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0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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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붉은 말에 올라탄 플라칼 가 제후군 경기병단장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장군은 마랄루 시 외곽의 한 언덕에 십여명의 근위기병들과 함께 서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요."
부장 루코프 녀석이 스코프의 배율을 조절하며 중얼거렸다. 언덕 밑에 보이는 작은 도시---기껏해야 2, 3만여명 정도 살까말까해보이는---는 이미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도시를 헐겁게 포위한 육천여명의 경보병들은 제 세상인 양 도시를 신나게 휘젓고다니는 삼천여명의 중장기병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이 진입할 타이밍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베아트릭스는 헤즈 사령관이 경보병단과 제3기사단에 왜 이곳을 '공격'하라는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헤즈 사령관은 이곳에 동부제후군 패잔병 천여명이 숨어들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새빨간 거짓임은 출동한 신임 제3기사단장과 경보병단장 모두 잘 알고있었다. 이 도시가 공격당한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었다.
이들은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3기사단놈들 반 쯤 미친것같군."
베아트릭스가 높낮이없는 밋밋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깨져서 개망신당했으니 저짓이라도 해야죠."
루코프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본가와 비엔에는 '제3기사단과 경보병단 마랄루 시 외곽에서 적 매복병 수천을 물리치는 대전과' 라는 얼토당토않은 소식이 알려질테고, 요격전에서 완전히 박살났던 저 두 부대의 위신도 어느정도는 살아날것이 뻔했다.
이곳에서 민간인들을 때려잡으며 처음에는 의아해했을 병사들 역시 그런 분위기에 며칠 어영부영 휩쓸리다보면 정말로 자신들이 적군을 죽였다는 최면에 자기스스로 속아넘어갈테고, 나중에 고향에 돌아가면 그 전쟁 특유의 과장과 적당히 버무려져서 적군 수십을 용감히 때려잡은 영웅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휘관들이 저희부대는 왜 안나갔냐고 불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닥치라고나 그래."
베아트릭스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이번 공격, 아니 학살에는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은 각자 병사의 판단에 맡긴다'는 꽤나 솔깃한 조건이 붙어있었다. 경기병단에도 비슷한 제안---'명령'이 아니고 순전히 '제안'이었다.---을 했던 헤즈 사령관은 참가를 딱 잘라 거절하는 베아트릭스의 태도에 꽤나 놀라는 표정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베아트릭스의 생각에 약탈과 강간이 난무할 이런 공격, 아니 학살은 부대의 기강을 흐뜨리는 미친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칫 이런 행동이 자신의 동부에 대한 '향수'정도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한 베아트릭스는 참가 대신 '직접 가서 참관'하겠다며 휘갑을 쳐놓고 이 불쾌한 자리에 나와있는 것이었다.
"경보병들 이제 들어가는군요. 이제 제대로 난리나겠네요."
베아트릭스가 처음으로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동부 군대'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동료를 잃은 저들이 '살인, 약탈면허'까지 가지고 들어간 도시에서 마주칠 동부 민간인들에게 어떻게 대할지는 말할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스코프로 내려다본 그 광경은 베아트릭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저희도 들어가볼까요?"
아까부터 몸이 달아있던 루코프 녀석이 말을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리며 물었다. 베아트릭스는 별 대답없이 말을 도시 쪽으로 몰고 있었다. 푸른 망토를 두른 이 지휘관을 따라 십여명의 근위기병들이 뒤를 따랐다.
기사단과 보병들이 이미 한바탕 휩쓸고간 도시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이미 불타고있는 집 안은 물론이고 길거리에도 꽤나 많은 민간인들의 시체가 구석구석마다 빠짐없이 들어차 있었다. 상당수의 시체는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에 적군들이 있다는 헤즈 사령관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은 또한번 드러나고 있었다. 적군들이 쳐오는데 그 앞에서 강간이나 하고있을 미친놈들이 어디있다는 말인가.
한구석에서는 한발 늦은듯한 십여명의 경보병들이 불이 붙지 않은 집들에서 몇명의 숨어있던 민간인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다 드릴께요!"
"네가 안줘도 그냥 가지면 돼."
동부 억양이 섞인 여자의 비명소리와 그를 놀리는듯한 병사들의 대꾸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베아트릭스의 귀에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꽤 높아보이는 장군의 갑옷과 망토를 두른 베아트릭스의 모습을 발견한 그 늙은 여자는 뒷덜미를 잡고있던 병사를 떠밀며 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베아트릭스는 이순간 얼굴을 가려줄 투구를 쓰고있지 않은것을 갑자기 뼛속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어르신, 보시다시피 다 애들이고....."
