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0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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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움직이지 말라니까."
카렐의 옆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움찔거리던 하심은 잠든 줄 알았던 카렐의 한마디에 다시 몸을 바싹 웅크리고 말았다.
"달아나려는 게 아니고.....그냥 좀....."
하심은 자신의 살과 몸이 맞닿아있는 카렐을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심의 두 손을 차 문짝에 꽁꽁 묶어놓은 카렐은 그의 바로 옆에 팔자좋게 드러누운 채 세상모르게 쿨쿨 곯아떨어져 있었다.
"좀 자라니까."
짜증스럽게 대꾸한 카렐은 조금 추운지 담요를 여미며 하심에게 더 바싹 달라붙어오고 있었다.
"아, 아이, 좀......떨어지라니까요."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코를 처박은 카렐을 엉덩이로 억지로 밀어내며 하심이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하지만 돌덩이같이 단단한 저 몸은 무게도 보통이 아닌지 그가 미는 힘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비교적 얌전하게 있는 카렐의 저 징그러운 손이 무력하게 묶여있는 자신의 몸을 행여 더듬지나 않을까 내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휴우."
카렐을 떼어내는 것을 결국 포기한 하심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모른 채 잠들어있는 '납치범'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일부러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건 아닌 듯 싶었지만 그렇다해도 지금껏 철저한 순결을 지키며 살아온 골수 원리주의 유학자 하심 예킨터스 교수에게는 이 밀폐된 공간에서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누워있는 상황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슴......만이라도......제발,"
그제서야 잠에 취한 눈을 조금 치켜뜬 카렐은 하심의 어깨를 밀어붙이고 있던 자신의 가슴을 조금 뒤로 빼며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오......일찍 말하지 그랬소. 이상한 뜻은 아니었으니......오해는 마시오."
곧바로 다시 잠들어버린 카렐의 팔에 붙들린 채 하심이 또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료소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오면 정말로 풀려나리라 잔뜩 기대했던 하심은 카렐이 사람하나 없는 이 황무지에 차를 세워놓은 채 좌석에 담요를 펼치는 모습에 순간 기겁을 했던 터였다.
아직 셔틀이 오려면 3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며 그동안 잠이나 자자며 이짓을 해놓은 이 가디언인지 이 자칭 장태자인지는 거의 '순결컴플렉스'에까지 빠져있는 하심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렇게 '추접스러운 동침---최소한 하심의 입장에서는---'을 강요하고 있었다.
"학장님......"
하심이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가까스로 눈물을 곱삼켰다.
가늘게 떨리고있는 하심의 몸에서 그의 기분을 눈치챈 둔감한 카렐이 그제서야 큰 하품을 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젠 내가 운전할테니 뒤에 있으시오. 이제 보내줄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하심의 표정에 간만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착각인지, 아니면 공포에 면역이 되어버렸는지 하심은 지금 당장은 최소한 죽음을 걱정하고있지는 않았다.
마지못해 일어난 카렐은 그의 손목을 동여맨 비단끈을 끌러주며 입을 열었다.
"늦은 밤이라서 가능하면 최대한 같이있다가 차하고 함께 돌려보내주려고 했더니만......밤보다 내가 더 무서운 모양이니.....별수없지.....학교 가까운 마을에 내려줄테니 차하고 댁의 할룩스는 나중에 찾아가시구려.."
"......고맙습니다."
카렐이 졸린 눈으로 차를 출발시키는 모습에 그제서야 살았다는 기분을 절감한 하심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길지않은 인질상태를 겪고 난 그는 이제 앞으로 다시는 저 괴물같은 가디언, 아니 장태자와 이렇게 만나지는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벨리크 그년 짓이 빤하군, 더 말할필요 있겠나. 그 천하의 돈버러지가 2억 5천만 골드를 놓칠 턱이 있남. 동생 뤼렌은 그렇게 못된 년은 아니지만 하나뿐인 딸이 그지경으로 당했던 걸 머릿속에 품고 있으니 돕고도 남았겠지. 아무리 그랬어도 지 손녀까지 잡아들인다는 건......하여간 이해못할 가문이라니까."
