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5 회: Part 13. 시들어가는 소나무 밑에 연꽃이 피어날때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평화롭게 잠들어있는 코리온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시간이 넘도록 다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그의 희고 매끄러운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고 솜털처럼 고운 손은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조금씩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젠 너 혼자서도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겠지?"
코리온의 뺨과 어깨에 한번씩 입을 맞춰준 주페는 잠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세수를 한 주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짧은 적갈색 반곱슬머리 밑으로 암갈색의 눈동자와 짙은 눈썹, 가무잡잡한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두드러진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그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
주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단단한 가슴과 굵은 팔, 유학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부진 근육질 상체를 말없이 더듬거렸다. 그 하나하나를 짚어보던 그는 결국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뒤로 돌아선 주페는 어제 잘 손질해두었던 검은 무명포를 꺼내 입고 금줄 4개가 그려진 보랏빛 머플러를 목에 단정하게 걸었다. 침실로 돌아온 그는 서랍 속에서 단단하게 봉인된 문서 한 장을 꺼내 아직 자고있는 코리온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아기 캡슐을 향해 돌아선 주페는 자그만 창을 열고 그 안에서 숨쉬고있는 '자신의 딸'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모디아크를 부탁한다. 코리온."
아기가 들어있는 캡슐과, 얼마나 만졌는지 이미 손때가 검게 타버린 아기신발, 아기 옷을 한번씩 얼굴에 대고 그 냄새를 음미해보았던 주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문 쪽으로 돌아섰다.
"어디......가세요?"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주페가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잠에서 깬 코리온이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새벽부터......어딜 가시려고요.....깨우지 그러셨어요."
코리온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주페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어디 좀 다녀오마. 조금 더 자고 있거라."
"제가 바래다 드릴께요."
방의 불을 켜고 일어선 코리온은 머리맡에 놓여있는 봉인된 문서에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주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급히 교수실을 나서고 있었다. 문서의 봉인이 주페의 것임을 확인한 코리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봉인 옆에는 수신자가 코리온이라는 주페의 글씨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순간 상황을 깨달은 코리온은 문서 내용은 볼 생각도 않은 채 허둥지둥 주페를 쫓아 달려나갔다.
"숙부님! 숙부님!"
계단을 내려가던 주페의 옷자락을 움켜쥔 코리온이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저게! 저게 도대체 뭡니까!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예? 뭐냐구요!"
자신에게 매달린 코리온을 짐짓 무표정하게 돌아본 주페는 갑자기 할룩스를 집어들며 또렷하게 말했다.
"주페 리쿠 응교네. 내 방으로 당장 병사 두 명만 보내주게. 그리고 하심 예킨터스 생도를 내 방으로 불러주게나."
"도대체 저게 뭐냐구요!"
코리온이 고래고래 악을 쓰며 주페의 가방을 붙들었지만 주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못 가십니다! 절대로 못 가십니다!"
주페의 교수실로 급히 달려온 두 명의 치안대 병사들은 가방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주페와 땅바닥에 꿇어앉아 그의 무명포자락을 붙들고 악을 쓰고 있는 코리온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무능한 황제 밑에서 우리의 뜻을 얼마나 펼 수 있겠느냐."
깊은 한숨을 내쉰 주페가 병사들에게 짤막하게 지시했다.
"코리온 리쿠 수찬이 내 방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교내 감옥에 가두게. 새 황제의 대관식이 있을 때까지 절대 풀어주지 말게나."
"예에?"
"빨리!"
주페의 목소리가 쩌렁 하고 울려퍼지자 병사들이 마지못해 코리온에게 달려들어 그를 힘으로 떼어냈다.
"안됩니다! 숙부님! 절대 가시면 안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하시다니요! 어찌 그런 무책임한 선택을 마음대로 하셨단 말입니까! 저와 모디아크는 이제 어쩌라구요! 제발! 제발!"
자다말고 달려온 하심은 코리온이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거칠게 저항하고 있는 모습에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온 주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방에 태아캡슐이 있네. 나와 코리온 사이의 5개월 된 딸이니 자네가 코리온이 풀려날 때까지 맡아 보살펴주고 있게나. 그냥......이상이 없는지만 때때로 챙겨주면 되네....."
