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5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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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세의 젊은, 아니 어린 나이에 일약 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오른 페로에게 이제 더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등급없는 가디언 카렐을 필두로 무려 5천명의 정예 가디언들이 있었고, 중앙에서는 물론이었고 외가를 등에업은 동부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젊고 정력적인 종장이 왜 아직까지 미혼으로 남아있는지에 관해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다보니 남쪽 안채에 모아놓은 백여명의 미녀들에 빠져 결혼 따위에는 관심없다는 헛소문부터 시작해 '고자'라는 말도안되는 억측까지 오가고 있었고, 이런 소문들에 가장 속상해하는 당사자는 물론 카렐 때문에 속을 썩고있던 페로 자신이었다.
'식인 보고서 사건'을 기점으로 큰 상처를 입고 꽁꽁 얼어붙어버린 카렐의 가슴을 어떻게해서든 다시 열어볼 방법이 없을까 하며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내던 페로는 꽤 근사한 몇개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페로의 비뚤어진 성격이 항상 문제였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자신의 잘못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있던 페로였지만 그는 가디언인 카렐에게 '사과' 따위를 항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고, 애정표현 따위로 자신의 자존심을 망가뜨린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천박한 가디언'이라는 자신의 고정관념과, 한때 자신이 그리도 그렸던 '괴상한 여자아이'의 이미지를 놓고 제멋대로 모순된 결론을 내려가며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고, 아직까지도 '피해자'인 카렐이 스스로 접고 들어오기만을 바라는 뻔뻔스러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결국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비뚤어져있던 페로가 ---어차피 자신과 '결혼'은 불가능한---카렐을 자극하기 위해 내세운 방법은 유치할정도로 어처구니없고도 잔혹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내 말 못알아들었나? 이년을 내 침실에 들이라고 했다."
"각하. 이분은 서부 2제후 세호 가와 로퍼크 가의 피가 섞인 고귀한 혈통이십니다. 이렇게 함부로 대하심은......"
페로 관에 끌려와 벌벌 떨고있는 마리안을 찬 마루에 꿇어앉혀놓은 페로는 자신의 말에 사족을 다는 카렐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네피나 다룬을 비롯한 다른 가디언들은 감히 주인의 말에 정면으로 거역하고 나선 카렐을 잔뜩 겁에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페로는 성난 표정을 지을 뿐 비슷한 행동을 한 다른 가디언들처럼 태형을 내리라던가 근신을 시키던지 하는 '판결'을 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각하,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하시옵소서."
카렐이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창백해져있는 카렐을 바라보는 페로의 입가에는 도리어 미소까지도 번져가고 있었다.
"닥쳐라. 카렐. 네가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감히 내 뜻에 거역하고 나서다니, 태형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내 이년이 마음에 들면 결혼할 것이다."
"이분은 이제 겨우 20살이시옵니다. 결혼하실만한 나이도 아닐 뿐더러....."
"닥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로가 사랑채 마루로 성큼 나서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아있던 카렐에게 들릴듯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신인 네놈 책임이다."
움찔 한 카렐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옆에 꿇어앉혀져 있는 이 나이어린 아가씨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페로에게 또한번 약점을 공격당한 카렐은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그 지독한 울분을 애써 삼키고 있었다. 그런 카렐의 태도를 즐기듯 내려다보던 페로는 마루 옆에 있던 로카에게 째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의무실에 가서 배란유도제를 가져오도록 해라. 가장 확실한 걸로."
바닥에 엎드린 카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마리안과 '결혼'하겠다는 페로의 의사는 확실해보였다. 주인의 명령에 허둥지둥 의무실에 다녀온 집사 로카의 손에는 붉은빛의 작은 알약이 쥐여져 있었다.
"이년에게 먹여."
그 약이 무얼 뜻하는것인지 모를턱이 없는 마리안이 마루에서 엉금엉금 뒷걸음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따위 년에겐 별 관심 없지만 자이센 가엔 어차피 후계자가 필요해. 게다가 로퍼크 가의 종손이기까지 하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뒤로 휙 돌아선 페로는 다시 사랑방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있었다.
"10시에 북쪽 안채로 갈테니까 그 전에 준비를 마쳐둬라. 그리고......오늘밤은 카렐이 내 곁을 지키도록 해."