서부 제3제후 사우드 발 부인은 제네르의 말에 어깨를 으쓱 하며 대꾸했다.
그의 뒤에는 지난번 메디스 시에서 카렐 일행과 함께 싸웠던 당시 수비대장 베나지 나하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주군을 지키며 서있었다. 플레렌 가의 압도적인 병력을 상대로 그곳을 하루나 지켜내고 대부분의 민간인들을 살려낸 공훈으로 일개 수비대장에서 중랑장급에 속하는 종가의 경비대장으로 파격적으로 특진해 있었다.
"어쨌든 세호 가나 파예드 아카데미쪽에 우리 세작들을 풀어놓았으니......조만간 연락이 올 거요."
사우드 발 부인은 차를 훌쩍 들이키며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제네르가 그런 부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낌없는 협조 감사합니다."
"그런데......페로 경은 언제 서부에 오신다는 말씀 없으신가?"
사우드 부인이 갑자기 묘한 눈동자를 지으며 묻고 있었다.
"서부와 전쟁중이시니.......총리께서 친히 오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실겁니다. 먼저 초청을 하심이 어떠실는지......"
"하긴, 그렇군. 딸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겠는걸......라마단중에 한번정도 여길 들러주시면 고맙겠다고 말씀드리게."
"반드시 전하겠사옵니다."
제네르가 유난히 번들거리는 부인의 눈에 잠깐 시선을 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네르는 권모술수에 능하기로 소문난 저 원숙한 미모의 여인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그것도 끈적거리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하며---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중앙귀족가에서 한 명, 서부에서 한 명, 남부에서 한명씩의 남편을 맞았던 사우드 부인은 그들과의 사이에 이미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맞았던 남편들은 하나같이 서부 제3제후의 남편이라고 내놓기는 민망할 정도 신분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의 출산 직후 모두 석연치않은 이유로 발 가로부터 파문을 당해 쫓겨났고, 제후들 사이에서는 권력욕심이 유난히 강한 사우드 부인이 옆에서 귀찮게 굴 지도 모르는 '제대로된 남편' 대신 순전히 '씨내리'를 필요로했을 따름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물론 저정도 신분의 여자라면 본능적인 욕구 해결에 남편 아닌 다른 남자들을 들인다고 해도 전혀 손가락질당할만한 일도 아니었고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꽤 많은 '비공식적인 남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부인은 다과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네르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종가 객사에서 묵도록 하게. 내 새소식이 들어오면 알려주겠으니."
사우드 부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제네르의 뒤를 우베와 카토, 자이납이 곧 따라붙었다. 집사에게서 안내받은 객사에 짐을 홱 던져놓은 자이납이 혀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아휴, 저 망할 여자 눈이 능글능글한게 드럽게 밥맛이네."
"니 눈이 더 능글거려."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은 우베가 한쪽에서 짐을 정리하는 제네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지난번에 페로 경이 여기 오셨을 때 사우드 부인하고 거시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수군대는 사람들 있던데 사실일까요?"
"쓸데없는 소리 집어쳐."
그 소문이 헛것이 아님을 잘 아는 제네르였지만 일단 무서운 눈을 부릅뜨며 이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막는 것을 잊지않았다.
안그래도 서부로 떠나는 제네르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면서 '사우드 부인의 언행에 각별히 신경써라'는 귀띔을 준 건 다른사람도 아닌 페로 자신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우드 부인이 페로를 다시 초청했으니 페로도 천상 저 달갑지않은 여자를 다시한번 마주해야 할 팔자인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배우자 없는 두 남녀가 만나는거니 누가 뭐랄 이유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황후의 강요에 별다른 대책도 없이 온 이 서부에서 단서하나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제네르로서는 머리가 부서져버릴 지경이었다.
