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3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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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자리드를 더 던지려던 베아트릭스는 아메스의 갑작스런 반격에 순간적인 판단을 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상대는 중장갑에 제대로 무장을 한 기병이니 자신의 기량이 우수하다고 해도 근접전에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궁기병의 특수장비는 근접전에서는 어느정도 마이너스요소로 작용하는것이 사실이었다. 녀석의 창 휘두르는 스타일로 보아 서투르나마 동부 방식의 기마전을 익힌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십여명의 유목민들까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뒤로 달아나 재공격을 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베아트릭스는 일단 위협이라도 하기 위해 쥐고있던 투창이라도 힘껏 던졌다.
"젠장!"
베아트릭스는 재빨리 자신의 창을 집어들수밖에 없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저 '정신나간 년'이 휘둘러대는 긴 사모창의 샤프트에 맞은 지근거리의 투창 직사공격은 맥없이 튕겨나가버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기병들이 재빨리 달려나갔지만 그들 역시 거칠게 밀어붙이는 상대방의 유목민 호위기병들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썅, 죽어!"
귀 옆을 스치는 사모창의 서늘한 느낌에 베아트릭스의 머리털에 바싹 곤두서고 말았다. 그는 상대방의 창술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채 그것에 안도하기도 전에 또한번의 충격이 그의 정수리 위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아메스와 함께 그를 공격한 다른 유목민의 창에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베아트릭스의 스코프와 캡이 산산조각나며 피와 함께 공중에 흩어졌다. 잠시 정신을 잃은 베아트릭스가 말 위에서 휘청거렸다.
"이 배신자년!"
뒤로 밀려갔던 아메스가 다시 창을 앞세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피로 시야가 흐려진 눈을 한 번 비비며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이 풋내기 어린 년이 어딜!"
아메스의 창을 미끄러지듯 비껴낸 베아트릭스는 창을 확 얽으며 힘을 주었다. 창술에서도 역시 베아트릭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 아메스는 순간적으로 한손을 놓쳤다가 가까스로 추스릴 수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빠른 창이 아메스의 견갑에 깊은 흠집을 내며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 벌어졌다.
둘은 그제서야 서로의 창이 X자로 상대의 안쪽으로 엉켜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메스가 잠시 창을 놓쳤던 그 짧은 순간에 빠른 공격을 가했던 베아트릭스의 창이 아메스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각각 두손으로 창을 쥐고있는 둘 중 어느 한쪽이 창을 놓지 않으면 풀릴 수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둘이 엉켜붙은 채 거칠게 몸싸움을 벌였지만 이 상황에서 어느쪽이든 창을 놓는다는 것은 패배와 함께 죽음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썅! 네년이 놔!"
"미쳤냐! 당장 놓지 못해!"
양쪽의 대장이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베아트릭스가 결국 타협점을 내놓았다.
"다른 무기로 싸우자!"
"좋아! 셋에 같이 창을 놓고 떨어진다!"
둘이 서로의 눈을 노려보여 숫자를 세어갔다.
"하나, 둘......셋!"
둘 모두가 움찔 했다. 셋까지 세었지만 양쪽 다 창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서로의 손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던 둘은 어느 순간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각자 자신의 창을 내던지고는 조금 물러나 각자의 무기를 허겁지겁 뽑아들고 있었다.
아메스는 허리에 차고있던 자신의 시미터를 뽑아들었다. 베아트릭스 역시 자신의 세이버와 방패를 집어들고 아메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투창을 막느라 이미 방패를 내버린 아메스로서는 칼만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돌격하는수밖엔 없었다. 어느새 그도 발만으로 말을 능숙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귀청을 찢는 금속성 충격음과 동시에 둘이 다시 맞부딪혔다.
"에잇!"
