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70화 (269/1,132)

< -- 270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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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습니다.”

워프비행에서 빠져나오자 카렐이 시스템을 원상복귀시키며 말했다. 카렐 말마따나 승용셔틀보다 두 배는 넘게 많은 조작키들과 이런저런 밸브들, 셔틀 전체에 흩어져있는 이런저런 장비들은 다리를 다치고 체력까지 약해진 코리온이 모두 조작하기는 어려운 것들임에 틀림없었다.

“2번 행성이 보이는군요.”

카렐이 코리온을 돌아보며 짐짓 웃음을 지었지만 코리온은 여전히 무표정함 그대로였다.

“대공주저하께 미리 연락했으니 와 계실 겁니다. 저하고 자이납은 오라버니만 내려드리고 경계를 넘어서 발 가 영지 쪽으로 가겠습니다.”

대기권 진입과 착륙준비로 부산한 카렐을 바라보며 코리온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 험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테나토 행성계 2번 행성의 누렇고 황량한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오고 있었다. 카렐이 여전히 코리온을 바라보며 싱글거리고 있는 자이납에게 물었다.

“자이납 네 고향이 여기였냐?”

“예.”

자이납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버지한테는 쫓겨났지만......언니하고 오빠들이 있을거에요. 지금쯤 다 결혼해서 분가해 살고있겠죠.”

약간의 진동과 함께 이 작은 화물셔틀이 대기권에 접어들고 있었다. 코리온의 굳은 표정을 힐끔 살핀 카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눈치 보니 저쪽에서 저녁초대 받기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배고픈데 네 가족들한테 저녁이나 얻어먹을 수 있겠냐?”

“헤헤, 그럼요. 제가 연락하면 기뻐할 거예요.”

착륙 예정지인 헤수스 산 중턱에는 붉은 저녁노을과 함께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듬성듬성 나무가 있는 이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는 셔틀을 제대로 착륙시킬만한 빈 공간은 잘 보이지 않았다. 스캐너를 켜 본 카렐이 군데군데 크고작은 바위가 흩어진 좁은 공간을 바라보며 말했다.

“휴, 착륙하기 꽤나 고약스런 데군요. 저기, 남쪽으로 5스타디아정도 아래에 셔틀 한 대가 기다리고 있군요. 대공주저하 타고 오신 셔틀인 듯 합니다. 여기서 내려드릴 테니 걸어가십시오.”

셔틀이 바닥에 내려서면서 랜딩보드에 바위 긁히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자이납이 셔틀 문을 열어주었다.

“에휴, 이제 또 언제 뵙나......”

지팡이를 짚고 셔틀에서 내려서는 코리온의 뒷모습에 자이납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 위쪽에서 불어오는 쌀쌀한 저녁바람에 코리온의 긴 머리와 튜닉자락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안전한 서부’에 도착한 코리온은 이곳의 공기를 느껴보려는 듯 큰 심호흡을 들이키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참, 이건 가져가십시오. 제가 선물로 사드린 물건들도 안에 있으니까요.”

카렐이 함께 가져온 여행가방과 주페 태자의 쿠크리를 끌러 코리온에게 돌려주었다. 칼을 받아든 코리온은 그 선명한 핏빛 날을 뽑아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손잡이에 달려있는 푸른빛 술 끝에는 지난번 카렐을 베면서 튄 검붉은 혈흔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으음?”

멀리 남쪽에서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의 좋은 눈은 그 앞에 서서 이쪽을 올려보고 있는 대공주와 예르마크 경, 그리고 샤드니의 얼굴을 똑똑히 구분하고 있었다. 카렐이 뒤돌아선 코리온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샤드니 경을 왜 부르셨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연락하지 마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샤드니 경을 못 믿는다는 건 날 못 믿는다는 뜻인가?”

저으기 기분이 상한 듯 되받아치는 코리온의 대꾸에 카렐이 마지못해 한 발 물러서며 셔틀에 재빨리 올라탔다.

“빨리 가자, 자이납. 저 서쪽 산봉우리만 넘어가면 동맹가문인 발 가 영지니까.....여기 오래 있어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언덕을 내려가는 코리온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시선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이납의 귀를 억지로 잡아끌며 카렐이 다시 셔틀에 올랐다.

“제 오빠 집은요, 남반구로 가셔서......잠깐만요, 연락 좀 해봐야겠네요.”

