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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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 평원에 다시 모인 동부 연합군 지휘관 회의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은 편은 되지 못했다.
"마랄루를 탈환하는 데 첫번째 걸림돌은 우리가 설치했던 에너지장벽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페로의 한마디에 지난번 마랄루에서 대패를 당했던 플로브 경이 민망함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도 급하게 퇴각하느라 요새가 그 상태 그대로 적군의 손에 함락되면서 트라티누스 가에서 설치했던 3500급의 강력한 에너지장벽을 이젠 적군이 그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에너지장벽 체계가 설치에 1개월정도 소요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적군 입장에서는 순전히 거저 굴러들어온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별수 없겠죠.....평소 하던대로 결사대를 조직해 포스트를 때려부수는밖엔."
어영부영 얼버무리는 플로브 경의 말을 가로막은 샤자한 공이 마랄루 인근 입체영상을 앞뒤로 빙빙 돌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녀석들은 강력한 중장보병으로 요새를 지키고 외곽에 배치한 기사단과 경기병단을 조공으로 우리가 간이 에너지장벽을 치는 것을 막을겁니다. 남부녀석들 공성이나 수성전 능력은 기병인 우리가 감히 상대할 수준이 아니죠."
페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릴수밖에 없었다. 보병이 빈약한 동부제후군에게 최악의 약점은 바로 공성이나 수성능력이었다. 그렇게보면 지난번 마랄루에서 수성전을 포기하고 기습을 택한 플로브 경의 선택을 반드시 잘못한 것이라 몰아붙일만한것도 결코 아니었다.
결국 마랄루 탈환을 위한 반격은 동부의 주력인 기병이 거세당한 채 저 한심한 보병들만으로 막강한 남부보병들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페로는 회의실 한쪽에서 사탕수수를 함께 씹으며 히히덕거리고 있는 네피와 시로. 다룬, 자이납을 힐끔 돌아보았다.
"대군을 동원해 직접 공격하는 바보짓을 하느니......"
그들을 바라보는 페로의 긴장된 시선에 제네르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강력한 특급 가디언이 셋이나 있으니 저들을 활용함이 어떨까 합니다."
"베아트릭스 그년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동부 연합군 세작 쪽에서 들어온 보고를 놓고 생각에 잠겨있던 헤즈 사령관이 케세크 경을 한 번 째려보았다.
"탈라스라면 그년 고향인데, 거기로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분수습차원일수 있죠. 슈트란 가와 트라티누스 가가 그년 놓고 서로 내놓으라며 머리털 쥐어뜯고 싸웠을테니......아예 안보이는데로 데려가버린 것일수도 있죠."
어깨에 감은 붕대를 아직 풀지 않은 히르직스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잘만 하면 종전후에 포로교환으로 돌려받을수도 있겠군요. 그 어미가 죽어버려서 좀 그렇지만.....뭐, 실력하난 괜찮은 녀석이었으니까. 솔직히 그만한 경기병단장감이 어딨습니까."
적 포위망 안쪽까지 자신을 구하러 달려왔던 베아트릭스를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히르직스는 나름대로 일말의 양심이 동했는지 그답지않게 베아트릭스를 '변호'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부관에게 넘겨준 헤즈 사령관은 큰 창 밑으로 보이는 마랄루의 요새를 한 번 빙 돌아보고 있었다.
초원 중간에 솟아있는 낮은 언덕에 자리한 육각형의 이 거대한 요새는 원래는 동부 제후군들이 자신들의 외적으로부터 에너지장벽 통제소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직경이 5스타디아에 달하는 이곳에는 족히 5만은 넘는 병력이 충분히 머물 수 있음직한 탄탄한 지하병영과 창고, 연병장, 주기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요새 방벽의 높이는 엔간한 건물 5층 높이에 해당하는 50여척에 달해서 엔간한 공성술로는 함부로 돌파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이정도의 요새를 거의 공짜로 '넘겨받은' 플라칼 가 입장에서는 바보짓을 해 준 플로브 경에게 이래저래 고마울수밖에 없었다.
"기사단 쪽 숙영지는 괜찮은가?"
"그럭저럭이요,"
헤즈 경의 물음에 히르직스가 성의없이 대꾸했다.