무어라 더 말하려던 노파의 목소리는 뒷머리를 거칠게 내려치는 병사의 방패에서 울린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딱 멈춰버렸다. 방패의 모서리에 뒤통수가 쪼개져버린 늙은 여자의 시체는 뇌수를 쏟으며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피묻은 방패를 히죽거리며 닦아내고 있는 병사를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가자."
어느새 입술을 단단히 깨문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가 절반 동부인임을 잘 아는 루코프 녀석이 조심스럽게 상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반 쯤 맥이 풀린듯한 베아트릭스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폐허가 된 길을 말을 타고가던 그는 기분전환이라도 하려는 듯 잠시 말을 세우고 쓰고있던 스코프를 벗어 전포자락으로 닦았다. 그러던 베아트릭스의 왼쪽 귀에 특이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썅!"
반사적으로 치켜든 베아트릭스의 방패에 꽤 묵직한 충격과 함께 투창 한 개가 꽂히고 있었다.
"뭐야!"
루코프 녀석이 대여섯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재빨리 달려나갔지만 그런 기병들의 옆을 쌕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무언가가 무서운 속도로 앞질러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직사로 던져진 그 무시무시한 자리드는 정신없이 달아나던 젊은 남자의 왼쪽 가슴을 꿰뚫고는 그 시체를 매단채로 허름한 회벽에 푹 꽂히며 파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그 무서운 위력에 청년의 뒤를 쫓던 루코프조차 경악하며 침을 꿀꺽 삼킬 지경이었다.
"지, 지금 스코프도 없이 던지신 것 맞죠?"
루코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베아트릭스에게 물었다.
"그래."
베아트릭스가 스코프를 다시 눌러쓰며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왼팔의 방패로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오른팔로 자리드를 던진 자신들 지휘관의 놀라운 순발력에 근위기병들이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루코프가 벽에 꿰여 죽어있는 청년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적병이 저격한 것일까요?"
"아니."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방패에 박혀있는 투창을 살펴보며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정규군에서는 옛날에 쓰던 구형 투창이야. 군대에 있던 경험이 있는 녀석이겠지. 동부에선 군인이면 보병도 투창 사용법을 다 배우니까."
"경보병단에 조심하라고 알릴까요?"
"됐어. 가뜩이나 미쳐있는놈들 더 날뛰게 할 필요는 없어."
벽에 박혀있는 자신의 투창을 도로 뽑아낸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손에 죽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제대로된 저항이라는 것을 한 청년의 마지막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의 남-서부 동시공격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죠."
이곳의 침울해진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회의실에 들어온 카렐이 상석에 자리잡고 앉으며 제일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말했듯이 지금의 남부제후군과 서부제후군은 기본적으로 '연합군'이라기보다는 '동시공격'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겁니다. 양측간에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고 현실적으로 전략조율도 있기가 어렵죠."
"코리온 리쿠 학장은 남부쪽이나 근위대에게서 간섭을 받을 인물이 절대 아닙니다."
카렐의 말에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리쿠 학장의 거창한 뜻은 접어두고 여길 침공하는 서부제후군들의 속내는 400년이 넘게 영유권을 주장해온 탈라스를 집어삼키는 거죠. 남부녀석들은 수우의 제위등극을 위해 동부의 항복을 받아내자는 거고. 둘은 기본적으로 방향이 틀립니다."
카렐의 의도을 제일먼저 눈치챈 페로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럼......녀석들을 이간질시키자는건가?"
"녀석들이 아르군 경과 마굴루 부인을 바툴 가 출신 무장을 동원해 암살한것과 마찬가지지."
카렐의 대답에 제르베 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아나? 서부놈들 계획대로 탈라스를 세호 가와 플레렌 가가 차지하면 영지면적에서 플레렌 가가 델루지 가하고 맞먹게 된다는 걸. 세호 가도 플라칼 가하고 비슷해질거야."
"풋,"
페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카렐의 뒤를 받았다.
"플라칼 가나 서부제후군이나 동상이몽에 빠져있겠군, 플라칼 가는 서부제후군이 공격은 하되 죽을 쑤기만 바라고 있겠고, 반대로 서부는 플라칼 가가 최대한 선전해서 동부의 주의를 분산시켜주기를 바랄테고?"
"그럴거면 왜 서부를 끌어들였을까요? 남부의 전력만 총동원해도 동부를 단독으로 충분히 꺾을 수 있을텐데."
샤자한 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카렐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은.....남부가 동부에 신경쓰고있는 새에 서부가 딴생각 못하게 묶어두는 것도 있을테고, 더 중요한 문제로 그렇게되면 수우가 제위에 오르는데 외형상 서부도 동의한 게 되죠. 군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명분쌓기라고 봐야 할 겁니다. 서부를 끌어들인 건 아직 젊은 제롬 공이 아니라 훨씬 멀리까지 바라보고 리쿠 학장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베흔 근위대장의 판단이었을 겁니다. 도리어 제롬 공 쪽에서는 잘 구워놓은 파이에 서부가 뒤늦게 달려든 걸 달갑지않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다고 앞뒤 양쪽에서 공격해오고있다는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않습니까. 우리는 한쪽만 상대하기도 버거운 입장이고."
