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74화 (273/1,132)

< -- 274 회: Part 14.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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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 석상에서 카렐과 페로가 바싹 붙어 나누고있는 밀담을 바라보는 다른 두 여자---세네피스 황후와 서부 3제후 사우드 발 부인---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지만 둘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골칫덩이 학장을 꼭 살려둬야 하는거야?”

페로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베흔과는 절대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야.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어.”

“가능할까......”

페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상한 건 샤드니 경하고 하심 예킨터스 교수 사이에 무언가 불화가 있다는 거야. 이유가 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돼.”

“샤드니 녀석이야......학장 밑에서 제후세력을 대표하는 녀석이고, 예킨터스 교수는 원리주의 학자들과의 통로 역할을 하는 녀석인데......학자세력과 제후세력과 내분이라도?”

“뭐,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생각할 문제일지는......아직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거야.”

카렐에게서 다시 떨어진 페로에게 사우드 부인이 슬쩍 가까이 다가오며 빈 찻잔을 채워 주었다.

타르서스 별궁 옥상에 만들어진 정원에는 아침의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조금은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황후폐하께서는 전하와 함께 침소에 드셨다구요?”

사우드 부인이 카렐과 세네피스 황후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내 태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우니 잠자리에서라고 예외겠소.”

따뜻한 양젖을 들이키던 세네피스 황후가 페로와의 친근함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는 사우드 부인에게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부인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끈적한 눈빛이 아니더라도 카렐의 일행 모두 부인과 페로와의 그 묘한 관계를 어느 정도씩은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 페로와 사우드 부인의 각각의 뒷배경을 살펴보면 꽤나 ‘안 어울리는’ 커플이기는 했다. 수명개조 직후세대인 460살의 사우드 부인과 페로 사이에는 무려 300살이라는 엄청난 나이 차가 있었다. 게다가 페로는 사우드 부인의 여동생이며 네페티 부인의 어머니인 마하 부인을 참혹하게 살해한 제수스 자이센과 투모카프 자이센의 직계후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문의 이익 앞에 이런 몇 백년 전의 원한 따위를 따지고들 수준 이하의 종장들은 결코 아니었다. 페로는 저 권력욕강한 여자를 만족시켜줄 힘과, 그의 색욕을 만족시켜줄 매력적이고 강건한 몸이 있었고, 사우드 부인은 서부에서 페로의 권력공백을 메워줄 ‘세력’과, 그의 유별난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미모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사실 네페티 부인과 사우드 부인,---그리고 죽은 마하 부인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을 보면 드러나듯이 발 가는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서부에서도 ‘미녀의 산지’로까지 유명한 가문이었다.

여전히 색기어린 눈빛의 사우드 부인은 이런 곳에 와서 기껏 딸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황후의 답답함을 비웃듯 페로의 검고 매혹적인 눈동자를 올려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사우드 부인은 오랜만에 마주한 조카 네페티 부인 쪽을 갑자기 돌아보았다.

“네페티 조카님 그간 상심이 크신 듯 하더니, 이제 많이 괜찮아지신 듯 합니다?”

“이젠 거의 떨구고 일어나신 듯 하오. 어차피 제가 즉위하면 황비책봉과 함께 최고제후에 복귀할 수 있을 거요.”

카렐의 대답에 네페티 부인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조카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플레렌 가에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사우드 부인 역시 네페티 부인이 최고제후에서 쫓겨나면서 입은 간접적인 손해가 상당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번에 페로의 정실부인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다면 황후의 어머니인 부부인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은 물론이고 황비이며 서부최고제후 네페티의 이모로서의 지위까지, 더할 나위 없는 실속은 다 챙기게 되는 셈이었다.

“얼핏 나약한 듯 싶으나 속이 야무진 사람이니 전하의 배우자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이옵니다. 곁에 가까이 두시고 사랑해주십시오.”

네페티 부인 얘기에 세네피스 황후가 보일 듯 말듯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참, 듣자하니 새 황빈을 물색하고 계신다면서요?”

“태자 몸이 아직 성치 않으니......조금 쉬었다가 월말에 상견례를 가질 참이요.”

