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4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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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 싸가지없이 구는 년 같으니!"
"바보같이 흥분해 날뛰는 놈보다야 낫겠지."
여전히 쌀쌀맞은 투로 대꾸한 릴라크는 가말라의 강력한 공격을 교묘하게 옆으로 비껴내며 예리한 창끝으로 가말라의 얼굴을 직격하고 말았다. 그 빠른 공격에 견갑 틈새가 벗겨져 날아가버리면서 순간 온몸이 오싹해진 가말라는 재빨리 상대방과의 거리를 벌리며 다시한번 창을 휘둘렀지만 그의 창을 능숙하게 쳐내는, 아니 유연하게 미끄러뜨려버리고 그 창을 타고 다시 얼굴을 향해 쳐오는 상대방의 기량은 그의 상상 밖이었다. 마음먹고 돌려친 공격이 또다시 비껴나자 가말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에이, 썅!"
힘으로는 가말라가 틀림없이 우위에 있었지만 상대는 적의 힘을 철저하게 역이용하는, 꽤나 지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차라리 말에서 내려 한바탕 육박전을 벌인다면 한주먹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애써 자위하고는 있었지만 딴에는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던 가말라로서는 꽤나 황당한 순간이었다.
"오호, 보기보다는 쓸만한 년이구나!"
제대로 적수를 만났음을 직감한 가말라가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창을 치켜드는 순간, 그의 등뒤에서 꽤 큰 폭발음이 들리고 있었다. 렌즈가 터져버린 에너지장벽 포스트 하나가 그 밑에 널부러진 수십여구의 결사조 보병들의 도살당한 시체 위에 폭발의 불꽃과 파편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다른쪽의 포스트도 곧 폭발할것이 확실해보였다.
"쳇,"
릴라크가 가말라에게서 급히 창을 거두며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비겁한 겁장이년! 서지 못해!"
가말라가 큰소리를 쳤지만 녀석이 자신이 무서워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곧 붕괴되어 동부연합군 본대가 몰아닥칠 그 곳에서 적에게 휩쓸리기 전에 몸을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있었다.
어쨌든 저놈들때문에 에너지장벽 붕괴가 다만 몇분이나마 늦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요새 전방의 적 사역병들은 미처 절반도 설치하지 못한 장애물들을 놔둔 채 돌진해오는 동부 경기병들에 쫓겨 허겁지겁 요새 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나머지 한 개의 포스트마저 폭발하면서 그 틈새로 동부 정규군 기병과 유목민 경기병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거 재밌게 돼가는군."
1, 3기사단과 함께 서쪽의 언덕 위에 보루를 만들고 출동 태세를 갖춘 채 요새 주변의 상황을 지켜보던 히르직스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2기사단장 릴라크 녀석이 나름대로 분전을 했지만 어차피 오래 막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릴라크 저녀석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저 빈정대는 성깔만 죽이면 좀 좋겠어?"
빈정대기로 말하면 릴라크나 별반 다를 바도 없는 히르직스의 말에 부장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에너지장벽을 돌파한 동부연합군은 예상대로 궁기병대를 선두로 요새에 돌진해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지난번 보였던 그 소름끼치는 검은 마귀놈과 바툴 가의 야만족 부대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덕 앞쪽으로 다가오는 6천여 동부 정규군 기병대에는 지난번 본 바 있던 그 원수같은 파란 망토의 토로 로버넬 녀석이 또다시 보이고 있었다.
"저놈은 뒈지지도 않는군. 천하에 질긴 놈 같으니."
"돌격 준비를 할까요?"
부장의 질문에 히르직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구경이나 하고 있어. 녀석들 요새 공격하다가 지칠대로 지쳤을 때 한바탕 작살을 내 줘야지. 어차피 쉽게 끝날 전투도 아냐."
경기병들과 함께 요새 정면까지 쳐간 시로와 다룬, 자이납은 거의 제세상 만난 셈이었다. 말이라면 진절머리치는 시로와 다룬은 요새가 가까와지자마자 얻어타고 온 말에서 서둘러 뛰어내렸고 자이납은 자기 탈 말이 없다며 어지간히 궁시렁거리며 마지못해 말에서 뛰어내려 장애물 작업이 한창이던 적 사역병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장이래야 짧은 검이나 작은 도끼에 갑주 비스끄무리한 라멜라 약간을 급소에만 걸친 것이 고작인 천여명의 사역병들은 7백여기에 달하는 경기병들의 바람같은 돌격에 작업하던 장비들까지 모두 내버린 채 허겁지겁 요새 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문 닫아! 닫아! 빨리!"
