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97화 (296/1,132)

< -- 297 회: Part 15. 밀집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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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성당 십경과정 박사생도로 있던 S-5-9 유평 리쿠 옹주에게 갑자기 오르마즈가 찾아온 건 1차 혼란기가 극에 달해있던 기원 97년 추운 겨울날의 일이었다.

5척 2촌이나 조금 넘음직한 자그만 키에 검은 곱슬머리, 고집이 흘러내릴 듯한 굳게 다문 입술과 얼굴 전체가 너덜너덜해졌을 정도로 깊이 남은 무수한 흉터, 한 쪽밖에 남아있지 않은 눈과 귀가 묘한 인상을 주고있는 40세의 이 야무진 옹주는 뜬금 없이 자신을 찾아온 이 충직한 신하의 굳은 표정에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TSG 지도자이며 제국의 창업자였고, 사실상 첫 황제였던 큰형 샤미르 리쿠가 반전파 쿠데타세력의 손에 살해당한 이후 또다시 벌어진 베흔의 반 쿠데타를 거쳐 제국의 ‘공식적인’ 첫 번째 황제로 등극한 것이 옹주의 아버지인 세나우스 1세 마시야스 리쿠였다.

하지만 그 장남으로서 일찌감치 후계자수업을 받으면서 명분을 가지고 있던 그 형과는 달리 베흔의 쿠데타세력에 의해 거의 억지로 황제의 관을 쓰게 된 14번째 아들 세나우스 1세가 제대로 된 황제로 대접받았을 턱이 없었다. 성전 이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고 은거중이던 오르마즈까지 어렵게 불러올려 나름대로 친위세력을 키워보려 애썼지만 이 무능한 황제에게 세상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유의 잔혹함과 장악력, 놀라운 두뇌로 콜로니 전체를 한 손에 쥐고 흔들던 강력한 독재자 샤미르 리쿠의 죽음은 그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지방세력에게는 이제 기지개를 켤 시기가 되었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이은 발호는 19살이었던 어린 황제 세나우스 1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황제가 손에 쥐고있던 ‘힘’이라고는 천 명이 조금 넘는 X들과, 샤미르 리쿠 사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이젠 빈 껍데기만 남아버린 옛 TSG 민병대조직---물론 황실에서는 그들에게 ‘황실 근위대’라는 제법 근사한 이름으로 불러주고는 있었지만--- 1만여 명, 그리고 이 무능한 황제를 힘겹게 지켜내고 있던 비서실장 오르마즈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있으나마나한 황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지방세력간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수도 있었다.

결국 제국을 제대로 통치해보겠다는 야심조차 잃어버린 황제는 자신이 손에 가진 것이 47 Ursa Major B라는---사람들이 흔히 ‘황제령’이라 부르는---, 그저 그런 행성계 하나 뿐이라는 데 도리어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어릿광대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던 저 탐욕스런 호족들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황제령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잘 개발되어있는 다른 지역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별 볼일 없는 황궁 하나를 빼면 거의 황무지에 가까운 이곳은 지금껏 그들의 관심사 밖에 철저하게 팽개쳐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40여 년간 계속된 지긋지긋한 내전기간동안 황제는 ‘황제령’이라는 이 보통 행성의 행정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끝도 보이지 않을 듯 하던 내전이 결과물을 조금씩이나마 드러내기 시작한 건 사실 지금부터 5년도 채 안될,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동안의 일이었다.

농업 이주민들을 기반으로 비엔에서 세력을 키운 델루지 가문 연합세력이 자칭 ‘남부제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이 ‘힘의 질서’가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전주곡이었다. 뒤이어 코윈 광공업지대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키워온 카파키 가문 연합세력 역시 ‘북부제후’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콜로니 전체가 잠시 2자 대결로 굳어져 가는 듯 싶어 보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1년 전 아켐을 기반으로 한 재향 유학자세력들이 ‘서부제후’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상황이 다시 복잡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농담 삼아 ‘이제 동쪽만 남았군’ 하며 떠들던 말 역시 요동의 유목계 호족들이 ‘동부제후’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현실로 드러난 건 바로 3달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콜로니의 상황은 그 누구도 한 치 눈앞을 예상할 수 없을 만큼의 혼란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테나스 황후폐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옹주마마.”