요새에 주둔한 3만의 중장보병단 주력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병단과 보병대 일부는 요새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쪽의 언덕에 주둔한 1기사단과 3기사단 6천기와 경기병단 4천5백, 보병 3천이 공성전을 펼치려는 적을 치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숲에는 2기사단 3천5백기와 중장보병, 경보병단 각각 5천씩이 언제든 기습을 노리고 대기중이었다.
사실 이들 역시 그다지 좋은 형편은 되지 못했다. 비교적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3만 8천여의 중장보병단을 제외하면 산산조각나기 일보직전의 경보병단이나 루사의 회전에서 무려 3천 5백여기를 잃는 치명타를 입은 기사단은 최악의 상황이었고, 그다지 전력손실은 없었지만 믿음직한 단장을 잃은 경기병단의 분위기 역시 결코 좋다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 땅'을 지키는 동부제후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강화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원정군인 플라칼 가는 루사에서 입은 생각외의 큰 피해 때문에 원래 전력으로의 보강이 단시간에 이루어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난 유목민 기병은 전투를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헤즈가 침울해진 각 병단 지휘관들을 달래듯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증원군이 열흘 정도 후에는 들어올 테니까 그때까지는 여기서 시간을 끄는수밖에 없겠어. 기사단에 2천정도 올테고 보병단에 5천정도 오겠지. 아마 그 전에 동부녀석들 한바탕 반격이라고 해오겠지만 변변한 보병이 없으니 어차피 요새를 뚫지는 못할거야. 어찌보면 녀석들 보병전력을 소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지."
헤즈 사령관의 여전한 자신감에 히르직스가 입을 조금 삐죽거렸다. 헤즈는 그런 히르직스의 태도를 보았는지 아닌지 여전히 말을 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라마단 기간이야. 1달동안 교전금지가 선포되니까 그 기간이면 충분히 이전 전력으로 회복할 여유가 생기겠지. 장기전 물량공세로 나가면 경제력이 떨어지는 동부녀석들은 결국은 나자빠질수밖에 없을걸. 그때까진 지친 병사들이나 좀 쉬게하고......탈라스에 있는 서부놈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신경쓰이는군. 제길, 녀석들이 잘 싸우기를 바랄수도 없고, 개판 치기를 바랄수도 없고......망할."
바얀 시 동쪽 100스타디아 정도 거리에 접근한 카렐 일행은 도시 쪽에서 접근해오는 다섯명의 서부제후군 낙타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정도 거리에서 한번쯤 검문을 당하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던지라 아무도 놀라던가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의 정지신호를 받은 탈란은 짐을 실은 것까지 포함해 16마리나 되는 말들을 모두 자리에 멈춰세웠다. 일행의 정면에 멈춰선 차량에서 십여명의 보병들이 창을 들고 내려서서는 일행에게 겨누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서서 멀찍이 떨어져."
분대장인 듯 해 보이는 녀석이 리더인 탈란에게 사뭇 위협적으로 지시했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두 손바닥을 그들에게 펼쳐보인 4명의 바툴 가 사람들은 무기를 말에 놔둔 채 침착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행렬의 맨 뒤에 있던 카렐과 라손도 말에서 내려섰다. 그제서야 낙타병 중 3명이 낙타를 자리에 앉히고 바닥에 내려섰다.
"어느부족 유목민들인가?"
"콩기라트 부족입죠,"
탈란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딱딱한 표정의 분대장은 탈란을 무섭게 째려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행선지는?"
"보시다시피......바얀 시에 말을 팔러 가는 길입니다요. 이 부근에 시장이라고는 거기 뿐이라서......저희같은 떠돌이 말장사꾼이 갈데가 거기밖에 더있겠습니까?"
"일가족인가?"
분대장이 '어딘지 닮은' 탈란과 베아트릭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둘 다 카이두를 닮은 만만치않은 큰 키를 하고 있었고 상대 분대장이 한참을 올려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탈란이 태연하게 웃음지으며 대꾸했다.
"제 조카들이죠."
"저 뒷놈들은 뭐야?"
"용병들이예요. 워낙 말도둑이 극성이어서......큰돈들여 고용한 놈들이죠."