셔틀을 다시 이륙시킨 카렐이 앞으로 가속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이납이 할룩스를 뽑아쥐었다.

“어? 왜 불통이지?”

반사적으로 스캐너를 살폈던 카렐이 기겁을 하며 조종간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막 가속하기 시작한 셔틀 앞을 갑자기 가로막은 건 눈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연두빛의 반경 10스타디아의 자그만 간이 에너지장벽이었다. 서부제후군인지, 아니면 근위대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이곳에 미리 반경 10스타디아의 에너지장벽을 설치하고 카렐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망할!”

막 속도를 받아 앞으로 치고 나가려던 셔틀은 그대로 전진하면 장벽과 정면충돌하며 산산조각이 나버릴 상황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작은 에너지장벽 안에 순식간에 갇혀버린 셔틀은 미처 제대로 방향을 틀 여유조차도 없었다. 힘겹게 방향을 틀며 장벽에 스치듯 충돌한 셔틀 엔진이 산산조각나며 흩어졌다. 비명을 지른 자이납이 뒤쪽 화물캐빈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으, 으악!”

방향을 상실해버린 셔틀은 큰 폭음과 함께 밑의 바위산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갑자기 들린 귀를 찢는 폭음에 코리온 일행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카렐이 탄 셔틀이 떨어지고 있는 모습에 그들의 표정 역시 순간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다.

“에너지 장벽.......”

순간 째지는 금속성의 파괴음이 그들의 귀청을 때렸다. 옆으로 기운 채 바닥에 스치며 떨어진 셔틀은 거대한 바위에 중간이 꺾이며 순식간에 앞뒤로 두 동강나 흩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에 꽤 많은 파편과 돌무더기들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바닥을 긁으며 한참을 미끄러져 간 큰 뒤 토막은 바위에 부딪히며 그대로 멈췄지만 바닥을 한 번 튕기며 파편을 사방에 흩날린 비교적 작은 앞 토막은 동쪽의 큰 절벽에 요란스레 부딪히고는 그 까마득한 밑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창백해진 하심과 라스가 허겁지겁 사고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원시적인 완충장치 외에는 버블 같은 안전장치도 변변할 리 없는 낡아빠진 화물셔틀에 이 정도 사고라면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코리온은 잘 알고있었다.

“카렐 님! 카렐 님!”

제일 먼저 뛰어오른 하심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던 하심은 셔틀 뒤 토막인 화물캐빈의 큰 파편 밑으로 비죽이 나와있는 사람 손을 보고는 놀라며 허겁지겁 달려갔다.

“라스! 라스! 같이 들어!”

하심과 라스가 함께 달려들어 캐빈의 큰 문짝을 힘껏 들어내자 그 밑에 피투성이가 된 채 깔려있던 자이납의 모습이 나타났다. 팔과 머리에서 꽤 많은 피를 흘리고있는 자이납은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의식이 희미해져있는 상태였다.

“복합골절이구나......맥박과 호흡은 아직 괜찮은 것 같다.”

뒤늦게 따라온 코리온이 자이납의 몸 곳곳을 짚어보며 말했다. 문짝에 깔려있던 왼팔은 심하게 찢어져서 흰 뼈가 드러났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팔에 출혈은 심하지만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잠시 의식을 잃은 것 같으니 라스 네가 업고 내려가도록 해라.”

“그런데 그분께선 도대체......”

부상을 입은 자이납을 내려보내고 다시 셔틀 주변을 돌아보던 하심은 앞 토막이 떨어진 절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는 낮은 신음소리에 위험한 비탈을 무릅쓰고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기어 내려갔다. 미끄러질 듯 앞으로 기운 경사 밑으로는 높이만 족히 1스타디아는 넘을 까마득한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예?”

용기를 내 절벽 밑을 내려다본 하심은 절벽에 위험천만하게 걸린 부서진 금속제 빔 파편을 왼손으로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카렐의 모습에 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셔틀 앞 토막에서 몸을 날린 듯 군데군데 옷이 찢어져 있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빨리 올라오세요!”

“왼팔이.....왼팔이......아윽,”

팔에 힘을 주려던 카렐이 거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지난번 호수에서 입은 어깨의 깊은 상처 때문에 그 강인한 팔도 이젠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성한 오른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어딘가를 짚으려 했지만 앞으로 기운 이 절벽에서 의미 없이 공중을 휘저을 뿐이었다. 힘이 빠져가는 듯 그의 왼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거! 이게 잡으세요!”