부들부들 떨리는 카렐의 손톱에 찍힌 사랑채 마루에 어느새 깊은 흠집이 새겨지고 있었다. 판의 손에 강제로 붙들린 마리안은 약을 먹지 않으려 계속 악을 쓰며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리안의 입을 강제로 벌린 로카는 그의 목구멍 안에 결국 알약을 쑤셔넣었다. 결국 약을 삼키고 만 마리안은 그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제 그의 운명은 결정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북쪽 안채를 찾아간 카렐은 안에 들어가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안방 앞을 네피와 함께 지키고 서 있던 카렐은 평소와 별다를바 없는 차림새로 이곳을 찾아온 페로를 무표정하게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년은 안에 있나?"
"예."
카렐이 짧게 대답했다. 카렐과 마찬가지로 쌀쌀맞은 표정의 페로는 다른 말 없이 안채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안에서 마리안의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방음설정도 잊어버리셨나?"
네피가 이를 악물었다. 네피 역시도 지금 이 기분나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이미 폭발 직전의 상황에 와 있었다. 또한번 들려온 비명에 움찔 한 네피가 무어라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곤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가 방음설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던 카렐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얇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굳게 깨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네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말했다.
"카렐, 어떡하지? 네가 주인님께 말씀 좀 드려 봐. 주변에 하인들도 있는데....이러다가 사람들 모이면 어떡해. 카렐.......어? 너......지금 울어?"
"아냐. 눈에 뭐 들어갔어."
하지만 양쪽이 다 붉어진 카렐의 눈시울은 결코 그것 때문이 아님을 네피 또한 잘 알고있었다. 짐짓 태연하게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낸 카렐은 네피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래, 남자인 나도 이런데 여자인 네가 듣기에 오죽하겠냐. 제길할."
"카렐!"
방 안에서 들려온 째지는 목소리는 바로 페로의 것이었다. 움찔 한 네피가 카렐을 얼른 돌아보았다.
"제길할! 한놈은 안을 지켜야 할 것 아냐!"
칼을 쥔 카렐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의 카렐이 안채 침실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안에 들어선 카렐은 문을 잠그고 방에 방음설정을 걸었다.
그리고 카렐은 자이센 가의 새 후계자 아메스가 '만들어지는' 그날밤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을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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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또한번 꽝 하고 울린 소리에 깜짝 놀란 우베가 소리를 질렀다. 카렐이 던진 투창에 명중한 표적 통나무---널빤지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를 않아서 대신 가져다놓은---가 또다시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조각을 흩날리고 있었다. 처음 한시간여를 '등급없는 가디언' 체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황당하게 헛발만 날려대던 카렐은 세시간여가 지난 지금은 그냥 서서 던지는건 시시하다며 달리는 말에 올라 벌써 수십개째의 애ㅤㄲㅜㅊ은 통나무를 투창으로 부수어대고 있었다.
십여개의 기본동작과 오십여개의 응용동작을 카렐에게 순전히 동작으로만 보여줬던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단 세시간만에 응용동작을 독창적으로 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자 꽤나 놀라고 있었다.
물론 단검던지기의 '기본'이 있던 카렐이 투창을 눈 깜짝할새 몸에 익힌 것처럼 투창의 '기본'에 기초지식까지 탄탄한 베아트릭스 또한 말에 올라 던진 투척용 단검들을 수십보 떨어진 표적에 꽤 근사하게 명중시켜놓은 후였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어깨의 사이클롭스와 스코프까지 장착한 베아트릭스는 원래는 투창을 던지도록 디자인된 사이틀롭스를 이용해 믿기 어려운정도의 거리까지 놀라운 정확도로 단검을 날려대고 있었다.
"휴, 어렵네, 역시 하루이틀에 되는 게 아니구나."
어깨너머로 카렐이 배우는 것을 따라하던 아메스가 지친 어깨를 풀어주며 바닥에 쏟아진 투창들을 긁어모아 한곳에 치워놓고는 꽤 멀리 떨어진 계곡 위의 종가로 걸어서 돌아가고 있었다. 두시간이나 투창을 제대로 던져보려 무진 애를 쓰던 라손은 '타고난 소질' 탓만 하며 궁시렁대고 이미 돌아가버린 후였다.
가지고있던 투창을 다 던진 카렐은 자리를 정리하던 베아트릭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꽤 좋은 말이군요."
베아트릭스가 카렐이 타고있는 시알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던 그는 이번에도 카렐과 단둘이 남게 되자 그제서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카파키 가 종가에서 대대로 키워오던 말이지만 원래 혈통은 서부 수베르 산이지. 오르마즈 경이 타던 '절영'의 자마라는군. 자네껀?"
"이곳 산 말입니다. 아버님이 귀향하실 때 꽤 여러마리의 말을 가지고 돌아가셨었죠."
