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4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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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최고교육기관이며 유력 정치인들의 산실이기도 한 남극성당은 황제령 최남단에 위치한 거대한 섬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편의상 남극이라 불리는 이 섬은 지리적으로 '진짜' 남극과는 꽤 거리가 있었고---지리상의 남극은 바다 한중간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그저 남반구 고위도에 위치한 대단히 큰 섬일 따름이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덕택에 위도에 걸맞지않는 온화한 기후와 뚜렷한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게 된 아름다운 이곳을 제일먼저 눈독들인 건 옛 다신교단 '침묵의 자매들' 이었다. 하지만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쓰였어야 할 이곳은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500만명이 넘는 초기 유학자와 TSG를 고문하고 학살한 잔혹한 종교재판의 장소로서 악명을 날리면서 일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끔찍한 전적을 간직한 곳이기도 했다.
결국 기원 원년, 종교재판에 의해 거열형을 받고 온몸이 갈갈이 찢겨 죽은 리 리쿠와 그를 따라 함께 처형된 12사도가 제니안에 의해 13성인으로 추존되면서 불붙은 대대적인 비폭력투쟁은 게릴라 집단이던 TSG와의 결합을 통해 무장투쟁으로 변모하면서 '제국'은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갔던 터였다.
그리고 기원 40년, TSG 민병대 장교이며 콜로니 지도부를 공포에 떨게 한 암살요원이던 오르마즈 카파키 중령에 의해 최고성직자 야푸르 다하카르가 살해당하면서 1차로 타격을 입은 후, 그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대학살을 자행하면서 '2차 암흑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그 잔혹한 역사를 계속 이어오던 그들은 기원 52년, 리 리쿠의 후손이며 세나우스 1세의 형이기도 했던 S-4-1 '피빛 비수' 샤미르 리쿠가 심복 오르마즈를 원수이며 사령관으로 삼아 '성전'을 개시하면서 그 첫 목표가 되었고, 최고성직자와 230여명의 사제들, 800여명의 코메트 요원들이 척살당하면서 그 피냄새나는 역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신 다하카르를 비롯한 무려 2백여 신을 받들던 그 사교(邪敎)의 성지는 오르마즈의 명에 의해 그 흔적조차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X부대의 이름없는 기동대원이었던 베흔과, 북부 출신이며 유학자의 딸인 TSG 민병대 장교 오르마즈 카파키를 일약 혁명의 영웅으로 끌어올렸던 그 피비린내나는 성전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제국 최대의 유학교육기관이 다시 들어선 이곳은 300년이 넘는 기간동안 황실시조 리 리쿠의 뜻을 받드는 유학의 총본산으로,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많은 정치가들과 유학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굳건하게 그 지위를 지켜오고 있었다.
흰 무명포에 부제학을 상징하는 학이 새겨진 금빛 머플러를 두른 세네피스 황후의 다분히 낯선 모습에 구석에 앉아있던 카렐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 정든 학교에 돌아온 황후의 뺨이 가벼운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참으로 오랫만에 열리는 남극성당의 이 큰 행사를 찾아오는 셔틀들이 속속 착륙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역시 어머니께는 험한 ㅤㅋㅞㄹ크보다는 여기가 더 잘 어울리시는군요."
"여기보다는 황궁이 더 잘 어울리겠지."
고개를 조금 치켜든 황후의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시돋힌 말에 카렐이 굳이 응수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황태후가 되시면 돌아가실테니......"
"껍데기뿐인 황태후라는 호칭은 어딘지 맘에 안드는구나......황궁의 진짜 안주인은 뭐니뭐니해도 황후 아니겠느냐."
카렐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황후는 한때나마 제국을 좌지우지했던 옛날을 그리고 있음이 확실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못난 황제의 황후가 무슨 빛이 나겠느냐. 힘있는 진짜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카렐은 어머니의 어처구니없는 회한에 쓴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황후가 탄식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행운을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줘버려야 한다니......"
