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78화 (277/1,132)

< -- 278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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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 첫날인 3월 1일 행해진 ‘반역재판’ 석상에 주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황제의 앞에 끌려나온 로노 장태자와 타니토 태자는 모든 진술이 금지당한 채 근위대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증거에 대해 예, 아니오의 두 가지 대답 중 하나만을 강요당했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궐석으로 진행된 코리온에 대한 재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이젠 황제가 된 남편 오넬론과 함께 재판장석에 앉아있던 세네피스 황후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타난 언니 오르마즈의 얼굴을 구경꾼 무리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벽에 기대 선 채 무뚝뚝한 얼굴로 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오르마즈는 술을 제대로 걸쳤는지 얼굴이 조금 발그스레해져 있었다. 주페 태자와 손잡고 가문의 종권을 탈취하려 했던 그는 아버지 투르케스크 공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바로 어제 사령관직에서도 파면당하고 난 후였다.

그리고 청중석 한쪽에는 두 손을 모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레곤 대공주와 샤드니 역시 섞여있었다. 이 망할 재판이 이미 다 내려놓은 결론을 가지고 벌이는 그럴듯한 연극에 불과하다는 건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는 노릇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이 상황에서 ‘혹시나’ 하는 그들의 바램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증거를 종합하건대, 로노 클라투스 리쿠, 타니토 세닉 리쿠, 코리온 세닉 리쿠, 그리고 그 추종자 105명에 대하여 사형을 언도함이 타당하다 판단되옵니다.”

“인정하오.”

수사관의 보고에 세나우스 3세 황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 간단한 한마디로 이제 이들과, 이들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구......”

아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에 남편의 품에 안겨 비명을 지르던 레곤 대공주가 결국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쳐 실려나가고 있었고, 샤드니 역시도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추종자 105명에 대해서는 참수형을 언도함이 타당할 것이나, 수괴인 이 3명은 특히 죄질이 흉악하니 황궁 앞 광장에서 거대한 나무판에 못박아 죽이는 목책형을 언도하심이 당연할 것입니다.”

‘목책형’이라는 끔찍한 구형에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키의 3배 정도에 달하는 거대한 목판에 산 사람 몸에 말뚝을 박아 세우는 그 끔찍한 형벌은 샤미르 리쿠의 독재시절 이후로는 단 한번도 시행된 일이 없는, 가장 잔혹한 사형법이었다.

“이런 썅! 누가 이러랬어! 누가 이러랬냐고 내가 다......”

언성을 높이며 난동을 부리려던 샤드니는 그 자리에서 대기중이던 근위대 가디언의 손에 입마개가 채워지며 질질 끌려나가고 말았다.

“자알들 한다.”

오르마즈가 갑자기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들고있던 독한 리커를 또다시 벌컥 들이켰다. 신성한 재판석상에서, 그것도 1년 중 가장 금욕해야 할 라마단 기간의 백주대낮에 음주는 엔간한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천하의 오르마즈를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한때 태자로 있던 자들에게 책형은 적당치 않으니 그 둘은 참수형으로 감하도록 하라.”

“폐하의 은사가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수사관들이 황제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허,”

이 뻔한 사기극을 바라보며 잔뜩 술에 취한 오르마즈가 또다시 비웃음을 퍼부었다.

“수괴 로노 클라투스 리쿠와 타니토 세닉 리쿠에게는 참수형을 언도하며 태자 주페를 교사하여 반역을 꾀한 코리온 세닉 리쿠에게는 구형대로 목책형을 언도한다! 그리고 종범 105명 역시 전원 참수형에 처한다!”

“웃겨주는군.”

뒤로 휙 돌아선 오르마즈가 비틀거리며 재판정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팔을 붙든 건 다름 아닌 일라드를 비롯한 두 동생들이었다.

“오오, 오랜만이다. 일라드.”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누나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린 일라드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누나를 부축해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어딜 가냐? 어, 엉, 나도 지하 12층에 가는 거냐? 하긴, 뭐, 이미 가 본 데 또 간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근데, 태자들 처형할 때 나도 같이 목 좀 쳐주련? 기왕 언제든 죽을 거라면 나도 단번에 죽고 싶은데.....”

주사를 부리는 오르마즈를 억지로 붙든 일라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149층!”

“149층? 거기에 새 감방이라도 생겼냐? 하기야, 이놈의 황궁이란 데가 몽땅 다 감방이긴 하지. 히히히.”

