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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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숙영지를 마련하고 난 서부연합군의 첫번째 목표는 키타이 사막에 위치한 유일한 오아시스 도시인 바얀 시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슈로 기사단 부단장 라손 바얀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이 거대한 키타이 사막 중앙부에서 유일한 오아시스라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아시스를 필요로 하는 주민 자체가 워낙 적은 탓에 기껏 천 명 정도의 많지않은 사람들이 꽤나 빈곤하게 살아가는 그냥 촌구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좀......이상하군요."
병력수송차량에서 내려선 하지즈 장군의 부관이 그 묘한 분위기에 머쓱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여기의 낙타병과 오백여 경보병, 삼백여명의 사역병을 이끌고 딴에는 잔뜩 긴장하며 이곳까지 달려온 하지즈 장군은 무슨 지나가는 손님이라도 바라보듯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 주민들의 태도에 스스로 민망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물론 노상 크고작은 전쟁에 시달려온 이곳에서 '조금 낯선' 복장의 군인들이 또 등장한 것 정도는 그다지 큰 사건도 못된다는 것을 아직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비병력은?"
"포착되지 않습니다. 사전조사 파일에서도 이곳의 수비병력은 공란으로 있었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있는 하지즈 장군의 멀리 앞쪽으로 말에 오른 서너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행여 기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창을 움켜쥐었던 하지즈 장군은 그다지 깔끔하지는 않은 평상복 차림의 그들의 모습에 다시 손을 놓고 말았다.
"누구냐!"
하지즈 장군의 근위병들이 그들에게 창을 들이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건 우리가 할 질문이요."
선두에서 달려온 조그만 체구의 전형적인 동부 남자가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이곳 시장인 도스트 바얀이요. 서부제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더니 댁들이요?"
바얀 시장의 너무도 태연한 응대에 하지즈 장군이 잠시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지나가던말던 댁들 맘인데 제발 말썽만 일으키지 말아주시오. 물을 쓰고싶다면 공급은 해드리겠소만 조합에서 정한 비용은 현금으로 제대로 챙겨주시구려. 금전감각 빵점짜리 바툴 가 녀석들처럼 물값 냈네 안냈네 투닥거리고싶지는 않으니까."
방금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점령군'이라 믿고있던 서부제후군 장교들은 당돌하기까지 한 이곳 시장의 언사에 잠시 멍 해진 표정으로 하지즈 장군을 올려보았다. 도스트 바얀 시장이 다시 짜증을 부렸다.
"뭘 그렇게 째려봐요? 물 쓰는만큼 돈 내래는데. 우린 인가받은 정식 사업자란 말이요."
"여긴 바툴 가 지역 아닌가?"
듣다못한 하지즈 장군이 물었다.
"바툴 가 녀석들? 걔네들 하는 일이래야 황실에 올라가는 세금 대표로 걷어가고, 말썽피는 도적떼나 있으면 와서 때려잡고 그정도밖에 더하나? 쿠......쿠릴타이인지 지랄타이인지 머시긴지 지들끼리 모여 가끔 쑥덕댄다고는 하는데 유목민녀석들 감각없이 굴긴 해도 못된놈들은 아니니까. 사실 우리 돈줄이지 뭐."
제후가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서부식'의 통치에 익숙해져있는 제후군 장교들은 자신들의 제후가를 아무렇지않게 씹어대는 이곳 시장의 태도에 잠시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는 이 자칭 '문명인들' 앞에서 도스트 바얀 시장이 다시 짜증을 부렸다.
"바툴 가 녀석들이 걷어가든 똥강아지가 걷어가든 우리가 낸 세금 쓸데 쓰이고 나머지 황실에 잘 갖다바치면 된거지 뭔상관이요? 유목민놈들하고 우리하곤 잘 어울려 살고있단 말이요. 댁들이 녀석들하고 싸우건말건 우리하곤 상관없으니 물값이나 제대로 챙겨줘요."
"바툴 가에서 파견한 너희도시 수비병은 다 어딨나!"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한 하지즈 장군이 바얀 시장의 멱살을 확 움켜잡으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수비병이라니? 누가 쳐들어와야 수비병이 있지? 자경단 삼십명쯤 있는데, 걔들 말하는거요?"