재빨리 뒤로 물러난 베아트릭스가 어이없이 부러져버린 자신의 형편없는 세이버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증조부 투모카프에게서 물려받은 아메스의 시미터가 자신이 부러뜨린 적의 세이버를 놀리듯 의기양양하게 검은빛 광택을 번득이고 있었다. 아메스는 방금전의 결과가 순전히 좋은 칼 덕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이 더 나아서라는, 꽤나 심각한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아메스가 다시 말을 돌려 베아트릭스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상대방의 칼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메이스를 집어들고 상대의 시미터를 어렵지않게 쳐내버렸다. 어쨌든 검술 역시도 아메스는 베아트릭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공격이 막혀버린 아메스가 신경질적으로 칼을 크게 휘둘렀지만 그건 상대가 바라던 바였다.
"악!"
방패로 시미터 공격을 막아낸 베아트릭스가 그 끔찍하리만큼 살벌하게 생긴 철퇴로 아메스의 정수리를 직격으로 타격하고 말았다. 탕 하는 거센 충격음과 함께 아메스의 투구 윗쪽이 메이스의 스파이크에 그대로 찍이며 찢겨나가고 있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아메스가 휘청거리자 베아트릭스는 그의 정수리를 향해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상대가 맥없이 말에서 미끄러지는 통에 뒷덜미만을 찍었을 뿐이었다. 의식을 잃은 아메스는 머리와 뒷덜미에서 피를 쏟으며 맥없이 말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잘걸렸다!"
쓰러진 녀석을 마지막으로 확인사살하기 위해 말에서 뛰어내리려던 베아트릭스는 전방에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대여섯명의 보병들, 아니 가디언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경기병보다 발이 느린 가디언들은 아메스의 숙영지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죽어라 달려 쫓아온 모양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투창이라도 뽑아들어 위에서 급소를 내리찍으려던 베아트릭스는 그들 가디언들 쪽에서 들려오는 바람 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익!"
무서운 회전을 받아 날아오던 투척도끼는 방패 끄트머리에 맞으며 한 번 튕겨 목 옆을 스쳐지나갔다. 가디언들의 그 무서운 힘에 순간 온몸의 소름이 뻗은 베아트릭스는 목에서 흐르고있는 적잖은 피조차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미처 던지지 못한 투창을 움켜쥐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는 수밖엔 없었다.
"아메스 아씨!"
가디언들이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진 아메스를 급히 몸으로 막아섰다. 투구를 서둘러 벗겨내자 메이스에 찍혀 머리가 깨진 채 피로 엉망이 된 아메스의 끔찍한 몰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트라티누스 종가와 보급품창고가 있던 곳에서는 불길과 연기가 세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퇴각한다!"
트라티누스 가 지원군이 오고있다는 보고를 접한 베아트릭스의 큰 고함소리에 유목민들과 백병전을 펼치던 창기병들이 서둘러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목민들이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쫓아 투창공격을 가했지만 등에 방패를 지고 빠르게 달아나는 그들을 맞추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베아트릭스는 또한번 동부인들의 자존심에 제대로 상처를 낸 채 그 손아귀에서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랄루의 통제소 요새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동부 연합군을 결국 요새 안으로 몰아넣은 플라칼 가 제후군 주력부대는 잠시의 숨돌릴틈도없이 요새를 짓쳐오고 있었다. 완전포위당한 이 상황에서 어물거리다가 적들이 간이 에너지장벽과 자기무기까지 설치하고 퇴로까지 막아버리면 모두 끝장이었다. 이 요새안에 와글와글 몰려있는 동부연합군에는 이미 붕괴된 연합기병대를 대신해 외곽에서 수성전을 보조할 다른 대규모 기병부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방을 빽빽하게 에워싼 채 돌격해오는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요새를 무너뜨릴만한 기세였다. 게다가 트라티누스 종가가 적 경기병단에게 기습당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은 이들 모두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소식에 잠시 표정이 창백해졌던 페로는 역시 그답게 딸 걱정은 단 한번도 입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이곳을 내주고 퇴각하는수밖엔 없겠군요."