"우베, 넌 사우드 부인께서 마련해주신 셔틀 타고 당장 4번 행성으로 떠나서 전하 모셔오는 데 동행해. 나하고 자이납, 카토는 세호 가 종가하고 뤼렌 부인 사택 부근을 정찰해야겠다."
남반구의 한 소도시에 내려선 하심은 카렐이 왜 한밤중에 자신을 내려주려 하지 않았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새벽 4시를 지나간 이시간에 이곳 유흥가를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낮에 보이던 유순한 시민들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특히나 한달간의 휴가에 가까운 라마단 기간동안 거의 밤낮을 바꾸어가며 사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심야는 철저하게 놀고마시기 좋은 때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채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는 그들에게 눈앞에 흐뜨러진 모습으로 바보같이 멍 하니 서 있는 검은 무명포의 유학자는 평소처럼 신경쓰이는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하심은 자신을 '사람 많은 곳'에 일부러 내려준 카렐의 처사가 자신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놀리려는 수작이었는지를 벌써부터 헛갈리고 있었다.
취객들과 불량스러워보이는 건달들이 종종 지나다니는 큰길 한쪽에 멀뚱하니 선 그는 결국 길 한쪽의 계단에 쭈그려앉을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하심은 조만간 학교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연신 위로하며 자칫 건드리기라도 하면 주먹부터 휘두를 듯 해 보이는 이 거친 사람들을 한번씩 곁눈질로 지켜볼 뿐이었다.
아카데미에 이곳 위치를 알려준 카렐은 자신을 이곳에 이렇게 '버려둔 채' 무언가에 쫓기듯 차를 몰고 사라져버린 후였다.
"괜히 빨리 보내달라고 했나......"
뼛속을 파고드는 겨울 밤추위를 느낀 하심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순간 카렐과 함께있던 따뜻하고 '안전한' 차 안이 갑자기 그리워진 건 그로서도 꽤나 황당한 일이었다.
하심의 옆에서 갑자기 벌어진 취객들간의 주먹다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욕지거리와 함께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광경에 질겁한 하심은 당장이라도 다른곳으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곧 학교에서 자신을 데리러 올테니 함부로 움직일수도 없었다.
"어?"
길 건너편 멀찍이에서 아까부터 제자리에 서 있던 차 한대가 어딘지 눈에 익다고 생각한 하심이 갑자기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그리고 삐끔히 열려있는 창 틈새로 누군가 회색빛의 눈동자만 드러낸 채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에 질려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진 하심은 자기도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계단에 다시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파예드 아카데미와 치안대 마크를 단 서너대의 차들이 이곳에 들이닥친 건 카렐이 연락하고 나서 십여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제일 앞의 차에서 급히 내려선 건 다른사람도 아닌, 그리도 그리던 코리온 리쿠 학장과 샤드니의 모습이었다.
병사들과 유학자들의 등장에 이곳 주변에서 난동을 피우던 건달들이 모두 눈깜짝할새 도망쳐버렸다. 하심은 카렐의 차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언제 가버렸는지 그새 사라지고 난 후였다.
"학장님, 직접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코리온의 모습에 감격한 하심은 차가운 땅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큰 절을 올렸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가?"
코리온이 떨고있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다정하게 묻자 하심은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리온은 벨트까지 풀린 채 무명포자락이 흐뜨러져있는 하심의 모습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녀석이 교수에게 몹쓸짓이라도 한건가?"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심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젓자 코리온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어디로 도망갔소?"
코리온의 옆에서 신경질적으로 물어온 건 함께 온 샤드니였다. 그의 질문에 움찔 한 하심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샤드니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하심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카렐의 행방을 알려줘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던 하심은 방금전까지 카렐이 있던 곳을 힐끔 바라보았다. 특별히 생각하고 한 행동은 결코 아닌, 그냥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녀석이 저기있었다고?"