"아, 아기요?"
순간 멍해진 하심이 주페와 울부짖고 있는 코리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서북 콜로니 아카데미로 인공 수정실로 데려가면 될 게야. 아이의 유전자 검색코드는 569221-63307-847번이네.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세포를 확인하는 비밀코드니 아무에게도 절대 알려주지 말고 자네 혼자 기억하고 있게나."
너무도 뜻밖의 사실에 순간 굳어져버린 하심에게 주페가 번호를 적은 쪽지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어리둥절해있는 하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주페는 학교 주기장 쪽으로 혼자 총총히 걸어가고 있었다.
"숙부님! 제발! 제발 한번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제 저 혼자 어찌 살라고 그러십니까! 숙부님!"
악을 쓰며 소리치는 코리온의 그 곱던 목소리가 이미 잔뜩 쉬어있었다. 치안대 병사들의 손에 강제로 감옥에 끌려가는 코리온의 절망에 빠진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병사들에게 미친 듯 저항하던 코리온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주페의 마지막 뒷모습을 향해 피어린 고함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대륙 경계 검문소 하나를 눈 깜짝할 새 박살내버린 카렐은 분대장이 가지고있던 할룩스를 옆에 앉은 코리온에게 넘겨주었다. 카렐과 코리온이 탄 차는 얻어맞아 피떡이 되어버린 8명의 치안군 병사들을 뒤로하고 대륙 경계를 넘어 타이마르에 접어들고 있었다. 기왕 신분이 드러난 김에 더 이상 코리온과의 동행 사실을 감출 이유도 없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어머님."
카렐에게 받아든 할룩스로 어머니에게 즉시 연락을 취한 코리온은 그 동안 아들걱정으로 사색이 다 되어버린 대공주를 바라보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어떻게 된 거냐! 얘야! 응? 지금 어딨어?"
"지금 카렐과 타이마르 대륙에 함께 있습니다. 조금 다쳤지만 안전하게 잘 있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샤드니 경도 혹시 그곳에 있습니까?"
대공주는 샤드니부터 찾는 아들에게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대공주 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민 샤드니는 코리온의 건재한 모습에 감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와 있으니 정말 든든하군. 나중에 다시 연락 주겠네."
통신을 끊은 코리온은 차창을 열고 한번 쓴 할룩스를 미련 없이 창 밖으로 내던졌다.
곧바로 도로를 벗어난 차는 초지가 우거진 언덕들 몇 개를 가로질러 이젠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이곳 대륙들 중에서도 가장 평탄한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타이마르 대륙은 딱히 도로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샤드니 경이 대공주저하나 베흔과 함께 있다면 공식 루트를 통해 들어왔을 테니 현실적인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습니다. 제네르 일행이 비공식적으로 이곳에 와 있을 것이라 하니 그쪽에 알아봐야겠습니다.
어느새 다른 도로에 접어든 카렐은 차 안에 놓여있던 여러 개의 할룩스---역시 초소 병사에게서 빼앗은--- 중 한 개를 무조건 집어들었다.
"이놈 위치를 잡아내란 말이야!"
흥분한 표정의 베흔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누마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타이마르 대륙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어디냐고!"
"그게......녀석들이 길도 없는 초원지대를 고속으로 움직이면서 통신을 하고 있어서.......어차피 도착할 무렵엔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을 겁니다. 일단 방금 통화했던 할룩스 코드는 폐쇄했으니......"
"저 망할 놈들, 막가자는 수작 아닌가."
이를 갈고있던 베흔은 대공주 옆에 서 있던 우베가 갑자기 할룩스를 집어드는 모습에 고개를 휙 돌렸다. '무언가' 말을 들은 우베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할룩스를 끊은 우베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대공주와 함께 어디론가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저놈 지금 누구하고 통화하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베흔에게 감청반 요원이 달려온 건 우베가 나가고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가 내민 쪽지에는 발신자의 위치와 등록자 이름,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내게만 웃어보이는 여자가 내 여기 잘 살아있다는 데 기뻐할 걸세.-
"이건 또 뭐야?"