페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베 경이 기습을 제안한 플로브 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곳 시설들을 즉시 파괴하도록 하십시오. 이곳을 포기할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페로가 거의 넋이 나가있는 제르베 경에게 말하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있던 마지막 병력수송선이 이륙하면서 발밑으로 마랄루의 요새에 진입하는 플라칼 가 병사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그대로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참담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페로에게 플로브 경은 물론이고 제네르나 카이두 그 누구도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여지껏 매사 자신만만하던 그가 이정도까지 절망적인 표정을 지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온 통신을 받으며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버린 다룬은 그런 페로에게 또한번 '끔찍한 말'을 해야하는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원망할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다룬은 지휘부 모두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북반구의 종가 쪽은 남아있던 수비병들과 유목민 용병대가 주축이 되어 물리쳤다고 합니다."
다룬의 보고에 차가운 침묵만이 흐르던 지휘부에 그나마 조금씩의 희색이 감돌고 있었다. 페로 역시 그 천방지축 '유목민'들이 그곳을 지켜냈다는 말이 조금 뜻밖인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룬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가 건물 중 18채 정도가 불탔지만 대개 행랑이나 별당 등이며 청사건물은 3분의 1정도가 불탔지만 업무수행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서측 보급품창고는 샤레이 유목민 중기병들이 육탄돌격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 건물 17동 중 5동만이 불탔을 뿐이라고 합니다."
"지들 밥줄 지키는 건 대단하군."
플로브 경이 입을 삐죽거리며 내뱉었다가 제르베 경의 곱지않은 눈초리에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쨌든 페로 역시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는지 표정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곧 카렐이 올테니......그때가서 지휘권 문제를 다시 논해야겠군."
플로브 경의 어깨가 들썩 하고 있었다. 페로가 이번 문제로 자신을 견책하려 함이 틀림없음을 깨달았지만 이번 패번의 '주범'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당장은 입이 열개여도 할말이 없었다. 지휘관들의 표정은 그 등급없는 가디언의 이름에 한결 표정들이 밝아지고 있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그 한가지 뿐이었다.
계속 말할 타이밍을 찾던 다룬이 방금전보다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오.....유목민들을 지휘하시던 아메스 아씨가......"
페로가 문득 다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장과의 대결도중에 중상을 입으셔서......"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페로의 표정은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떤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어떻게?......"
"적 경기병단장과 직접 대결을 벌이셨다고 합니다. 녀석의 투구를 박살내 부상을 입히고 적의 칼까지 부러뜨리시며 분전하셨지만......그만 철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셔서......지금 치료중이시라고 합니다."
'철퇴'라는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장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부상 중 하나임을 그들도 모두 잘 알고있었다.
"죽지만 않았으면 됐다. 전투가 뭔지 제대로 경험했으니."
페로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이런 황당한 태도에 말을 하던 다룬은 물론이고 지휘부까지 할말을 잊은 채 서로 마주볼 뿐이었다. 하지만 페로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심하게 떨리고 있는 페로의 꽉 악문 턱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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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종잣돈' 수준의 재산은 충분히 확보한 페로는 위험한 '재산전'을 다른 사람처럼 금전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계획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제 그에게 돈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재산전의 목적 역시 재산이 아닌, 걸르적거리는 인물의 제거였다. 이미 20여명이 넘는 고위급 중요인물들이 포함된 '피의 목록'을 작성해놓은 페로는 이것만은 수십년간의 장기계획을 가지고 차근차근 진행해가고 있었다.
이 야심만만한 페로 자이센 시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근위대와 황궁 내에 자기 사람을 심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도적떼 소탕을 위한 여러번의 합동작전으로 근위대와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페로에게 근위대 내에 정보통을 만드는 것은 페로 정도의 재력에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단을 위해서는 돈을 절대 아끼지 않는, 페로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페로의 종장시절 초기에 맞닥뜨렸던 문제---최고위층에 친인척이 없다는---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헤데론 작은아버지가 있는 남극성당 부제학이라는 지위는 현실정치문제에서는 그다지 조카에게 도움이 될 자리가 아니었다.
