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6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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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팔자가 최고로군."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변 전황을 할룩스로 전해들은 네피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운없는 적 경보병을 성의없이 발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숲 속으로 진입해올 동부 기병들을 대비해 숲 곳곳에 흩어져있던 남부 경보병들은 에키트 족 전사들에게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별것아닌 귀찮은 놈들에 지나지 않았다.
"딱 내 스타일이라는 카렐 녀석 말이 솔직히 일리는 있어."
나무 위에 숨어있던 적 경보병을 도끼를 던져 단번에 떨어뜨리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네피가 다시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솔은 잘 있으려나. 연락도 못해봤네."
도끼를 어깨에 걸고 산책이라도 하듯 걷던 네피는 한 명 더 죽였다며 팔뚝에 신나게 칼집을 내고있는 저 황당한 놈들에게 혀를 쑥 내밀었다.
"저기다!"
부하들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네피는 얼른 그쪽을 향해 내달렸다. 숲 중간에 나무들을 베어내고 만들어진 임시 막사터 중간에는 '아직도' 안죽고 살아있는 1천 2백여명의 경보병들이 견고한 원진을 이루고 적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치로 보아 에키트 족들이 지금 숲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병들간의 접전에 끼어들지 않도록 죽을때까지 시간을 끄는 역할이 이들과 주변에 흩어져 드문드문 공격을 가하는 적 경보병들에 주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대형을 이루고 싸우는 전투에 아직 취약한 에키트족들의 약점을 나름대로 따져 생각하낸 최후의 수단임에 분명했지만 역시 이들의 떼죽음을 늦추는 정도밖에는 효과가 없을 것임에 분명했다.
숲을 뒤지고 있는 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에키트 족 전사들 2천여명이 이곳에 모여들며 그들을 둥그렇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내가 앞장설테니까 따라와."
네피가 자기 도끼에 침을 퉤 뱉어 핏자국을 닦아내며 지시했다. 도끼를 어깨에 지고 성큼성큼 그들 코앞에 나선 네피가 숲이 쩌렁쩌렁 울릴 큰 소리로 외쳤다.
"난 특등급 가디언 네피고 여기는 탈라스의 에키트 족 전사 3천명이다! 느그들 숫자도 별볼일없는 거 잘 알테니까 결과는 내 입으로 말 않겠다. 싸울텐가 항복할텐가!"
"플라칼 가에 항복은 없다!"
호령하는 네피의 맞은편으로 다가온 지휘관인 듯 싶은 녀석이 십여명의 참모진과 함께 다가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쯧쯧, 부하들 등뒤에서 속편하니 저런 소리도 하지. 야! 준비해!"
네피가 자신의 도끼를 제대로 움켜쥐자 3열로 헐거운 포위망을 짠 에키트 족 전사들이 손에 도끼 하나씩을 들고 살기어린 눈으로 플라칼 가 경보병들에게 접근해들어가기 시작했다. 네피의 바로 앞에 위치하게 된 꽤나 운없는 병사들의 얼굴이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1천 2백명이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서서 만든 원진은 이 야만족 보병들의 돌격에 뒤어 벌어질 대대적인 학살극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준비한다! 우리는 플라칼 가의 영광스런 보병들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미 꽤 낡은 갑주 상태로 보아서 이들 대부분은 새로 들어왔다는 델루지 가의 증원군 경보병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번의 패전과 갖은 소모품 취급이라는 천대를 다 겪어낸 이들 플라칼 가 경보병들은 얼핏 보기에도 전의를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으아아!"
도끼를 쥔 네피가 제일먼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기 시작하자 그의 앞에 있던 남부 병사들 몇이 지레 놀라 비명을 꽥 질렀다.
그 때, 네피의 맞은편에서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던 지휘관이 갑자기 맥없이 픽 쓰러지고 있었다.
"잠깐! 잠깐! 하, 항복하겠소!"
방금 쓰러진 지휘관 뒤에 서 있던 다른 장교가 피묻은 단검과 입고있던 입고있던 흰 셔츠를 벗어 흔들고 달려나오며 외쳤다.
"썅! 이새끼! 항복은 무슨 항복이야! 배신자를 죽여!"