"썅!"
거구의 하지즈 장군이 조그만 체구의 바얀 시장을 그대로 바닥에 패댕이쳐버리고는 마을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이곳은 이제 우리 플레렌 가가 통치한다! 오아시스는 이제부터 서부 상급제후 가문의 소유다! 포악한 유목민놈들은 이제 이곳엔 얼씬도 못하게 될 거다. 우리가 너희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줄거다!"
"이양반 미쳤나? 지키긴 누구한테 지켜? 누가 우릴 공격한다고? 오아시스는 우리 주민 꺼라구!"
말에서 내동댕이쳐진 바얀 시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악을 쓰자 하지즈 장군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닥쳐!"
서로를 전혀 이해못하는 동부인들과 서부인들 사이에 말은 통하고 있었지만 의미는 전혀 오가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멀쩡한 오아시스를 뜬금없이 자기들 것이라 우겨대는 황당한 침입자들에게 동부인들은 동부인들대로 악을 쓰고 있었고, 야만적인 유목민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고마운' 구원자들에게 뻔뻔스럽게 물값을 요구하는 돈벌레들에게 서부인은 서부인들식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어쨌든 하지즈 장군을 따라온 9백여 '원정군' 들은 별다른 어려움없이 이 큰 오아시스를 차지할 수 있었다.
겔에 누워 둥근 터너 위로 보이는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카렐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반 잔 정도의 아이락을 마셨던 카렐은 루사로 돌아갈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아메스를 비어있는 겔로 데려가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짧고도 격렬한 관계를 가지고 난 후였다. 아메스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몇번이나 다짐을 한 후에야 아버지가 보내온 셔틀을 타고 떠나갔지만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아메스가 떠나자마자 또다시 약간의 술을 또 마시고는 자신의 겔 안에서 몇시간째 혼자 널부러져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카렐은 주머니에서 수첩만한 작은 캡슐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그 캡슐 안에는 카렐이 잘 말려서 끼워놓은 하얀 인동꽃 한 송이가 소담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휴우,"
바깥에서 들려온 셔틀 착륙 소음에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두번이나 연달아 마셔댄 술 탓인지 몸이 거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포기하고 도로 드러누워버린 카렐의 귀에 겔로 다가오는 종종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계세요?"
"이제 도착했구나."
양털카펫이 깔린 바닥에 누워있던 카렐이 조금 뭉개진 말투로 대답했다. 겔 입구를 열고 얼굴을 빠끔히 디밀었던 솔은 흐뜨러져있는 카렐의 모습에 입가에 가득 웃음을 띠어보였다.
"술......드셨어요?"
"응, 조금."
"감당도 못하시면서....."
맥없이 누워있던 카렐의 눈에 아름다운 솔의 모습이 들어왔다. 카렐의 옆에 단정하게 꿇어앉은 솔은 누워있는 그의 술취한 얼굴을 그 특유의 선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렐이 여전히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세상 어떤 녀석이 나만큼 운이 좋을까......"
카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선한 얼굴은 한때 자신이 찔러죽였던 누군가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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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성당에서 돌아온 페로는 북쪽 사랑채 마당에 끓어앉아있는 카렐을 보며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카렐의 무릎 앞에는 마리안이 죽을 때 입고있던 흰 비단포가 카렐의 피묻은 단검과 함께 놓여있었다. 불륜을 저지른 정실부인에게 음독명령을 내려놓은 페로가 양심의 가책이나 갈등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동창모임에 태연하게 다녀왔다는 사실은 같은 집안 사람들에게 거의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잘했다."
마리안의 목을 찔러죽인 카렐을 보며 페로가 뜻밖의 말을 내뱉자 가디언들이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고통스런 죽음을 선고받은 마리안에게 감히 즉사라는 '자비'를 베풀어준 카렐에 무시무시한 형벌이 쏟아질 것을 예상하고 있던 그들은 그제서야 페로가 카렐의 이런 돌발 행동을 미리 예상한 것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카렐 역시 주인의 말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아메스 아씨가......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카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마루에 앉아 되묻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은 무책임한 남편이고 아버지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페로는 물론이고 사랑채에 둘러앉은 가디언들까지 수석가디언의 이 '방자하기 짝이없는' 언사에 경악하고 말았다.
