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91화 (289/1,132)

< -- 291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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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드니 이놈이 아주 초강수로 나오는군요.”

플레렌 종가에서 있던 만찬회 소식을 전해들은 제네르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학장을 억류하고, 최고제후까지 찬탈하고, 약혼사실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전하께 거액의 현상금까지.....이제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다 식은 찻물을 들이키며 제네르는 사막의 한줄기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는 천창을 잠시 올려보았다. 다시 고개를 떨군 제네르는 카렐의 손가락에 있는 페리도트 반지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응?”

“전하와 아메스, 솔과도 약간은 근친이 되겠군요? 라바니 경이 전하의 조부가 되니......6촌간이 되는 셈인가요?”

“그래, 그렇게 되겠군.....마리안 부인이 내 당고모였고 말이야......세상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군. 내 할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겨누어야 한다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사실을 밝혀야 할지 말아야할지......”

한숨을 내쉰 카렐이 제네르와 하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로 며칠 전 해버린 ‘장태자 선언’이 결국 자신의 발목까지 잡아버린 셈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유전자은행에 있는 두 사람의 세포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상 계속 장태자 행세를 해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서부의 협력을 얻어낸다는 건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핏줄을 밝혀야 하는 것을 뜻했다.

“딜레마가 되어버리는군요.”

제네르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주페 태자저하의 피를 물려받은 ‘군’에 불과하시다 해도 제위승계권을 주장하실 명분은 충분합니다. 다섯 공주들이 승계권이 없고, 로노 장태자전하 2세는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 전하께서 S-7세대 중 계승서열 1위가 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샤드니 녀석도 전하의 친부를 알면서도 감히 못 터뜨리고 있는 거죠. 지난번 코리온을 지지했던 명분과 얽혀 자승자박이 되어버리니 말이죠.”

“어차피 말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결국은 싸움에서 이기는 놈의 논리가 승리하게 될 테니.”

카렐의 한마디에 제네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제는 동부입니다. 전하께서 장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합의를 깨고 이반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샤자한 공은 주페 태자저하를 원수 보듯 했던 인물입니다. 4차 혼란기 당시에도 서부와 권력을 나눠먹지 않으려다가 제 목에 밧줄을 건 인물입니다.”

“알고 있네.”

카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전하께서 사실을 밝히시면 서부의 분열을 도모할 수 있으시겠지만 동시에 전하를 지원하는 동부까지도 함께 분열될 겁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사실을 밝히는 건 저희와 서부 양쪽이 함께 동반자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고개를 끄덕거리는 카렐에게 이번에는 하심이 말을 이었다.

“학장님께서 이 사실을 전하와만 은밀히 논의하려 하셨던 것 역시 그 때문이셨을 겁니다. 방금 제네르가 말한 사항들을 미리 꿰뚫고 계셨을 테니 아마도 학장님께서 유학자들을 동원해 전하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한 다리 건너뛴 간접적 방식을 택하셨을 겁니다. 동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제후들은 일단은 중립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말씀입니다.”

“주페 태자.....아니 아버님의 기습진공계획같이 말이군.”

“그런 셈이죠.”

하심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솔직히 그 정도도 샤자한 공이 받아들일지 의심스러운걸.”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일단 서부의 변수가 너무 커져버렸으니까......당장은 서부 상황을 지켜보세. 샤드니 이놈이 어떻게 나오는지......리쿠 학장은 구할 수 있는 건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여전히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는 하심의 으스러진 왼쪽 다리와 화상패치가 붙어있는 손과 얼굴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몸은 좀 어떻소?”

“학장님께서 그리되셨는데......제 몸이 편하고 말고가 문제겠습니까......”

하심의 크고 검은 눈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화상으로 드레싱을 잔뜩 붙인 하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들겨주며 카렐이 말했다.

“당장 학교에는 돌아가기 힘들게 되었으니 일단 남극성당에 가 계시오. 내 어머님에게 말씀드려 임시로 있을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하심 정도면 그쪽 원리주의 교수들에게도 환영받을 것이요.”

카렐의 제안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어보이던 하심은 제네르와 카렐을 한번씩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무리한.......부탁이라는 걸 잘 알지만......”

“뭐 다른 거 필요한 거라도 있으면 얘기하시오.”

“학장님을 저 위험에서 꺼내드리는 데 미약하나마 제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주페 태자저하의 유지를 받들고 싶사오니......그때까지 전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게만 해 주시면......”

