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0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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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양명의 사상이라......누가 이걸 모르나. 어디서 아는 걸 주섬주섬 베껴서 편집해 오셨군."
자신의 공개질의에 대한 헤데론의 답변서를 탁자 앞에 집어던지며 세네피스 황후가 자신의 회의석상에 모인 삼십여명의 중도파 유학자들과 몇 안되는 개혁파 유학자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란조 대제학의 죽음 이후 코리온이 수장으로 있는 파예드 아카데미에 학계에서 줄곧 수세를 면치 못해온 남극성당 유학자들은 그에 대항할만한 권위를 지닌 유일한 인물인 세네피스 황후의 밑으로 알게모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동부 탈라스에서 돌아온 세네피스 황후는 며칠이나 되는 '답변기간'동안 헤데론에게서 돌아온 것이 유치한 교과서 수준의 문장이라는 데 짐짓 분통을 터뜨리며 있는대로 언성을 높였다.
"최소한 후기유학에서는 확실한 우위가 있던 우리 남극성당이 이런 변증적 논쟁에서까지 유치한 답안으로 밀리고 있다니 이게 가당한 말인가!"
고함을 버럭 지른 세네피스 황후가 휘하 유학자들에게 집어던진 건 코리온이 저술한 '사단분집'이었다.
"후기유학의 대표적 논리인 명각정찰처에 관한 이 원리주의 먹통의 견해가 훨씬 논리정연하니 이 사태를 어찌하겠다는 수작인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헤데론 경을 더이상 우리의 대제학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회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황후의 마지막 호통에 유학자들의 얼굴이 갑자기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내 남극성당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간 유명무실했던 대문회(對問會)을 실시하고자 하니 이를 교내에 모두 알리도록 해라!"
세네피스 황후의 선언에 몇 교수들이 비명까지 지르고 있었다. 한 상급교수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오나 대문회는 부제학급 이상 사이에서는 그 선례가 없으니......"
세네피스 황후가 자신에게 감히 말대꾸를 하는 그 유학자를 순간 매섭게 째려보았다.
유학자들 사이의 일종의 '학문적 결투'격인 대문회는 그 교수의 말마따나 부제학급 이상의 최고위 유학자들 사이에는 그 선례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교내의 모든 생도들이 모인 가운데 두 명의 유학자가 마주앉아 벌이는 이 '조용한' 토론은 한쪽이 주제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10분 이내에 구술이 아닌 지면으로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한쪽이 자신의 붓을 꺾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번 열리면 짧게는 몇시간부터 길게는 며칠간 계속되기도 하는 이 대결은 학문적 능력은 물론이고 최고의 필력과 끈기, 집중력에 심지어 강인한 체력까지도 요구되는 것이었다. 초기 유학자들 사이에 유희의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던 대문회는, 그 이후 학자들의 명예를 위한 대결로 변모했고 유학 발전에 꽤 많은 공헌을 했지만 세나우스 2세 치세였던 230여년 전, 주페 태자가 일으켰던 '대문회 사건'이후로 유학자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되고 말았다.
당시 파예드 아카데미와 원리주의를 대표해 남극성당 중도파들에 도전장을 던졌던 주페 태자는 같은 응교중에서 선발된 한 명과, 상급교수 한 명,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부제학과의 장장 3일간에 걸친 피말리는 대결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대제학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주페와 대결하는 것을 두려워한 대제학은 그가 묵던 객사에 불을 내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고, 그곳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주페 태자가 다음날 있은 대제학과의 대문회에서 '대결할 가치가 없는 자와는 상종하지 않는다'며 스스로 붓을 꺾고 나가버리면서 남극성당에 최악의 치욕을 안겨주었던 일이 있었다.
어쨌든 패한 자는 스스로의 지위를 내놓고 얼마간이라도 근신하는 것이 전통인 이 대문회를 세네피스 황후가 제안했다는 것은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에게 자리를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이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선례가 없다하여 이를 피하다니, 그대도 원리주의 먹통들과 한패거리인가!"
세네피스 황후의 무서운 눈초리에 교수들이 일제히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내 열흘 후, 이번 주제에 관해 태학전 광장에서 대제학과 공개 대문회를 가지고자 하니 그대들은 이 뜻을 학교에 모두 알리도록 하시오!"
