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9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
.
.
외곽에서 지원사격과 적 이탈병추격을 하고 있던 베아트릭스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북쪽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2천여 적 좌군 잔여병력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힘이라도 얻은 듯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적의 6천여 기병대 소식에서 그대로 확인되고 있었다.
"히르직스 경! 빨리 나오십시오! 이대로 있으면 기사단 전체가 포위당합니다!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헤즈 사령관 각하! 퇴각령을 내려주십시오!"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퀴버에 단 한발 남아있는 투창을 바라보며 결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자신뿐만이 아니고 궁기병대 대부분이 '최후'를 위해 남겨두어야 할 한발씩을 남겨두고 모든 투창을 써버린 후였다. 게다가 적들이 남쪽에서까지 몰려온다면 재보급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령관 헤즈에게서 아무 대답도 들어오지 않자 베아트릭스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창을 대신 뽑아들었다.
"퇴각할까요?"
다급해진 표정의 부장 루코프가 물었지만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퇴각령은 아직 없다. 무단이탈할 수는 없으니.....적 좌군 잔여병력을 무너뜨려 기사단에 길을 뚫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베아트릭스를 선두로 정연한 돌격대형을 이룬 경기병단은 겨우 2천여명이 남아있는 토로 경의 잔여병력을 향해 일제돌격을 감행했다.
"단장님!"
"왜!"
"북쪽에서......적 중장기병 천오백여명입니다! 슈로 기사단 같습니다!"
"그건 또 뭐야!"
도주하는 플라칼 가 3기사단을 멀리 쫓아낸 제네르는 마지막 추격을 경기병들에게 맡겨두고 최대한 서둘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카렐의 뒤를 쫓아 남쪽을 치는 대신 아군의 후방을 한바퀴 빙 돌아 토로 경의 좌군에 직접 합류해 북쪽을 치는 방법을 택했다. 카렐이 앞장서는 6천의 기병대는 자신이 굳이 신경쓸 필요도 없을테고 토로 경이 이끄는 좌군 잔여병력이 얼마나 북쪽을 버티어주느냐가 카렐의 뜻에 따라 적 기병전력을 포위해 완전히 무너뜨리느냐 마느냐를 결정지을것이라는 그의 순간적인 판단이었고, 그것은 정확히 적중했다.
토로 경의 잔여병력으로 북동쪽을, 카렐의 지원병력으로 남쪽을 차단당한 2개의 적 기사단은 제네르가 이끌고 온 슈로 기사단이 북서쪽에서 '마지막 뚜껑'을 닫으면서 완전히 포위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토로 경이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전하께선 단장님이 좌군 잔여병 지휘를 맡으라 하십니다!"
"알았다!"
발리의 고함소리에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캐너를 계속 살피던 발리가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포위망 외곽에 적 경기병단 아직 남아있습니다. 녀석들은 충분히 퇴각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놈들이 우리 좌군을 공격하려는 모양입니다!"
"미친놈들이군, 경기병 주제에......돌격준비!"
제네르의 명령에 슈로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번쩍이는 창을 치켜들었다. 지난번, 대제례장에서 놓쳤던 바로 그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패를 쥔 제네르의 왼쪽 어깨에 자기도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북동쪽에서 적 슈로 기사단 천오백입니다!"
"제기랄! 동쪽으로 퇴각한다!"
갑자기 끼어들어온 슈로 기사단 때문에 히르직스의 기사단을 구해내기 위한 베아트릭스의 마지막 돌격은 적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저 2천 기병만 무너뜨리면 최소한 한곳은 숨통이 트일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틀려버린 셈이었다. 전투 내내 내리던 가랑비까지 꽤 이젠 꽤 굵어져 이래저래 신경쓰이는 형국이었다.
"기사단은?"
"여전히 갇혀있습니다! 히르직스 경이 부상을 입었다던데 큰일입니다!"
모두에게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적의 포위망 밖에 있는 베아트릭스의 경기병단은 완전히 갇혀있는 기사단보다는 조금 나은 셈이었다. 그리고 베아트릭스의 귀에 그리도 기다리던 헤즈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모두 마랄루로 퇴각한다! 숙영지 전방에 수송선을 대기시킬테니 모두 퇴각하라!"
