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0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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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에키트 족 녀석들이 북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베아트릭스의 보고에 카렐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에키트 족 측에서는 이미 서부연합군과의 조약을 파기했고,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1천 5백의 선발된 전사를 더 보내드리겠다고 연락해왔습니다."
베아트릭스의 보고에 갈라크가 카렐과 함께있는 네페티 부인 들으라는 듯 한마디를 냉큼 덧붙였다.
"녀석들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서부하고 남부놈들 껍데기는 모조리 벗겨서 천막 재료로 쓰고 뼈는 발라내서 장식품으로 쓰고 싶답니다."
대놓고 막말을 하는 갈라크에게 카렐이 대뜸 험한 눈길을 보냈다. 겔 한쪽을 지키던 '서부 출신' 유시프 장군 역시 그다지 곱지않은 눈으로 갈라크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그래, 녀석들 용감하고 잘 싸우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하나하나가 강하다고 모아놨을 때 좋은 군대가 되는 건 아니지. 듣자하니 녀석들 완전히 통제불능에 제멋대로던데, 그런 놈들을 제대로 보병답게 쓰려면 훈련이나 실전감각을 좀 익혀야 할거야."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이번에는 함께있던 탈란이 입을 열었다.
"녀석들의 태도는 조금 더 현실적인 맥락으로 파악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지금 북극은 곧 겨울이 시작될 시기입니다. 보고에 따르자면 지난번 적군이 월동거래를 덮친 탓에 에키트 족에서 무더기 동사나 아사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 5백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북극에 돌아가 봤자 군더더기 입만 될 뿐입니다. 에키트 족장이 전사를 더 보내줄테니 맡아달라는것도 결국은 입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도일 겁니다."
이곳 출신다운 탈란의 조언에 카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먹고 입혀주면 뭐든지 다 하겠다?"
카렐의 질문에 탈란이 냉큼 대답했다.
"그런 셈입니다. 모두 합치면 삼천 명 정도의 보병 전력인데 녀석들은 기본적인 옷가지와 북극에 남은 가족들 겨우내 먹을 양식과 의복, 도끼, 방패만 준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지난 여러번의 혼란기때도 대단한 활약을 했던 타고난 전사들입니다."
"탐나긴 한데 말이야......경보병감으로 더 바랄데가 없는 놈들인데.....저런 놈들을 도대체 누구한테 맡겨야 하는거지?"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카렐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우베를 불러들였다.
"이봐, 이녀석들을 다 마랄루로 보내도록 해."
"예?"
"그 통제불능이던 유목민들도 정규군들하고 합동작전을 치르니까 그제서야 분위기가 제대로 잡혔잖나. 똑같은 도끼잡이들이니까 네피보고 맡으라고 그래. 그녀석 스타일하고 딱 맞을테니."
"라바니 세호 경. 말씀해보시오. 왜 세호 가 병사들이 사령관인 나도 모르는 새 에키트 족 인질들을 데리고 소금광산에 가 있었는지?"
눈을 부릅뜬 샤드니가 부사령관이며 보병사령관인 라바니 경을 무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보병 2백이 전사하고 5백명이 무더기로 포로로 잡힌 건 물론이려니와 천 오백이나 되는 인질까지 무더기로 놓친 이 황당한 사건은 제대로된 전투중에 발생한 것도 아니었고 인질들의 반란으로 있은 것도 아니었다. 그 참극은 전투도 아닌,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망신스러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감한 얼굴로 한숨만을 내쉬고 있는 라바니 경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 말해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천 오백이나 되는 인질들을 영외로 내보내는 데 건방지고 돈욕심으로 똘똘 뭉친 저 한심한 부사령관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한 샤드니도 결코 아니었다.
"내 인질 서너명이면 하급장교들이 물욕에 어두워 저지른 짓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으나......천 오백이나 되는 인질이 사령관의 허락도 없이 영외의 소금광산에서 세호 가 병사들 통제하에 노역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군요. 라바니 경. 제발 설명 좀 해주시오."
"저도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단속하지는 못하는 형편이니....."
"누굴 바보로 아는 것이오!"
평소 그리 조용하던 샤드니가 갑자기 사령실이 떠나갈 정도의 큰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은 병사들은 어찌할 것이며 달아난 인질들은 어찌할 것인가! 에키트 족이 이미 협상파기를 선언해버린 이마당에 그걸 네놈 혼자 어떻게 책임질것이냐는 말이다!"