"꽤 많이 던졌는데 어깨는 어때?"
카렐이 손을 뻗어 베아트릭스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자 그가 처음으로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포로로 잡힌 이후로 처음 보여준 밝은 표정이었다.
"휴, 종가까지 가려면 꽤나 한참 올라가야겠는걸."
카렐이 멀리 절벽 위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앞쪽에 우베와 함께 걸어서 종가로 돌아가고 있는 아메스의 모습이 보였다.
"난 아메스 아씨를 태우고 갈테니 자넨 우베를 태우고오게나."
"......"
다시 굳어진 베아트릭스의 시선은 앞장서 말을 몰아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한손으로 아메스를 번쩍 들어올려 앞에 태우는 카렐에게 우베가 다시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아씨, 사람 차별하시네."
"베아트릭스 말 타고 와. 후훗, 자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여자'잖아. 하긴, 나도 여자였나?"
"씨이, 동부나 남부여자는 싫다니깐요, 게다가 저 장군님은 차갑기가....."
자신의 등뒤로 다가오는 베아트릭스의 말발굽소리에 우베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제네르하고 쌍벽을 달리는 제국 최고의 기마술을 느껴보라구,"
뒤떨어진 우베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카렐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쭈삣거리며 마지못해 베아트릭스의 등뒤에 올라탄 우베는 그의 허리를 돌려안으며 무슨 이유엔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베아트릭스의 시선은 아메스와 함께 앞에서 말을 타고가는 카렐을 줄곧 향하고 있었다.
"들어가면 찬물로 어깨 좀 식히셔야겠네요."
아메스의 뺨에 입을 살짝 맞추며 카렐이 속삭였다. 카렐의 가슴에 바싹 기대앉은 아메스는 자신의 허리를 힘있게 감싸안은 카렐의 오른팔을 어루만지며 간만에 찾아온 둘만의 데이트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힘겹게 절벽을 올라 도착한 바툴 가 종가는 아침에 떠나올때나 마찬가지로 꽤 조용한 모습이었다. 우베를 말에서 내려준 베아트릭스는 한구석의 마구간에 말을 세우고 털을 빗어주고 있었다.
"우와, 아세요?"
"뭘?"
아메스와 함께 말에서 내려선 카렐이 건성 되물었다.
"플라칼 장군님이요."
"베아트릭스 경? 왜?"
"배하고 허리에 근육이 장난 아니던데요? 후와, 얼마나 놀랐던지."
"망할 녀석, 타라는 말은 안타고 몸이나 더듬고 있었냐?"
카렐이 우베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아휴, 정말이라니깐요, 손대자마자 땅땅한 근육이 딱 만져지는데, 정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더라니깐요."
우베가 머리를 붙들고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계속 수다를 이었다.
"됐어, 다음부터 여자하고 말 탈 생각은 하지도 마."
우베를 쫓아낸 카렐은 말을 몰고 베아트릭스가 있는 마구간쪽으로 향했다. 말의 갈기를 빗어주는 베아트릭스를 바라보던 카렐은 우베의 말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그의 허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웃음짓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표정의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서야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은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붉은 말 옆에 자신의 시알피를 세워놓았다.
"다음번에 나갈 땐 나도 투창 한 열개쯤 시범삼아 가지고 나갈까봐."
카렐의 말에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베아트릭스는 갑자기 자신의 말 안장에 달려있던 퀴버 두 개중에 한 개를 떼어 카렐에게 내밀었다.
"자넨?"
"늑대가죽이 있을테니 직접 만들겠습니다."
"고맙네."
떼어낸 퀴버를 안장 오른쪽에 정성들여 묶어주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렐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종가의 중앙에 매달려있는 비상을 알리는 징이 요란스럽게 울려댄 건 그때였다.
수송선에서 내려선 샤드니는 사뭇 굳은 얼굴로 황량한 키타이 사막을 둘러보았다. 건조지역에서나 보이는 작은 나무나 풀들이 드물게 자라고 있는 이곳은 탈라스 2번 행성의 비교적 저위도에 위치한 반사막-반초원지역이었다. 열악한 기후나 급수사정, 희박하다못해 제로에 가까운 인구밀도만 보아서는 이 대군의 숙영지 겸 원정군 본부로 그다지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만 지난 많은 침략에서 겪었던 유목민들의 집요한 게릴라전에 학을 뗀 서부제후군으로서는 녀석들의 본거지인 산악이나 소규모 초원들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기도 떨떠름한 상황이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우수한 성능의 수송선과 셔틀들, 고성능 탐지장치를 지닌 서부제후군들에게 있어 사방이 뻥 뚫린 이곳은 제아무리 대담한 유목민들이어도 함부로 접근할 엄두를 못 낼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인구밀집지와의 거리문제나 급수문제도 서부의 뛰어난 엔지니어들만 동원한다면 그 해결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남동쪽 100스타디아 지점에 정체불명의 셔틀이 착륙하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적 정찰부대가 아닐까 합니다."