또다시 술을 들이키려는 오르마즈의 손에서 거칠게 병을 낚아챈 일라드가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세네피스가 누님을 모셔오라 했으니 가서 만나보시죠.”

149층에 도착한 일라드는 황후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취기에 제대로 발도 옮기지 못하는 오르마즈는 두 동생들의 손에 붙들린 채 무언가를 꿍얼꿍얼거리며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누님 모셔왔다. 세네피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황후가 완전히 망가진 오르마즈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의 눈짓을 받은 일라드는 축 늘어진 오르마즈를 황후의 침대에 눕혀놓고는 씩씩대며 물러났다.

“오라버니들은 돌아가도록 하세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침대맡에 걸터앉은 황후는 고주망태가 되어 푹신한 황후 침대 위에 엎드려 흉하게 곯아떨어져 있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헝클어진 오르마즈의 다갈색 머리칼을 조용히 쓸어올리며 세네피스가 중얼거렸다.

“절 그리도 이뻐해 주시더니......언니마저 이제 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건가요?”

오르마즈의 옆에 조심스럽게 몸을 뉘인 세네피스는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혼자 울먹이고 있었다.

“전......외롭다구요.....죽고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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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100층 주기장에서 잔뜩 긴장된 얼굴로 ‘물건’을 기다리던 하심은 카인이 들고 나온 금속제 상자를 보고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내용물 확인해 드릴까요?”

카인이 약간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하심이 마지못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꽤 두꺼워 보이는 금속 상자의 뚜껑을 비틀어 연 카인은 안에 있는 투명한 병을 천천히 들어올려보였다. 병 앞에는 ‘108년~196년  S-6-2  주페 리쿠’ 라는 오래된 라벨이 앞에 붙어 있었고, ‘가문과 이 반역자와는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 라바니 세호 -’라는 글이 함께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 뼘 정도의 변색된 늑골조각이 부패된 살점과 함께 보존액 속에 들어있었다.

“그, 그건가요?”

끔찍한 시체 ‘조각’을 확인한 하심이 내심 몸서리치며 물었다.

“예. 이제 됐죠?”

다시 뚜껑을 닫은 카인이 파랗게 질려 있는 하심의 손에 상자를 내주었다. 상자를 받아든 하심은 허둥지둥 셔틀에 뛰어올랐다.

“빨리 가자.”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하심은 그 소름끼치는 상자를 편지와 유언장이 들어있는 가방 안에 얼른 집어넣었다. 황궁 주기장을 떠난 셔틀은 ㅤㅋㅞㄹ크가 있는 남서쪽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하심은 물론이고 조종사 역시도 이 검은색 셔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다른 셔틀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ㅤㅋㅞㄹ크 서부밀림으로 가면 됩니까?”

“그래.”

안도의 숨을 내쉰 하심은 그 가방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조심해서 몰도록 해. 지금 귀한 물건들이 많이 실려 있으니.”

“알겠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릴 테니 눈이라도 잠깐 붙이시죠.”

조종사가 넉살좋게 대답하며 셔틀의 속도를 붙였다.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잠이 오겠나.”

하심이 옆 좌석에 놓인 가방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발 밑으로 지나고 있는 ㅤㅋㅞㄹ크의 빽빽한 정글을 바라보며 하심은 한 번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던 카렐을 또 한 번 머리에 떠올렸다.

“다 왔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조종사의 목소리에 하심이 문득 밑을 내려다보았다. 십여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이 무성한 왕대나무 숲 한중간에서 보이다 말다 하고 있었다.

“저긴가?”

“주신 주소가 맞다면요.”

인적이 썰렁한 마을 한켠에 셔틀을 세워 둔 하심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어깨에 단단히 짊어지고 땅을 디뎠다. 황제령에서도 제일 외진 ‘촌구석’인 ㅤㅋㅞㄹ크 서부밀림 답게 집들 역시 나무와 잎사귀를 엮어 만든 허름한 ‘비막이’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녀석이 직접 갖다 달라고 할 만하군.”

하심이 내심 혀를 차며 몇 채 되지도 않는 집들 사이를 조심스레 걸었다. 인적이 드문 이 작은 마을 한쪽에서 방금 수확한 듯한 대를 엮어 단을 만들고 있던 원주민 둘이 갑자기 하심에게 다가왔다. 이유없는 불안감이 덜컥 든 하심은 어깨에 멘 가방을 더 꽉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서부 아켐에서 온 하심 예킨터스라고 하는데......여기 붓에 쓸 왕대 세 단을 예약해 놓은 게 있다고.....”