총리대신 슈엘러 쉐너 경이 이끄는 내각은 이미 완전히 썩어문드러져 재력가인 페로가 내미는 약간의 유혹에도 흔들리기가 일쑤였지만 페로는 이런 식으로 자기 편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에게는 권력 핵심부에 정보통 수준 이상의 '내 사람'이 필요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충분한 '몸값'을 확보한 페로에게 '정략결혼'도 그 한 방편이 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작 몸값을 올리고 나니 결혼할 상대가 더더욱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수준의 가문이라면 중앙귀족중에서는 총리가 있는 전통적 정계명문 쉐너 가가 대표적이었지만 종장이며 총리인 슈엘러 쉐너 경의 5명의 적생자들은 이미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고, 손자대 자손은 페로의 저울질 결과 '경제성'이 부족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황실 재무부 쪽을 장악하고 있는 재벌 로퍼크 가 정도가 있겠지만 이 황당한 가문은 유일한 상속인인 두 쌍둥이 형제가 서로 자신이 형이라며 장자 자리를 놓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싸우고 있는 형국인데다가 형제 모두에게 페로가 결혼할만한 딸도 없었다.
페로 스스로 '최고제후가 종가 적생자가 아니면 안된다'며 그 격을 못박아놓은 지방제후가문쪽은 더 상황이 심각해서 외가인 동부의 슈트란 가와, 몰락한 북부 카파키 가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서부 플레렌 가와 남부 델루지 가 뿐이었다. 하지만 자이센 가와 철천지 원수인 플레렌 가와의 혼인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고, 델루지 가의 종부 네페티 부인도 제롬과 수우 형제를 낳은 후에 더 이상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사실 샤자한 공도 페로에게 그 당숙모뻘인 자신의 막내딸 구르베스와 혼인을 제안한 일도 있었지만 페로는 그런 식으로 슈트란 가에 지나치게 편향된 인물이 되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후 제국을 좌지우지할 인물로서, 가능하면 동부와 적대관계에 있는 남부나 서부 피가 섞인 사람과의 혼인을 원하고 있었다.
페로 스스로는 '절세미인 네페티 부인을 꼭 닮은 수우의 여동생' 정도였으면 자신의 이상적인 배우자감이었을 것이라며 혼자 공상에 빠지기도 했지만 네페티 부인은 아직 더 이상의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어쨌든 페로의 권력 핵심부에의 접근은 이래저래 꼬여가고 있었다.
"오랫만입니다. 근위대장님.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황실의 큰 파티라면 어김없이 참석해 얼굴도장을 찍던 페로는 TSG추도식에도 아니나다를까 그 잘생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흔과 나란히 서서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던 네페티 부인은 이 '뻔뻔스럽기까지 한' 자이센 가 종장의 모습에 약간 난처한듯안 웃음으로 아는 척을 해 주었지만 베흔은 둘의 대화에 끼어든 페로에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 거만한것만 빼면 제법 사교적이던 근위대장의 그런 태도에 도리에 놀란 쪽은 페로였다. 머쓱한 웃음과 함께 물러나온 페로는 혼자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가디언 주제에.....쌀쌀맞긴.....썅,"
뒤로 돌아선 페로는 멀리 상석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시선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미녀들이 둘러싸여 히히덕거리고 있는 황제와 조금 떨어져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실리페 황후가 이쪽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그다지 곱지않은 눈초리는 다름아닌 네페티 부인과 서 있는 베흔을 향하고 있었다. 페로는 얼른 베흔의 눈치를 보았지만 베흔은 황후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네페티 부인과의 대화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또 한바탕 하셨나......"
