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3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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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별 미친놈들 다보겠네.”
그날저녁 동부연합군 쪽에서 3천명의 병사들이 몰려나와 숲을 베어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경보병단으로부터 전해들은 헤즈 사령관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제대로된 장비하나 없이 도끼 하나 달랑 든 꽤나 무식해보이는 놈들이 손으로 나무를 하나하나 찍어대고 있다는 말에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까지 배꼽을 잡고 있었다.
“몸통갑옷에 도끼하고 단검만으로 무장한 것을 보아서 사역병들인 듯 합니다. 체격이 꽤 크고 무장도 부실한 것으로 보아 야만족에서 징발한 녀석들이 아닌가 합니다. 뭐, 나무 찍는 도끼질 솜씨는 일품이라더군요.”
“그래봤자 미친놈들이지 뭔가. 도끼질로 어느세월에 그 숲을 다 베겠다고?”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한 헤즈는 경보병단장에게 물었다.
“적 기병들이 호위하고 있다고 했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녀석들이 쓰러뜨린 나무를 그대로 놔두고 전진하고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는 통에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있을 따름입니다.”
“가지가지 미친짓은 다하는군. 경보병 3천만 보내서 녀석들 쫓아내버려.”
“알겠습니다!”
힘있게 대답한 장군은 즉시 할룩스를 끊고 자신을 둘러싼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숲 곳곳에 매복 혹은 함정을 만들어놓고 동부 기병 혹은 보병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오던 이들은 간만에 제대로 ‘때려잡을’ 상대가 생겼다는 데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상대는 사역병 3천명이다. 너무 세게 치지 말고 적당히 살살 다뤄주도록 해. 혹시나 기병놈들 쫓아오면 이 숲 속으로 끌어들여 역습하도록 한다. 제대로 매운맛 좀 보여줄테니까.”
비교적 안전한 숲 중앙에 모여있던 경보병 3천여명이 각자의 지휘관들을 따라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있는 남쪽 숲 경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남부에서 새로 도착한 5천여명의 증원군이 합류하면서 경보병단의 사기는 오랫만에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방패와 한손검으로 무장한 경보병들은 그들다운 날랜 걸음으로 숲을 가로질러 행군하고 있었다. 숲 속에서는 천하의 동부기병들이어도 이들 경보병들의 사냥감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적정을 정찰하고 돌아온 정찰병의 보고에도 그다지 놀라운 건 없었다.
“도끼로 베고있는 것 치고는 상당히 빠릅니다. 벌써 0.5스타디아정도는 숲을 파고들어왔습니다. 녀석들이 벤 나무를 치우지 않고 그냥 바닥에 방치해 둬서 천연의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으니 주변의 적 기병들은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븅신새끼들,”
정찰병으로 나가있는 자이납으로부터 적 경보병들이 접근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네피는 각 지휘관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했다.
“작업 정리하고 지정장소로 후퇴한다!”
숲 남쪽을 에워싸고 나무를 베어들어가던 3천여명의 에키트 족 전사들이 작업을 하 던 큰 도끼를 바닥에 내던지고 뒤로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숲 속에서 몰려오는 적 보병들의 큰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이들 역시도 서두르기 시작했지만 쓰러뜨린 나무들을 땅바닥에 마치 전시하도 하듯. 그것도 최대한 방해가 되도록 가지까지 마구 흩뜨려 바닥에 널부러놓은 상태에서 어차피 질서있게 빠져나올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난리법석통’을 허우적거리며 ‘걷고, 넘고, 기어가며’ 나오던 이들 전사들은 그 장애물들의 정확이 중간쯤에 멈춰서더니 적들이 몰려나올 숲 쪽을 향해 일제히 돌아섰다.
“준비!”
네피가 도끼를 치켜들며 소리를 지르자 그들이 등에 메고있던 둥근 방패와 작업용 보다는 조금 작은, 전투용 도끼를 일제히 한손에 움켜쥐며 고함을 올리기 시작했다.
“후, 저친구들이 정말로 잘해줄까?”
외곽에서 2천의 슈로 기사단을 이끌고 이들을 지켜보던 제네르가 내심 걱정스러운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천하의 페로가 내놓은 제안이기는 했지만 백병전의 귀재라는 저들 산악 야만족들이 싸우는 광경을 실제로 본 일은 한번도 없는 그였기에 안심은 되지 않는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저 나무로 만들어진 장애물들 때문에 설사 저들이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기병들이 도와주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일부러 그것을 노리고 벌린 일이기는 했지만.
“온다.”
제네르가 눈을 부릅뜨며 숲 경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귀청을 울리는 함성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회색빛 라멜라갑옷 차림의 적 경보병들이 기세등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엉?”