"제기랄! 10분만 빨리 결정하지!"
소리를 버럭 지른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부대를 추스려 급히 후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때, 말을 돌려 남쪽으로 향하던 베아트릭스에게 또다시 들어온 통신은 다름아닌 히르직스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베아트릭스 경, 동쪽 측면을 뚫어주게나, 도저히 나갈수가 없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히르직스의 처절한 목소리에 베아트릭스도 급히 말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2기사단장은 헤즈의 퇴각령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검은 마귀' 운운하며 전장을 무단이탈해 포위망을 빠져나갔지만 히르직스가 직접 이끌던 1기사단과 2기사단 잔여병력은 만 명의 적 기병에 사방을 완전포위당한 채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말을 세운 베아트릭스가 함게 달리던 참모에게 물었다.
"젠장, 적 동쪽 측면은 어떤 부대인가?"
"적 경기병 이천과 중장기병 8백여기입니다! 그나마 적들의 밀도가 가장 낮은 곳입니다."
스캐너를 살핀 참모의 대답에 잠시 무언가 생각한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궁기병대 선봉으로 마지막 공격이다! 적 측면의 경기병대 이천을 근거리공격한다! 히르직스 경! 저희가 사격할때 맞춰 돌파해나오십시오!"
'마지막' 자리드를 뽑아든 베아트릭스가 스스로 앞장서자 경기병대들도 일제히 자신들의 투창을 집어들고 대장의 뒤를 따랐다.
"동쪽에 적 궁기병 천오백, 그 후방에 창기병 3천여기입니다! 퇴각하다말고 다시 돌아온 모양입니다!"
발리의 고함소리에 순간 당혹한 제네르가 급히 동쪽을 쳐다보았다. 포위망을 빠져나오려 버둥거리고 있는 히르직스의 기사단 3천여명과 보병대 2천여명을 가까스로 묶어두고 있던 제네르는 퇴각하는 줄 알았던 적 경기병대, 그것도 무시무시한 전문 궁기병 천 오백을 선두로 갑자기 방향을 틀어 후방 기습공격을 해오자 저으기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대비할 시간여유도 없이, 측면을 지키던 2천여 동부 경기병들의 등뒤로 천 오백발의 투창이 빗속을 뚫고 조준사격인 직사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타이밍을 맞춘 듯, 포위망 안의 적 기사단이 일제히 포위망의 동측면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뭔가? 적 경기병들이야?"
남쪽에서부터 적 기병을 '도륙'해오고 있던 카렐 역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할룩스를 통해 카렐의 약간 화난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적 궁기병의 느닷없는 기습에 흐뜨러졌던 동부 기병들은 반대편에서 쳐오는 남부 기사단의 일제돌격에 순간 무너지며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포위망이 뚫린거야?"
"아......예! 적 경기병 기습에 측면이 약해졌습니다!"
"제길, 당장 적 기병을 추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기껏 완성한 포위망이 돌파당하는 상황에 면목이 없어진 제네르는 즉시 좌군 기병들을 모두 몰아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적 기사단의 뒤를 맹렬히 쫓기 시작했다.
"히르직스 경! 어디계십니까!"
베아트릭스의 계속된 질문에도 그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방금전의 그 희미하던 목소리로 보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베아트릭스가 개인적으로 결코 좋아할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플라칼 가에서 가장 우수한 기병지휘관임에는 베아트릭스 스스로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있었다.
"루코프! 히르직스 경을 탐색해!"
즉시 스캐너를 작동시킨 루코프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히르직스 경은.......아직 적 포위망 안에 있습니다.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길할, 너희 다섯 명만 날 따라와!"
5명의 창기병만을 거느린 베아트릭스가 아수라장이 된 적진 안으로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뛰쳐들었다. 투창을 모두 써버린 베아트릭스는 대신 창과 방패를 단단히 꼰아잡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진형이건 뭐건 엉망진창이 된 채 적진 안에서 허둥지둥 도망쳐나오는 아군 기사단과 보병들 사이에서 베아트릭스와 부하들만이 반대방향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적 기병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단번에 꺾어가며 달리는 베아트릭스의 오른쪽 멀리, 북쪽의 얕은 언덕너머에서 거의 지진에 가까운 진동이 울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달아나는 아군을 추격해오던 제네르가 이끄는 무려 4천여의 무시무시한 동부기병대였다. 그 위용에 잔뜩 겁에질린 루코프가 소리를 질렀다.