옹주는 자신에게 고개를 깍듯하게 숙여 보이는 이 큰 키의 전사가 바로 그 ‘북부제후’ 카파키 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 5만 대군을 앞세운 북부 카파키 가가 결국 이곳 ‘황제령’까지 쳐들어와 황궁을 점령해버렸다는 것도 물론이었다.

콜로니에서도 가장 많은 인종과, 가장 많은 종교와 사상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얼핏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자칭 ‘북부’지역은 그 다양성 자체를 힘의 근원으로 활용하는 특이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 카파키 가문의 분열상 또한 우스울 지경이어서, 카파키 가문의 종장 빌루이 카파키의 둘째아들 투르케스크는 그 아버지와 형이 황궁을 공격하는 ‘반역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이 와중에도 자신은 이곳 남극성당에서 ‘충효’ 운운하며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투르케스크의 장녀인 ‘개국공신’ 오르마즈는 이 유명무실한 황실에 충성을 바치면서 아버지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아버님은 어찌되셨죠? 오르마즈?”

옹주의 질문에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무얼 뜻하는지를 잘 아는 옹주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잠시 망설이던 오르마즈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근위대장 베흔이 X 5명을 데리고 황궁에 잠입했습니다. 그곳을 뒤지던 중에......22층 계단에서 폐하를 발견했습니다.”

입술을 꽉 깨문 옹주는 흐린 하늘을 올려보며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 분이.......왜 황제답지 못하게 추하게......계단 같은 곳에서......돌아가신 거죠?”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연 옹주에게서는 황족다운 기개인지, 한때 자신과 친어머니를 버렸던 아버지에 대한 매정함인지 분간 못할 무언가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오르마즈가 힘없이 대답했다.

“황궁 사환 복장으로 갈아입고 몰래 달아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계단실에 무장한 다른 사환의 시체도 있다는 것으로 보아서 적들 역시 폐하인지 미처 모르고 시해한 것 같습니다.”

“망신스럽게.......자결하실 기개도 없으셨다니.”

옹주가 이를 악물었다. 친아버지의 부고를 받고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그의 태도는 오르마즈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옹주의 아버지 마시야스가 당시 TSG 지도자였고 형이었던 샤미르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평 옹주의 어머니인 두 번째 부인 유레트 나이킨을 내친 건 ‘잔소리 많은 천출(賤出)의 여인’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18살밖에 되지 않던 그의 아버지에게서 남편다운 책임감을 바랄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때 이미 4명이나 되는 부인을 거느리고 있던 그는 그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옹주의 위로도 3명이나 되는 배다른 오빠들을 낳아놓은 후였다.

아버지 말마따나, 그의 어머니 유레트는 이후 황제가 될 젊은이, 아니 소년의 눈에 띄어 운 좋게 그의 둘째 부인이 되기는 했지만 길거리 창녀 출신에 별다르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말 그대로 밑바닥 여인이었다.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어처구니없이 남편에게서 쫓겨난 유레트는 오르마즈와 샤미르 리쿠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그를 낳았고, 이 작고 똑똑한 아이는 그 숙부인 샤미르 리쿠 같은 ‘발현자’는 아니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결단성으로 어릴 때부터 ‘재목’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샤미르 리쿠의 죽음과 아버지의 즉위 이후 그도 오르마즈의 집요한 요구로 S-5-9라는 황족코드와 황제의 서녀인 ‘옹주’라는 칭호를 어찌저찌 부여받기는 했지만 도리어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일 줄은 그 스스로도, 오르마즈도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인 황제의 명을 받고 수베르 개척을 나갔던 3명의 태자들이 그곳 유목민들의 기습공격으로 모두 전사하면서 유평 옹주는 졸지에 황제의 ‘장자’가 되어버렸던 터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겨우 1년 후, 석연치 않은 차량 사고가 벌어지면서 옹주는 어머니 유레트와, 어머니와의 정식 결혼식을 겨우 5일 앞두고있던 자상한 새아버지까지 모두 잃는 참혹한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함께 입은 상처로 옹주 역시 한쪽 눈과 귀를 잃고 처참한 흉터로 얼룩진 얼굴, 그리고 심하게 뒤틀어진 불편한 다리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제가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입니다.”