지난번 '동행자 발목은 나았다'는 문장도 결국 암호해독에 실패했던 기억이 있는 베흔은 또 한번 보내진 뭔지 모를 문장에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아메스한테 안부 전해달라는 말씀이신가?"
카토의 질문에 우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메스 아씨는 아무 데서나 잘 웃는데?"
"네페티 부인께서도 우리 앞에서 잘 웃으시는데? 그럼 뭐야? 설마 잡혀가 있는 솔은 아닐 테고?"
"게다가 솔이 웃기야 제일 잘 웃지."
대공주가 둘의 뜬금없는 '웃음 논쟁'에 한참 답답해하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거린 우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소에 잘 안 웃는 사람 말씀하신 거 아냐?......푸헷, 안면에 철판 깐 플라칼 단장님이......어? 정말 그렇네?"
우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베 녀석이 제발 말길을 알아들었어야 할텐데."
카렐이 차에 속도를 더 붙이며 중얼거렸다. 군데군데 숲은 있지만 지형은 마치 동부의 평원지대같은 제법 넓은 초원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초소에서 빼앗은 지도를 보며 특별한 길도 없는 초원을 몇 시간 동안 빙빙 돌며 돌아다닌 카렐은 한쪽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동의 모습에 얼른 속도를 늦추고는 차창을 조금 열었다.
"안녕, 양들이 정말 통통하구나."
망토를 눌러쓴 카렐이 씽긋 웃음을 지으며 소년에게 1골드 동전 한 닢을 내주었다. 뜻밖의 수확을 얻어 기뻐하고 있는 소년에게 카렐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부근에 가문 경기병단장으로 있던 베아트릭스 플라칼 경의 영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전쟁터에서 돌아가셨다던데요?"
"응, 알아, 알아. 그분하고 전쟁터에 함께 있었던 사람인데 그분 댁이나 찾아가 보려고."
소년이 그다지 멀지않은 곳에 보이는 언덕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어기 언덕부터가 그분 땅이셨대요. 근데 그분 어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주인이 바뀌었다던데요?"
"그분 집도? 그럼 누구 딴사람 살아?"
카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거긴 사는 사람 다 죽어나가는 재수 없는 집이라고 겁나서 아무도 얼씬 안해요. 언덕 꼭대기에서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단풍나무 숲 안에 있어요."
"고맙다."
다시 차를 출발시킨 카렐은 목동이 말한 언덕 위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서서 큰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군데군데 숲이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구릉지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동부에서 돌아온 베아트릭스가 젊은 시절을 보냈을, 마치 그의 고향인 동부를 연상케 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초지였다.
"휴, 베아트릭스가 이걸 보면 뭐라 생각할지....."
언덕 위에 세워져있는 이정표를 보며 카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 헌액 유가족 엘룬 바툴,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에게 가문에서 하사한 특별영지' 라는 빛 바랜 이정표 위에는 붉은 페인트로 살벌한 사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전쟁 유공자 쿤제 스비아토에게 하사된 영지'라는 새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베아트릭스를 놓쳐버린 플라칼 가에서 약혼자였던 쿤제에게 베아트릭스의 땅을 몰수해 대신 주어버린 모양이었다.
카렐은 목동이 말한 한쪽의 단풍나무숲으로 차를 몰았다. 크지 않은 단풍나무숲에는 베아트릭스가 투창훈련에 썼음직한 여러 개의 표적판들, 더미들이 주인을 잃은 채 땅바닥에 흉하게 뒹굴고 있었다. 목동 말마따나 베아트릭스의 어머니인 엘룬 바툴까지 이곳에서 떠나간 뒤 철저하게 버려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쉽시다."
카렐이 코리온을 부축해 세워주며 말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2.5층짜리 단촐한 집은 도둑이라도 들었던 듯 조금 어질러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쌓여있는 먼지 외에는 그다지 심하게 상한 곳은 없었다.
"지금은 다 죽은 사람들이죠."
베아트릭스의 가족들 사진을 올려보는 코리온에게 카렐이 중얼거렸다. 한때는 꽤 다복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을 이들의 얼굴 밑에는 하나같이 '전사일과 전사지'가 붙어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아버지, 두 오빠와 옛 남편, 아들까지, 5명의 사진 밑에는 누가 걸어놓았는지 마른 꽃이 한 다발씩 매달려 있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여길 떠난 사람은 이렇게 사진을 걸어주고 꽃을 챙겨줄 누군가조차도 가질 수 없었지만."