제르베 경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플로브 경이 성급하게 물어왔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야 할까요?"
"그건 당장은 현실적으로 어려울겁니다."
카렐이 딱 잘라 대답하자 페로가 동그레진 눈으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당장은?"
"결론적으로 남부와 서부 양쪽 모두의 똥줄을 타게 하려면 서부에겐 내주고 남부는 깨부숴야 한다는 뜻이지. 아마 남부놈들은 서부가 탈라스를 차지하기 전에 동부를 무릎꿇게 하려고 공격을 많이 서두를거야."
종종 튀어나오는 카렐의 막말에 자이납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렐의 그 말이 얼마나 큰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인지를 잘 아는 제후들과 페로의 표정은 굳게 변해 있었다.
"탈라스의 주인인 바툴 가가 큰 역할을 해주는수밖에 없겠군."
카렐이 페로의 뒤에 서 있는 카이두 경 쪽을 돌아보았다.
"일단 이곳 전황만 어느정도 안정되면 이쪽은 샤자한 공과 페로 경이 맡고 저는 다시 탈라스로 가서 바툴 가와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베라카스의 근위대 파견군 3만은 페로 경의 영지를 지키고 있는 2천 가디언하고 요동의 슈트란 가 잔여병력이 견제하면 경거망동하지 못할테고. 그러니 근위대가 이 일에 공식적으로는 나서지 않는 한은 페로 경의 가디언부대도 표면에는 나서지 않는것이 좋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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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몸으로 막아선 카렐은 양손에 칼과 프레일을 들고 또다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는 도망가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그 '괴상한 여자아이'는 가디언이라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무시무시한 '전투기계'가 되어 있였다. 나무를 등지고 페로를 지켜선 카렐은 무려 세 번이나 되는 자신에 대한 공격을 순전히 몸으로 받아낸 후에야 결국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순간 페로는 모든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처절하게 올려보는 카렐의 핏발선 눈에는 잠시나마 자신이 지켜주었던 옛 친구를 이제 다시 떠날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듯 눈물이 가득히 맺혀있었다. 하지만 긴 세월동안 변했을 그 얼굴만이라도 보고싶은 마음에 서둘러 복면을 벗기던 페로의 손마저도 막아버린 건 그 망할 베흔 녀석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잔혹한 근위대장은 베흔은 자신과 더불어 카렐까지도 저승으로 보내려 이 모든 것을 계획했음에 틀림없었다. 계획의 실패에 실망하는 베흔의 표정은 페로의 눈에 똑똑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풀이를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칼과 창에 찔려 이미 쓰러진 카렐에게 하고 있었다. 베흔은 카렐의 어깨와 등을 철편---도저히 사람에게 쓸 수 있을까 싶은---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살갗과 근육이 찢겨 피를 사방에 뿌리면서도 카렐은 비명이나 신음소리한번 내지 않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네피에게 두팔을 붙들린 채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던 페로는 머릿속 한편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었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저 '괴상한 여자아이' 아니 가디언 카렐을 반드시 자신의 품으로 되찾아오겠다며 스스로에게 굳은 약속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페로의 500여 가디언부대의 기습공격으로 반군의 중요거점은 일단 파괴되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본부를 부수었다고 일이 끝나는것이 아니었다. 기습에서 사살한 1700여명은 이곳에 숨어든 2만여 반군들의 일부에 불과했고, 이젠 '머리'를 잃고 사발팔방 흩어졌을 이들을 찾아내 토벌하는, 가장 짜증나는 일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선천적인 전투감각을 지닌 가디언 한 명이 정규군 100명보다 더 값을 하는것이 사실이었다.
근위대로부터 가디언 증원요청을 받은 페로는 즉시 휘하의 가디언을 천 오백으로 증원시켜 이들로 하여금 각자 삼사십명의 제후군 병사들을 이끌도록 조치했고, 결과적으로 그 혼자 5만여 대병력을 수하에 두고 지휘하는 격이 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이던 슈엘러 경이 일선부대 시찰 도중 게릴라의 기습으로 중상을 입은 건 페로에게 기회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무려 21만의 대군을 이끌 토벌군 사령관은 무장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한 자리였다. 그러다보니 제후군 측에서는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자신들 측에서 사령관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근위대에서는 황제령에서의 토벌인만큼 근위대장인 베흔이 맡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 토벌군 내에서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례와 포고령대로라면 근위대와 제후군의 연합의 경우에는 황제의 공식 대리인인 태자 중 한명이 그 사령관을 맡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변변한 태자가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사령관을 맡았던 총리까지 그지경이 되면서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그때 토벌군에는 황실로부터 참으로 뜻밖의 전갈이 내려와 있었다.