“오르마즈가 미안할 게 뭐 있겠어요. 무능한 아버지 모시느라 그간 고생만 했는데.”

옹주는 눈꼬리에 조금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그다운 야무진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옹주가 이런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가 자신과 함께 하는 이 순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사고 직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옮겨져 한동안 사경을 헤맸던 옹주는 퇴원 직후부터 지금까지 겉으로는 꽤나 기이한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뒤틀린 다리나, 망가진 얼굴에 대한 복원수술도 모두 거부한 채 흉해진 얼굴과 절룩거리는 다리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거지들과 구걸을 하고 다니다가 발견되기도 했고, 시장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상인들에게 몰매를 맞은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한번은 처형장에서 반나체로 단상에 뛰어올라 소동을 벌이다가 함께 목이 잘릴 뻔 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 한때 옛 경전까지 능수능란하게 해석하던 그는 지금은 아주 기초적인 고대어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고, 심한 말더듬과 바보짓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가 일쑤였다.

그의 이런 갑작스런 바보짓을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뇌손상 혹은 눈앞에서 어머니를 끔찍하게 잃은 충격 때문에 생긴 정신착란으로 짐작한 의사들은 빨리 치료를 받을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옹주 스스로가 ‘병원은 진절머리난다’며 매번 도망다니기가 일쑤였고, 그리고 친척인 황족들 역시 무슨 이유엔지 이런 그를 강제로 병원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한때 남극성당 박사과정 장학생으로까지 있던 옹주는 학교교과도 잠시 중단하고 학교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오르마즈의 도움을 받으며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황후폐하.......아니 태후폐하께서 옹주마마를 찾으십니다.”

입술을 꾹 다문 옹주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그 동안의 기행이 살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황실 그 누구도 이 덜떨어진 옹주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지만 무려 2년 동안의 이런 철저한 연극이 황족이며 활달하고 놀기 좋아하는 개혁파 생도였던 그에게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투쟁이었는지는 평생을 그와 함께 해 온 오르마즈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분이 날 왜 찾죠?”

오르마즈의 눈을 올려본 옹주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후훗,”

옹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그득한 흉터의 주름이 더욱 더 깊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보황제가 필요하군요. 태후 손에 놀아날.”

“옹주마마께서는 어쨌든 장자이십니다. 주변에서 참견할 어머니도 없고......다른 첩실의 자녀분들이 제위를 잇는 것보다는 테나스 태후폐하께 유리하죠. 어차피 그분 친자녀들이 다 돌아가셨으니. 그리고......지금 상황이 많이 안좋지 않습니까.”

옹주가 갑자기 다리를 절룩거리며 오르마즈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올려보며 사뭇 간절하게 말했다.

“부탁 있어요, 오르마즈.”

“말씀만 하십시오.”

“날......도와줘요. 내가......‘제국’을 세우고 최초의 황제다운 황제가 될 수 있게.....”

자신을 바라보는 옹주의 한쪽밖에 안 남은 검은빛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오르마즈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흉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물론입니다.......당연히 그러셔야죠. 옹주마마.”

오르마즈의 든든한 품에 얼굴을 묻은 옹주는 그간 자신을 사실상 키워주고 보호해온 이 영웅의 존재를 새삼스레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추해진 외모 속의 이 야무진 옹주는 콜로니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발 밑에 두겠다는 굳은 다짐을 스스로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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