세네피스 황후가 즉시 대답했다.

“즐거우시겠군요.”

사우드 부인이 찻잔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곁에 앉은 베아트릭스를 힐끔 바라본 카렐이 황후를 향해 문득 입을 열었다.

“지역안배를 위해......남부 혈통이 섞인 사람이 새 황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카렐의 말에 제네르의 시선 역시 자기도 모르게 베아트릭스를 향하고 있었다.

“남부가문에서 설마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이미 동부 쪽에서 한 명 맞기로 했잖나.”

페로가 중얼거리자 카렐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남-동부 혼혈 없을까?”

“풋, 그런 사람을 찾느니 델루지 가에서 결혼허락 받는 게 더 쉽겠다.”

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개방적이고 잘 놀기로 유명한 북부 사람들은 전통적인 우방지간인 동부는 물론이고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남부나 서부와도 곧잘 혼혈을 두곤 했지만, 동부 민간인 4천만 명이 남부의 손에 무참히 학살당한 2차 혼란기 이후 원수지간이 된 남-동부 사이에는 혼혈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딸의 의도를 눈치챈 세네피스 황후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띠며 옆에 앉은 베아트릭스의 빈 잔에 차를 담아주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베아트릭스에게 쏟아졌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베아트릭스를 멍 하니 바라보던 일행이 갑자기 페로를 선두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황후폐하께서 농담도 다 하시는군요.”

사람들의 비웃음에 자존심이 상한 베아트릭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거칠고 딱딱한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차를 들이키던 세네피스 황후는 베아트릭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카렐의 태도를 그답지 않게 짐짓 못 본 척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후의 눈치부터 제일 먼저 살폈던 베아트릭스는 그의 이 예상못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순간 당혹해하고 있었다. 카렐이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식사들 마치시고 11시까지 별궁 3층의 대강당에서 뵙도록 하죠.”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스가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조금 더 부으며 안에 누워있던 코리온에게 물었다.

“그래, 됐다.”

눈을 지그시 감고있던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으, 응......새 옷은 다려서 장 안에 걸어두었고 말도 산책시켰습니다. 아래쪽 서가 청소는 반쯤 해 둔 상태고요......오후에 마저 다 할 예정입니다. 침대보하고 담요도 방금 싹 갈았구요.”

“잘했다.”

마치 잠든 듯 욕조에 조용히 누워있는 코리온을 힐끔 돌아본 라스의 해맑은 눈에 밝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손에 큰 수건을 든 채 코리온의 목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 웃다 말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꽤 한참동안 욕조 안에 누워있던 코리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좀 일으켜다오.”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린 라스가 코리온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아직 다리가 불편한 코리온을 힘껏 일으켜 세워 주었다. 수건을 쥔 라스는 그의 몸에서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내 주었다.

“오후 4시 정도에 말을 타고 교내를 돌아볼 것이니 그 전에 준비를 해 놓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학장님! 학장님!”

속두루마기를 챙겨 입던 코리온은 학장실 문이 부서지듯 열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하심이 노크도 없이 이렇게 학장실 안에 ‘쳐들어오는’ 일은 코리온으로서도 처음 당해보는 일이었다. 무언가 큰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한 코리온이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내 여기 있네. 무슨 일인가?”

얼굴이 거의 흙빛이 된 하심이 코리온 앞에 달려오며 그의 앞에 납죽 엎드리더니 거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외쳤다.

“주페 태자저하 묘소가......도, 도굴당했습니다!”

하심의 보고에 잠시 멍 한 표정으로 있던 코리온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주페의 묘소가 있던 남극 부근의 야산에는 이미 2백여명의 플레렌 가 치안군 병사들이 사방에 흩어져 혹시모를 도굴범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창백해진 표정으로 하심의 부축을 받으며 ‘봉분이 있던 자리’ 앞에 도착한 코리온은 다리의 힘이 풀리며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게......도대체......어떤 죽일 놈 소행인가!”