페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 거의 '바늘과 실'정도로 비유되던 근위대장과 실리페 황후와의 관계가 요즘 꽤 소원해졌다는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 알게모르게 돌고있었다. 시녀장이던 실리페 베로를 세네피스 황후에 이은 새 황후로 추천했던 사람이 다름아닌 베흔인 것을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 무언가 안좋은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이크,"
실리페 황후가 한손에 술잔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괜히 저 둘 사이의 신경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당연한 결론을 내린 페로는 허둥지둥 베흔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페로의 발목을 뜻밖의 다정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페로 자이센 경? 맞나?"
기겁을 한 페로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돌아섰다.
"그간 무고하셨사옵니까, 황후폐하."
"종장들 모이는 자리마다 얼굴을 보기는 했었는데.....한번도 제대로 얘기를 해본적은 없었지? 아마?"
"그러하옵니다."
페로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큰 키에 갈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한 이 도발적인 외모의 여인은 페로의 앞에 심하다싶을 정도로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페로는 그제서야 베흔이 이쪽을 힐끗힐끗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황후의 휘하 귀족에 대한 이 과도한 관심을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키도 크고......정말 잘생겼군. 아직 미혼이라지? 관직이....."
"15년 전부터 3번도시 시장을 맡고 있사옵니다."
"아, 아, 그래. 그래. 전에 한번 시장이라고 문안인사 온 적 있었어. 내 한심한 기억력 좀 봐."
황후는 페로의 위아래를 다시한번 죽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 요즘 시정에 어려운 점이라도 없나?"
"예? 글쎄요.....저희 도시는 도적떼도 잠잠하고......어느 도시보다 잘 운영되어서....."
실리페 황후는 젊은 페로의 눈치없는 대답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내게 직접 와서 상의하게나. 내 힘 닿는데까지 도와줄테니."
뜨끔 한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한발 물러나고 있었다. 이 둘째황후가 걸핏하면 귀족남자들을 침실에 끌어들이곤 한다는 소문은 페로 역시 익히 들어오고 있었지만 남의 일처럼만 여겨졌던 그 화살이 지금 자기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말해보게. 어려운 점이라도 있나?"
"그....."
얼굴이 붉어진 채 더듬대고 있는 페로의 모습에 황후가 갑자기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귀여워 죽겠는걸. 이렇게 숫기가 없다니.....도적소탕은 그렇게 잔인하게 한다더니......역시.....이래서 미혼남자가 매력있단 말이야.....자네 도시의 조세저항문제는 내 잘 생각해볼테니 내일 저녁 9시에 내 알현실로 오게나."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페로를 남겨둔 채 황후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런 페로의 등뒤로 방금전까지 네페티 부인과 얘기하던 베흔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경쓸 것 없네. 페로 경."
"예?"
"그냥 시키는대로 해. 어차피 쌍판대기만 평균 이상이면 내각의 엔간한 고관들은 다 거쳐간 길이니. 후훗, 경같은 미남을 아직 안건드린 게 신통한 노릇이지."
페로가 베흔을 가볍게 쏘아보았지만 그는 한손에 술잔을 든 채 뭐가그리 기분이 좋은지 키득거리고만 있었다.
"행여나 거부한다면 그 댓가는 꽤나 혹독할거야. 이제 겨우 가문 기틀을 잡아가는데 쓸데없는 짓을 하면 곤란하지......아니, 저 굶주린 여자를 제대로만 잡으면 꽤 짭짤한 결과가 있을거야. 내 약속하지. 겉보기는 쌀쌀맞아보여도 한번 푹 빠지면 간쓸개 다 내주는 여자거든."
페로는 황후의 은밀한 생활을 아무렇지않게 자신에게 말하는 베흔의 의도는 물론이고, 제국의 황후를 '저 여자'정도로 표현하고 있는 오만불손하기 짝이없는 언사에 또한번 놀라고 있었다.
어쨌든 페로로서는 이제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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