황후는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카렐의 시선을 가볍게 피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서부의 파예드 아카데미에 비해 족히 두배는 됨직한 이 넓은 교정은 가장 내륙쪽에 위치한 제국 최대의 도서관 규장각을 중심으로 대강당과 수백개의 연구실 겸 강의실이 정면과 좌우에 배치되어 '수학원'을 이루고 있었고 대제학과 부제학급 학자들의 처소 겸 집무실인 높고 긴 태학전이 이 수학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태학전 바깥으로는 일반교수들의 숙소와 자습을 위한 학습당, 생도들을 위한 기숙사 등이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누구든 높은 '태학전'의 창에 서기만 한다면 이 넓은 학교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남극성당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이곳 교수들 사이의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양분되고 있었다. 조카의 강요에 마지못해 그의 복귀에 동의한 헤데론 자이센을 비롯한 부제학급 이상의 최상급교수들---대부분 중도파들이 장악하고 있는---은 학파의 통일의견에 관계없이 좋게말하면 소신있게, 나쁘게말하면 제멋대로 의견을 내세우곤 해온 저 강단좋은 유학자의 재등장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 밑의 일반교수들이나 생도들은 진정한 중도파 학자로 잘 알려진 세네피스 황후가 요즘 부쩍 편협해진 학풍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특별히 정해진 상근교수제도가 없는 이곳에서는 누구든 그 학문적 역량에 따라 직위를 부여받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강의를 맡은' 교수들은 교내에서, 제네르처럼 '강의가 없는' 이름뿐인 교수들은 교외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다가도 언제든 다시 강의를 맡을수도 있는---물론 대제학의 동의가 필요하겠지만---개방형 교수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황후로 책봉되면서 학교를 떠났던 세네피스가 돌아온 것도 무려 220여년만에 '다시 강의를 맡는' 방식이었지만 원칙적으로 이전의 직위가 고스란히 보존되는 이곳에서 수석 부제학이었던 세네피스 황후의 재등장은 현 부제학들이 서열상 한단계씩 밀려남을 뜻했고 대제학에게는 '자신보다 더 높은 부제학'이 생기는 황당한 결과로 돌아온 셈이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이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문밖에서 들린 우베의 목소리에 카렐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부제학실 밖으로 나서는 황후의 뒤를 따랐다. 평소 입던 검은 수트 위에 종아리까지 오는 긴 비단튜닉을 걸쳐입은 카렐은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여느 사람처럼 오늘은 몸에 아무 무기도 지니지 않은 상태였다. 공권력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성역인 이곳에서 무장을 할 수 있는 건 대제학 직속의 치안대가 유일했다.
하지만 비무장임에도 불구하고 황후의 뒤를 따르는 이 무시무시한 '등급없는 가디언'의 모습에 생도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혼비백산해 좌우로 갈라서는 건 그 큰 키와 살기어린 눈빛, 한때 이곳 대제학이었던 란조 경의 목을 부수어죽였던 그 악명 때문임은 말할필요도 없었다.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셔틀 착륙장인 태학전 앞 광장에 도착한 카렐은 옆으로 조금 비켜서며 황후에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황후는 혼자서 광장 중앙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이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황후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히야아, 리쿠 학장님 다시 볼 수 있는거예요?"
오지 말라는 것을 끝끝내 쫓아온 자이납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카렐 옆구리로 머리를 디밀었다.
"좋은 반응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
"헤헤, 혹시 아나요. 제 미모에......"
황제령으로 왔어도 여전한 자이납의 공주병에 진짜 공주 카렐이 황당하기 짝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우베가 자이납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했다.
"도대체 누구야? 자이센 총리야? 리쿠 학장이야? 아니면 플레렌 응교야? 최소한 하나 정해놓고 사모하던지 말던지 해. 오락가락하지좀 말고."
"흠......역시 섹시하고 터프한 매력은 총리각하가 최곤데......리쿠 학장님은 그 넘치는 지성미에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플레렌 응교님은 그 꽃같은 외모에 부드러운 매력이 일품이고.....캬아.....내 참 숱한 남자를 다 경험해봤어도 저런 멋진 분들은......."
"내가 미쳐. 참이나 자랑이다."
우베가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멀리 북쪽 하늘에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셔틀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카렐이 숨을 가다듬으며 눈을 똑바로 부릅떴다. 파예드 아카데미의 학표가 붙은 검은색 셔틀은 남극성당 상급교수들이 모여선 광장 중간에 사뿐히 내려서고 있었다. 그들 상급교수 주변으로 지난번 2차 학란을 비난하는 많은 생도들과 하급교수들이 피켓을 들고 함성을 올리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지만 그들을 가로막아선 치안대들 때문에 셔틀에 가까이 접근할수는 없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그 긴 속눈썹을 조용히 치켜뜨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열린 문 안에서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먼저 달려나와 급히 발판을 깔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검은 무명포에 보랏빛 머플러를 두른 단정한 모습의 코리온이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검고 긴 생머리와 오른쪽 귀의 아름다운 페리도트 귀걸이가 바닷바람에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앞장서 나아간 헤데론 자이센 대제학이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랫만입니다. 코리온 세닉 리쿠 학장님."
"초대해주셔서 고맙군요. 헤데론 노에누스 자이센 대제학님."