"자, 장군님! 빨리 나가야 합니다! 저기 휩쓸리면 다죽습니다!"
"알아!"
짜증을 부리며 대답한 베아트릭스의 스코프에 몇명의 적 기병들과 사투중인 아군 근위기병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이미 정신을 잃어가는 히르직스를 실은 말이 근위기병들의 결사적인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창을 쥐고 그쪽으로 서둘러 달려가 적 기병 한 명을 단번에 쓰러뜨려버렸다. 눈을 가늘게 뜬 히르직스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베아트릭스를 약간 뜻밖이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동쪽이 뚫렸으니 빨리 달아나! 빨리!"
근위기병들에게 소리를 지른 베아트릭스가 또한명의 기병을 말에서 거꾸러뜨렸다. 히르직스와 근위기병들이 서둘러 달아나고 있었다.
"제길할!"
자신에게 계속 몰려드는 동부기병들을 상대하며 베아트릭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곳을 향해 돌격해오는 무시무시한 적 기병대 주력이 어느새 족히 2, 3스타디아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까스로 말을 돌린 베아트릭스가 결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게 누구신가?"
추격대 선두를 달리던 제네르가 갑자기 창을 치켜들며 말의 방향을 조금 틀었다.
"라손! 베아트릭슨지 뭔지 그년을 발견했다! 내가 쫓을테니 네가 부대를 지휘해! 발리는 날 따라와!"
제네르는 비상버클을 풀어 마갑을 떨어뜨리며 말에 최대한의 속도를 가했다. 발리 역시 말에 최대한의 속도를 붙였지만 절정의 기마술을 자랑하는 제네르에게 조금씩 뒤처지고 있었다.
"이번엔 절대 안놓친다!"
제네르가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그를 실은 얼룩무늬 말 역시 주인의 기분을 이해한 듯 거의 필사적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지난번 베아트릭스를 쫓았을 때에는 '남의 말' 이었지만 이번에 제네르 자신을 싣고 달리는 건 오랜동안 호흡을 맞춰온 그의 애마였다. 하지만 베아트릭스의 붉은 준마 역시 제네르의 말 못지않게 주인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저 망할 노랑머리 년!"
무심코 뒤를 돌아본 베아트릭스가 자기도모르게 욕을 토해냈다. 붉은 망토에 새겨진 네 마리의 용은 자신을 쫓는 녀석이 지난번의 그 '노랑머리 년'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에겐 투창이 단 한개도 없었다. 그는 더럽게도 운없는 자신을 또한번 저주하고 있었다.
"그래, 저기까지만 가면,"
베아트릭스는 이번이 지난번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애써 자위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녀석이 땅끝까지 쫓아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앞쪽의 달아나는 아군 대열에 합류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양쪽 다 절륜의 기마술을 자랑하는 이상, 이변만 없다면 녀석과의 반 스타디아의 거리 정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믿으며 말을 몰던 그의 측면으로 정찰병으로 보이는 동부기병 네 기 정도가 불쑥 모습을 나타낸 건 한마디로 최악의 불운중에 불운이었다.
"이, 씨,"
돌아서 갈 시간여유가 없는 베아트릭스로서는 정면돌파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말을 몰아오는 그의 기세에 창을 치켜들던 적 기병 역시 약간 겁을 집어먹었는지 움찔 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괴성을 지르며 창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맨 앞쪽에 있던 동부 기병이 미처 그 참격을 받아내지 못한 채 말 뒤로 나딩굴렀다.
"젠장!"
적이 겁을 먹고 비켜나주기를 바랐던 베아트릭스로서는 이것이 결코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다. 적을 말에서 떨어뜨린 충격량만큼 자신의 속도가 떨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뒤를 돌아본 그는 방금 전보다 절반의 거리로 가까와져있는 제네르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비켜!"