코리온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누렇게 말라죽은 떼를 움켜쥐며 울부짖었다. 봉분은 완전히 파헤쳐져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꽤 깊이 묻혀있던 관은 아예 누군가가 통째로 들어내간 흔적이 역력했다. 치안군 장교가 한쪽에 흰 천으로 덮여있는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을 돌보던 관리인 역시 어젯밤에 피살당했습니다. 누군가 치밀하게 계획해서 저지른 범행이 틀림없습니다.“

“학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도착한 샤드니가 바닥에 꿇어앉아 흐느끼는 코리온에게 급히 달려왔다. 거의 이성을 잃은 코리온은 샤드니의 가슴에 안긴 채 계속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샤드니가 치안군 장교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진거야!”

“오늘 새벽 3시 정도로 추정됩니다. 순찰 중이던 치안군 병사들에게 발견되자 대기시켜둔 셔틀을 타고 달아났습니다.”

“가져간 게 무언가!”

“부장품은 모두 그대로 남아있고......유골이 들어있는 관만 가져갔습니다. 부장품까지 가져가려다가 발각되어서 포기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유골만 노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간 코리온은 움푹 패여 있는 구덩이 안의 처참한 모습에 또 한번 통곡을 하고 말았다. 생전에 쓰던 붓과 벼루, 먹 등등의 물건들이 원래 들어있던 상자에서 끄집어내어진 채 흙 속에 파묻혀 뒹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태자저하......모두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던 코리온이 또 한번 탈진해 쓰러지자 그를 급히 부둥켜안은 샤드니는 구덩이 안에 아직 남아있는 물건들을 멍 하니 내려다보았다.

“행여 못된 놈들이 이 유품들도 노릴지 모르니 현장확인이 끝나는 대로 이것들도 거두어 철저하게 보관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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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에 있는 플레렌 가 정보통으로부터 ‘코리온 소식’을 전해들은 샤드니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황궁의 근위대 중앙본부로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었다. 칼에 찔린 옆구리도, 병상을 떨치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그를 붙드는 의사의 만류도 그 분노를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늦은 오후에 접어든 1번 도시의 거리는 아스트라이아 홀에서 열리고 있는 새 황제의 즉위식 소식으로 온통 축제분위기에 빠져있었지만---물론 새 황제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라 보다는 지긋지긋한 혼란기가 끝났다는 기쁨이라는 것이 문제겠지만--- 샤드니에게 그것 따위는 지금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즉위식 때문인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는 황궁 1층 아스트라이아 홀은 거대한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이곳을 찾은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바로 2년 반 전, 세나우스 2세가 죽음을 맞았던 이 웅장한 공간은 이제 그 셋째아들인 오넬론의 즉위식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대단한 장관을 기대하고 찾아왔을 구경꾼들의 표정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천 명의 각지방 제후들로 꽉 차 있어야 할 제후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고 그나마 많지 않은 북부제후들과 중앙귀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가 막히군,”

바깥에서 애써 머리를 들이밀고있던 한 구경꾼이 중얼거렸다. 즉위식을 주재하고 있는 남극성당 대제학 란조 경은 완전히 겁에 질려 말까지 더듬고 있는 상황이었고 ‘즉위’ 하고있는 당사자인 오넬론 태자, 아니 세나우스 3세 황제 역시 반쯤 넋이 빠져있는 듯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황실 대례복인 화려한 면복에 황제의 홀을 들고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사람 옷을 억지로 입혀놓은 원숭이마냥 꽤나 어색한 모습이었다.

정작 사람들의 시선은 그 덜떨어진 황제보다 그 옆에서 너무도 당당한 자태로 서서 특유의 무지개톤 회색 눈을 치켜뜨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네피스 카파키, 새 황후에게 쏠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틀어 올린 다갈색 머리와 눈부신 머리장식, 대례복인 적의 위에 황룡이 새겨진 황실의 머플러를 두르고 도도하게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남편의 모습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파키 가의 자녀들이 모두 서 있는 그 중간에서 정작 오르마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즉위식이 진행되는 시간동안 황궁의 모든 시설들이 정지되면서 두 시간을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 했던 샤드니는 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을 헤치며 황궁 101층에 있는 근위대 중앙본부로 급히 향했다.

“웬일이신가? 샤드니 경께서?”