라바니 경은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들어와 있는 서슬퍼런 시미터 날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바닥에 꿇어앉았다.
"주둔지 무단이탈과 그 방조는 당연히 참형이거늘! 명색이 연합군 부사령관이 솔선수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죄송합니다. 제발......"
라바니 경의 그 자존심도 이마당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샤드니가 당장 자신을 끌어내 참수한다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볼쌍사납게 자리에 꿇어앉은 라바니 경은 목숨을 비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극도의 흥분으로 이까지 빠드득 갈고있던 샤드니는 칼을 거두며 냉랭하게 말했다.
"쓰레기같은 네놈의 행실을 보아서는 참수함이 당연하나 그간 서부에 해 온 공헌이나 황상의 배우자였던 옛 지위를 생각해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다만 앞으로 두 달동안 부사령관으로서의 모든 권한은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대신 행사할 것이니 그동안 근신하도록 해라!"
참모진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한 라바니 경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령실을 나설수밖에 없었다. 사령실 앞에서 숙부를 기다리던 부장 사르키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괘......괜찮으세요?"
"닥쳐."
라바니 경은 엉뚱한 사르키스에게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며 그가 내민 자신의 말고삐를 빼앗듯 나꿔챘다.
"천하에 멍청이새끼들.....살아돌아온 놈들 어딨어?"
"지금 규율대에서 심문중입니다."
"몇명이랬지?"
"32명입니다."
"심문따위 필요없다. 주둔지 무단이탈이니 다 참수해버려."
숙부의 뜻밖의 명령에 기겁을 한 사르키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녀석들은 모두 사병들입니다. 명령에 따랐을 것인데....."
"명령은 얼어죽을 명령, 지들 몫도 있으니까 낀거지! 다 처형해!"
자존심이 단단히 상해버린 숙부가 생존병사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자신의 잘못을 은근슬쩍 덮어버리려는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사르키스는 이 말도안되는 명령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들 32명 뿐만이 아니고 이번에 적들에게 자진투항했다는 5백여명의 나머지 병사들도 송환 후 모두 죽일 수밖에 없어진다는, 끔찍한 사실이었다.
"포로가 된 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나중에 일이 커질 것이온대......그냥 강제노역형 정도로......"
"그놈들도 데려다가 싹 다 죽여버리면 돼."
숙부의 태연한 대꾸에 눈앞이 아찔 해진 사르키스는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이 남자가 서부에서 '성인'으로 추앙되는 자신의 사촌형 주페 태자의 친아버지가 정말 맞나 하는 황당한 의심까지 품고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막사에 도착한 라바니 경 앞에는 뤼렌 세호 부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안좋은 일 있었다고요? 오라버니."
"군대 일이니 네가 신경쓸 거 없다."
여동생에게까지 괜한 짜증을 낸 라바니 경은 무뚝뚝하게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아하, 라바니 경이시구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라바니 경은 자신의 막사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구의 남자 모습에 순간 화들짝 놀라며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롬 공께서 오셨군요."
"사막 따위는 정말 딱 질색이구려."
오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던 제롬 공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손에 들고있는 리커잔을 기울였다. 숙부와 함께있던 사르키스도 난생 처음 눈앞에 마주한 남부 최고제후의 위압적인 모습에 허리를 깊이 숙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엔간한 가디언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사르키스의 허벅지 굵기와 비슷함직한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을 지닌 이 건장한 남자가 그 조그만 네페티 부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린 사르키스는 내심 황당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빛과 금발이 어울린 오렌지빛 머리칼과 초록색의 반짝이는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의 제법 잘생긴 서글서글해 보이는 얼굴은 천하절색으로 꼽히던 그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두 손이 묶인 채 제롬의 앞에 꿇어앉혀져 있는 솔은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연신 이를 따닥거리고 있었다.
"샤드니 외숙부에게 한바당 당하셨다구요. 라바니 경."
제롬 공이 피익 웃으며 묻자 흥분한 라바니 경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뭐, 군을 이끌다보면 이런일 저런일 다 있는것 아니겠소. 그런건 다 잊어버리고 술이나 한잔 하시구려."
오빠인 라바니 경에게 기꺼이 술잔을 권하는 제롬의 호감어린 태도와 준수한 외모에 뤼렌 부인은 이 '손녀사위감'이 꽤 마음에 드는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거칠어보이는 인상과 오만한듯한 태도가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르키스는 속내를 애써 감추며 어머니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저 역시도 제롬 공께 얘를 보내는 것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뤼렌 부인이 여전히 벌벌 떨고있는 솔을 힐끔 바라보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공께서 지난번 이 아이에게 큰 실수를 하신 것이니 혼담에 앞서 일단은 사과부터 하시는 것이 옳은 순서일 것입니다."