흥분한 제네르가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동부 정찰기병들에게 째져라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이미 쓰러져있는 기병과 그의 말 위를 훌쩍 뛰어넘은 제네르는 그 푸른색 눈에 살기를 번득이며 앞에서 베아트릭스를 쫓던 정찰병들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추월했다. 그는 창도 옆으로 치워놓은 채 온몸을 말 갈기에 바싹 붙이고 큰 소리로 말을 독려하고 있었다.
"에이, 썅!"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린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호흡이 멎을만큼의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남쪽 초원에서 얕은 언덕을 넘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기병 한 명, 아니 지난번에 본 바 있던 '검은 마귀'가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날 못잡아,"
베아트릭스가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거리상 저녀석이 아무리 말을 최대한 빨리 몰아도 자신을 잡기는 불가능할것이 확실했다. 그는 자신의 스코프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급히 닦아냈다.
멀리 앞으로 아군의 퇴각행렬 후미가 보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안도한 베아트릭스는 옆에서 달려오던 그 '검은 마귀'쪽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엉?"
방금 그곳 조금 앞에 녀석이 타고있던 검은 말이 등에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뭐지?.......도대체......."
그는 퍼뜩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도리어 잘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에 다시한번 속도를 가하던 베아트릭스는 등뒤에서 들리는, 무언가 타타탁 하며 빠르게 땅바닥을 딛는 소리---말굽소리는 틀림없이 아닌---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드러난 그 시커먼 형상은 방금전까지 먼 곳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검은 마귀'였다.
"이, 익!"
가슴을 덮쳐오는 그 어마어마한 힘에 밀린 베아트릭스가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에서 카렐에게 들이받힌 베아트릭스의 몸은 이 무서운 적의 가슴에 안긴 채 공중으로 붕 치솟아올랐다. 충격에 자신의 목이 부러져버릴 것이라 생각한 베아트릭스는 자기도모르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으윽,"
빗물로 질척질척해진 땅바닥에 먼저 떨어진 건 카렐 쪽이었다, 베아트릭스에게 가해질 충격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받아낸 카렐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투구를 쓴 베아트릭스의 머리가 거세게 튕기며 카렐의 단단한 가슴에 두번째의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잘 알고있었다. 원래는 자신이 먼저 떨어지며 그 충격에 몸이 으스러졌어야 할 것을 할 것을 이자가 몸을 공중에서 몸을 돌려 대신 받아주었다는 것을.
"전하!"
큰 고함을 지른 제네르가 급히 말을 멈춰세웠다. 베아트릭스가 정신이 얼떨떨해져있는 카렐의 팔을 힘껏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떨어지며 한쪽 발목이 뒤틀려버린 베아트릭스가 엉금엉금 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절룩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카렐의 큰 손이 악을 쓰며 달아나려는 그의 발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놔!"
세이버를 뽑아들고 자신을 붙든 카렐을 내리치려던 베아트릭스는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온 '노랑머리 년'이 거칠게 휘두른 장검의 충격과 발목을 굳게 잡고있는 카렐의 힘에 중심을 잃고는 다시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세이버가 공중을 빙 돌아 멀찍이에 떨어져버리고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제네르가 쓰러진 베아트릭스를 향해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해치지 마라!"
카렐의 고함소리에 베아트릭스의 손목을 치려던 제네르가 급히 칼을 거두었다.
"위험한 년입니다. 손목을 잘라내는 것이......"
"놔둬."
힘겹게 몸을 일으킨 카렐이 누워있던 베아트릭스의 몸을 깔고앉으며 양 어깨를 바닥에 내리누르고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베아트릭스는 며칠만에 다시 마주한, 바로 그 무지개톤의 회색눈을 상대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은 그가 쓰고있던 투구와 스코프를 홱 벗겨내버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헐떡이고 있는 카렐의 피비린내어린 거친 숨결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와닿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장군인가?"
사람의 목소리같지도 않은, 그 소름끼치는 울림에 베아트릭스의 온몸이 바싹 얼어붙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와 흑인종 특유의 도톰한 입술이 치욕스러움에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제발.....날 죽여주시오."
"왜?"
카렐이 아무렇지않게 되묻자 베아트릭스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적 장군을 사로잡은 카렐 주변으로 수십의 동부 제후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을 한 번 빙 둘러본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는 카렐의 팔뚝을 느닷없이 거칠게 물어뜯었다.