요새 문를 지키던 중장보병단 지휘관이 입구까지 대담하게 쳐오는 동부 경기병들의 기세에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광경에 가장 놀란 건 아직 미처 요새까지 도착하지 못한 5백여명의 남부 사역병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내달았지만 요새 문은 야속하리만큼 큰 소리와 함께 그들의 살 구멍을 가로막아버리고 말았다. 몇몇 사역병들이 닫혀버린 문에 매달린 채 거의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동부 기병들이 등뒤에서 인정사정없이 날리는 투창 뿐이었다.
"부숴! 빨리!"
도끼를 든 시로가 다룬에게 대마 장애물들을 가리키며 소리치고 있었다. 적들의 계획대로 작업이 완결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닥에는 이미 신경쓰일정도의 마름쇠가 깔려있었고 기병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장애물들도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요새를 향해 돌진하던 경기병들 중 몇은 이미 그것들의 첫 희생물로 말에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시로와 다룬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남부 사역병들의 작업용 도끼를 집어들고 그들 모두를 정신없이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아직 에너지장벽이 살아있는 남쪽 초원에서는 가말라가 이끄는 중장기병과 적 2기사단과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남쪽 에너지장벽이 뚫리는대로 아군 궁기병대가 1차 돌격을 해 올 공간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제기랄, 저새끼들 정말로 전우애라고는 털끝만치도 없구만,"
요새 위에서 밑을 향해 투창과 스파이크가 박힌 통나무를 마구 굴려대는 적 중장보병대를 올려보며 자이납이 소리를 꽥 질렀다. 공성중인 보병을 막는 수단인 저것들은 어차피 발빠른 경기병들이나 가디언들에게는 그다지 효용이 없는 공격이었고 밑에서 아우성치며 적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는 같은 남부 사역병들만 깔아뭉갤 뿐이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남부 사역병들이 무장을 내던지며 항복하는 녀석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었다.
"에너지장벽이 부서졌다!"
지휘관의 고함소리에 동부 경기병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며 함성을 올렸다. 장애물을 때려부수는 다룬과 시로의 손도 더 바빠지고 있었다. 뚫린 구멍으로 몰려들어오기 시작한 중군의 궁기병들과 경기병들이 일제히 요새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22스타디아! 몇분 안남았어!"
시로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지만 어차피 그들만으로 장애물들을 다 때려부수는 건 말도 안되는 노릇이었다. 자이납까지 가세해 함께 장애물을 쓰러뜨리고 있었지만 무려 2만에 달하는 아군 기병들의 말발굽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발사!"
새 궁기병대장 다얀 바툴의 명령에 1스타디아 앞까지 도달한 유목민 궁기병 4천명이 첫번째 일제 공격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오른 4천발의 투창은 공중에 꽤 뾰죽한 포물선을 남기며 요새의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 머리 위에 일시에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장거리 궁사를 대비해 요새 위에 미리 대놓았던 방호벽 밑으로 일제히 몸을 숨기는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의 움직임은 전혀 흐뜨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적 위로 쏟아진 투창은 평소의 그것이 아니었다.
"뭐야!"
몇몇 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거적 밑에서 도망쳐나오기 시작했다. 촉에 약간씩의 인화물질을 포함한 투창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거적과 방어장비들에 눈깜짝할새 불을 붙이고 있었다. 불붙은 거적과 파비스 방패, 발을 동동 구르는 보병들이 뒤엉켜 요새 위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머리 위로 2차, 3차의 투창공격이 계속 쏟아져내렸다.
"적들이 당황했다! 계속 몰아붙여!"
궁기병들과 거의 선두까지 뛰쳐나와있던 페로가 창을 앞으로 겨누며 큰 소리로 외쳤다. 5개조로 나뉘어진 기병들이 계속 순서를 바꾸어가며 요새의 남쪽 벽에 쉴새없이 사격을 퍼부었다. 기병 공격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적들에게 이쪽 보병을 공격할 여유를 주지 않고 쉴새없이 계속 사격을 퍼붓는것이 관건이었다. 밝은 아침의 파란빛 하늘은 2만의 기병이 조금의 쉴새도 없이 하늘을 향해 퍼부어대는 투창으로 마치 소낙비같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동부 중장보병들을 선두로 대오를 이룬 보병들과 공성장비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보병대 선봉은 누굽니까?"
선봉에서 헐떡대며 돌아온 페로의 질문에 샤자한 공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곳출신 지원병들입니다."
"안됐군요."
페로가 그다지 동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곳 요새 높이에 맞게 제작된 공성탑 십여개와 긴 발판이 궁기병들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아메스가 페로에게 물었다.