동료의 배신에 놀란 하급지휘관이 칼을 뽑아들고 대뜸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저들의 황당한 내분에 네피는 일단 손을 치켜들어 부하들을 정지시켰다. 대장을 지키던 근위병들과 몇몇 지휘관들, 그리고 이미 모의를 마친듯한 또 몇 명의 장교들이 뒤엉키며 느닷없이 벌어진 적 지휘부의 칼부림에 가뜩이나 기죽어있던 남부 병사들의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들고 있었다.
"썅! 여기서 다죽을거냐! 천대라는 천대는 다 받고?"
"이 망할 배신자야! 우린 군인이다!"
"그래! 너 잘났다! 그건 플라칼 가 출신인 너나 따져!"
"군인이 죽으라면 죽는거지!"
각 지휘관들이 저마다 악다구를 쓰고 저희들끼리 싸우면서 적진 안은 온통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일선의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교들끼리 알아서 빨리 결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씨발! 빨리 결정하란 말이야! 우린 바빠!"
기회를 잡은김에 그냥 쳐들어갈까말까 고심하던 네피는 적 '항복파'의 기세가 조금 우세한 듯 싶어보이자 그 큰 목소리로 또한번 고함을 버럭 질렀다. 지휘부까지 흔들리면서 겁에질린 몇몇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오고 있었다. 네피가 그들 병사들에 대고 다시한번 크게 소리쳤다.
"1분 이내에 무기 버리고 튀어나오는 놈은 살려주고 나머지는 항복하건 말건 싹 다 모가지를 쳐버릴테다!"
네피의 고함소리에 그의 바로 앞쪽에 있던 수백명이 붙드는 사관들과 지휘관들을 뿌리치며 허둥지둥 무기를 버리고 달려나오고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몇 명이 상관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있었지만 급속하게 붕괴되는 상황을 그것만으로 막기는 이미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1선이 붕괴되면서 남아있는 병사들의 공포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본 네피가 짜증나는듯 얼굴을 찌푸렸다.
"공격준비!"
네피의 고함에 에키트 족들이 일제히 도끼를 다시 치켜들었다.
"자, 잠깐! 전원 항복하겠소! 제발!"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는 동료를 제압한 장교가 다시한번 흰 셔츠를 흔들었다. 지휘부의 항복결정에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도 고집센 몇몇을 제외하고는 기다렸다는 듯 무기를 일제히 내려놓았다. 네피가 휘파람을 불며 들고있던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철저하게 천대받고 이용당해온 플라칼 가 경보병단은 이렇게 플라칼 가 역사상 최초의 '집단투항'으로 그 마지막을 고하고 있었다.
"슬슬 움직일때가 됐다."
동부연합군 좌군 사령관을 맡은 4제후 나람 눌레딘 경의 크지않은 목소리에 준비를 마친 북부용병 5천여명과 마랄루출신 결사대원 5천명이 대오를 맞추어 정열하기 시작했다. 전방에 5열로 포진한 결사대원들의 뒤로 8열포진한 북부용병들이 늘어서서 동쪽의 언덕 아래 자리잡은 마랄루 요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고 단단한 사각방패와 프레일, 도끼와 같은 단병기나 도끼창으로 무장한 결사대원들과, 중장갑에 원형방패, 장창으로 무장한 북부용병들의 외모는 딴판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단 한곳, 마랄루 요새의 서문을 향할 뿐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곳은 헤즈가 예상하는 보병대 후방이 아닌, 바로 적들의 심장인 마랄루 요새였다.
"요새 안에는 적 사역병들과 기타 지원병력 만 명, 종군노예 2만여명과 중장보병 6천여명이 있을 것이다. 나도 함께 전진할 것이다. 무운을 빈다."
갑주를 입고 천여명의 경기병 선두에 선 나람 경이 직접 군기를 직접 들고 앞장서 내려가기 시작하자 만여명의 보병들 역시 서쪽 언덕의 보루를 미련없이 버린 채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 보병들은 지난번 그리도 힘들게 차지한 이곳 보루를 버리고 내려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힘을 비축할 수 있도록 제대로된 공격에 동원되지 않았던 그 이유 또한 물론이었다.
군기를 쥐고 앞장선 나람은 페로가 남부보병대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을 중군 쪽을 잠시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번에 페로가 비교적 쉬운 공격목표인 남부 중장보병대 후미를 놔두고 요새를 직접 치는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그도 잘 알고있었다.