떡 벌어진 우람한 거구를 자랑하는 헤데론 경과 날씬한 몸매에 큰 키의 코리온이 마주보며 허리를 굽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세네피스 황후가 보일듯말듯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있었다.
다시 허리를 편 코리온은 여전히 미소띤 얼굴로 약간 뒷쪽에 서 있던 세네피스 황후, 아니 새 수석 부제학을 돌아보았다.
"학계에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리옵니다. 세네피스 카파키 전 황후폐하.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조카님이 직접 축하해주시니 이렇게 기쁠수가 없군요.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여전하시군요."
얼핏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인삿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세네피스 황후와 코리온이 잠시나마 상대를 째려보고 있었다. 눈을 먼저 가볍게 내리깐 황후가 뒤로 돌아서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코리온이 내린 셔틀에서 샤드니가 흰색의 남극성당 교복에 보라색의 파예드 아카데미 머플러를 두른 평소처럼 희한한 차림으로 내려서서는 코리온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역시도 오랫만에 돌아온 모교의 광경에 주변을 한 번 죽 둘러보고 있었다.
황후를 따라 태학전을 향해 걷던 코리온이 누굴 찾는지 좌우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카렐은 저 앞에 있습니다. 조카님."
세네피스 황후가 눈을 내리깐 채 낮게 중얼거리자 코리온이 자기도모르게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코리온은 잘 알고있었다. 카렐이 세네피스 황후와 함께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코리온은 광장 한구석에 단정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렐을 문득 돌아보았다. 카렐은 한손을 가슴에 붙인 채 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렐 옆에 있던 자이납도 유학자를 대하는 서부인답게 얼른 엎드리며 바닥에 이마를 들이댔다. 한때 자신을 칼로 찔렀던 그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샤드니의 이마에 약간의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샤드니 플레렌! 저 배신자놈!"
피켓시위를 하던 하급교수 한 명이 샤드니에게 고함을 지르자 생도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코리온이야 원래부터 파예드 출신의 골수 원리주의자였지만---물론 1년정도 남극성당에 발붙인 일도 있기는 했지만---한때 이곳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던 샤드니가 동문을 학살한 코리온의 '앞잡이'노릇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반응을 어차피 예상했을 샤드니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코리온에게 조금 가까이 붙어서 서고 있었다. 치안대들이 소란을 피우는 생도들과 교수들을 강제로 광장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생도 중 몇 명이 미리 준비해온 돌을 대뜸 집어던졌다. 샤드니 자신은 물론이고 코리온이나 손님을 맞이한 주인 입장인 자이센 대제학의 표정에서도 순간적으로 핏기가 싹 가셔버렸다. 어딘가에 얻어맞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몇 개의 돌멩이들이 바닥에 나딩굴렀다.
"죄송합니다. 리쿠 학장님. 생각없는 나이어린 생도들의 무례한 소행을 용서해주십시오."
어느새 코리온의 옆을 막아선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샤드니 쪽으로 날아가던 돌을 한손에 움켜쥔 카렐의 이마와 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신들을 노려보는 카렐의 살기등등한 시선에 겁을 집어먹은 생도들이 허겁지겁 광장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카렐의 얼굴에 맞고 떨어진 두 개의 모난 돌에는 피가 조금 엉겨붙어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을 막아준 카렐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무표정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역시, 남극성당 생도녀석들 버릇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코리온의 가시돋힌 말에도 아랑곳없이 카렐은 다시 옆으로 물러서며 코리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본 세네피스 황후의 얼굴이 흥분으로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저......망할 녀석들을......"
"참으십시오. 황후폐하. 아직 철없는 어린것들입니다."
카렐이 세네피스 황후 앞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얼핏 듣기는 꽤 공손한 듯 했지만 코리온은 그 강한 어조 속에 숨어있는 '명령'에 가까운 힘을 느끼고 있었다.
일행은 다시 수학원 중심에 자리잡은 대강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의 피를 대강 닦아낸 카렐은 코리온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멀찍이에서 코리온 일행을 바라보는 생도들과 교수들의 시선은 여전히 경멸의 빛을 품고있었다.
"3차 학란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군요."
자이센 대제학에게 말을 건넨 코리온이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태연하게 대강당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코리온을 따라온 십여명의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들은 이곳의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하오면 소인이 이번엔 학장님을 안고 뛸 것이니 염려 놓으시옵소서."
코리온은 등뒤에서 들리는 카렐의 작은 목소리에 그답지않은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샤드니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자이납이 영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전 플레렌 응교님을 안고 도망칠테니 염려놓으십시오."
자이납이 카렐 흉내를 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이자 샤드니가 경악을 하며 코리온에게 다시 바싹 붙어섰다. 우베가 기가막힌지 자이납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아이, 왜그래요, 전 진심으로 그때 일을 사죄드리려고 하는거라구요."