입고있던 튜닉을 벗어던진 하심은 버둥거리고 있는 카렐의 오른손을 향해 내려주었다. 가까스로 옷자락 끝을 붙든 카렐이 힘을 준 순간, 경사진 절벽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하심이 그 힘을 버티어내지 못하고 쭉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으악!”

하마터면 절벽 밑으로 떨어질 뻔한 하심이 허둥지둥 위로 기어올랐다.

“젠장! 왜 밑에선 아무도 안 올라오는 거야!”

멀리 반대편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샤드니 일행을 바라보며 하심이 분통이 터지는 듯 악을 쓰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하심의 등뒤로 코리온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학장님! 도와주십시오! 한 사람만 더 도와주면 이 분 오른팔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하심이 우두커니 서 있는 코리온에게 결사적으로 호소했다. 조금씩 힘을 잃어 가면서 온몸을 떨고 있는 카렐을 그는 위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매달린 채 버둥거리던 카렐과, 그런 그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는 코리온의 사이에 잠시 무언의 대화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제게 샤드니 경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거의 탈진해버린 카렐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코리온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하심이 다시 소리쳤다.

“학장님! 제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도와주십시오! 제 혼자 힘으로는......”

하심의 호소에도 코리온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카렐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오라버니는 지금 날 어찌할 거요.”

기진맥진해진 카렐이 자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코리온에게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입술을 굳게 깨문 코리온의 머릿속에는 처형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주페의 마지막 처절한 눈빛과, 끔찍하게 산산조각나 죽었다는 딸 모디아크의 시체와, 그 모든 것을 지시했다는 세네피스의 밉살머리스러운 얼굴이 지난 며칠간 목숨까지 내맡기며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카렐의 고통스러운 얼굴 위로 오버랩핑되고 있었다.

“그래. 날 믿은 네놈 잘못이다.”

“학장님!”

하심이 무심한 학장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넌 162년이나 살았으니......살만큼 실컷 살았구나. 5개월만에 캡슐 안에서 으스러져 죽어간 내 딸, 아니 태자저하 딸에 비하면 말이다. 네 어미도 자식을 잃는 슬픔이 어떤 건지 이제 뼈저리게 깨닫겠구나.”

코리온이 그 깊은 갈색 눈동자에 살기를 띠며 카렐을 노려보았다. ‘주페 태자의 딸’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에게 코리온이 매몰차게 말을 이었다.

“시체는 네 어미에게 고이 보내줄 테니 염려 말아라. 난 그 시체조차 만져보지 못했지만.....며칠간이나마 날 도와준 대가라고 해 두지.”

카렐의 절망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코리온이 휙 돌아서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심이 그런 학장의 등뒤에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학장님! 제발!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아무리......”

“빨리 오게. 예킨터스 교수.”

“학장님!”

“내 명령일세.”

카렐을 차마 돌아보지 못한 코리온이 자리에 선 채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잠시 멍 한 표정으로 있던 하심이 천천히 카렐을 바라보았다.

“전.....못 갑니다. 학장님.”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그의 모습에 코리온의 낯빛이 순간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빨리 오란 말이요! 예킨터스 교수!”

“못 갑니다!”

하심이 순간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학장을 노려보았다. 뒤로 휙 돌아서며 절벽 끝으로 다시 다가가려던 그는 갑자기 울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감히......”

손에 들고 있던 주페 태자의 쿠크리를 다시 품안에 챙겨넣은 코리온은 칼자루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져 흐느적거리는 하심을 어깨에 불끈 짊어졌다. 기절한 하심을 어깨에 둘러멘 코리온은 기진맥진해 가는 카렐을 그대로 놔둔 채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학장님!”

샤드니가 무사히 돌아온 코리온의 앞에 얼른 꿇어앉으며 큰 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어깨에 메고 온 하심을 의사에게 넘겨준 코리온은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과 반가운 포옹을 나누었다.

“세상에, 몸이 이 모양이 되다니......얼굴도 여위었고......”

대공주는 핼쓱해진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지 코리온의 품을 내내 꼭 껴안고 있었다.

“자, 빨리 돌아가자. 다친 몸도 치료하고......이제 좀 쉬어야하지 않겠냐.”