카렐이 그곳 밑에 엘룬 바툴 부인의 사진을 가져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청소하고 정돈할 동안 앉아 쉬고 계십시오."
제롬 공은 느닷없이 델루지 종가를 찾아온 어머니 네페티 부인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부인은 서너 명의 집안 가디언들을 데리고 나온 아들의 모습에 표정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왜? 날 잡아 억류라도 하려고 그러느냐?"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제롬은 부인의 뒤에서 도끼눈을 뜨고 서 있는 네피와 판을 보며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나 가까스로 성질 죽이고 서 있는 다혈질의 네피를 자칫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어머님."
오르테 부인이 시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시어머니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부인의 평소 모습을 잘 아는 제롬은 그의 이 황당할 정도로 속보이는 행동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들과 함께 종가 안으로 들어서며 네페티 부인이 사뭇 쌀쌀맞게 물었다.
"솔이 이곳에 왔다고?"
"그으......예."
"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말하지 않았더냐?"
네피가 갑자기 이를 빠드득 갈며 제롬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초리에 등골이 오싹해진 제롬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최고제후의 첫째 소실이면 솔에게도 그만한 영광이 없으니......물론 솔의 아버지인 네피에게도 제가 따로 고마움의 뜻을 표할 것입니다. "
응접실 상석에 자리잡은 네페티 부인이 다시 아들을 돌아보았다.
"듣자하니 네 멋대로 날짜까지 잡았다며?"
"......3일 후입니다."
제롬이 '고자질' 했음이 분명한 오르테 부인을 살짝 째려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페티 부인이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
"솔을 여기 데려와 봐라."
"예?"
"왜? 네 멋대로 결혼까지 결정해놓고, 어미한테 아예 보여주지도 않을 생각이냐?"
"아, 예, 알겠습니다."
솔을 기다리는 동안 응접실 안에는 꽤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네피는 식은땀을 흘리는 제롬을 내내 노려보고 있었고, 오르테 부인은 자신을 곱지않게 째려보는 남편의 눈길을 짐짓 못 본 척 무시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솔이 나타날 때까지 이 묘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솔!"
흥분해 딸에게 달려가려는 네피를 네페티 부인이 한 손으로 가볍게 가로막았다. 여전히 손목이 묶여있던 솔은 자신을 보러 온 아버지 네피의 너무나 반가운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멍 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무사히 잘 있었구나."
자리에서 일어선 네페티 부인이 솔에게 다가서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이 네페티 부인의 앞에 무릎꿇고 앉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르테 부인은 시어머니에게 저리 친근하게 구는 솔을 그다지 곱지않은 시선으로 살짝 흘겨보았다. 그로서는 솔을 어떻게 해서든 첩에서 밀어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휙 돌아선 네페티 부인이 다시 상석에 자리잡고 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 다시 말하지만 이 혼인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제롬 넌 알아두도록 해."
"어머님께서 반대하시건 말건 혼례를 올릴 겁니다. 전 200살이 넘었으니 어머님 동의 없이 혼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 어디 네 뜻대로 되나 두고보자."
네페티 부인이 아들을 똑바로 쏘아보며 맞받아 언성을 높였다. 솔을 사이에 두고 이 모자는 거의 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께서 방금 보내오신 델루지 종가 평면도와 네피 대장이 보낸 경비병력 배치현황입니다."
네페티 부인이 델루지 종가 안에서 아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그 시간, 그 주변의 숲에서 7명의 휘하 가디언들과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아메스는 조페가 내민 도면과 지도를 바닥에 펼쳐놓았다. 평범한 남부 농민 차림으로 이곳에 며칠째 잠복해 온 아메스는 꽤나 데데하고 지저분해진 몰골이었지만 파랗게 번득이는 두 눈만은 평소의 총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까지 아메스를 따라왔던 킵과 페로가디언들은 '제후들을 상대하는 일에서 페로와의 관련성은 빼는 것이 좋다'는 제네르의 의견에 따라 조페와 전사단 고급가디언들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네페티 부인이 네피와 판을 데리고 종가를 뜬금없이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혼례식은 모레입니다. 첩실의 혼례는 별다른 손님 없이 양가 대표만이 참석해서 종가 응접실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흠, 아무리 첩이라지만 좀 심했군. 강당도 아니고."