하심의 말에 카렐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카렐이 하심을 받아들인다면 전사단 최초의 원리주의 출신 인물이 되는 셈이었다. 코리온의 최측근이기도 했던 하심이 제네르 못지 않게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은---물론 몇 가지 ‘세속적인’ 분야에서 기가 막힐 만큼 순진하다는 것을 빼고는---카렐 역시도 잘 알고있었다.

하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씰룩거리던 제네르가 그에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리쿠 학장이 주페 태자의 뜻을 저버리고 전하와 적이 되는 길을 택한다면 어떡할 거지? 네 안전을 보장할 테니 돌아오라고 한다면? 샤드니 경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학장님께선 절대 그러시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부릅뜬 하심이 카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을 조금 찡그린 제네르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주페 태자는 200년이 넘게 옛날에 죽은 사람이고, 샤드니 경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인데, 게다가 자길 황제로 만들어준다고 하는데 누가 더 소중하겠냐고? 솔직히 나라도 흔들릴걸?”

“학장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당연히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행여 그것이 주페 태자저하의 뜻을 거스르고 전하께 해가 되는 것이라면 제가 죄를 대신 씻는 뜻에서 스스로 자결하겠습니다.”

원리주의자다운 그의 극단적인 대답에 카렐이 기겁을 하고 말았다. 순간 할말을 잃어버린 제네르도 잠시 멍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짐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온 하심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는 혈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제 뜻입니다.”

그가 내민 건 ‘義之與比’라는 네 글자였다. 하심이 피로 써서 바친 그 글을 바라보던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라 했으니 군자는 세상 일에 관하여서는 가까이 할 것도 없고 멀리 할 것도 없으며 오로지 의로움에 따를 뿐이다......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글이군.”

“그러하옵니다.”

다시 머리를 조아린 하심의 손가락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심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렐은 피가 흐르는 그의 손가락을 갑자기 꼭 쥐어주었다.

“나머지 피는 나를 위해 아껴두게나.”

학장실에 딸린 작은 침실에 말없이 앉아있던 코리온은 한구석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플레렌 가 가디언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라마단도 거의 끝나가는 지금,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실 저녁 산책을 틈타 시도했던 세 번째의 탈출도 거의 성공 직전에 귀신같이 알아 쫓아온 가디언 때문에 실패하고 난 후였다. 지금껏 제대로 만나 본 가디언이라고는 카렐 한 명이 고작이었던 그로서는 1스타디아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빛도 거의 없는 한밤중에 생도들의 행렬에 소리없이 파묻혔던 자신을 어떻게 그렇게 교묘하게 잡아냈는지 이해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때는 그의 천재적인 두뇌도 저들의 빠른 발과 놀라운 감각기만큼의 가치가 못되는 상황이었다.

그 똑똑한 머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실패해버린 지난 두 번의 탈출시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학교 정문의 코앞에서 저 가디언에게 붙들리면서 지금까지 거의 한 시간동안 길길이 날뛰는 샤드니의 모습을 억지로 보아야 했던 터였다.

“휴우......”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코리온은 붕대를 감은 목과 왼쪽 손목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탈출할 방법조차 막혀버린 그에게 이곳을 나가는 유일한 길은 죽어 관에 담기는 것 뿐이었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5일 가까이를 식음도 전폐한 채 누워있던 그에게는 스스로의 동맥을 단번에 끊을 수 있을 정도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애썼음에도, 욕탕에서 몰래 벌였던 그의 자살시도 역시 모두 실패해버린 탈출처럼 10개가 넘는 무수한 칼자국만을 목과 손목에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코리온은 이곳 ‘사단의 탑’ 주변에 200명이 넘는 플레렌 가 정예병력이 매복한 채 카렐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행여 카렐이 이곳에 자신을 구하러 들어온다면 그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가디언에게서 시선을 돌린 코리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디언이라면 침실 밖에서도 충분히 나를 감시할 수 있을 테니 자리를 비켜주겠나? 가디언과 함께 있는 건 습관이 되지 않아 잠을 잘 수가 없다.”

말없이 뒤로 돌아선 가디언은 코리온의 침실 창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곳 학장실의 운치있던 창호지 창들 밖으로 단단한 고정식강화유리창이 설치된 것도 오늘 저녁의 일이었다.

사실 더 소란을 떨자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샤드니가 일단 이 정도로 그만둔 건 바로 내일이면, 라마단의 마지막날인 내일이면 자신을 데리고 탈라스로 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탈라스의 연합군 병영에 자신을 가두어 둘 숙소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말도 들었던 터였다.

“침입자라도 있으면 부르십시오.”

