길을 찾은 루코프의 남부 경기병들이 허둥지둥 중장보병대 후방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2만여 유목민들의 매서운 투창공격이 이제 중장보병대의 머리 위에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부연합군에는 악몽과도 같은, 저 차돌같이 강력한 남부 중장보병대와 동부연합군이 다시 충돌할 시간이었다.
“투창공격 밀도를 최대로 높여라! 중장보병들에겐 넓은 면적에 뿌려야 소용없다! 선두 5열까지를 목표 삼아서 벌집을 만들어라!”
유목민 기병대 지휘를 맡은 페로가 사력을 다해 외쳤다. 이번의 동부 부대배치는 적 기병대를 거의 궤멸의 지경까지 밀어붙이고 베아트릭스를 사로잡았던 루사의 결전 2차 전투 때와 많이 비슷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의 전투는 그때와 같이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현상유지에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이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판은 나지크 산악에서 벌어지고 있을 조공부대끼리의 전투가 얼마나 빨리 결판나줄지에 따라 결정될 일이었다.
그 손녀와 함께 투창공격의 최고명수인 카이두 경이 최일선에 직접 나서서 5천명씩 교대로 돌아가며 쉴 틈 없이 쏟아 붓는 투창공격의 템포를 조절하면서 적 중장보병대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바위처럼 단단한 저 망할 남부 중장보병대의 대오는 쉽사리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이번 전쟁을 통틀어보아도 저 중장보병대를 완전히 붕괴시켜본 일은 놀랍게도 단 한번도 없었다. 천하의 카렐이 직접 선두에 나섰던 루사의 1차 전투 때와, 북부용병대가 선봉을 이루어 공격했던 2차 전투 때 부분적으로 조금 무너뜨렸던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저들의 놀라운 견고함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물량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적들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방패로 촘촘하게 전방과 머리 위, 양옆을 감싼 저들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족족 그 위치를 매우며 동부 본진이 있는 슈카른 계곡 꼭대기를 향해 천천히 진격해오고 있었다.
“토로 경! 진격하게!”
“예!”
페로의 명령에 동부보병대 양익에서 정규군기병대를 이끌고 대기중이던 토로 경이 1만5천기의 기병대에게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7천여 경기병과 5천여 중장기병, 3천여 유목민 중기병으로 이루어진 연합기병대는 적 보병대의 양익을 이루고 진격해오고 있는 히르직스의 남부 중장기병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부 놈들은 어딨는 거야? 서부 보병대가 있을 텐데!”
눈앞에 온통 남부제후군들밖에 보이지 않자 저으기 걱정이 된 페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중장기병대 후미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2만이 조금 넘는 것 같습니다!”
“나지크는 서부가 주축이고 여기는 남부가 주축인 건가!”
페로가 말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토로 경! 적 기사단 후미에 서부 경보병들이 위치해있다! 근접전이 벌어지면 녀석들이 측면을 돌아 협공할 것이 확실하니 놈들에게 측면을 쉽게 내주면 안된다! 잠시 후에 궁기병대를 보내주겠다!”
“알겠습니다!”
토로 경이 그다운 힘있는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카이두 경! 우리 보병과 적 보병이 가까워지면 유목민 경기병은 보병대와 연합작전을 펼칠 것인즉, 궁기병대는 2천5백기씩 양 측면으로 이동해서 우리 기병대를 공격하는 서부 경보병을 견제하도록 해라!”
“예!”
여러 번의 전투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경륜이 늘은 페로는 미리 앞서 모든 상황을 머릿속으로 따져놓고 있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장기전으로 몰고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이제 카렐이 나지크의 전투를 빨리 끝내고 이곳으로 달려와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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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 회의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편이 끝나는대로 그림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