얼어붙어있는 솔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뤼렌 부인의 나름대로의 '배려'임을 잘 아는 제롬은 갑자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솔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내 지난번 너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만 이성을 잃고 못된 짓을 저질렀으나 앞으로는 부부로 만날 것이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거다. 네 그 미모에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겠냐. 이젠 그만 화를 풀어라."
제롬의 사과인지 아닌지에 사르키스가 보일듯말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귀에는 '앞으로는 합법적으로 강간하겠다'는 뜻의 어처구니없는 핑게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뤼렌 부인이나 라바니 경은 나름대로 흡족한 표정으로 솔에게 무어라 답변을 강요하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느새 살기까지 번득이는 눈을 한 솔은 턱에 힘줄까지 드러났을 정도로 치를 떨고있었다.
"내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아직 모르는군요.....못된건지, 멍청한건지,."
솔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제롬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솔의 태도에 당혹한 라바니 경은 솔의 저 철없는 모습에 행여 제롬이 화를 내지나 않을까 재빨리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금 굳어진 표정의 제롬은 쌀쌀맞게 고개를 돌리며 뤼렌 부인에게 미리 준비해온 두툼한 서류를 내놓았다.
"약속된 지참금은 식을 올리는대로 전달될 것입니다. 일단 오늘은 혼약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의 '보호자'로서 혼약서에 기쁜 얼굴로 서명하는 어머니 뤼렌 부인의 모습과, 그 옆에서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고 있는 솔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르키스는 저 아이를 잡아온 것이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는지 갑자기 의구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을 잠시 내보내고 홀로 겔 안에 누워있던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이 올려보이는 둥근 터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엔지 거의 원수지간같이 구는 어머니와 네페티 부인 사이에서 이래저래 난처할수밖에 없는 카렐은 이번에도 또한번 그 처지를 절감한 셈이었다.
아메스가 그 특유의 똘똘함으로 황후의 눈치를 교묘히 피해간다고 하면 네페티 부인은 황후와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식이었고, 솔은 황후가 무어라하건 무조건 순종하고 있었지만 도리어 셋 중에서는 제일 미움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위치가 확고한 아메스와 네페티 부인은 접어두고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암투'나 '처세' 따위의 단어조차 모르는 순진한 솔을 떠올릴때마다 카렐의 가슴이 잔뜩 미어오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순간 무슨 이유엔지 카렐의 눈꼬리에 자꾸만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카렐은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지난번 읽다 만 책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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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아버지 투르케스크 공의 성난 목소리가 오르마즈의 병실 안을 쩌렁 하고 울렀다.
"보시다시피 이상태로는 제대로 사령관 노릇을 할 수가 없으니......가문 군 사령관직을 내놓으려 합니다. 제 부장인 바스토프 경이 뒤를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도통 연락이 되지 않던 딸에게 결국 직접 찾아온 투르케스크 공은 지친 표정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오르마즈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고는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언니를 찾아온 세네피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병실 구석에 말없이 서 있었다.
딸의 느닷없는 폭탄선언에 얼굴의 붉어질정도로 화가 치솟은 투르케스크가 또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이런 중요한 때 가문의 중핵인 네가 물러나겠다니!"
"이런 중요한 때 일도 못할 병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르마즈는 얼굴을 찡그리며 잘려나간 팔을 추켜올렸다. 군에 관해서라면 이 딸 하나만을 철석같이 믿고있었을 아버지에게 오르마즈의 선언은 말 그대로 충격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네가 직접 전장에 나갈 필요는 없으니 자리는 그냥 지키고 있거라. 가문 근위부대장 토로 로버넬 장군이 야전을 맡을거다."
"군문의 일이 쉽사리 분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한명에게 권한을 몰아줌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반항적인 딸의 지독한 고집은 그동안 익히 알고있던 것이었지만 이번에도 오르마즈는 전혀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고 있었다. 투르케스크가 그런 딸을 똑바로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네 종장이며 아버지로서 다시 명령한다! 오르마즈. 넌 우리 카파키 가 군대의 총사령관이고 우리 가문의 후계자다. 치료가 끝날동안에는 야전은 토로 경이 맡을테니 안에서 일해도 좋다. 의사 말이 3, 4달 정도면 회복될 것이라니 그때 이후엔 지금까지처럼 네가 군을 총괄지휘하도록 해라. 알았냐!"