부장인 하지즈 장군의 보고에 샤드니가 피식 웃음짓고 있었다.
"기동대를 파견할까요?"
"기마 정찰대가 왔을테니.....경기병들하고 낙타병부대로 한바탕 얼을 쏙 빼놓는것도 괜찮겠지."
샤드니는 남동쪽 멀리로 보이는 낮은 언덕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장갑보병은 족히 만 오천은 될 것 같고......낙타병은 만 기 정도? 기병도 일이천 되는 것 같고......일반보병도 4만은 되겠군."
언덕 위에 서서 정밀 스코프와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카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긴 창을 등에 메고 평소처럼 검은 망토를 두른 카렐은 말에 올라 자신을 구경만 하고있던 베아트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친사람 끌고나와 미안하다구. 혼자오긴 심심해서 그런 것 뿐이야. 여기에 정찰간다니까 사람들이 다 미친놈취급하고 아무도 안따라오지 뭔가."
카렐이 반쯤 장난섞인 말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릭스는 자신을 계속 곁에 두기 위해 사사건건 모든 일에 다 참여시키려는 카렐의 의도를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플라칼 가의 손길에서 최대한 떨어진 이곳까지 자신을 데려온 이유도 별다르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뭐 조만간 녀석들 낙타병들이 몰려오겠지. 그때 신나게 달아나려면 자네 기마실력도 필요하고."
"전하 발이 제 말보다 더 빠르지 않으십니까."
베아트릭스의 말에도 카렐은 혼자 키득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직경이 30스타디아는 되고도 남음직한 서부연합군의 대규모 숙영지는 능숙한 서부 사역부대 엔지니어들의 지휘아래 눈깜짝할새 만들어지고 있었다. 숙영지 주변에는 이미 수백여기의 낙타병들과 보병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고, 서부의 정예보병인 장갑보병들이 숙영지 핵심지역들에 군데군데 모여있었다.
개개의 개성보다는 집단적 대형전투를 중시하는 남부의 둔중한 중장보병들과 달리 개개의 공격력을 극대화한 저들 장갑보병은 할버드와 양손검 등의 다루기 어렵지만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남부 중장보병에 맞먹는 방호력을 제공하면서도 훨씬 기동성은 우수한, 신형의 경량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느슨한 대형으로 전술을 펼치는 서부제후군에서 그들의 역할은 경보병 위주로 이루어진 보병대에서 진형의 와해를 막는 골격 역할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반 보병 개개의 전력은 비슷하게 보병 위주의 전술을 펼치는 남부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들 장갑보병들만은 남부의 유명한 중장보병보다도 개개로 보면 훨씬 더 강력한 진짜 '전쟁기계'들이었다. 보병조차도 철저하게 서열화한, 서부제후군다운 병종이었다.
"에너지장벽 자재도 들어와있고, 자기와이어는 벌써 작동 개시했고......어라? 벌써들 오시나?"
고개를 번쩍 든 카렐은 뒤에서 기다리던 시알피에 잽싸게 올라탔다. 적진 쪽에서 소형 셔틀 두 대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말에 급히 박차를 가하며 카렐이 큰 소리로 물었다.
"베네루스! 지금 위치가 어딘가?"
"전하 계신 곳에서 남쪽으로 38스타디아입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적 자기 와이어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알았다. 빠져나가보지."
말 갈기에 몸을 바싹 붙인 카렐이 시알피의 고삐를 바싹 움켜쥐었다. 그 옆에 바싹 달라붙어 함께 달리던 베아트릭스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혼자오시는 게 더 안전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을 타고 달리시느니......"
"아씨, 환자 데리고나와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베아트릭스의 질문의 의도를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카렐은 엉뚱한 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검고 반짝이는 몸을 자랑하는 큰 체구의 시알피와 그보다는 조금 작은 베아트릭스의 붉은 준마가 숨을 헐쩍이며 무서운 속도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능숙하게 말을 모는 카렐의 모습에 베아트릭스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기마술은 언제 배우셨죠? 가디언들에겐 원래 승마를 안가르칠텐데."
