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6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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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말에서 뛰어내린 베아트릭스는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자신에 뒤이어 셔틀에 오르는 시알피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돕는군."
피식 웃음지은 베아트릭스는 시알피의 어깨에 달려있던 자신의 퀴버에서 날카로운 투창 한 개를 뽑아들었다.
"전하께서 정말로 다치신 모양입니다. 어쩌죠?"
걱정스런 표정의 베네루스가 스캐너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베아트릭스에게 외쳤다. 한손에 투창을 쥔 베아트릭스가 그의 등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었다.
"어쩌죠? 도와드릴 방법이......"
뒤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베네루스는 자신의 목을 향해 투창을 치켜들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살기띤 눈동자에 호흡을 멎어버리고 말았다.
"셔틀 돌려."
공포에 질린 베네루스는 차마 조종간에 손을 대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단 몇분의 일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의 공포가 지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경은 도착했나? 그럼 일단 도망가!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할룩스를 통해 카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스코프로 힐끗 돌아본 곳에는 십여기에 가까운 기병들에게 둘러싸인 카렐의 위치가 그대로 표시되어 있었다. 적 기병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잘 움직이지 못하는 카렐의 주변을 멀찍이에서 빙빙 돌며 견제만 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멀리서 그쪽을 향해 다가오는 백여기의 적 낙타병들의 더 있었다.
도망치라는 카렐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들은 베아트릭스의 검은색 눈동자가 지독한 갈등에 떨리고 있었다. 카렐이 미끼 역할을 자임한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어떻게......배반을......."
베네루스의 떨리는 목소리에 베아트릭스가 갑자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전하 쪽으로 가지 않고 여기 멈춰서서 뭐하냐고!"
"에?"
어리둥절해하는 베네루스를 뒤로하고 베아트릭스가 급히 시알피에 뛰쳐올랐다.
"해치 열어!"
베아트릭스의 고함소리에 베네루스가 닫았던 해치를 다시 열어주자 검은 시알피와 한몸이 된 베아트릭스가 셔틀에서 다시 뛰쳐나갔다. 그는 한손에 투창을 단단히 움켜쥐고 적들에게 둘러싸인 카렐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게 뭐냐구!"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기회를 스스로 내버린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자책하며 베아트릭스가 자기도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함소리와 함께 내던진 한 발의 강력한 자리드가 카렐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낙타병 한 명을 살인적인 충격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닿을듯이 가까이 접근해 날린 또한발의 투창은 다른 기병의 스코프를 꿰뚫고 머리를 관통하면서 끔찍할만큼 많은 피를 공중에 흩뿌렸다.
기회를 잡은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무시무시한 투창공격에 반 쯤 넋이 나가있던 기병 한 명을 골라 창으로 떨어뜨려버리고는 정말로 다리를 다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잽싸게 적군의 말에 뛰쳐올랐다. 그새 뒤로 조금 물러났던 베아트릭스가 또한발의 투창을 날려 카렐의 뒤로 달려들려는 낙타의 목을 관통해버렸다. 말에 박차를 가한 카렐과 베아트릭스는 아직 기다리고 있는 아르다가 셔틀 쪽으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빨리 해치 닫고 출발해!"
가까스로 셔틀에 뛰쳐들자마자 카렐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명령대로 서둘러 해치를 닫은 베네루스는 기수를 급히 남쪽으로 돌려 셔틀을 가속하고 있었다.
"다리를 다치신겁니까?"
무려 세 명의 적병들을 투창만으로 쓰러뜨린 베아트릭스가 말에서 내리는 카렐을 부축해주며 물었다.
"다친 옆구리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것 뿐이야, 별것 이냐. 자네 덕분에 살았군. 정말 고맙네."
미소지은 카렐이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꼭 껴안아주고 있었다. 또한번 그 품에 안겨있던 베아트릭스는 자신을 껴안고있던 카렐이 조종사 베네루스와 셔틀 쪽방에 몸을 감추고있던 가디언 카토를 향해 눈을 쫑긋거리고 있는 것을 눈치챌 여유까지는 없었다.
"이제 루사로 돌아가야겠네요? 어쩐대요?"
겔에 함께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던 아메스를 보며 우베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삐죽거린 아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서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을 본 베네루스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접시를 들고 다가온 베아트릭스는 모여앉은 사람중에 카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표정하게 뒤로 휙 돌아서버렸다.
"아휴, 플라칼 장군님, 여기 앉으세요,"
우베가 갑자기 깔고앉았던 방석 두 개 중에 한 개를 얼른 내놓았다.
"제가 덥혀놓은거라니깐요. 아씨, 베네루스 너 좀 그쪽으로 비켜. 자리가 좁잖아."