동부연합군 제1진으로 탈라스에 되돌아온 4천여 유목민 궁기병대의 지휘를 다시 맡게 된 카이두 경의 뒤에는 전사한 오빠 다얀에 이어 새로이 아버지의 부장이 된 탈란이 서 있었다.
"바툴 가 사람들 딴건 몰라도 저 체격 하나들은 정말 일품이군요."
애꾸눈을 하고 선 제네르가 당당히 말에 앉아있던 탈란을 힐끗 돌아보며 카렐에게 말했다. 도끼에 찢긴 머리와 왼쪽 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그 큰 상처는 꿰맨 자국 그대로 남아있어서 이 '유학자'가 그다지 '유학자다와보이지 않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상처 좀 가리고다니던지 빨리 지우라는 카렐의 말에 제네르는 '흉터 하나쯤 있는 게 기사단장에겐 더 어울린다'는 뜻밖의 대답으로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터였다. 물론 '탈라스출신답다'며 생각없이 빈정거리던 우베가 괜한 꿀밤만 번 건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그런 얼굴에 동부 스타일의 긴 치마식 찰갑과 단단한 견갑, 흉갑을 댄 위엄있는 갑주를 갖춘 그의 모습은 이제 완전한 '기사단장'의 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함께 선 토로 경까지, 휘하의 가장 믿음직한 두 명의 기병지휘관 사이에서 카렐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제네르 자네 몸도 못잖게 괜찮던데?"
"아, 아니, 전하께서 교수님 몸은 또 언제보셨어요?"
카렐의 옆을 줄곧 지키고있던 아메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묻자 제네르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번 베아트릭스 일에 이어 또한번 난처한 질문을 받은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몸 얘기만 하면 왜이렇게 과민반응들일까? 잠자리라도 해보고 이런소리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제말이 그말이라니까요."
제네르까지 맞장구치자 할말이 없어진 아메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듯 토로 경의 잔소리가 또 이어졌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지엄하신 황상이 되실 전하의 일상까지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시는 건 내명부 수장의 맞는 행실이 아니십니다. 황후가 되실 분으로서 앞으로 전하께 절대 순종하는 태도를 먼저 배우셔야 할 듯 합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귀에 영 거슬리는지 아메스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저 잔소리꾼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바툴 가 종가가 있는 슈카른 계곡의 깎아지른 절벽을 등지고 있는 비탈진 허허벌판에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새 동부연합군 숙영지는 샤레이의 정리를 마치고 이곳으로 이동해 온 6만여 대군의 총 본산이 될 곳이었다. 마랄루에서 대패한 플라칼 가의 군대가 페로의 거센 추격에 쫓겨 다시 남부로 물러나고, 서부와 연합군 결성이 알려지면서 결국 적들이 쳐올 곳은 이곳 탈라스밖에 없었다.
오랫만에 전사단의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말 위에 앉아있던 카렐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이었지만 전보다 기분은 한결 나아보였다.
"샤자한 공께선 정말 애처가이신가봐요."
카렐 들으란듯이 떠드는 아메스의 모습에 제네르가 또한번 웃음짓고 있었다.
"루사에서도 영내에 부인하고 함께 계시더니 마랄루에서도 전투 끝나자마자 부인부터 찾으시는 거 있죠? 지금도 종가에서 부인하고 함께 계실걸요?"
"캬, 나도 그정도 절세미인 마누라 뒀으면 그보다 더할수도 있을텐데. 솔 정도만....."
생각없이 입을 열었던 우베가 급히 입을 다물며 네피의 눈치를 살폈다. 솔을 세호 가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에 거의 한나절을 술과 한숨으로 지샜던 네피는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 한 표정이었다.
카렐이 그런 네피를 바라보며 힘있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네피. 곧 솔을 되찾아올테니까."
"......응."
네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퍼졌던 침묵을 깨뜨리듯 아메스가 갑자기 카렐의 어깨에 바싹 달라붙으며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전하께선요? 배우자한테 잘 할 스타일이세요?"
아메스의 속보이는 질문에 카렐이 시선을 사막으로 돌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그 기질은 보통 아버지 닮는다던데......선대폐하께서 어땠는지 잘 아실테고......"