"저곳에 가디언 중 한명이 선두에 서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딸의 질문에 페로가 성의없이 대꾸했다.
"그런데......왜......"
"첫 전투에서부터 가디언을 죽이고 싶냐? 아메스?"
아버지의 대답에서 이번 공격의 '진의'를 깨달은 아메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동부 지휘부는 이번 공격에서 적들을 꺾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있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공성탑 뒤를 줄지어 따라가는 병사들의 유난히 새것인듯한 갑주들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공성장비와 보병들의 뒤를 따라가는 동부 사역병들이 바닥에 깔린 장애물과 마름쇠들을 꼼꼼하게 제거하고 있었다. 요새를 직접 공격해오는 저 동부 보병들을 막기 위해서는 남부 보병들도 궁기병과 경기병들의 원거리공격 앞에 몸을 드러낼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번에 4천발씩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사격 속에서 성벽의 남부 보병들도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아메스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이번 보병들은......그냥 사격용 미끼군요."
말고삐를 굳게 쥔 채 요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로는 딸의 말에도 여전히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십여개의 공성탑 중 제대로 요새에 도달한 건 5개 정도가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적의 공격으로 멈춰버리거나 함정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공성탑은 물론이고 배후보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돌격용 전차들도 요새가 가까와지면서 요새 자체방어시스템에 일제히 오작동을 일으키며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방패를 머리에 뒤집어쓴 보병들이 수십씩 달려들어 구동축을 풀고 힘으로 떠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준비!"
요새가 가까와지면서 각 공성탑 꼭대기, 혹은 발판 선두에 배치된 보병들이 사관들의 독려에 무기를 움켜쥐며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공성탑이 열리면 일제히 쏟아져나갈 이들 선봉대들은 '결사조 보병'들과 마찬가지로 거의가 지원병이었고, 동부보병중에서는 나름대로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다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복수심, 혹은 호기, 아니면 '거점 확보'에 성공했을 때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보상에 보잘것없는 목숨 하나로 건 베팅을 한 용사들이었다. 물론 공성탑이 다가오는 앞에 미리 대기하고 이들을 맞아줄 적의 선발된 용사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돌격!"
충돌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선두의 병사들부터 큰 고함을 지르며 쏟아져나갔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미리 기다리던 남부보병들의 창에 꿰여 죽거나 집중사격에 적과 맞싸워보지도 못하고 산산조각나 시체로 변해버리고 있었다.
"계속나가! 계속!"
공성탑의 사관들이 한손에 칼을 들고 이 거의 가망없는 구멍을 향해 미끼가 될 보병들을 계속 쏟아부었고 이들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벽 모퉁이까지 나와있던 남부보병들 역시 하늘에서 계속 쏟아져내리는 기병들의 집중사격에 계속해서 쓰러져나갔다. 입구가 있는 공성탑 밑에서는 각자의 무기를 든 보병들이 이 죽음의 대열에 서서 차례대로 뛰어올랐다.
"전진해! 전진!"
어느새 요새벽에 걸쳐진 발판으로도 정연한 대형을 갖춘 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앞세우고 밀어붙이기 시작했지만 남부보병들 역시 단단한 보병의 벽을 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장거리 공격에 쓰러져나가는 남부보병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고, 공성탑과 발판에서 밀어붙이는 동부 보병들 역시 정연한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던 적병들의 손에 속절없이 죽어갈 뿐이었다.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속셈이군."
서쪽 고개의 보루에 주둔하고 있던 히르직스는 이미 말에서도 내린 채 부하들이 가져다놓은 큰 안락의자 위에 몸을 파묻고는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물량공세로는 저희들이 남부를 당할 수 없다는 걸 모르나보지?"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히르직스의 옆에 서 있던 한 여자가 꽤나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검은 머리칼과 매서운 검은 눈동자를 한 그 여자의 몸에는 기사단 고급지휘관의 은색 갑옷이 걸쳐져 있었다. 흰 망토가 걸쳐진 어깨에는 단장을 상징하는 금색의 마름모꼴 계급장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랫만에 몸 좀 푸니까 어떠신가? 릴라크 예리노프 경?"
"평소같이 부르시죠. 듣기에 거슬리는군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여자는 겨드랑이에 끼고있던 투구의 먼지를 툭툭 털어 옆에 내려놓고는 히르직스의 옆에 놓여진 조잡한 나무의자에 털석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래도 동서지간에 지킬 건 지켜야지? 막내 처남은 여전하신가?"
"루시도프요? 여전히 책에 파묻혀있죠."