며칠 후면 모든 교전행위와 살생이 금지되는 한달간의 라마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사 이번 전투에서 그럭저럭 큰 승리를 거두어내 적 보병 몇만을 살육한다해도 남부 정도의 막대한 동원력이면 한달 동안 그 구멍을 메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 라마단 전에 저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다면 더더욱 궁지에 몰리는 쪽은 동원력이 빈약한 동부가 될 터였다.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쥔 만여명의 병사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발소리를 맞추어 동쪽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우렁찬 함성은 멀리 마랄루의 요새에 남아있는 적병들에게까지 충분히 들리고도 남을 터였다.
마랄루의 요새 마구간의 여물 속에 몸을 파묻고있던 시로는 자이납이 갑자기 자신의 아랫도리를 빤히 쳐다보자 얼른 다리를 오므리며 민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봐?"
"킥킥, 복원하셨다면서요?"
"알면서 묻긴 뭘물어?"
시로가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듣자하니까 복원한 가디언이 그렇게 끝내준다면서요?"
자이납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묻자 가뜩이나 숫기없는 시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난 경험 없으니까 경험있는 네피한테나 물어봐."
"나도 원칙은 있다구요. 임자있는 남자는 절대 안건드려요."
"20년 전에 죽었는데 임자는 무슨 얼어죽을 임자."
"그런가? 어쨌든 솔직히 그 툴툴거리고 땍땍거리고 무뚝뚝한데다가 재미없는 덩치 네피 대장보다는 정많고 몸매 쭉빵한 시로 대장님이 훨씬 매력적인데요?"
시로가 갑자기 가슴을 바싹 붙여오는 자이납을 기겁을 하고 밀어내며 입을 삐죽거렸다.
"리쿠 학장 허리띠나 머리에 두르시고 정신차리셔. 속옷 훔쳐다가 코에 쳐박고살아도 아무소리 안할테니까."
시로의 다분히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자이납은 화도 내지 않은 채 다시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햐아......그럼 좋긴한데 너무 멀리계시니......당장 오늘의 갈증은 어찌 풀꼬? 정말 생각없어요? 시로 대장님? 내가 총각딱지 떼드릴께."
"싫어."
고개를 돌려버린 시로가 딱 잘라 대답했다.
"쳇. 쌀쌀맞긴......임자도 없으면서......서투른 숫총각 어떤 여자가 좋아할 줄 알아요? 나같은 전문가한테 제대로 배워야지, 킥킥."
"갈수록 태산이네. 정말."
자이납을 또한번 째려본 시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북부용병대의 우렁찬 함성소리와 나팔소리에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자이납도 지금껏 저질스런 농담따먹기에 열중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에서 빛을 뿜으며 칼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시간 됐다."
자리에서 일어난 둘은 짐짓 태연하게 서문 제어실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계속해서 들어오는 부상병들로 온통 뒤엉킨 마랄루 요새 안쪽은 곳곳의 비명소리와 악을 쓰는 욕지거리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 사이를 짐짓 태연하게 걸어간 두 사람은 수백의 중장보병들과 사역병들이 사뭇 팽팽한 분위기로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는 서문 일대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서쪽 언덕 보루에 있던 적 보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보루를 텅 비워두고 모두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부장의 보고에 헤즈가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겠지. 거길 버리고 움직일리가 있나?"
"1열에 동부보병 5천, 2열에 북부 중장보병과 경기병 천여기까지 도합 만여 명의 병력입니다. 지금 우리 요새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길 공격하려는 모양입니다."
"미친놈들 아닌가. 라마단 전에 완전히 사생결단하겠다는 수작이군."
얼굴을 살짝 찡그렸던 헤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좌군이 주둔중이던 숲은 이미 적의 에키트 보병대 손에 넘어간 후였고, 요새 외곽에 다른 주둔지가 절실히 필요하기는 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들이 마치 먹어보라는 듯 언덕을 텅 비워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함정 아닐까요?"
참모의 질문에 헤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우리 병력을 분산시키려는 수작이겠지. 그러면 지들이 여길 먹을 수 있을줄로 아나보지?"