말에서 내려선 카렐과 라손의 너무나 극단적인 키 차이를 보고는 분대장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게다가 털모자를 눌러쓴 카렐의 키는 그나마 평소보다도 더 커보이고 있었다. 분대장이 라손의 턱을 억지로 치켜들며 비웃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쬐끄만 놈도 용병으로 써먹나?"
"아이씨,"
또다시 자존심이 상한 라손이 대뜸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엔 카렐 앞에 마주선 분대장은 그 큰 체격에 위압되었는지 방금전보다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넌......이곳사람같지는 않은데, 어디 출신이냐?"
"북부 출신이요."
무뚝뚝하게 대답한 카렐의 등에 메고있는 위협적인 장창을 본 분대장이 얼굴을 다시 찡그렸다. 제국에서도 가장 체구가 큰 북부 출신의 용병들은 그 뛰어난 창술로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 생긴 게 그럴 줄 알았지......잠깐, 너......용병 주제에 감히 말을 타? 너 유목민이 아니면 승마는 귀족밖에는 할 수 없다는 걸 모르나?"
분대장의 눈짓을 받은 병사들 두명이 일제히 달려와 카렐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윰 포고령 위반으로 네놈을 체포한다. 당장 무기 내려놔!"
선두에 서 있던 탈란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가디언이 말을 탈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데리고있는 용병이 죄를 지었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얽혀들 건 뻔한 노릇이었다.
카렐이 잔뜩 흥분한 그들에게 너무도 태연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귀족이요."
카렐이 품 속에서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페로가 만들어준 새 귀족신분증에는 '블리크 시어리'라는 지극히 평범한 북부풍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용병이 '귀족' 신분이라는 말에 분대장도 조금 기가막힌지 신분증과 카렐의 얼굴을 잠시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뭐 잘못되었소?"
카렐의 질문에 '계급'에 유난히 약한 서부 평민출신 분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이녀석 혈액 신분증하고 일치하나 확인해 봐!"
분대장은 카렐이 귀족이라는 말이 끝내 믿기지 않는지 유전자 스캐너를 든 병사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잠시 안도하는 듯 싶었던 탈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카렐이 살짝 찡그렸지만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렐이 내민 신분증을 기계에 꽂은 그들은 손가락에서 뽑아낸 피를 집어넣고 '비교'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오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분증에 입력된 내용과 일치합니다."
"쳇,"
분대장이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신분증을 약간은 의아한 얼굴로 집어든 탈란은 그 내용을 힐끔 살펴보았다. 부계는 불명, 모계는 북부 상급귀족으로 표시된 이 신분증은 얼핏보기에 아무 이상할 것 없는 보통의 귀족신분증이었다.
"몰락한 북부귀족 자존심을 끝까지 건드려야겠소?"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카렐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일행의 짐을 수색한 다른 병사들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의심스러운 물품은 없습니다! 신변용품과, 식량, 야영장비 뿐입니다!"
병사들이 창을 거두며 물러나자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고 탈란의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와 함께 다시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랫만에 고향의 공기내음을 맡은 라손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보였다. 하지만 마을 구석구석에 인상을 쓰며 서 있는 서부제후군 병사들의 모습에 그의 좋던 기분도 몇분 가지않아 망가져버리고 있었다.
키타이 사막 중앙에 위치한 바얀 오아시스는 직경이 80스타디아 남짓 될 자그만 호수였고,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상업과 더불어 마을의 주 수입인 물 판매조합과 가난한 어부들의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그나마 물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 유목민들 때문에 얼마 안되는 정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고기잡이도 그나마 돈이되는 장사는 아니었다. 물가에서 철없이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던 라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행의 앞으로 꽤나 허름한 2층 목조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저기네요. 도스트 아저씨네 여관이죠. 3년 전엔가 여기 시장으로 뽑혔다고 그러던데 잘 계신가 모르겠네요."
말에서 제일 먼저 내려선 라손이 썰렁한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 문을 쾅쾅 두들기자 얼굴에 붕대를 덕지덕지 붙인 퉁퉁 부은 조그만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방 몇개......어? 라손이냐?"
서부 제후군에 억류되어있다가 갓 풀려난 도스트 바얀 시장은 오랫만에 찾아온 이 반가운 친척 조카에게 서둘러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아니, 아저씨 얼굴이 그게 뭐예요?"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도스트의 얼굴을 바라본 라손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썅, 저 망할놈의 서부새끼들, 오아시스가 지네들꺼라고 빡빡 우기잖아. 내가 덩치만 컸어도 그 콧수염난 개새끼를 묵사발내놓는 거였는데."