맥빠진 표정의 코리온은 단단한 창을 바라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디언이 자리를 비우자 창가로 천천히 다가간 코리온은 품안에 숨겨두었던 주페 태자의 그 마지막 편지를 조용히 펼쳐보았다. 그 내용을 몇 번이나 읽어내려가던 코리온은 결국 편지를 든 손을 힘없이 떨구며 창에 이마를 기댄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긴 갈색 속눈썹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코리온이 창틀을 움켜쥐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 도대체 뭡니까......”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은 코리온은 벽에 계속 머리를 짓쪼아댔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뺨을 지나 입술로 흘러들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조차 없었다.

창 밑에 웅크린 채 잠들었던 코리온이 눈을 뜬 건 자정이 한참 넘어간 늦은 시각이었다. 문득 거울을 바라본 코리온은 자신의 얼굴에 번져있는 핏자국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코리온은 피를 닦을 거즈를 찾으려 서랍을 뒤적거렸다. 방안을 뒤적거리던 코리온은 문을 열고 학장실로 나섰다. 탁자서랍까지 모두 뒤진 코리온은 샤드니가 자신의 방에서 의료함을 비롯한 ‘위험하게 쓰일 수 있는 물건들’을 모두 치워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서려던 코리온은 학장실 서가 중간에서 꼼지락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가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라스.”

갑자기 나타난 코리온의 물음에 깜짝 놀란 라스가 허둥지둥 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시각에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다.”

“그, 그게......”

바닥에 엎드린 라스가 말을 더듬거리며 학장실을 지키고있는 무서운 가디언들을 한번씩 바라보았다.

“빨리!”

코리온의 호통에 라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라스의 자그만 손에는 누군가 쓰다 버린 듯한 낡은 펜과 코리온이 쓰고 버렸던 종이 한 장이 쥐여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 속에는 자그만 책 한권이 안겨있었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전 그냥......”

“들고있는 걸 빨리 내놓지 못할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건들을 내민 라스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가 내민 종이와 책, 필기구를 받아든 코리온은 그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쓰다버린 종이에 엉터리로 ‘그려진’ 글자들은 틀림없이 고대어였다. 그리고 라스가 베껴 그리고 있던 건 이 학교 박사과정생들이 교재로 사용하는 현대유학 논리서 중 한 권이었다.

“공용어 쓰는 것도 서툰 네놈이 이것들로 도대체 뭐 하고있던 거냐?”

겁에 질린 라스가 눈물을 닦으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을 토해냈다.

“소인......주인님 말씀하시는 것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천하의 까막눈이라서......그냥.......학자님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도 알아듣고 싶고......주인님께서 지으신 책이 어떤 건지도 읽어보고 싶었고......”

라스의 너무나 황당한 생각에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코리온은 혀만 차고 있었을 뿐이었다.

“네놈이 내 책을 읽고싶다고? 그래서, 이 논리서를 베끼고 있던 거냐?”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네 감히 노예 주제에......”

성난 표정을 지은 코리온은 라스가 훔쳐내 보고있던 그 책을 도로 서가에 꽂아넣었다.

“저놈이......”

침실 쪽으로 돌아섰던 코리온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바닥에 팽개쳐버린 펜과 종이를 얼싸안은 채 라스가 여전히 울고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잠시 망설이던 코리온은 다시 서가로 돌아가더니 짐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채찍질당할 것이라 생각한 라스가 울음을 애써 참으며 바닥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매질만은......제발, 주인님,”

얼굴을 찡그린 채 서가를 뒤지던 코리온은 한쪽의 상자 안에서 눅은내가 풀풀 풍기는 오래된 책 한 권을 끄집어냈다.

“기초적인 글자라도 몇 글자 알면 내 일시키기도 편해지기는 하겠다. 어린아이 교재니 네놈도 볼만할 거다. 한달 이내로 다 외우도록 해라.”

“예에?”

놀란 마음에 생각 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라스는 하마터면 주인의 얼굴을 올려보면 안된다는 철칙을 어기고 코리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뻔 하고 말았다.

“주인님......”

책을 건네준 코리온은 아무 말 없이 뒤로 휙 돌아섰다. 평소 쌀쌀맞기만 하던 이 주인에게서 두 손으로 책을 받아든 라스는 지팡이를 짚은 채 절룩거리며 돌아가는 코리온의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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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면 이 파트도 끝이군요. ^^;;;

요즘 코멘이 줄어 의기소침.......추천도 더불어 잊지마시고.....ㅠ.ㅠ

<조회수부터 딸려서 그런가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판타지란 추천순위에서도 계속

밀리는군요.....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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