헤즈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요새 안에는 6천의 중장보병들이 있었고, 야전에서의 1대1 접전은 사실상 어렵지만 수성전에서만은 충분히 병사 하나 몫으로 써먹을 수 있는 사역병들도 만 명이 넘게 남아있었고, 평소엔 일꾼으로, 급하면 투창받이로라도 써먹을 종군 노예들도 2만이나 남아있었다.
"어쩐다?"
헤즈가 두툼한 살집이 오른 턱을 한손으로 고이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적들의 속셈을 모르는것도 아니었지만 텅 비어있는 저 언덕은 그 불안감을 충분히 상쇄시킬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영내에 중장보병이 6천에 사역병들까지 만 명이나 있으니 그정도 놈들 상대로 수성하는데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보병 3천명하고 사역병 2천명 북문으로 내보내. 비어있는 언덕을 기습 점거한다."
"예! 알겠습니다."
보병들을 내보낼 것을 명한 헤즈는 서쪽 언덕에서 정연하게 밀고내려오는 만여명의 적병들 대오를 실펴보았다. 이번에는 공성탑은 물론이고 변변한 공성장비도 없이 얼핏 사다리같아보이는 기다란 것들 몇십개만을 어깨에 걸고 오고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저깟녀석들 정도는 쉽사리 물리칠 수 있을것이 확실했다. 위험한 지점에는 중장보병들을, 그리고 성벽에 빼곡하게 설치된 수성장비들은 사역병들로 움직이면 저런 우습기까지 한 공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정작 그가 제일 신경쓰고 있는 건 기병들끼리 맞붙고있는 좌군 쪽이었다. 히르직스 녀석이 중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혼전양상에 접어든 저곳은 그를 대신해 릴라크가 혼자 고분군투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아직 어느쪽이 우세인지 섣불리 점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얼핏 이쪽이 조금씩 밀린다는 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세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중군의 중장보병대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북부보병대가 보병대 후방을 치지 않고 요새 쪽으로 온다는 사실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중장보병대에는 후위에 두었던 정예병들 이제 슬슬 앞으로 내보내 밀어붙이라고 해. 놈들이 이쪽으로 온다니 이젠 저 오합지졸들 제대로 힘으로 밀어붙여야겠다."
"알겠습니다."
"베흔 그 미친놈, 큰소리 땅땅 치고 가더니."
헤즈의 화살은 페로와 샤자한 공을 죽이고 돌아오는 데 실패한 베흔에게로 엉뚱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천하의 카렐도 케세크 경을 죽이겠다며 남부 중장보병 팔랑크스 대오에 잘못 뛰어들었다가 하마탄 덕택에 하마터면 죽을 뻔 했었던 것을 잘 아는 헤즈 사령관이었기에 처음부터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큰소리만 치지 않고 나갔더라면 녀석 덕택에 적 중군 후방이 엉망진창이 된 공훈으로 꽤나 감탄했을테지만 베흔이 자기 입으로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았던 것이 문제였다.
어쨌든, 꽤 큰 피해가 없지않았지만 중군 보병들이 이제 제대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으니 반 쯤 무너져가고 있는 적 중군 보병대는 조금만 기다리면 끝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요새 서문 통제실 경비병의 눈을 피해 뒷켠으로 잠입한 시로와 자이납은 적어도 5층 높이는 될 거대한 크레인장치 앞에 서 있었다. 무게만도 엔간한 대형셔틀에 맞먹는 저 금속제 서문은 이 크레인이 아니라면 인력은 고사하고 엔간한 공성장비로 들이받아도 꿈쩍 할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문을 여닫는 이 망할 크레인은 원칙적으로 총사령관 헤즈가 버티고있을 통제실 안, 그리고 적 보병들이 우굴거리는 서문 바로 위의 지휘소에서만 삼엄한 보안장치를 움직여 조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장치를 만들어 설치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동부 엔지니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굳건한 철조망으로 가려진 이 크레인 주변에는 십여명의 근위병들이 눈을 치켜뜨고 사람들의 접근을 봉쇄하고 있었다. 몇시간동안 몸을 숨기고있던 시로와 자이납에게 주어진 명령은 간단했다. 이 둘의 임무는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을 좌군 보병대를 위해 이 크레인을 움직이는, 아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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