순간 아메스의 일그러든 표정에 우베가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오르마즈' 이야기가 나오자 카렐을 문득 돌아본 토로 경이 짧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솔직히 전하께서 선대폐하를 그다지 닮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보긴 전하 성격은......선대폐하나 황후폐하보다는 돌아가신 오르마즈 경을 더 닮으신 것 같습니다만......"
"난 그분 뵌적도 없어서 잘 모르겠어. 모렌 박사 말로는 나 아주 어릴 때 그분이 직접 전사의 결연을 하고 그분 피로 축복까지 해 주셨다고는 하는데, 갓난아기때 일이니 내가 기억할 턱이 있나. 어쨌든 사람들이 날 볼때마다 그분 얘기들을 많이 하기는 하더군."
카렐의 시알피의 목을 두들기며 대답하자 제네르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오르마즈 경께서 직접이요? 휴우~ 대단한 영광이었겠는걸요? 엔간한 사람들은 그분 감히 쳐다보는것만도 대단한 영광으로 삼았었는데."
제네르가 조금 놀란 듯 카렐을 바라보며 그답지않은 감탄사를 내놓고 있었다.
"남극성당에 생도로 있었을 때 한 번 만나뵌 적 있죠. 검은 말에 치렁치렁한 비단 튜닉하고 갈색 머리 휘날리면서 한 번 지나가시면 그 카리스마에 사람들이 폭풍만난 갈대마냥 우수수 쓰러졌지 뭡니까."
"그양반 바람둥이가 되신 게 이상할것도 없구만."
'바람둥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자이납이 갑자기 질문을 꺼내들었다.
"우와, 그렇게 멋진 분이 옛날에 있었단 말이예요? 어떠셨는데요? 리쿠 학장님같이 목소리도 매혹적이었어요?"
"솔직히 전하 목소리에 비하면야......옥구슬소리였지."
"제대로된 사람 목소리면 누군 안그런가요."
갑자기 눈을 흘겨뜬 카렐이 제네르와 자이납을 대뜸 째려보았다.
"흠흠,"
제네르가 갑자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꾸눈의 그 희한한 얼굴에 전혀 안어울리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음......지금.....저게 누구죠? 설마....."
제네르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검은 경갑옷 차림의 무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레이프니르 단원들의 숙영지를 미리 둘러보고 돌아온 베아트릭스는 부하들 중앙에 있는 카렐에게 공손히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루사를 떠날 때에 비해 너무나 달라진 그 모습에 다른 부하들은 물론이고 제네르마저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카렐이 베아트릭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슬레이프니르와 슈로 기사단은 모두 내 직속이니까 단장직만으로는 둘이 동격이지만 제네르는 내 수석 보좌관을 겸하고 있으니 전사단 내 서열로는 자네보다는 한단계 위로군."
"알겠습니다."
침착하게 대답한 베아트릭스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제네르에게도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을 살핀 자이납이 우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뻣뻣하기론 하크로딘 단장님보다 더 강적이네요."
자이납의 악의없는 농담을 못들은 척 한 카렐은 은색 중갑주차림의 기사단장 제네르와 토로 경, 그 옆에 나란히 선 경기병단장 베아트릭스 세 사람의 모습을 꽤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재밌겠는걸."
남극성당에서 대문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코리온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230년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대문회라......그것도 남극성당 대제학과 부제학, 중도파 회색분자들끼리 말이야.....맘만 같다면 가서 내눈으로 한번 보고 싶지만......그럴 형편이 못되는게 안타깝군."
학교에서 온 편지를 접어넣으며 코리온은 옛 생각이 나는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머릿속에서 무얼 떠올리고 있는지를 잘 아는 샤드니가 조금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나우스 2세 폐하 시해당하시기 10년 전 일이었죠?"
"그 때 너도 있었느냐?"
눈을 반 쯤 뜬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학부생도 신분이라 전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죠."