"콧수염이요?"
"뭐라더라? 아씨든지 아쉬든지......하지즈라던가? 그 망할놈의 새끼, 내손에 잡히기만 해봐,"
주먹을 움켜쥔 채 엉뚱하게 말로 화풀이하고 있는 도스트 앞에 서 있던 라손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요?"
"네가 그놈을 어떻게 아냐?"
라손이 뒤에 서 있던 카렐을 잔뜩 겁먹은 얼굴로 휙 돌아보았다. 하지즈 장군은 루쿠스탄에서 자신의 포로처리를 맡았던 라손을 너무나 잘 알고있을 것이 확실했다. 라손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뭐, 서부에서 워낙 유명한 장군이니까요......"
"근데, 네가 여기 웬일이냐? 너 카나 가 기병대에 중대장으로 있다고 형님 자랑이 대단했는데......때려쳤다며? 지금은 뭐하냐?"
도스트가 먼지앉은 식탁과 의자를 걸레로 닦으며 묻자 라손이 거기에 냉큼 궁둥이를 대고 앉으며 대답했다.
"용병으로 먹고살아요. 수입도 괜찮아요."
'용병'이란 말에 도스트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뭐냐......명색이 귀족이......"
표정으로 보아서는 무어라 한마디 하고싶어하는 것이 확실했지만 뒤에 서 있는 일행들 때문인지 도스트도 더 이상은 별 말이 없었다. 제네르나 마찬가지로 평민이나 별다를바없이 가난하게 자란 '이름뿐인 귀족' 라손에게 기병으로 전공을 세워 출세길을 여는 건 어찌보면 유일한 방편이었을 터였다. 조카가 잘나가던 상급제후가 기병대 중대장을 때려치고 '천박한' 용병 생활을 한다는 말에 도스트의 저런 태도는 이해되고도 남음이었다.
"어쨌든 손님을 5명이나 모시고왔으니까 좋은 방 내줘요."
"쿠틀룩 부족에서 노얀을 포함해서 천 명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방에 들자마자 지도를 펼쳐놓은 카렐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족 원로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모두 죽었다는군. 생존자는 갓난아기하고 아이들, 중상자 십여명 뿐이라고 한다."
마랄루에서도 동료들이 저지른 비슷한 학살극을 지켜볼수밖에 없었던 베아트릭스가 마치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조금 떨구고 있었다.
"노얀들의 준동이 있을테니 바툴 가에서 빨리 복수전을 치러야 할 거야. 내 카이두 경에게 4일 후 기습을 예정하라고 했으니 그 전까지 이곳 부근을 파악해 알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맥없이 앉아있는 베아트릭스는 접어두고 라손 혼자 힘있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탈란의 표정이 어딘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카렐이 탈란의 얼굴을 흘끔 돌아보았다.
"알겠......소."
"라손은 이곳 사람이니 도시 안에 주둔한 제후군들의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고, 탈란은 이곳을 드나드는 장사꾼들이나 유목민들에게서 떠도는 정보를 파악하도록 하시오. 나와 베아트릭스는 도시 바깥에 숨어있을 적 매복병력을 찾아볼테니."
"예!"
이번에도 단호하게 대답한 건 라손 뿐이었다. 베아트릭스를 돌아본 카렐은 탈란이 그에게 보내고 있는 성난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카렐에게 대답하려던 베아트릭스는 이모의 그 곱지않는 눈길에 중간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렐이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 비록......일개 가디언이나 이번 정찰대의 지휘권은 내게 있으니 지시에 따라주셔야겠소. 탈란 바툴 중랑장."
카렐의 사뭇 위협적인 목소리에 탈란이 갑자기 카렐을 똑바로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위험에 처했던 걸 몰라서 그리 뻔뻔스러운 겁니까? 가디언 주제에 감히 말을 타다니, 내가 그래서 마차를 타라고 이미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유전자 스캐너가 운좋게 오작동한 건지 모르지만 잘못하면 모두 몰살당할 뻔 했습니다. 앞으로 또 그런 검문을 당하면 어쩔 생각입니까? 가디언의 mDNA는 종류가 얼마 안되어서 스캐너에 바로 포착된다는 것도 모릅니까!"