즉위식에 참석하느라 챙겨 입었던 예복을 도로 갈아입고 있던 베흔이 짐짓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와 약속하지 않았냐구요! 제가 바본 줄 압니까! 대군마마께서 지하 고문실에 계시다면서요!”

“내 살려준댔지 손도 안대겠다는 약속은 안했잖나?”

“뭐요?”

황당한 말장난에 격분한 샤드니가 이성을 잃고 베흔에게 덤벼들다가 옆에 서 있던 쿠베에게 가로막히며 거칠게 밀려나고 말았다. 베흔이 뒤로 나동그라진 샤드니를 쌀쌀맞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 마라. 죽이지는 않을 테니. 우린 주페가 제위에 오르고 싶어 환장했다는 말 딱 한마디가 듣고싶을 뿐이야. 그 말 한마디를 안해주니.......”

“내, 내가 증언하겠소! 내가 증언할 테니 그분께는 손대지 말란 말이요!”

“우린 새 황상은 물론이고 모든 제국민들이 수긍할 확실한 인물의 증언이 필요한데? 저 망할 대군놈의 물증은 넘쳐나는데 태자와의 연계를 증명할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저 천재놈이 지가 다했다고 잡아떼고 있는걸 네깟놈이 나와서 뭐라고 증언할건데?”

“그......그럼......오르마즈 그놈이 알고 있을 거요! 그놈이 황궁 기습공격을 제안했으니......”

“이런, 이런 한심한 친구 같으니......”

베흔이 자빠져 있는 샤드니의 멱살을 번쩍 들어올리며 쏘아붙였다.

“오르마즈를 잡아다가 고문하라고? 지금 날보고? 황후의 친언니에 제국 제1공신에, 카파키 가의 적장자 오르마즈를?”

“그럼 네페티 누나도 한패거리 아니었소! 근위대는 누나를 최고제후에서 몰아내지 않고 뭐 하는 거요!”

“이 천하에 후레자식새끼!”

갑자기 눈동자에 노기를 띤 베흔이 샤드니를 바닥에 홱 집어던져 버렸다. 샤드니는 누나를 최고제후에서 몰아내라는 자신의 말에 근위대장이 왜 저리 흥분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샤드니는 베흔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며 처절하게 애원했다.

“제발, 제발 그분을 만나게라도 해 주시오,”

“그래?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어차피 지금 내려가려던 참이니.”

베흔을 따라 음습한 지하 9층에 내려선 샤드니는 몇 발짝 옮기지 않아 그의 귀를 쥐어짜듯 울려오는 끔찍한 신음소리에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한때 자신을 그리도 매혹하게 했던 바로 그 코리온의 그것이었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샤드니는 차마 발걸음을 더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죽 늘어져있는 유리벽들 안에는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제일 안쪽에는 큰 키와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아니 아름다웠던 남자가 갈갈이 찢긴 등과 어깨에서 피를 쏟으며 형틀에 묶여 있었다.

“대군......마마.......”

샤드니의 목소리에 코리온이 빛을 잃어 가는 눈동자를 조금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채찍질로 너덜너덜해진 어깨와 등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로 바닥까지 더러워져 있었다. 코리온은 기운이 없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어버리고 말았다.

“이봐, 한마디만 하라구. 니 방에서 나온 출병계획표하고 근위대 기밀문서 말이야, 태자가 봤지? 응? 봤을 텐데? 한마디만 해. 그놈한테 다 보고했다고.”

베흔이 코리온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묻자 코리온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애써 몸을 가누려던 코리온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축 늘어지고 말았다.

피곤에 찌든 얼굴의 심문관이 베흔에게 말했다.

“이놈 태도로 봐서......쉽지 않겠습니다. 일찌감치 12층으로 내려보내시는 편이.....”

“내일까지 두들겨 봐. 안되면 그때 가서 내려보내도 될 테니.”

고개를 끄덕인 심문관이 형리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섬뜩한 채찍이 또다시 공중을 날아 코리온의 등과 어깨의 살갗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고통에 겨운 코리온이 온몸을 비틀며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과 신음소리에 샤드니의 머리가 깨져버릴 지경이었다. 샤드니는 그런 코리온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못난 자신을 끝없이 책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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