"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가하지 않겠다!"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거친 숨을 씩씩거리던 투르케스크는 더이상 오르마즈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병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네피스가 오르마즈에게 다가와 짐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저리 흥분하고 계신데......일단은 좋게 말씀하시고 나중에 기분 좋으실 때 다시 얘기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 불같은 성격 다 아시면서 꼭 이렇게 매번 싸우셔야겠어요?"
"더이상 군대는 가까이하고싶지 않아. 이젠 조용히 살고싶어."
"오르 언니답지않은 말씀이시네요. 지난번처럼 또 사막 한중간에 술집이라도 차리시게요?"
세네피스가 밝게 웃음지으며 다가와 오르마즈의 담요를 챙겨주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동생의 이런 과잉친절이 당황했을 때 곧잘 나오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보다 자신을 더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 이 무서운 동생녀석임에 틀림없었다.
"치료가 끝나면 오랫만에 훌훌 털고 혼자 여행이나 하고싶다."
"어디요?"
세네피스가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서부. 네페티 부인이 한 번 오라더군."
"플레렌 가 놈들이 언니 잡아먹으려고 들지 않으면 다행일텐데요."
"가족이 지은 죄가 많다면 잡아먹혀도 할말없지."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버린 세네피스가 방금 손보았던 오르마즈의 담요를 또한번 여미어주고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찾던 세네피스는 창문너머 보이는 높은 황궁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근위대가 황궁 144층 이상을 모두 폐쇄했어요. 차기 황제가 결정될때까지는 아무도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없다고요. 로노 태자는 교외의 자기 별장으로 일단 쫓겨갔고 모디아크 공주는 2번 도시 부근에 슈로 기사단 주둔지에 아직은 조용히 있더군요. 타니토 공주도 학교에 돌아가지 않고 도시 안에 있는 것 같고......레곤 녀석은 속편하게 동부유람중이더군요."
"너흰 어떡할거냐?"
오르마즈의 살기어린 회색빛 시선이 동생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무언가 평소같지 않은 것을 느낀 세네피스는 또한번 입가가득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일단 이 도시 안에 있으라 그러시는데......"
문을 열고 나타난 오르마즈의 아들 메네스의 모습에 둘간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둘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메네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예드 아카데미의 주페 태자저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오르마즈가 얼른 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꾹 다물고있는 세네피스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세네피스 태자빈과 함께 있으니 내 잠시 후에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려라."
아들을 내보내는 언니를 가볍게 쏘아보던 세네피스가 시선을 문득 돌리며 조금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서부 놈들하고......잘 어울리시는군요. 언니가 저 답답한 원리주의 먹통들하고도 친분이 있으시다니.....뜻밖이시네요."
"내 골아픈 학문 따위에 관해서는 어차피 아는바가 거의 없으니 원리주의건 개혁파건 무슨 상관이겠냐."
오르마즈의 '엄살'에 세네피스가 다시한번 얼굴을 찡그렸다. 얼핏 학구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오르마즈였지만 유학이라면 진절머리치는 겉모습과는 달리 늦깎이로 들어간 남극성당을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것은 물론이었고, 개혁파 유학자들과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세네피스도 잘 알고있었다.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말하다니, 그거야말로 뜻밖이구나."
오르마즈가 흐릿해진 눈으로 천장을 올려보며 말했다.
"네 남편은 어떠냐? 이제 열흘이나 같이 있었는데.....똑똑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못된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구나."
고개를 조금 떨군 세네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르마즈는 그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얼굴을 조금 가까이 가져가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부터 각방 쓴다는 게 정말이냐?"
어느새 한결 부드러워진 오르마즈의 다정한 시선이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세네피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이만 가볼께요. 아버지 북부로 돌아가신다는데 배웅이라도 해드려야죠."
질문에 별다른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세네피스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총총히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토로 경을 '야전사령관'으로 오넬론 태자를 황제로 지원하기 위한 북부 연합군 결성이 제국에 선포되던 그날, 병실에 있어야 할 오르마즈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남편들과 자녀들에게 '조용해지면 돌아오겠다'는 짤막한 편지를 남긴 그는 아직 거동조차 불편한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가 가져간 건 그의 분신같이 지니고 다니던 무기들과, 약간의 돈, 그리고 두세벌의 옷가지와, 자칭 '최고의 벗' 바하칼리산 럼주 한 병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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