순식간에 상황을 눈치챈 샤드니가 뒤따라온 치안대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전 병력 동원해서 당장 이 부근 완전히 폐쇄하고 샅샅들이 검문하도록 해라! 치안군으로 부족하면 제후군에도 연락하고! 예킨터스 교수의 차를 당장 수배하도록 해!"
샤드니의 즉각적인 반응에 도리어 깜짝 놀란 건 하심이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준 카렐에게 나름대로 고마운 기분도 없지않던 그로서는 샤드니가 너무나 일찍 눈치를 채 버리자 당혹스러움과 묘한 양심의 가책에 발을 동동 구르며 코리온과 샤드니, 두 사람의 눈치만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샤드니의 수색명령이 떨어지고 5분도 지나지 않아 교수의 양심의 가책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코리온에게 서둘러 달려온 플레렌 가 치안군 병사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알려왔다.
"검문에 불응하고 도시 밖으로 달아나려던 차 한대를 방금 발견했습니다! 추적셔틀에 쫓겨 다시 이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제기랄, 저 망할 교수를 그냥 놓고 가버리는건데."
카렐은 자신의 바보짓을 뼛속깊이 후회하며 이 자그만 소도시 한복판으로 차를 되돌리고 있었다. 차 위에 달라붙은 소형 추적셔틀은 이상태로 떨어뜨릴 수 있을 턱이 만무했지만 발목도 다쳐 뛸 수 없는 상황에서 차를 버리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이크!"
앞을 가로막는 치안군 차를 발견한 카렐이 급히 방향을 틀어 골목에 접어들었다.
"저 망할 여자 같으니! 내손에 다시 걸리면 요절을 내 버릴테다!"
이를 악문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쿠크리만을 가까스로 챙긴 카렐은 결국 차를 세우고 사람 한명 가까스로 지나감직한 좁은 집 틈새 길로 무작정 뛰쳐들어갔다.
"여기다!"
차를 뒤쫓아온 병사 한 명이 흰 비단옷차림의 카렐을 멀찍이서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동료들을 불러들였다.
"젠장!"
지저분한 골목에서 다시 방향을 튼 카렐은 방향감각도 상실한 채 벽을 짚고 절룩거리며 무조건 걷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같은 곳을 빙빙 돌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는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무조건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을 향해 조여드는 포위망을 느끼며 카렐이 거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 이 블록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 망할,"
모처럼 보인 큰길로 고개를 쑥 디밀었던 카렐은 기겁을 하며 얼른 몸을 다시 감추었다.
"제기랄, 왜 하필이면....."
카렐이 몸을 숨긴 모퉁이 너머 겨우 몇십발짝 떨어진 곳에서 코리온이 겁에 질려있는 예킨터스 교수를 달래며 서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코리온과 십여명의 치안군 병사들의 시선이 이 골목 반대편의, 자신이 차를 버리고 달아난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카렐의 등뒤에서 골목을 수색하는 병사들의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 눈을 삐끔히 내민 카렐은 문이 조금 열려있는 한 대의 차와, 한 대의 병력수송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별수없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카렐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기어서 문이 열려있는 차---다른 사람도 아닌 코리온의 차---로 슬그머니 기어들었다.
지나가는 차들을 몽땅 다 검문하고 있는 저들이지만 등잔밑이 어둡다는 옛말마따나, 설마하니 코리온의 차를 검문할 턱은 없다는 것이 카렐의 황당한 믿음이었다.
3명이 타는 이 중형의 고급승용차는 앞 중앙의 운전석 뒤로 2개의 높은 상석이 있었고 그 뒤와 밑에 짐을 싣거나 필요한 때 하인들과 노예들이 타는 분리된 짐칸이 조금 있었다. 꽤 많은 책들과 신변용품들, 여행용 가방까지, 그 좁은 틈새에는 생각외로 꽤 많은 물건들이 실려있었다.