의사에게 응급처치를 받고 있던 자이납은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몸 곳곳에 붕대를 댄 데다가 뼈가 부러진 왼팔에는 응급부목까지 대어져 있었다.

“이게......어디죠?”

멍 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자이납은 대공주와 코리온, 하심, 라스의 모습에 자기가 산 것을 깨달았는지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작 카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져가기 시작했다.

“카렐 그놈은 죽었습니까?”

코리온과 가벼운 포옹을 나눈 샤드니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쪽 절벽에 아직 살아있을 거다. 어깨를 다쳐 제 힘으로는 못 올라오니 이미 떨어져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정말 잘하셨습니다. 학장님. 이제야 그 분과 모디아크 아씨의 원수를 갚게 되셨군요. 감축드립니다.”

샤드니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감돌았다. 아들과 샤드니의 대화를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대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냐......”

어머니의 말에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린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샤드니가 할룩스를 대뜸 뽑아들었다.

“이제 들어가 확인사살하시오.”

샤드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 산 북쪽 반대편에서 미리 대기하던 5백여 이스마엘 가 정규군들과, 함께 기다리던 베흔을 선두로 한 근위대 가디언 십여 명이 동쪽 절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들것을 박차고 일어나는 자이납을 막으려던 의사가 비명과 함께 튕겨나며 소리를 내질렀다.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한 자이납을 노려보며 코리온이 쏘아붙였다.

“꼼짝 말고 여기 가만히 있지 못하겠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코리온에게 갑자기 씨익 웃어보인 자이납이 냉큼 대꾸했다.

“그러고는 싶은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네요. 다음에 또 봐요, 학장님. 헤헤.”

능글맞은 웃음을 남긴 자이납은 붙드는 이쪽 병사들을 거칠게 떨구며 한 팔에 응급부목을 한 채 사고가 난 바위언덕 위로 비틀거리며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코리온의 턱에 순간 힘줄이 바싹 곤두섰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에너지장벽으로 사방이 온통 가로막혀서 놈들이 달아날 구멍도 없습니다.”

샤드니가 반대편, 북쪽 언덕을 까맣게 덮으며 몰려오고 있는 대병력을 가리키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북쪽에서 몰려 내려오는 대군을 빤히 보면서도 주군을 구하기 위해 홀로 달려 올라가는 자이납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코리온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도 고대하던 ‘복수’를 절반이나마 달성한 이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기쁨과 통쾌함이 아닌, 지독한 죄책감이 심장을 갈갈이 찢어놓고 있었다. 이유 없이 메어오는 가슴에 그는 입술을 꽉 악물고 있었다.

“죽은 게 나였다면......그분께선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코리온의 혼잣말에 샤드니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그에게로 휙 돌렸다. 코리온은 붉은 노을이 드리운 하늘과, 그곳에 희미하게 걸쳐져있는 에너지장벽, 아니 카렐에게는 죽음의 경계선이 될 그 연두빛 장벽을 저주스런 눈으로 올려보았다. 그는 샤드니와 함께 있던 이스마엘 가 장교에게 문득 시선을 주었다.

“제네르 충고를 듣지 않은 벌을 받는 거야......”

땀이 나면서 미끄러지기 시작한 저린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며 카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예민한 감각기에 북쪽 정상 쪽에서 몰려 내려오고 있는 수백의 인기척이 느껴져 오고 있었다. 침통함에 눈을 감은 카렐은 저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손을 놓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잠시 빠져들고 있었다.

“전하! 전하!”

갑자기 절벽 위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카렐은 자신의 환청이 아닌가 잠시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반가운 그 목소리는 서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틀림없는 자이납의 고함소리였다.

“여기, 여기다,”

카렐이 쉰 목소리를 쥐어짜내 대답했다. 이 위험천만한 절벽 끝으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온 자이납은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발목에 꽉 동여맸다.

“죄송합니다, 저도 한 팔을 못씁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흙바닥에 힘껏 박아넣은 자이납은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고는 바지를 묶은 다리를 절벽 밑으로 늘어뜨렸다.

“그걸 잡으세요! 빨리요!”

“조금만, 조금만 더,”

허리를 튕기며 오른팔을 필사적으로 휘저은 카렐은 자이납의 바지 끝단을 가까스로 꽉 움켜쥐었다.

“됐다!”