"하여간, 못살어."
라손이 우베의 호들갑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구석진 곳으로 가려는 베아트릭스를 반 강제로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앉힌 우베는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베아트릭스의 얼굴을 올려보며 우베가 갑자기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약혼자한테 혹시 연락이라도 안왔어요? 그 서기아가씨 꽤나 걱정할텐데?"
라손이 짐짓 관심없는 듯 딴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우베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고깃덩이를 잘근거리고 씹던 베네루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뭐, '못생긴' 동부나 남부여자는 여자도 아니라고 틈날때마다 그렇게 씹어대는 남자였으니......뭐, 걱정이나 하고있겠어요? 뭐, 서부에서 어쨌더라? 라호르에서......서부미녀가......"
당황한 우베가 가지고있던 동전 한 개를 잽싸게 베네루스의 주머니에 넣어주자 베네루스는 그제야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쳇, 이 도둑놈 같으니, 같이가놓구......"
우베가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베아트릭스는 평소처럼 카렐 외의 다른사람에게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우와, 팔이 정말 멋있네요,"
차가 든 잔을 들고있는 베아트릭스의 잘 다듬어진 근육질 팔을 가리키며 우베가 입에 든 밀떡 조각을 사방으로 튀겨가면서 중얼거렸다. 탄력넘치는 근육과 반짝이는 검은 피부가 누가보기에도 탄성을 자아낼 매끈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전하께선 어디계십니까."
베아트릭스가 카렐의 아랫사람들에게 건넨 처음 말치고는 참이나 재미없는 그것이었다. 그 재미없는 질문에 걸맞게 역시나 재미없는 성격의 카토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쿠릴타이에서 카이두 경을 비롯한 가문 원로분들과 몇 노얀분들도 함께 불러 향후계획에 관해 상의중이십니다."
베아트릭스의 무덤덤한 태도에 실망한 우베가 대화 주제를 다른데로 돌리려는지 아메스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아버님한테 말 들었어요?"
"뭘요?"
"샤자한 공이 황빈 중 한자리를 동부 하급제후가 출신으로 달라고 했대요."
"풋, 제 편 하나 만들어주시려는 모양이신데......세네피스 황후폐하가 퍽이나 좋다고 하시겠네요."
아메스가 별것 아니라는듯이 대답했다. 최소한 황후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아버지 페로보다 황후를 잘 아는 아메스의 입장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아메스의 순간적이고도 정확한 판단에 우베가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카렐 이야기에 베아트릭스가 갑자기 눈에서 빛을 내며 우베를 돌아보았다.
우베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황비 자리는 네페티 부인이 사실상 예약해놓은 상태고 황빈 중에 한자리는 황후폐하가 북부출신중에서 두시려고 할 테니까 동부 출신으로 나머지 한 자리까지 채우면 솔은 도대체 어디로 가냐구요."
"전하가 솔을 버릴 분으로 보이세요? 그리고 명색이 솔 언니로서 나도 그건 싫다구요."
아메스가 피익 웃음까지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우베는 '솔 언니' 타령하는 아메스의 진짜 속셈이 그다지 순수한 것은 못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순해터진' 네페티 부인과, 역시 거기서 별다를바 없는 솔이 나머지 한자리까지 차지하면 내명부에서 황후를 제외한 3명의 정식 비빈들중에 '아메스 황후'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야심만만한 자리는 이제 단 하나 남는 셈이었다. 아메스로서도 욕심없는 솔이 자리 하나를 채워서 적 하나를 줄여주기를 바라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덧붙여 우베가 아메스에게 귀띔해주었던, 또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우베가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세네피스 황후폐하께서 퍽이나 만만한 북부여자를 데리고오시겠네요. 전하가 몽땅 다 딱지맞아서 그렇지 프로필들을 보니까 정말로 장난들이 아니던데요. 죄다 150살 내외에다가 남극성당 출신에 관직경력도 있고, 생긴것도 쭉빵한게....."
"5명이나 딱지맞았다는 게 중요하죠. 잠자리도 못가보고......스스로 꽤 멋있다고 믿고 계셨는데 그 충격이 오죽하셨을까나?"
아메스가 자기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베아트릭스의 입가에도 희미하나마 웃음이 퍼져 있었다.
우베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전하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나봐요. 그래서 7제후 바툴 가부터 10제후 첸 가까지 미혼자 리스트를 뽑고있다나봐요. 보니까 카이두 경도 은근히 이쪽에서 나오길 기대하는 모양이던데요? 지금 딸들 다 불러들이고 난리도 아니던걸요?"