“아아, 그러시군요. 그러시면 저어기 저 집에......”

원주민 여자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며 손가락을 마을 한쪽의 집 한 채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생각없이 시선을 움직이던 하심은 함께 있던 또 한 명의 원주민이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바싹 다가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원주민이 내지른 칼은 본능적으로 몸을 휙 돌린 하심의 가방을 쫙 찢으며 그의 손등을 깊이 베고 지나갔다.

“으, 으악!”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하심은 옷자락을 붙드는 여자의 거친 손을 힘껏 떨궈내고는 셔틀을 향해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원주민들이 소지품을 빼앗으려는 그냥 강도나 도적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썅! 저년 잡아!”

반대쪽에서 왕대를 엮고 있던 다른 두 명까지 하심을 향해 칼을 뽑아들며 셔틀을 향해 도망치는 하심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향을 돌려 숲으로라도 도망치려던 하심은 그쪽에서 몰려드는 또 다른 괴한들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방향을 돌렸다. 거의 십여 명의 놈들이 하심 하나를 향해 사방을 조여오고 있었다. 가방을 품에 꽉 끌어안은 하심은 도망갈 곳도 찾지 못한 채 중간에서 발만 동동 구를 따름이었다.

“뭐, 뭐 하는 놈들이야!”

사방이 포위당한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하심은 등 뒤를 휙 돌아보았다. 대나무와 잎으로 지어진 작은 오두막이 바로 뒤에 있었다. 달아날 곳조차 잃은 하심은 오두막에 무작정 뛰어들어가 나무문과 창을 정신없이 걸어 잠갔다. 집안에는 두세 꾸러미의 대나무 묶음과 보잘것없는 세간살이 약간이 뒹굴고 있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몰려든 괴한들이 문을 들이받으며 거친 고함을 연신 질러댔다.

“썅! 불질러 버려!”

포위된 오두막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하심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놈들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급해진 하심이 얼른 할룩스를 빼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할룩스를 작동시킨 그는 타고 온 셔틀을 제일 먼저 호출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카, 카렐 님?”

급한 나머지 카렐이라도 호출해 보려던 그는 이상한 냄새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우, 욱!”

문 밑으로 무언가 매캐한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코를 싸쥐고 물러난 하심은 창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가다가 무언가에 걸려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으악!”

대나무더미 한쪽에는 원주민 가족인 듯 한 시체 세 구가 놓여있었다. 저 망할 놈들이 이곳을 먼저 급습해 사람을 죽여놓고 자신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확실했다. 문부터 번지기 시작한 불은 이 대나무 오두막을 순식간에 감싸며 맹렬한 기세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가방을 둘러메고 허둥지둥 일어난 하심은 굴러가 떨어진 할룩스를 급히 집어들고 카렐의 코드를 다시 눌렀지만 그 야속한 가디언은 받지도 않고 있었다. 4면의 벽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열기가 몰려 들어오자 하심은 오두막 중앙으로 허둥지둥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벽은 물론이고 지붕에서까지 맹렬히 타들어가는 불길이 뜨겁고 매캐한 연기를 쏟아 내놓았다.

“하, 학......”

숨이 막히면서 눈앞이 아찔해진 하심은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뜨거운 불꽃과 연기는 이미 사방에서 하심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치솟는 연기를 피해 바닥에 엎드린 하심은 목에 걸고 있던 머플러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악!”

어느새 옷에 불이 옮겨붙은 것을 알아챈 하심은 무명포를 벗어던졌지만 이미 그의 바지와 신발도 조금씩 타 들어가고 있었다. 손이 데는 것도 아랑곳없이 불꽃을 죽여보려 버둥대던 하심은 머리 위에서 들려 온 끼익 하는 소리에 얼른 위를 올려 보았다. 마른 잎으로 엮어 얹은 지붕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다리에 불이 붙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려던 하심은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불붙은 지붕에 다리와 한쪽 팔, 그리고 목숨같이 소중하게 안고 있던 가방이 깔리면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가방! 가방!”

으스러진 채 타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팔다리를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하심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 아악!”

고통을 견디다 못한 하심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연기를 잔뜩 들이마신 그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타 죽느니 차라리 연기나 잔뜩 들이마시고 의식을 잃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불타고 있는 집 밖에서 웬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의 판단력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황금색 팔찌를 낀, 덩치 큰 누군가가 문을 때려부수고 안에 들어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하심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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