‘사역병’들을 향해 돌진하려던 남부 경보병들은 눈앞을 가로막은 통나무들과 무성한 가지들, 땅바닥을 덮고있는 정신없는 덤불들에 순간 당혹해하며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장애물들 속에 파묻힌 채 칠십여보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동부 사역병’들이 이들을 놀리듯 엉덩이를 드러내며 큰 소리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제기랄! 넘어가! 다 잡아죽여!”
지휘관들의 명령에 5천여명의 보병들은 이 장애물들을 넘고, 기어가며 자신들을 놀리는 적 ‘사역병’들에게 허우적거리며 접근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형 따위는 전혀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썅, 저새끼들 뭐야,”
몇몇 경보병 지휘관들이 전투병인 자신들이 코앞까지 접근했는데도 달아날 생각도 않은 채 ‘실실 쪼개고 있는’ 저 덩치큰 녀석들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 경험많은 지휘관과 고참병들의 입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녀석들 조심해! 어쩌면......”
눈치빠른 몇몇의 고함소리가 채 끝맺기도 전에 장애물들을 넘고있던 그들의 이마 앞으로 저 야만족들의 첫번째 ‘선물’이 날아왔다. 3천명의 에키트 족 전사들이 한명씩을 조준해 날린 작은 손도끼에 장애물을 넘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이들 경보병들의 선두병사들이 저항한번 못해본 채 끔찍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야만족 전사들이 섬뜩하게 날이 선 도끼를 일제히 치켜들고 장애물을 넘어오는 남부 보병들에게 일시에 돌격해들어갔다.
“대가리를 찢어발겨버려!”
“썅! 열토막을 쳐주마!”
남부 보병들은 ‘와아’하는 그냥 함성소리가 아닌, 거의 미친놈들이 질러대는듯한 욕지거리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대며 도끼를 내지르는 이 미친놈들의 정체를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숲을 갈갈이 찢듯이 울려퍼진 괴이한 함성과 함께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온 저 거구의 괴물들은 덤불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불쌍한 남부 경보병들의 머리 위에 일제히 도끼날을 내리찍었다. 사방에서 쪼개지는 투구와 방패 소리, 가까스로 공격을 막은 경보병들이 쓰러지며 내지르는 비명과 동시에 이 크지않은 덤불 안에는 소름끼칠정도의 피냄새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모여! 집결해 써워! 흩어져있지 말고!”
사관들의 고함소리가 허망하게 곳곳에서 메아리쳤지만 눈 깜짝할새 상황은 수습불능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료들과 정연한 대형을 이루어 싸우는 데 익숙했던 이들은 이 망할놈의 장애물들 때문에 지금의 싸움이 ‘전투’가 아닌, ‘일대일 난투극’이 되어버릴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렇기로 말하면 지금 이들은 제국에서 가장 달갑지않은 최악의 족속들을 만나고있는 셈이었다.
1대 1 싸움으로 치면 제국에서 이들을 당할 자들은 가디언이 아니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탈라스 출신이지만 이거 민망할 지경이군,”
제네르가 자기도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거의 일방적인 도륙 그 자체였다.
장애물들 한중간에서 이들 야만족들과 맞붙은 경보병들은 훈련받은대로 나름대로 저항하려 했지만 부족에서 특별히 선발된 이들 전사들에 비하면 힘과 빠르기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부는 도망치다가 나무에 걸려 볼쌍사납게 자빠져 죽음을 당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두셋끼리 붙어다니는, 나름대로의 수를 내서 살길을 찾는 남부 병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달아나지도 못한 채 이 무서운 적과의 일대일 대결을 강요받고 있었다.
물론 가장 살판 난건 갑주도 입지않은 맨몸에 덤불들 사이를 신나게 ‘날아다니고 있는’ 네피였다. 네피가 이들에게 내린 지시래봤자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숲속으로 쫓아들어가지 말고 나오는 족족들이 다 죽여버려라’는 꽤나 단순한 한가지 뿐이었다. 이런 길은 들어오는것이 어려웠듯이 도망가는것 또한 쉬운길이 아니었다. 나무를 베어낸 이 거대한 미로는 몇분 지나지 않아 거대한 무덤이 되어가고 있었다.
“훗, 탈라스 야만족들이었군.”
마랄루의 요새 전망탑에서 망원경으로 동쪽 숲을 내려다보던 베흔이 바로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헤즈 사령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저정도 잔대가리 쓸 녀석이면 페로나 제네르 년정도 되겠군.......아하, 저기 자칭 슈로 기사단들께서도 계시는구만. 어쩌시겠소. 헤즈 경. 빤히 눈앞에 보면서도 손도 쓰지 못하니.”
“지금 농담할때입니까!”