"말도안되는 소리!"
성이 머리끝까지 난 베흔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리고 당혹해하기는 자리에 모인 제후군 지휘관들도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들 중간에 섞여있는 동부제후군 지휘관들만은 이런 회의실의 살벌한 분위기에는 짐짓 관심없는 척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 미친년 수작이야, 틀림없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베흔이 말하는 '미친년'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서슬퍼런 근위대장의 이 정신나간 욕지거리를 탓할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전갈을 받고 달려온 페로가 사령관 막사에 들어온 건 이때였다. 이를 갈고있던 베흔은 막 들어온 페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그다지 곱지않은 말투로 쏘아붙였다.
"예비 부마나으리 오셨군요."
어리둥절해져있는 페로의 귀에 아르군 경이 얼른 말을 건넸다.
"방금 널 토벌군 사령관으로 봉하라는 칙서가 내려왔어. 태자 대신 그 역할을 수행하라고."
페로의 번득이는 눈이 역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베흔을 똑바로 향했다. 황실 내에서 베흔과 세력싸움을 벌이고 있던 실리페 베로 황후가 페로를 끌어들여 베흔을 견제하려 함이 확실했다. 가뜩이나 카렐의 일로 베흔에게 감정이 잔뜩 상해있던 페로에게 이런 황후의 호의가 달갑지 않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휘경험이래야 기껏 일이천 단위의 가디언부대를 이끌고 도적소탕을 다닌것이 고작인 페로에게 무려 21만의 대군의 총 지휘관을 맡긴다는 것은 누가보기에도 말도안되는 짓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페로는 그 절호의 기회를 사양하기에는 너무나 뻔뻔스럽고 대담한 인물이었다.
페로는 단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폐하께 무한한 영광이라 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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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예드 아카데미 부근에 1차 집결을 마친 플레렌 가 제후군 3만의 전열을 바라보며 코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눈처럼 희고 큰 백마 위에 앉아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존경스러운 학장의 모습에 제후군들은 자신들의 이번 원정이 '무언가 큰 뜻'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경보병 기동군 위주로 짜여졌던 지난번 루쿠스탄 원정군과는 달리 이번 탈라스 원정군은 주력군인 경보병 3만 8천은 물론이고 서부가 자랑하는 최정예 중보병인 장갑보병대 1만 5천도 함께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낙타병 9천과 그들의 기동력을 보완할 기병대 2천까지 포함되어 총 6만의 전투병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덧붙여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총집결한 서부 사역병단 1만여까지 합치면 서부제후군 최강의 조합을 갖춘 셈이었다.
"네 그런 모습을 보는것도 참으로 오랫만이구나. 샤드니."
플레렌 가의 문장이 새겨진 초록 광택의 당당한 갑옷을 입은 샤드니가 갈색의 건장한 말을 몰아 다가오는 모습에 코리온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얼핏 온실속의 귀공자처럼 보이는 그의 손에 단단히 쥐여진 길고 묵직한 창은 이미 내노라하는 수십의 무장들을 저세상으로 보내준, 피어린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샤드니의 뒤에는 루쿠스탄 공략전의 치욕을 갚기위해 두달동안 칼을 갈아온 부장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자신의 섬뜩한 방천극을 번뜩이며 따라오고 있었다.
"팔은 좀 어떤가? 하지즈 장군?"
코리온이 자신에게도 아는척을 해 주자 하지즈 장군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목청높여 대답했다.
"접합상태가 좋다고 합니다. 당장 일기투를 한다고 해도 끄덕없다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코리온은 샤드니와 나란히 말을 몰며 병사들 앞을 사열하기 시직했다. 갈색 말에 올라탄 중갑옷 차림의 샤드니와, 검은 무명포에 흰 망토를 걸치고 능숙하게 백마를 몰아가는 코리온의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코리온이 앞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남부녀석들을 절대 믿지말아라."
"알고있습니다."
샤드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녀석들은 우리와 갈길이 틀린 녀석들이다. 남부 녀석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더라도 휩쓸리지 말고 우린 우리 계획대로 몰아붙이기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녀석들은 남부에는 공세를 취하고 우리에게는 방어위주의 전략을 펼 것이다. 그 약점을 충분히 활용하도록 해라."
하나하나 자신에게 지적해주는 코리온의 태도에 샤드니가 그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연인을 전장에 내보내는 코리온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은지 드문드문 들릴듯말듯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샤드니의 눈을 잠시 응시했던 코리온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조심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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