"난 태자저하와 함께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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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페의 밑에 꿇어앉아 먹을 갈아주고 있던 코리온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극성당 부제학을 힐끗 돌아보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남극성당 중앙에 위치한 태학전 앞 광장에는 가랑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의 5천명에 가까운 양교 생도들이 운집해 이 '희대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만들어진 높은 제단의 양쪽 끝에는 20보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검은 무명포와 흰 무명포 차림의 두 유학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서로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4개의 금줄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주페는 이미 같은 등급의 응교와, 한등급 위의 직제학을 2,3시간만에 단 꺾어버리는 기염을 토하며 이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이번에 만난 저 중도파 출신의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은 제국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던 주페로서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하의 몇몇 남극성당 생도들이나 교수들은 조금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해야하나'며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3일간이나 계속된 이 끈질긴 대결이 도대체 어떻게 끝날는지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운 채 조용히 시선을 집중시킬 따름이었다.
물론 지금은 파예드 아카데미를 대표해 앉아있는 주페 태자가 한때 이곳 남극성당에서 학부과정 생도로 있었을 때 그의 학우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원리주의계열 교수들이나 생도들은 중간에서 도대체 누구를 응원해야 되는 것인지 꽤나 혼란에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날씨까지 숙부님을 돕습니다. 그다지 강건한 사람은 못되는 것 같으니 이 비를 계속 맞으면 얼마못가 탈진할 겁니다."
코리온의 '조언'에 주페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대문회에서 짜증나는 문답을 계속 유도해 상대를 흥분시키거나 긴 대결로 체력을 고갈시켜버리는 것도 꽤 자주 쓰이는 작전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작전들을 상대의 '몸과 마음의 수련'을 테스트하는 방법으로 도리어 권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페의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옳지 않은 방법이다."
조카가 갈아준 먹에 붓을 담그며 주페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계속된 3일간의 대결은 이미 이 두 사람을 극한의 상태로 내몰고 있었다. 주페는 반대편에 앉아 졸린 눈을 가까스로 부릅뜨고 있는 저 아름다운 여자 유학자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번의 글제인 '혁명시인론'에 있어 얼핏 대립적인 지위에 서 있는 듯 한 두 사람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사실 크지않았다. 주페가 통치수단의 차원에서 개혁파의 논리를 상당부분 수용한 절충적 원리주의자였다면, 세네피스는 그 본색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최고제후가 직계자녀라는 그 신분상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도파의 색채를 띠게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세네피스는 이런 정치적 견해의 유사점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주페와는 견해가 다른 원리주의 주류의 문제를 끌여들여 집요한 질문공세를 퍼부어온 터였다.
어쨌든 투모카프 자이센 총리의 공포정치와, 세나우스 2세 황제의 패권통치가 극에 달해있는 지금, 입밖에 내는것조차 금시시될 이런 주제로 대문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 유학자들의 관심을 온통 잡아끌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 끈질긴 토론이 3일간이나 지속되면서 타고난 강건한 몸으로 아직까지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주페 자신과 달리 상대는 논쟁 자체를 떠나 이미 육체적으로는 '탈진'의 상태에 접어든 역력했다. 하지만 학이 새겨진 금색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저 고집센 부제학의 아름다운 그레이오팔 눈동자만은 여전히 살아 번득이고 있었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큰일나겠구나. 저 몸으로는 얼마 못 버틸 것 같으니......"
주페가 글을 쓰기 시작하자 남극성당 생도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이미 반 쯤 정신을 잃어가면서 패색이 짙어진 세네피스 카파키 부제학이 주페가 던질 날카로운 반론에 제대로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주보고 앉아있는 두 사람의 옆에는 지난 3일동안 작성한 수백장의 문답지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고개를 반 쯤 숙인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카파키 부제학의 비에 젖은 무명포 위로 희미한 김이 솟아올랐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그의 손끝은 이미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훌륭하신 답변입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붓을 내려놓는 주페에게 코리온이 웃으며 말했다. 둘 사이에 놓인 시계는 답변시간 10분 중 아직 5분이나 남았다고 알려주고 있었지만 주페는 자신이 쓴 문답지를 별다른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세워진 차트에 조금은 서두른다 싶을 정도로 급히 걸었다.
세네피스가 졸린 눈을 치켜뜨며 저 '지독한 적수'가 내민 답변서를 올려보았다.
"답변하시겠습니까? 카파키 부제학님."
중간에서 사회를 보던 남극성당 교리가 이례적으로 물었다.
"물론......이다."
당연히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세네피스가 뜻밖에 고개를 끄덕이자 구경꾼들이 또한번 탄식과 탄성을 섞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멍 하니 앉아있던 세네피스는 떨리는 손끝으로 붓을 집어들었다.