"네 이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페로가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오냐오냐해줬더니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각하의 마지막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그마저도 없었습니다."
"이.....이놈이......"
"세상 어떤 여자가 주인님같은 무책임한 남자에게 호감을 가질 것 같습니까?"
순간 멍 해진 표정의 페로는 꿇어앉은 카렐의 눈에서 번득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무서운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그 눈빛에 압도당한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한 발 뒷걸음치고 말았다.
"난......되찾고싶었을 뿐이야......"
페로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되찾아서 어쩌시게요? 똑같이 하시렵니까?"
카렐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감긴 카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둘간의 대화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변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있을 따름이었다.
마리안을 제거하면 카렐이 도리어 기뻐하리라 믿었던 페로는 또다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말도안되는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마저도 인정하고싶지 않은 페로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바보짓에 대한 책임은 모든 문제의 근원인 저 '뻔뻔스러운' 카렐에게로 다시 전가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100년을 묵묵히 기다려준 자신의 앞에 실망스럽다 못해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카렐에게 있었다.
갑자기 이를 악문 페로가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망할 년 시체는 검은 숲에 내다버려라! 카렐 넌 열흘동안 네 방에서 근신하도록 해!"
"시신은 없습니다."
카렐이 중얼거렸다.
"뭐, 뭐야?"
"무책임한 남편이 손댈 시신은 없습니다."
가디언들 사이에 또한번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마리안을 찔러죽인 카렐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 싶어보이고 있었다.
"망할 년!"
마당으로 뛰쳐내려온 페로가 카렐의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차버렸다.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카렐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을 뿐이었다.
"시체는 어딨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해! 썅!"
페로가 쓰러져있는 카렐을 다시한번 짓밟았지만 카렐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페로는 쓰러진 카렐에게 거의 미친사람처럼 발길질을 퍼부어댔다.
"주제도 모르는 싸가지없는 건방진 놈, 네년이 날 얼마나 실망시켰는지도 모르지?"
카렐을 미친 듯 발길질해대고는 지레 지쳐버린 페로는 여전히 멍 한 얼굴로 흙바닥에 뒹구는 카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힘껏 짓밟아버리고는 옆에 서 있던 다룬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시체가 어디있는지 실토할때까지 이년을 채찍으로 갈겨버려!"
"가, 각하......하지만 수석 가디언이온데......"
"내 명령 못들었나! 여기에 형틀 가져다놓고 치란 말이야!"
다룬이 카인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채 마당 한쪽 구석에는 가디언들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이 뜻밖의 상황에 웅성대고 있었다. 카렐은 엘러의 다리를 껴안은 채 벌벌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메스의 겁에 질린 시선을 문득 바라보았다.
아메스의 갈색 머리칼 위에는 이젠 저세상에 있을 어머니 마리안이 만들어준 빨간색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먼 옛날, 팔찌를 설치하던 자신을 바라보며 떨고있던 어린 페로의 비슷한 눈길을 떠올린 카렐은 자신의 손목에서 여전히 빛나는 파란색의 가디언 팔찌를 바라보며 이유없는 미소를 지었다. 피를 흘리며 누워있던 그는 마리안의 방에 아직 남아있는, 아직 반 쯤 뜨다 만 머플러를 아메스에게 가져다주어야겠다며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카인이 창고에서 형틀을 끌고나오자 다룬과 킵이 카렐을 억지로 일으켜세워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쇠사슬로 단단히 동여맸다. 사랑채 마루에 올라선 페로가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다시묻겠다! 그년 시체는 어디있냐!"
"시체는 없습니다."
카렐이 또다시 같은 대답을 반복하자 사랑채에 모여든 집안 사람들 중 몇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모여든 집안 사람들도 '이걸 어째'를 연발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카렐의 눈에서는 광채까지도 뿜어나오고 있었다.