순간적으로 흥분한 라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덩달이 언성을 높이려는 라손을 가로막은 카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잘 아시는구려. 탈란 바툴 중랑장. 하지만 걱정 마시오. 앞으로 같은 검문을 당해도 유전자 스캐너 결과는 똑같이 나올테니까."
카렐의 매서운 눈길에 겁을 덜컥 집어먹었는지 탈란이 움찔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명령을 따를 것이요? 거부한다면 내 직권으로 바툴 가 리더를 교체할테니."
입술을 굳게 깨문 탈란이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급히 지도를 접어넣은 카렐은 문을 열고 나타난 도스트 바얀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굳은 표정의 탈란이 밖으로 휙 나가버리고 있었다.
잔뜩 화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탈란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본 도스트가 카렐에게 물었다.
"저녁식사는 어떡할까요?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여기 가져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한 카렐은 라손도 삼촌을 도우라며 내보냈다.
카렐과 단둘이 방안에 남게 된 베아트릭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탈란 이모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낮에 많이 놀랐던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지않겠나."
씁쓸하게 웃음지은 카렐이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접어넣었던 지도를 다시 펼쳐놓은 카렐은 베아트릭스를 바라보았다.
"매복규모는 아마도 낙타병 수천기정도 되겠지. 쿠틀룩을 공격한 낙타병이 5천이었다니까 여기 매복한 건 2, 3천 정도가 아닐까 싶네. 자네라면 어디에 두겠나?"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카렐은 그를 한 명의 휘하 지휘관으로 대하고 있었다. 지도를 살핀 베아트릭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낙타는 말보다 속도가 느리지만 힘과 지구력이 좋아 험한 지형에서도 잘 움직이니 서쪽과 남쪽의 바위계곡이 가능성이 높지않을까 합니다. 지형으로 보아서 이곳을 지나갈 정신나간 유목민은 없을 듯 합니다. 특히 서쪽 계곡은 양옆이 높이 1스타디아가 넘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로막혀서 약간의 경계병력만 풀면 보병을 이용한 정찰도 사실상 불가능하니 최적지가 아닌가 합니다."
"자네 생각이 내생각이네."
카렐이 빙긋 웃으며 입고있던 가죽옷 외투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바얀 시라는 맛난 먹이를 눈앞에 던져놓고 바툴 가가 공격할수밖에 없도록 압박하겠지. 여기저기서 학살이 자행되면서 노얀들의 반발이 커지면 바툴 가로서도 이곳의 주인으로서 위험을 감수하고 어딘가 공격할수밖에 없을테니......항상 그렇듯이 알면서도 당하는거지."
짐 속에서 자신의 수트와 망토를 꺼내놓은 카렐은 베아트릭스 앞에서 갈아입기가 조금 머쓱한지 그대로 옆으로 치워놓았다.
"저녁먹고 새벽 1시쯤 나가볼까 해. 따라오겠나? 들킬지 모르니 말은 안 갖고 갈거야."
"그럼 어떻게......거리가 100스타디아가 넘는데....."
"두 다리로 가지."
"내일 새벽에나 도착하겠군요."
베아트릭스가 그 보기힘든 웃음을 두번째로 내비치자 카렐도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말게. 10분도 안걸릴테니."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저녁식사인 구운 양고기와 밀떡, 치즈와 요구르트가 있는 제법 푸짐한 저녁식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가서 탈란 좀 불러오게나. 원래 같이 식사하면서 감정도 푸는 거 아니겠나."
자리에서 일어선 베아트릭스는 잔뜩 삐져있는 탈란이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원래 베아트릭스의 계획대로라면 이 방은 자신이 라손과 함께 써야 할 방이었지만 기분이 잔뜩 상해버린 탈란은 카렐의 옆 침대를 베아트릭스에게 거의 강제로 떠넘기고는 이곳에 이미 자기 짐을 풀어놓은 후였다.
"말해봐. 베아트릭스."
탈란이 막 문에 들어선 조카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바보는 아냐. 뭘 숨기고 있지?"
탈란의 날카로운 눈이 베아트릭스를 향해 매섭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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