"부제학님, 할만큼 하셨으니 이젠.......몸 상하십니다. 저분을 상대로 이정도 버티셨으면....."
세네피스의 먹을 갈아주던 응교가 애타는 얼굴로 말했지만 세네피스는 들었는지 아닌지 묵묵부답이었다.
붓을 든 채 큰 숨을 한 번 내쉰 세네피스는 떨리는 손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국 3대 명필중의 하나로 손꼽이던 그의 대단한 필력은 이미 완전히 망가져서 무슨 내용으로 쓰는지조차 가까스로 알아볼 수준이었지만 이미 판단력도 상실한듯해보이는 그의 손에서는 틀림없이 '답변'이 쓰여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이 광장에 잠시 긴장이 흘렀다. 답변을 다 쓰고 마지막 획을 긋던 세네피스가 또 한번 깊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부제학님?"
"괜찮......"
잠시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던 세네피스는 결국 붓을 쥔 채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운 빗물에 식어가는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당사자 두 명 외에는 단상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부제학님! 빨리 붓을 꺾으십시오! 제발! 이젠 물러나셔도 전혀 수치스런 일이 아닙니다!"
세네피스 밑에 꿇어앉은 교수가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오른손에 붓을 꽉 쥔 세네피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촛점없는 눈으로 의미없이 주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옆에 놓인 시계는 3분이 남았다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의식을 거의 잃은 채 쓰러진 세네피스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이상은 안되겠다."
진행을 맡은 교리가 뒤에서 대문회를 지켜보던 대제학의 결단을 기다리듯 문득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주페의 밑에 앉아있던 코리온까지도 쓰러져있는 세네피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우지끈 하는 소리가 단상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귀를 울렸다.
"아, 앗!"
너무나 놀란 코리온이 입을 쩍 벌린 채 숙부를 멍 하니 올려보았다. 그리고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학전 광장에 놀라움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중간을 부러뜨린 붓을 옆에 내던진 주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코리온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숙부님! 지, 지금......뭐하시는 겁니까! 다 이겼......"
"그 어떤것이 사람보다 중하겠느냐."
맞은편에 쓰러져있던 세네피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주페는 입고있던 무명포를 거리낌없이 벗어 이 '호적수'에게 덮어주었다. 세네피스가 이미 적어놓은 답변서를 힐끗 쳐다본 주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졌습니다. 카파키 부제학님. 이제 답변서만 거시면 끝납니다."
세네피스를 품에 안아 일으킨 주페는 가늘게 떨리고있는 세네피스의 회색빛 눈동자를 웃음띤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주페의 무명포를 몸에 감은 채 부들부들 떨고있던 세네피스 역시 이 적수의 암갈색 선한 눈동자를 멍 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회색빛 속두루마기를 걸친 주페의 넓은 어깨에서도 차가운 공기 속으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체온을 잃어가는 세네피스를 일으켜주며 가슴에 안으며 주페가 다시한번 말했다.
"빨리 답변서를 거십시오."
주페의 넓은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묘한 온기에 세네피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치 몸을 일으키려는 것처럼 붓을 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빨리 하십시오, 2분 남았습니다."
자신을 재촉하는 이 낯선 남자의 가슴에 뺨을 한 번 부빈 세네피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후두둑 소리와 함께 대나무로 만들어진 세네피스의 검은색 붓 중간이 그대로 꺾여버렸다. 주페 역시도 그의 뜻밖의 행동에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사회를 보던 교리가 광장에 모인 오천여명의 교수와 생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승부입니다!"
"제가 졌습니다......태자저하......대제학님과 좋은 승부 펼치십시오."
자신의 마지막 답변서와, 부러진 붓을 구겨 내던지며 세네피스가 거의 죽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혹스런 표정의 주페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이 여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숙부님! 숙부님!"
먹을 버리고 달려온 코리온이 주페의 어깨에 급히 마른 담요를 덮어주었다. 들것을 가져온 남극성당 생도들이 쓰러진 세네피스를 눕히는 모습을 바라본 주페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코리온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들것에 실린 채 멀어져가던 저 여인의 희미한 시선이 주페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심상치않은 모습을 마주서있던 코리온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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