'어디 가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당장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상석 뒷쪽의 의자 밑 완충용 틈새에 그 큰 덩치를 우겨넣은 카렐은 책들과 여행가방을 조심스레 움직여 몸을 최대한 가렸다.
"아직 못잡았나!"
샤드니가 치안군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건 카렐이 버려두고 도망간 예킨터스 교수의 작은 차 한대가 고작이었다. 차 안을 들여다본 샤드니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의자는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고 분해된 추적장치는 내장을 그대로 내놓은 볼쌍사나운 모습이었다.
잠시 시계를 바라본 코리온이 수색작업을 총괄하던 샤드니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쩔 수 없군. 일단은 갈길이 바쁘니 여기는 치안군들에게 맡겨놓아야겠구나. 네가 맡아 처리해다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샤드니의 인사를 받은 코리온이 축 늘어진 하심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미안하네. 예킨터스 교수. 그 자를 놓아준 내 잘못이네. 이제 저 차는 거들떠보기도 싫을테니 내 사재로 좋은 것을 새로 마련해주겠네."
"아닙니다, 고쳐서 그대로 써도 괜찮습니다."
"어허,"
풀죽은 하심을 달래주며 코리온은 그와 함께 자기 차의 상석에 올랐다.
'아쿠,'
두 사람이 앉으면서 조금 눌린 완충장치에 유난히 두터운 가슴이 깔려버린 카렐이 신음소리가 새나오려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사람들을 태운 코리온의 차는 치안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원수같은 소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하간에, 이 도시를 빠져나간다는 카렐의 목적은 그럭저럭 달성된 셈이었다. 지금 상황이 더 황당하기는 하지만.
코리온이 하심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그래도 지금 막 남부로 떠나려던 참이었네. 조금만 연락이 늦었다면 자넬 여기 놔두고 가야 할 뻔 했어."
"다시금 학장님과 함께 갈 수 있게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애써 표정을 푼 하심이 어깨를 껴안아주는 코리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돌덩이는 돌덩이시구만. 풋,'
카렐은 저정도로 자신을 헌신적으로 따르는 미모의 미혼 여교수에게 '묘한 눈길한번 주고있지 않은' 코리온에게 괜한 얼토당토않은 짜증을 부리며 완충장치에 깔린 몸을 애써 꿈틀거렸다.
"내 여객선 출발을 1시간만 늦추라 지시했으니 아직 여유가 조금 있군. 숙소에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자네 짐도 가져오게. 자네 차가 그지경이 되었으니 내 차에 같이 싣고 떠나지."
"저때문에 다른 교수님들이 다 기다리신다니.....면목이 없습니다."
"자네 잘못인가. 그 미친 살인귀 때문이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네. 어차피 학회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뭐, 뭐어?'
카렐의 머리가 순간 아찔 해왔다. 차에 실린 짐들은 비엔의 플라칼 가 영지에서 있을 예정인 라마단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부로 떠나는 코리온의 물건들인 모양이었다. 때맞춰 내리지 않으면 약속된 귀환셔틀은 타보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차와 함께 남부로 실려갈 판이었다.
자리 사이의 틈새로 나란히 앉아있는 코리온과 하심의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카렐이 아무리 다쳤다해도 이 둘 정도 제압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뒤따라오고 있는 아카데미 치안대와 제후군의 병력수송차였다.
'젠장, 재수 옴 붙었군.'
카렐로서는 일단 파예드 아카데미에 도착할때까지는 가만히 있는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경계가 느슨한 학교에 도착하면 그때가서 도망치든 말든 따져볼 요량이었다.
코리온과 하심, 그리고 불청객 카렐을 실은 이 차는 심야의 어둠을 가로질러 파예드 아카데미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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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과 코멘이 성실한 (!!!) 아마추어 글쟁이의 유일한 낙이라는 건 이미 아시죠??? ^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