“농담이 아니고......녀석들이 저렇게 만든 덤불로 숲 남쪽 경계를 틀어막아버리면 앞으로도 기사단들이 저곳을 돌파해 적 우군을 기습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텐데? 만 8천에 가까운 기병대가 일시에 돌격하려면 저 나무들을 몽땅 다 걷어야 할거요. 문제라면 후질르는건 잠깐이지만 그걸 치우는 건 몇십배의 시간과 노력이 더 든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죠.”
베흔의 빈정거림에 한참 기분이 상해있던 헤즈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좋습니다! 이번에 지원군도 왔으니 우리가 더이상 웅크리고 시간을 끌 이유가 없겠소. 당장 적들을 총공격해 격퇴시켜야겠습니다!”
베흔이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마랄루의 요새 남문이 드디어 열렸다는 보고에 서둘러 달려나온 페로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동부연합군 진영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말을 끌고오라 손짓한 페로가 뒤를 따르는 무장들에게 말했다.
“이제 결판을 지어야 할 때가 왔군.”
무장들 역시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에 그다지 놀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샤자한 공이 지난번 전투의 부상으로 누워있는 지금 이제 총지휘는 페로 혼자만의 몫이었다.
“제네르 경에게 퇴각을 명하게. 에키트 족 경보병대는 적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면 숲으로 진입하고.”
투구를 눌러쓰고 말에 뛰어오르는 주인의 뒤를 칼을 쥔 다룬이 단호한 표정으로 지키고 섰다. 미리 저녁식사까지 모두 마치고 대기하던 동부 병사들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지시받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샤자한 공의 부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적 중장보병 팔랑크스대형으로 집결중입니다. 현재 2만이고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총 4만여의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남부 중군과 상대해야 할 동부연합군 중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2만이 채 안되는 보병들과 4천여 탈라스 궁기병대, 만여기의 유목민 경기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페로가 적 요새 서쪽의 언덕을 올려보며 물었다.
“북부용병대는 준비완료했나?”
“요새 서쪽 언덕에 비상대기중입니다. 그쪽을 지원할 이곳출신 보병결사대 5천과 경기병 천도 나람 경의 지휘하에 대기중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번에는 동쪽의 숲 쪽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적이 차지하고 있던 서쪽 언덕을 빼앗으면서 그곳에 주둔하던 적 기사단과 경기병단은 모두 숲의 좌군에 합류해 있었다. 플라칼 가의 충원군에 델루지 가에서 온 지원군까지 합쳐져 만 4천으로 다시 늘어난 적 기사단과 4천여 경기병대, 그리고 만여명의 적 경보병단이 저 숲속 어딘가에서 이쪽을 노리고 돌격해올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을 맞을 동부연합군 우군은 토로 경의 지휘하에 6천여의 정규군 경기병대와 5천의 정규군 중장기병, 2천 5백여의 유목민 중기병과 2천의 슈로 기사단이 전부였다.
“야전에서 우리 중군이 먼저 무너지느냐, 우리가 저놈들의 거점을 먼저 빼앗느냐의 문제로군.”
페로가 여전히 부실한 동부 보병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퇴각! 퇴각한다!”
페로의 지시를 하달받은 제네르가 함께 나와있던 슈로 기사단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남쪽으로 다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네피 역시도 별도의 명령을 받았는지 3천여 에키트 족 전사들을 이끌고 달아나는 적들을 쫓아 숲 속으로 밀고들어가기 시작했다. 저들이 남기고 간 덤불에는 이미 2천여구는 되는 적 경보병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시로 대장하고 자이납이 안보이는군요?”
옆에서 함께 말을 달리던 발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제네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장님?”
“아냐.......”
낮은 한숨을 내쉰 제네르는 문득 마랄루의 요새 쪽을 돌아보았다.
“허, 고놈들 참. 많기도 더럽게 많다.”
마랄루의 요새 삼면의 문으로 쏟아져나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적 중장보병들을 바라보며 자이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끄러.”
그놈의 입을 잠시도 쉬지않는 자이납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으며 시로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런 일은 전하가 하셨다면 정말로 제격일텐데.”
위압적인 모습의 마랄루 요새를 올려보던 시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너무 크셔서 안돼요. 어디 그키에 맞는 갑주가 있겠냐구요.”
자이납은 몸에 입고있는 남부 사역병의 갑옷이 영 어색한지 자꾸 몸을 비틀고 있었다. 몸에 맞지않는 작은 갑주를 억지로 끼어입은 시로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분이라면 이렇게 위장하고 올 필요도 없지......그냥 벽을 찍고 올라가셨을테니까. 이크,”
가슴버클 하나가 끊어진 것을 발견한 시로가 입을 삐죽거리며 마랄루 요새의 동쪽 입구로 향했다.