베네루스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 참, 재밌어지네, 자리는 두갠데 후보는 셋이고.....나도 착한 솔은 꼭 황빈이 됐으면 정말 좋겠는데. 하기야, 황빈이 아니더라도 전하가 소실로 계속 두시기야 하겠지만.....히야아......솔 정도 절세미녀가 날 따라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절세미녀'라는 베네루스의 말에 같은 여자로서 조금 자존심이 상했는지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다시 무표정함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에게 슬쩍 가까이 다가앉은 우베는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쌀쌀맞은 인상에 미인과는 거리가 먼 베아트릭스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우베의 황당한 모습에 평소 '미인타령'에 허우적거리는 그의 모습을 잘 아는 다른 사람들이 머리가 돌은 모양이라며 키득거리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근데 전하는 북부출신중에서 황빈을 맞을 생각은 없으신 모양이던데요. 황실에 북부혈통은 황후폐하하고 전하 스스로로 충분하다고 그러시더라구요."
내내 잠자코있던 카토의 한마디에 아메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사, 두분 입김만으로도 북부 영향력은 충분할텐데 전하 성격에 북부 편애한다는 소리 듣고싶지 않으신 건 당연하시겠죠. 어쨌든 황빈 한자리는 무조건 솔이 되어야 한다구요,"
조금 흥분한듯한 아메스의 말투에 우베가 그답지않은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되물었다.
"설마......솔 그것 때문에....."
아메스가 조금 놀랐는지 우베에게 입을 다물라 급히 손짓하고 있었다.
한참 수다를 떨고있던 그들은 겔의 입구를 열어젖히는 소리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피곤한 얼굴로 겔에 들어선 카렐은 화로 주위에 모여앉아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결론 났습니까?"
라손의 질문에 카렐이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결론이랄것도 없고......결국은 수세적인 입장을 지키는 수밖에 없겠지. 카이두 경을 총대장으로 해서 천이나 이천씩 9개의 연대로 짜기로 했다네. 난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식객일테고."
아메스의 옆에 털석 주저앉으며 카렐이 차 한잔을 집어들었다.
"아참, 우베. 낮에 슈벨 수반한테 연락왔는데, 자네 약혼자 말이야. 자네 보고싶어서 요즘 많이 힘든가봐. 그래서 내가 이리 데려오라고 했어. 그동안 내가 너무 밖에만 나돌게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좀 미안하더라구. 이따가 밤 2시나 3시 쯤에 올거야."
"큭,"
베네루스가 갑자기 터져나온 웃음을 겨우 추스렸다. 카렐은 아메스가 남겨놓은 차를 훌쩍 들이마시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젠 사탕수수밭에 숨어서 콩딱거리지 말고. 겔 하나 줄테니까 얼마간 제대로 같이 지내 봐. 돌아가면 식 올리던지 하고."
"정말이요?"
약혼자와 함께 살 집까지 내준다는 말에 우베도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방금전까지 잠시 한눈 판 게 정말이었는나 싶을 정도로 입이 귀에 걸린 채 해해거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아메스를 한 번 힐끔 돌아본 카렐이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솔도 함께올거야."
"잘됐네요."
찡그릴 줄 알았던 아메스가 뜻밖에도 아무렇지않게 웃음짓자 카렐의 표정이 더 굳어지고 있었다.
카렐이 바로 옆에 앉은 아메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물었다.
"혹시.....알고 계십니까?"
"어느정도는요. 동생 일인데 당연하죠. 그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너무 안됐어요."
아메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잠시 멍 하니 앉아있던 카렐은 갑자기 분위기에 안어울릴정도로 큰 웃음을 지으며 잔을 치켜들었다.
"나 술 조금 하고싶은데. 많이는 말고 아주 조금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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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의 아버지 슈막이 외아들 페로에게 무관심했던 이유가 '꼴도 보기싫은' 정실부인을 닮았기 때문이었음을 잘 아는 집안 사람들은 아메스가 아버지 페로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데 그나마 안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으로서는 최악이랄 수 있는 페로였지만 외동딸인 아메스에게만은 놀랄만큼의 애정을 쏟는 모습을 보여 주변사람들을 꽤나 놀라게 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 그랬듯 아메스를 가디언 수련장으로 보내버린 페로는 그 바쁜 와중에도 어린 딸에게 최소한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는 투자해 자신이 직접 무기 다루는 법과 공부를 가르치는 꽤나 열성적인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사실상 격리된 채 아버지의 품에서만 자란 아메스가 어머니인 마리안에게 아버지만큼의 깊은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어린 딸과 강제로 격리된 채 감옥같은 안채에서 살아가는 어머니 마리안의 심정은 매일매일 까맣게 타들어가고만 있었다. 외로움 속에서 조금씩 시들어가던 마리안 부인을 보다못한 네피가 아메스와 마리안 사이에 '다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도 이때문이었다.