"이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칼을 치켜들었다.
"가만히 있게, 제네르 경."
카렐이 아무렇지않게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의 송곳니에 물린 카렐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여전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렐의 기세에 다시한번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의 그 특이한 목소리가 또한번 공기를 울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죽고싶나?"
"더한 거라도 할 수 있소."
서슴없이 대답하는 베아트릭스의 입술에 카렐의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목에 아직 그대로 붙어있던 작은 드레싱을 살짝 들쳐보았다.
"단검에 찔렸는데......다 들어가지는 못했군......절반정도?.....스스로 그랬나?"
"당신이 알 필요 없소."
"상태를 보아선.....요동에서 그 일을 일으켰을때쯤 난 상처같군. 행여 외가에 누가 될까봐 자살하려 한 건가?"
베아트릭스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의 위로 떨어지는 굵고 차가운 빗줄기를 카렐의 넓은 어깨와 가슴이 마치 우산처럼 가려주고 있었다. 카렐은 파르르 떨리고있는 베아트릭스의 검은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띤 카렐이 온기가 느껴지는 그 큰 손으로 이 쓰러진 적장의 뺨을 가만히 짚어주었다. 생각외로 따뜻한 카렐의 목소리가 움찔 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군. 어차피 플라칼 가에서는 바툴 가와 상급제후가문을 이간질시키려고 일부러 장군을 이용한 것이니.....아무리 발버둥쳤어도 신원은 밝혀질밖에."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 한 표정의 베아트릭스가 갑자기 카렐을 눈을 다시 올려보았다. 베아트릭스의 목 드레싱을 조심스럽게 원위치시켜준 카렐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어서는 카렐을 바라보며 베아트릭스의 입가에 제발 그대로 있어달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카렐이 일어나면서 발목이 뒤틀린 채 말에서 바닥으로 나딩군 그의 장군답지 못한 치욕스런 모습이 적병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위를 가려주던 카렐이 사라지면서 그의 얼굴에 그대로 떨어지는 굵은 빗물이 뺨과 눈 언저리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적 장군이니 최대한의 예우로 대하도록 한다."
카렐이 옷에 엉겨붙은 진흙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이자는......"
제후군 기병장교 하나가 약간 볼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찢어죽여도 부족한 년입니다!"
트라티누스 가 문장을 단 고위급 장교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자 카렐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포로니 능지처참을 하던 목을 베건 너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날 죽이라니까!"
그때까지도 바닥에 쓰러져있던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말을 못들은 척 한 카렐이 제네르에게 말했다.
"내가 잡은 포로니 자네들이 데리고 있도록 해. 제후군쪽에 인계하는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흥분한 동부제후들로부터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네르가 들고있던 칼을 즉시 칼집에 꽂아넣으며 그다운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지난 사건의 '주범'인 베아트릭스가 잡혔으니 이제 저들이 그를 얼마나 잔혹하게 대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투구를 벗은 제네르는 바닥에 쓰러진 '숙적'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 역시도 존경스러울정도로 뛰어난 전사이며 지휘관인 그에게 적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치욕스러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던 베아트릭스는 그의 동정어린 시선에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발리,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을 잘 모시도록."
발리는 제네르의 '용어선택'에 잠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발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베아트릭스의 등에 카렐이 자신의 검은 망토를 벗어 덮어주고는 후드로 얼굴까지 가려주었다.
"쓸데없이 다른사람 관심끌지 말도록 해. 아군이건 적군이건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하고."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보인 발리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베아트릭스를 한쪽 어깨에 불끈 짊어지고 자신의 말로 향했다.
"적들 추격은?"
베아트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렐이 제네르에게 무표정하게 물었다.
"대기시켜준 수송선을 타고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마랄루로 돌아갈 모양입니다. 우리 승리입니다. 이제 마랄루를 수복하고 반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적 경기병대만 아니었으면 기사단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는데....."
카렐이 쓴 입맛을 다시며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우두커니 올려보았다.
적에게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안긴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것으로 승승장구하던 플라칼 가의 기세는 완전히 꺾인 셈이었다. 이번 전쟁의 큰 분수령이 된 루사의 회전이 동부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제위경쟁 또한 혼돈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