수만명의 보병들이 계속해서 악을 쓰며 몰려나오고 있는 입구 부근은 눈코뜰새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요새 앞에 만들어져있는 큰 장애물들을 걷어내는 사역병들의 작업도 한창이었다. 대마장애물을 하나씩 어깨에 진 자이납과 시로는 다른 짐을 지고 들어서는 수백의 사역병들과 슬쩍 어울려 쪽문을 통해 요새 안으로 태연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지고 온 장애물들을 요새 안의 창고에 얹어놓은 둘은 다른 사역병들의 눈을 피해서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새 북쪽에 만들어져있던 중장보병대 숙소에서는 여전히 병사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고 그 소란 덕택에 그들은 별다른 시선을 받지 않은 채 남쪽의 통제실 탑 주변 마구간까지 접근해갈 수 있었다.
“엇,”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시로가 자이납의 머리를 얼른 내리눌렀다. 요새 통제실 문이 열리더니 반짝이는 은빛 갑주를 입은 한 사람이 루토와 함께 탑에서 나서고 있었다. 말 여물 뒤에 몸을 숨긴 둘이 그 ‘은빛 갑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거의 카렐과 비슷할 정도의 놀랄만큼 큰 키와 균형잡힌 체격 외에는 그 신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루토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인 녀석은 옆에 세워져있던 회색 준마에 훌쩍 올라타고는 다른 근위대 가디언이 넘겨준 은빛의 거대한 창을 굳게 쥐고 남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녀석 누구지? 근데 근위대 놈들이 여긴 왜 와있는거야?”
고개를 갸웃거린 시로가 통제실로 돌아가고 있는 루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히야, 방금 나간 기사 누군지 몸매 하나는 죽여주네. 정력도 죽이겠네.”
“하여간......”
자이납을 한 번 째려본 시로는 여물 속에 몸을 더 깊이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여기서 대기하자.”
4만에 가까운 적 중장보병들이 이루고 있는 끝도없이 긴 대오를 바라보며 선두에서 유목민 기병대와 함께있던 페로가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카이두의 맏아들 다얀 바툴이 이끄는 만 4천의 유목민 기병대가 함께하기는 하겠지만 실상 중군의 생존 여부는 플로브 경이 이끄는 2만의 동부 보병들 손에 달려있었다.
그간의 전투들과 공성전에서 나름대로 경험을 익혔을 이들 보병들이 다시한번 야전에서 마주한 남부 중장보병들에게 최소한 지난 루사의 전투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동부연합군 전체의 붕괴는 불을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나마 있던 정예보병들인 북부용병대와 지원병 결사대가 서쪽 언덕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대오를 이룬 남부 보병들의 큰 함성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동부 보병들이 각자의 무기를 집어들며 맞받아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다 합치면 거의 7만에 달할 양군의 우렁찬 외침에 마랄루의 크지않은 언덕 주변의 공기가 떠나갈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중장갑에 짧은 검으로 무장한 남부 보병들에 대항할 동부 중장보병들은 방패와 길지않은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중장보병 대오 중간중간을 채우고 있는 경보병들은 비교적 긴 할버드로 틈새만을 노려 파고드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진격!”
적진에서 들려온 큰 돌격나팔 소리에 페로가 고개를 홱 돌렸다. 4만의 적병들이 발소리를 맞춰 전진해오는 그 규칙적인 진동에 땅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중군 전진한다!”
페로 지시에 다얀의 유목민 기병대와 플로브 경의 보병대도 적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적의 발소리에 일부러 엇박을 놓으며 바닥을 최대한 힘있게 딛는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반 쯤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쌓여온 피로와, 이를 이겨온 살기가 어우러져 그들에게서도 광기에 가까운 광채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궁기병 돌격!”
다얀의 명령에 일제히 선두로 쳐나간 4천의 탈라스 궁기병대가 이 대결의 첫번째를 대대적인 투창공격으로 수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적 중장기병들은 쓰러지는 수백의 동료들을 뒤에 남긴 채 끊임없이 쏟아지는 사격을 꿋꿋이 버티어내며 계속 전진해왔다. 뒤이어 유목민 경기병들까지 가담해 무려 만 4천명이 계속해서 쏟아붓는 투창에 밀집 팔랑크스대형을 이룬 적들은 진격로 중간에 널부러진 동료들의 시체와 그 몇배는 되는 부상자로 그 흔적을 확실히 남기고 있었다.
“기병대 물러난다!”
거리가 어느정도 가까와지자 페로가 팔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유목민 기병들이 일제히 보병대 대오 중간중간으로 물러나며 지난 루사의 회전 2차전때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버티기 작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을 쓰며 고함을 내지르는 4만여 남부 보병들이 언덕을 거세게 달려내려와 동부 보병진과 굉음을 울리며 충돌했다.
마랄루와 샤레이, 동부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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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에 첨부되어있던 전황도는 유조아의 개편으로 태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일시 삭제했습니다. 개편 후 다시 올릴 예정이며, 그 전에는 혈맥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로 가시면 작가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