"이게 뭔데?"
수련장 대청에서 네피가 직접 만들어준 작은 목검을 가지고 놀던 어린 아메스는 이 덩치큰 가디언이 내민 작은 꾸러미를 보고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고 있었다. 겨울이 찾아오고 있는 수련장 마당에는 활엽수들에서 떨어진 누런 낙엽들이 마치 눈처럼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날이 추워지니까 마당에서 연습하실 때 꼭 쓰라고 하셨습니다."
아메스 앞에 쭈그려앉은 네피는 종이로 꼼꼼하게 싼 꾸러미를 풀어 내용물을 꺼내놓았다. 손으로 직접 뜬 빨간색의 작은 모자에는 아메스의 이름까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아메스의 작은 머리에 모자를 씌워준 네피는 이 꼬마를 한바퀴 빙 돌려보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예쁘시네요. 마리안 마님 손재주가 정말 좋으십니다. 지금 이거하고 똑같은 머플러하고 장갑도 뜨고 계시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쁘다'는 말을 싫어할 꼬마가 있을 턱이 없었다. 들고있던 목검을 내려놓고 모자를 깊이 썼다가 조금 돌려보았다가 하던 아메스는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 덩치큰 가디언에게 몇개 빠져날아간 앞니를 드러내며 웃어보이고 있었다.
"아버님한테 이거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다고 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왜?"
새 모자를 더듬던 아메스가 어머니를 닮은 그 초롱초롱한 파란색 눈동자는 반짝이며 물어왔다.
"그게......"
"아아, 아빠가 삐지는구나? 나만 줬다고?"
그럴싸한 대답을 궁리하던 네피는 나이답지않게 똘똘한 아메스의 짐작 덕택에 겨우 궁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았어. 유모가 해줬다고 할께."
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쓴 아메스는 다시 목검을 집어들고는 연병장 맞은편의 더미들 쪽으로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아메스의 뒤를 따라간 네피는 더미를 신나게 두들기는 해맑은 그의 모습을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께선......결혼하시거든 남편한테 정말 잘해주셔야 됩니다."
마리안을 떠올린 네피가 한숨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난 아빠랑 결혼할거야."
"풋,"
어린 아메스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네피가 자기도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아빠가 최고야. 힘도 세고, 나한테도 잘해주고. 잘생겼고."
"그럼 어머님은 어쩌구요?"
"그런가?"
더미를 두들기던 아메스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피를 향해 뒤로 돌아선 아메스가 갑자기 비명을 꽥 질렀다.
"으악!"
아이의 비명에 깜짝 놀란 네피가 도끼를 움켜쥐며 휙 돌아선 쪽에는 바닥에 깔린 낙엽들을 밟으며 나타난 카렐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네피가 아메스의 어깨를 껴안아주며 말했다.
"아메스 아씨, 저사람은요......"
"저놈 싫어. 오지 말라고 그래. 빨리! 보기싫단 말이야!"
아메스가 네피의 다리를 껴안으며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아메스의 말을 들은 카렐이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있었다.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은 카렐이 일부러 옆으로 멀찍이 돌아 지나가고 있었다. 아메스가 자신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건 어차피 카렐에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카렐의 차가운 표정은 굳이 아메스가 아니어도 가만히 잘 있는 아이도 그냥 울음을 터뜨리게 하기가 일쑤였고, 어떤 면에서는 어른들보다 사람을 더 정확히 읽어내는 아기들은 카렐의 주변에 감도는 그 묘한 살기를 훨씬 더 빨리 알아내고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어쨌든 카렐은 여지껏 자신을 보고 좋은 태도를 보이는 아이들은 태어나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네피가 아메스를 설득하듯 입을 열었다.
"아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사람은 이곳의 수석 가디언이고 주인님의 충성스런....."
"너무 무섭게 생겼어. 목소리도 이상하고. 저사람 너무 싫어. 저리 가라고 그래! 빨리!"
지나가던 카렐은 문득 멈춰서서는 네피의 다리를 껴안고있는 아메스를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아이의 작은 머리에는 마리안 부인이 근 며칠간 아메스를 생각하며 열번도 짜고 풀고를 해가며 그 입가에 보기드문 웃음을 지어내게 했던 그 빨간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모자 정말 예쁘군요, 아메스 아씨."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은 카렐은 자신을 곤혹스럽게 돌아보는 네피에게 짧은 눈인사만을 건네고는 돌아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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