끌어올려진 오른팔로 바위조각을 붙든 카렐이 큰 함성을 내질렀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백의 병사들은 이미 절벽을 완전히 에워싼 채 공간을 좁혀오고 있었다.

“헉, 헉,”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가며 가까스로 위로 기어오른 카렐은 거의 탈진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이납을 급히 일으켜 주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고통이 몰려오는지 이 명랑하던 아가씨가 흐려진 눈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몰려오는 많은 병사들과 카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젠 어쩌죠......”

바닥에 박혀있던 자이납의 칼을 뽑아 손에 쥔 카렐은 절벽을 좁혀들어오는 서부제후군들과 베흔을 비롯한 가디언들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달려와 준 이 충성스런 부하를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와 줘서 고맙다.”

몇 마디를 더 하려 했던 카렐은 더 이상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아무리 카렐이어도 아직 성치않은 몸으로 10명의 가디언들과, 저 많은 정규군 병사들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등뒤의 까마득한 절벽 외에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엉?

가쁜 숨을 몰아쉬던 카렐은 몰려 올라오던 수백의 서부제후군들이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서는 모습에 순간 당혹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을 에워싼 에너지장벽이 갑자기 마술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야, 이 새끼들!”

절벽 끝에 내몰린 카렐을 향해 기세 등등하게 다가가던 베흔은 함께 가던 서부제후군들이 일제히 정지해 버리자 깜짝 놀라며 좌우를 급히 둘러보았다. 함께 가던 카인과 쿠베, 근위대 가디언들 역시 서부제후군들의 이 느닷없는 돌발행동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베흔이 대뜸 핏대를 올리며 서부제후군 장교의 멱살을 확 움켜쥐었다. 놀란 표정으로 우물대던 그 장교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리쿠 학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셨다고 합니다.”

“뭐?”

베흔은 남쪽, 코리온과 샤드니가 있던 언덕 아래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최악의 예상이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샤드니는 자신의 의사를 말 한마디로 뒤집어버린 코리온의 결정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그 분노를 삭히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짐짓 못 본 척 셔틀에 오른 코리온은 조종석에 앉으며 조종사에게 떨어져 있으라 눈짓을 보냈다.

“내 저 자를 용서해서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셔틀을 직접 이륙시키며 코리온이 샤드니를 달래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기결수에 대한 사형과 정당한 제수 외에는 살생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신성한 서부에서 어찌 계율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오나......”

코리온의 변명아닌 변명에 잔뜩 격앙되어있는 샤드니가 애써 성을 죽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샤드니를 향해 코리온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라마단 기간만 끝나면 샤드니 경이 저 자의 목을 베어 내 앞에 바칠 그 날만을 기다릴 것이니.”

구석에 몰린 카렐을 향해 셔틀을 몰며 코리온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베흔이 십여 명의 직속 가디언들만으로 자이납과 단둘이 남은 카렐을 향해 절벽 끝으로 쳐가고 있었다.

“착륙할 시간이 없을 것 같구나.”

거의 코앞까지 쳐온 베흔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던 카렐은 남쪽에서 저고도로 올라오는 셔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코리온의 셔틀 옆에서 손잡이가 달린 강습용 와이어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급히 달려 올라오는 근위대들과, 다가오는 셔틀과의 거리를 어림하던 카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삶의 끈을 잡을 것인지 아닌지를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가만히 있어도 베흔의 손에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카렐이 쥐고있던 칼을 자이납의 허리에 다시 꽂아주며 말했다.

“자이납, 내 목을 껴안아라.”

한쪽 팔에 부목을 댄 자이납이 나머지 한 팔로 목을 꽉 껴안자 카렐이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거의 닿을 듯 다가온 베흔을 마지막으로 노려보았다.

“잘 있게나, 근위대장.”

공중으로 힘껏 뛰쳐오른 카렐은 코리온이 내려준 와이어 끝을 오른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이런 썅!”

헐떡이며 이곳까지 달려온 베흔을 마치 놀리듯, 절벽 끝의 카렐을 눈 깜짝할 새 휙 낚아챈 셔틀은 서쪽, 발 가 영지를 향해 방향을 틀어 날아가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싸맨 베흔이 바닥의 돌덩이를 힘껏 걷어차내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저 죽일 놈의 백면서생 같으니! 내 저놈을!”

분노의 함성을 내지른 베흔은 멀어져 가는 셔틀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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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일 나옵니다. ^___________________^ (두근반 세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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