"치지않고 뭐해!"
페로가 채찍을 들고 서 있던 다룬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몇대나 때릴까요......"
"죽어도 좋으니까 실토할때까지 때리란 말이다!"
킵이 단검으로 카렐의 수트를 찢고 등과 어깨를 드러내자 그 '소름끼치는'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 또한번 비명이 올랐다. 팔에 힘을 준 다룬이 카렐의 등을 향해 긴 가죽채찍을 힘껏 날렸다. 눈을 감은 카렐은 잠시 움찔 했지만 여전히 별 반응은 없었다. 드문드문 페로를 올려보는 카렐의 시선은 여전히 고집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엔간한 사람이라면 한번 맞는 것으로도 찢어지며 피가 흐를 채찍이었지만 카렐의 강인한 피부와 근육은 붉게 부어오르기만 할 따름이었다. 카렐은 여전히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이를 악물며 참고 있었다.
"시체는 어딨냐!"
"없습니다!"
악을 쓰며 대답하는 카렐이 또한번 움찔 하고 있었다. 다룬은 주인의 명령대로, 묶여있는 그의 등에 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몇십분이 지났지만 페로의 두 눈에서는 여전히 분노와 쓸데없는 오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매질을 견디다못한 카렐의 등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각하, 150대입니다, 벌써 사람 둘은 죽이고도 남았을 횟수입니다. 이젠......"
다룬이 숨을 헐떡거리며 간청했지만 페로는 여전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황토빛 대청마당은 카렐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피로 덩어리져 있었다.
200대를 넘어서면서는 반 쯤 의식을 잃어가는 카렐의 입에서도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틀에 이마를 기댄 카렐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더이상 반응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로카가 급히 달려들어 카렐의 눈을 뒤집어보고 있었다.
"각하, 의식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젠 그만하심이......"
"시체는 어디있냐고!"
페로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카렐은 그 와중에도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고 있었다. 페로의 눈짓을 받은 다룬이 또다시 채찍을 휘두르자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튀어오른 카렐의 피로 다룬의 전포도 엉망이 되어있었다.
"250대입니다!"
다룬의 고함소리와 함께 휘두른 채찍에 또 한무더기의 피가 튀며 의식을 잃은 카렐의 고개가 뒤로 홱 꺾여버렸다. 무릎이 꺾여버린 카렐이 형틀에 맥없이 매달린 채 무너져내렸다. 흰자위가 드러난 카렐의 눈에는 여전히 약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기절했습니다! 이 이상 치면 쇼크로 죽습니다! 제발, 주인님,"
다룬이 축 늘어진 카렐의 허리를 껴안으며 페로에게 마지막 자비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를 빠드득 갈던 페로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랑방 쪽으로 향하자 카렐의 포박을 서둘러 푼 다룬이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그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의무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본 9살의 어린 아메스는 엘러의 손을 꼭 붙든 채 그 작은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랑방 문 앞에 잠시 멍 하니 서 있던 페로는 다룬의 등에 업혀 실려나가는 카렐의 처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촛점을 잃은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페로가 미친사람처럼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내가.......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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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의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잠시 멍 하니 올려보던 카렐은 그 크고 굳은 손을 솔의 얼굴을 향해 꽤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내내 웃음짓던 솔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은 건 그때였다.
"그냥......살짝 만질테니까......안심해."
"뭐.....아무래도 괜찮아요....."
하지만 카렐의 손이 닿은 솔은 갑자기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렐의 손바닥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솔은 숨까지 헐떡거리며 거의 반 쯤 넋이 나가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있는 솔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제발, 솔,"
살짝 만진다던 카렐이 갑자기 두 손을 뻗어 솔을 와락 껴안았다. 얼떨결에 카렐의 품에 안긴 솔이 갑자기 소름끼칠정도의 큰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욱,"
신음소리를 내뱉은 카렐이 솔을 안았던 팔을 급히 풀고 말았다. 그의 왼쪽 뺨에는 세개나 되는 깊게 찢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뒤로 나동그라지듯 물러난 솔은 자신의 오른쪽 손톱에 남아있는 카렐의 살점과 피에 지레 놀라 또한번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겔 안으로 뛰쳐들어왔던 우베 역시 카렐의 뺨에 난 큰 상처들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상처가 꽤 깊은지 얼굴 왼쪽 전체가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바닥으로 피를 찍어본 카렐이 우베를 돌아보았다.