"베흔한테 배웠지. X-5세대 가디언까지는 기마를 정식으로 배웠거든. 모르긴몰라도 녀석 기마실력 자네에 비해 떨어지지는 않을거야. 공개적으로 안타서 그렇지."
자신만큼이나 말을 잘 모는 사람이 더 있다는 말에 베아트릭스가 또한번 몸서리치고 있었다.
뒤를 한 번 돌아본 카렐이 등에 지고있던 창을 뽑아들며 투덜거렸다.
"제에길,"
한 대의 셔틀에서 7명은 되는 기병들이 내려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대의 셔틀도 두 명의 앞에 6기의 낙타병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자넨 싸우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 뒤에 바싹 서게나."
입술을 가볍게 깨문 베아트릭스가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샤레이에서의 마지막날 밤 플라칼 가 군대를 떠나겠다고 카렐에게 약속한 베아트릭스였지만 그렇다고 동부 제후군을 위해 싸우면서 남부에 대한 배신을 저지를 생각도 전혀 없었다. 물론 이곳에 나오면서도 아무 무장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말고삐에서 손을 뗀 카렐은 자신의 검은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6기의 낙타병들은 겨우 2기에 불과한 동부 정찰병들이 자신들을 피할 생각도 없이 곧바로 돌격해오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가소로운 것들!"
창을 거세게 휘두른 카렐이 앞을 가로막는 두 명의 낙타병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려버리자 시알피가 공중으로 솟구쳐 흙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낙타의 거구를 훌쩍 뛰어넘었다. 미처 막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 그들의 창이 동강난 채 옆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카렐의 뒤를 바싹 따라온 베아트릭스 역시 말등에 몸을 바싹 붙이며 앞을 가로막는 적 낙타의 큰 몸통 위를 능숙하게 뛰어넘어 달려나갔다.
"자네가 앞서가!"
일단 적들을 돌파하자 카렐이 안전한 자리를 또다시 베아트릭스에게 양보했다.
"셔틀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베아트릭스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카렐은 몸을 휙 뒤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낙타병들을 쓰러뜨리느라 속도가 줄어든 자신들의 뒤에 바싹 달라붙어있는 적 기병의 머리를 향해 허리에 차고있던 단검 중 하나를 냅다 집어던졌다.
"젠장!"
서부 셔틀 한 대가 앞서 달려가는 베아트릭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재빨리 자신의 말 목을 후려친 베아트릭스는 말 머리와 몸을 바싹 낮춘 채 놀랄만큼 낮은 그 틈새를 귀신같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꽤나 아슬아슬하게 지났는지 셔틀 바닥에 거의 스쳐지나간 베아트릭스의 말 머리에 씌웠던 면렵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이익!"
카렐은 앞서 지나간 베아트릭스만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앞을 가로막는 셔틀의 거대한 동체에 놀라 자리에 급히 멈춰선 시알피는 중심을 잃으며 그대로 흙바닥에 나딩굴고 말았다. 넘어지는 말에서 몸을 날린 카렐은 바닥을 몇바퀴 굴러 자리에 가까스로 멈춰섰다.
"도망쳐!"
이미 한참 앞서가고 있는 베아트릭스를 향해 카렐이 할룩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행히 다리는 다치지 않았는지 시알피가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시알피의 엉덩이를 세게 두들겨 베아트릭스 쪽으로 쫓아낸 카렐은 말들보다 훨씬 빠른 자신의 두 다리로 뛰어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간, 다리를 붙들며 갑자기 절룩거리기 시작한 카렐은 멀리 도망치는 베아트릭스 쪽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셔틀 아래를 가까스로 통과한 베아트릭스는 문득 뒤쪽을 돌아보았다. 셔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낙마한 카렐은 다리를 절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다쳐서인지, 아니면 추격병들을 자신 쪽으로 유인하려는 행위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치신겁니까?"
이미 적 기병과 낙타병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카렐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기의 기병이 아직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런 무장도 하고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베아트릭스에게는 카렐을 놔두고 달아나는밖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기회일지도 모르지."
베아트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카렐과 단둘이 타고온 아르다가 셔틀에는 이제 베네루스 혼자 남아있을 뿐이었다. 싸움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그 조종사 녀석은 전쟁터에서 다져진 자신의 한주먹감도 아니었다. 일단 셔틀에만 올라타면 녀석을 협박해 플라칼 가로 돌아가는 건 식은죽먹기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악마적으로 미소짓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앞으로 아르다가 셔틀에서 내려준 해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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