아메스가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후훗, 그럼 나중에 전하께서 비빈 네 분 말고 다른 첩 맞으실 때도 황실 대강당 아스트라이아 홀에서 혼례식 치러야겠네요?"
"미쳤어! 혼례는 무슨 얼어죽을 혼례야! 첩실 어쩌구 하는 소리 내 앞에서 또 해 봐!"
조페의 짓궂은 농담에 아메스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뭘요, 세나우스 2세 폐하도 하렘에 남자가 120명 정도 되셨고 3세 폐하도 첩이 90명 정도 되셨으니 당연히 전하께서도 그 정도는 맞으셔야 격이......"
"시끄러, 말이 씨 된다고."
입을 삐죽거린 아메스가 조페의 입을 틀어막았다.
멀리 언덕 위에 자리잡은 델루지 종가를 바라보며 조페가 물었다.
"그런데, 이제 어쩌실 거죠?"
"6번 행성에서 전하와 연락이 닿았다고 하니까......일단 내일까지는 기다려봐야겠어. 전하께서 나오시면 무슨 지시를 주실 테니 그때 가서 움직여도 늦지 않지. 게다가 저곳 내부구조에도 훤하시다니까 전하께서 계시면 일이 훨씬 쉬워질 거야."
조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솔직히 솔한테는 좀 미안하지만......걔 하나 구하러 이런 요란까지 떨 필요가 있는 건가요?"
"이건 단순히 솔을 구하는 것 그 이상의 정치적 목적이 있는 거라구."
아메스가 네피에게 그새 배웠는지 사탕수수를 질겅거리고 씹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이번에 전하께서 빠져나오시면 바로 장태자임을 공개하고 제위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행사를 가질 거라고 하셨거든. 말하자면 그를 위한 정지작업인 셈이지. 델루지 종가 기습. 이 화끈한 시도를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이야아, 학장님 다시 뵙는 거예요?"
좋아 날뛰는 자이납을 째려보며 제네르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운전을 하고있는 베아트릭스와 하심의 표정도 그답지 않게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사실 우베에게 들어온 소식이 이 일행에게 오기까지는 북부길드를 통하는 꽤 복잡한 경로를 통해야 했지만 그 전하려는 내용 하나만은 확실했다. 베아트릭스가 힘있게 말을 꺼냈다.
"틀림없습니다. 타이마르에서 뜬금 없이 저를 언급하셨다면 제 옛날 집에 계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집 안전하기는 한 건가?"
제네르의 반쯤 걱정 섞인 질문에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가보면 알겠죠.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옛 자신의 영지 초입에 차를 세운 베아트릭스는 그 눈에 익은 풍경에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어둑어둑해져가는 지평선 너머로 아름답기까지 한 붉은 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단풍나무 숲 사이로 불이 켜진 자신의 집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경계섞인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베아트릭스에게 붉은칠된 이정표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쿤제 이 개자식!"
갑자기 문을 확 열고는 차에서 뛰어내린 베아트릭스가 쿤제의 이름이 쓰여진 이정표를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 넘어뜨려 버렸다. 베아트릭스는 그의 입에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갖은 욕지거리를 마구 쏟아내며 쓰러진 이정표를 미친 듯 짓밟아댔다.
"저, 저 사람이 도대체 왜 저래?"
그답지 않은 격앙된 모습에 제네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은 베아트릭스는 차에 다시 오르며 조종간을 손에 쥐었다.
"이제 가죠. 전하께서 기다리실 테니."
++++++++++++++++++++++++++++++++++++++++++++++++++++++++++++++++++++++++++++++++++++++++++++
개인지 예약마감기간인 20일까지 5일 남았습니다.
어여 http://vein.zio.to/ 로~~ ^^
(가예약하신 분들도 신청양식은 작성해주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