"괜찮아......별것 아니니까......구급상자 좀 가져다주겠나?"
"아, 알겠습니다."
솔과 카렐을 한번씩 번갈아 쳐다본 우베가 머뭇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사라진것을 확인한 카렐이 솔에게 조금 머쓱한 억지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던 카렐은 거의 사색이 다 된 채 겔 구석에 달라붙어있는 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내가 술을 먹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보다......앞으론 절대 방금전같은 짓은 하지 않을테니.....정말 미안하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이걸 도대체....."
자신의 손으로 카렐에게 상처를 냈다는 데 충격을 받았는지 솔이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피묻은 손을 어찌할 바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가죽으로 된 겔 벽에 손을 서둘러 닦아내고 있었다.
"네가 와서 피를 닦아주면 좋겠구나."
카렐에게 다가온 솔은 피가 흐르는 상처에 차마 손을 대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제롬에게 며칠간이나 감금된 채 강간을 당하고 돌아왔던 솔에게 어느날부터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후유증은 몸의 병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심각한 대인공포 수준까지 갔던 그의 상태는 몇달동안 치료를 받으며 많이 나아져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사소한 신체접촉에 가끔씩 반사적으로 보이는 접촉공포와 발작은 아직 여전히 남아 카렐과 네피의 걱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작은 카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 사실이 카렐과 아버지인 네피, 우베 외에는 철저하게 감춰질 수 있었던 건 세네피스 황후의 반응을 걱정한 카렐이 이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었다는 것과, '카렐의 여자' 라는 딱지 때문에 감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ㅤㅋㅞㄹ크의 분위기 탓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약삭빠른 아메스가 이 사실을 어떻게 '이용'해먹을지는 카렐로서도 꽤나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그럼 내가 닦지 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카렐은 또다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푸,"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든 카렐은 일단 급한대로 피가 대책없이 흘러내리는 뺨 위에 들이댔다. 몇번이나 접은 흰 무명손수건 위로 카렐의 붉은 피가 몇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자잘한 신체접촉으로 솔을 '적응'시켜보려 했던 카렐의 시도는 안좋은 결과로 끝나버리기가 일쑤였지만 이정도로 큰 상처까지 남긴 건 처음이었다. 카렐로서는 세네피스 황후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는 데 나름대로 안도하는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분별없이 행동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황후가 이 사실을 알게된다면 '귀한 자식'에게 감히 상처를 낸 솔에게 얼마나 무서운 분노가 쏟아질지는 생각하나마나한 일이었다.
"이 옆에 너 있으라고 자그만 이동주택 하나 마련해뒀다. 천막생활엔 익숙치않을테니......난 여기에 머무를테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면 돼."
"예. 알았어요."
고개를 잔뜩 숙인 솔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건드릴테니까 다가와도 돼. 정말이다."
그제서야 꽤나 조심스럽게 카렐에게 다가온 솔은 어느새 피로 완전히 물들어버린 카렐의 손수건을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을 조금 찡그린 카렐이 뺨의 상처에 박혀있던 뾰죽한 조각 하나를 빼냈다.
"이런.......손톱이 부러졌구나......"
정신을 조금 차린 솔은 중지의 손톱 중간이 부러져나간 것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피묻은 손수건에 부러진 손톱을 싸서 한쪽에 치워놓은 카렐은 손톱이 부러질정도로 세게 할퀴어진 자신의 뺨에서 흐르는 피는 정작 안중에도 없는 듯 솔의 다친 손가락만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참, 이거 너 주려고 내가 만든거다."
애써 웃음지은 카렐은 수첩만한 투명상자에 끼워넣은 하얀 인동꽃을 솔에게 내밀었다. 어느새 카렐의 피가 잔뜩 묻어버린 그 작은 캡슐을 받아들며 솔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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