"후훗, 신랑 잘만난줄 알아. 솔직히 플라칼 가에서 그만한 착한 남자가 어딨냐구."
"장군님이 부르시지만 않았다면 저도 겨우 다섯달된 아기하고 자상한 남편 떼어놓고 여기까지 나오진 않았을거라구요. 팔자 하고는 정말."
릴라크는 목걸이 뚜껑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갓난아기와 남편의 형상을 잠시 바라보고는 도로 닫아버렸다. 종자가 내민 음료잔을 받아든 릴라크는 히르직스처럼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한모금을 훌쩍 들이켰다.
"장군님이나 저나 결혼 덕택에 이 빌어먹을 가문에 코꿴 건 매한가지지만......그래도 배우자만 봐서는 제가 좀 나은 건 인정하죠."
"훗, 그놈의 남편 자랑 또시작이군."
릴라크의 다분히 건방진 말에도 히르직스는 별로 화내지도 않은 채 태연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후우, 또하나 무너지는걸."
요새를 공격하던 동부의 공성탑 중 한개가 무너지는 모습에 히르직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 탑 안에 모여있었을 보병들이나 저곳을 타고 올라와 저항하고 있었을 동부 보병들의 운명은 보나마나한 노릇이었다.
음료잔을 비운 릴라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한숨 돌렸으니 전 숲으로 돌아가죠. 아까 그놈 제법이던데 다음번에 또 붙을 일 있으면 한번 맡겨주시죠."
"기꺼이."
투구를 눌러쓴 릴라크는 말에 훌쩍 뛰어올라 오십여명의 근위기병들과 함께 요새 북쪽을 거쳐 2기사단 주둔지인 서쪽 숲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히르직스는 어느새 수염이 꺼칠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시원한 음료수 한 모금을 들이켰다.
성벽 위 공성탑이 맞닿은 지점에는 동부보병들과 남부보병들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제 더이상 쌓일곳도 없는 동부 보병들의 시체들은 뒤이어 몰려올라오는 전우들의 발에 밟히고 차여 까마득한 땅바닥으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요새의 큰 크레인에 직격당한 공성탑 두 개가 또다시 산산조각나며 땅바닥에 산 사람과 이미 죽은 시체를 50척 높이의 공중에 사방으로 흩날렸다.
5개의 발판은 이미 모두 무너진 후였고 겨우 2개 남은 공성탑은 이미 부서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다. 사격에 당한 남부보병들의 시체와 미처 옮겨지지 못한 부상병들이 요새 성벽에 즐비했지만 안쪽에서부터 계속해서 충원되는 그들 중장보병들은 꿈쩍도 않으며 성벽을 여전히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젠 슬슬 빼야겠군요."
페로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공성탑이 거의 무너진 이상 더이상의 공성은 의미없는 희생일 뿐이었다.
"보병 피해는 어느정도쯤 되겠나?"
페로가 샤자한 공의 부장에게 무표정하게 물었다.
"부상자 합쳐 보병 3천 정도. 일부 사관들과 선봉 지원자들을 빼면 거의 신병들이고 우리 사격에 당한 적들의 피해도 비슷한 수준인 듯 하니 큰 손해는 아닙니다. 지시하신대로 고참병들은 탑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페로가 샤자한 공을 휙 돌아보았다..
"퇴각한다!"
보병사령관 플로브 경의 명령과 함께 요새를 공격하던 보병들이 기병들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10대 중 겨우 2대 살아남은 공성탑도 만신창이가 된 채 천천히 뒤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뭐 그저 그렇군."
얼굴을 찡그린 샤자한 공이 엉망이 된 채 돌아오는 보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후방에서는 이미 장기전을 위한 숙영지공사도 한참 진행중이었다. 어차피 이번 한번의 공격에 무너지리라 기대했던 것도 아니지만 공성에서 딱히 큰 전과를 남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의 가장 큰 목표였던 '진격로 확보'만은 성공한 셈이었다.
"에너지장벽을 빨리 무너뜨렸으니 일단 절반은 성공한 것이겠죠. 적 보병들도 꽤 놀란 것 같고......적 사역병들을 많이 생포했으니 다음번 공격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정도면 오늘 목표는 달성한 것 아닙니까."
페로가 샤자한 공을 위로하듯 말을 건넸지만 억지웃음을 지은 샤자한 공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전하께서 탈라스를 굳게 지켜만 주신다면야 이쪽에서 시간이 얼마 걸려도 괜찮겠습니다만....."
어처구니없이 빼앗겼던 마랄루 요새를 되찾기위한 공격은 양쪽합쳐 수천의 사상자를 남긴 이 피의 하루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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