"조용히 좀 해. 하여간, 분위기파악 못하는 거 하고는,"
우베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자이납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대강당 입구를 지키던 교수 한 명이 코리온에게 큰 방명록을 펼쳐보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방명록을 마주한 코리온은 평소처럼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내민 자신의 붓을 받아들었다. 현존하는 제국 최고의 명필인 코리온이 방명록을 적는 광경에 교수들이 일제히 눈에서 빛을 내며 그 광경을 주시했다. 제국 제일의 명필답게, 코리온은 방명록에 이름을 써넣는 정도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도 정성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붓을 쥔 손에서 굵은 힘줄이 불끈 드러날 정도의 강한 힘을 주며 방명록 한 페이지가 꽉 차도록 큰 초서로 자신의 이름을 눈 깜짝할새 적어넣었다. 용틀임치듯 힘이 넘치는 그의 빠른 붓놀림에 몇 교수들이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코리온의 뒤를 이어 카렐이 방명록 앞에 섰다. 방명록을 관리하던 하급교수가 붓을 든 채 카렐을 올려보았다.
"이곳 방명록은 고대어로 적으니.......이름을 불러주시지요."
"직접 적죠."
미소를 띠어보인 카렐이 붓을 꺼내들자 앞장서가던 코리온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유학자들의 태도 역시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무학력'인 가디언이 감히 붓을 드는 것부터가 그들로서는 난생 처음보는 황당한 광경일 것이 뻔했다. 교수가 글씨를 쓰려는 카렐에게서 방명록을 빼앗아들며 난처한 듯 말했다.
"방명록은 영구히 보관되는데......함부로 붓을 놀려서 망치기는 그러하니......"
"천박한 가디언의 황당한 붓장난을 보관해두는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겠군. 대신 내 글씨가 망가지지 않게 중간에 몇장쯤 건너뛰면 좋겠네."
코리온이 낮게 중얼거리자 하급교수가 마지못해 그의 이름이 쓰인 페이지에서 한참을 띄어 종이를 펼쳐보였다. 카렐이 코리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불초 천박한 가디언이 감히 붓을 놀릴 수 있게 해주시오니 감사하옵니다."
붓을 똑바로 쥔 카렐은 '코아 전사단 지도자 가디언 카렐'이라는 글씨를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해서체로 적어넣기 시작했다. 글을 써가는 카렐을 바라보던 코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망치지나 않았을까 염려스럽군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씨를 다 쓴 카렐이 붓을 우베에게 돌려주었다. 잘 쓰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 가디언이 고대어를 써넣는 말도안되는 모습에 남극성당 교수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카렐을 한번씩 돌아보고 있었다. 카렐의 이마에서 떨어진 피 한방울이 마침표처럼 이름 끄트머리에 붉은 점을 남기고 있었다.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군."
애써 의미를 축소하며 뒤로 돌아서는 코리온의 뒤에서 카렐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불초 가디언 주제에 천박하나마 흉내내 보았습니다."
제대로 배워본 일이 없는 카렐의 글씨는 특별히 잘썼다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엔간한 유학자들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은 없는 수준이었다.
"힘이 들어갈곳과 아닐 곳을 구분함은 칼과 붓이 별 다름이 없사옵니다."
카렐이 코리온의 뒤에 대고 들릴듯말듯 속삭였다. 잠시 자리에 우뚝 멈춰섰던 코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카렐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키가 꽤 큰 코리온이었지만 그보다 족히 반 뼘은 더 높은 카렐의 어깨 덕택에 그가 처음으로 작아보이고 있었다.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내게 손을 내미는 건가?"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거부하지 아니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소인 학장님께 제 뜻을 알려드리고자 하는 것 뿐이오니 부담갖지 마시옵소서."
"군자? 내 천박한 가디언의 입에서 그따위 소리를 듣는 일이 생길줄은 상상도 못했군."
코리온이 코웃음을 쳤지만 카렐은 별로 동요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순자께서 말씀하시길 잘 걷는 사람일수록 먼 길을 걷는 헛수고를 하는 법이고, 돌을 지고 있는 자가 더더욱 물에 깊이 빠지는 법이라 하였사옵니다."
코리온이 카렐을 노기띤 얼굴로 대뜸 노려보았다.
"네놈의 얄팍한 지식으로 감히 날 훈계하는건가?"
"문혜왕께서도 백정의 칼놀림에서 도를 깨달으셨다 하였거늘 어찌 천박한 이 가디언의 한마디에 그리 소심하게 구시나이까."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코리온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맞상대를 피하며 철저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천박한 가디언' 카렐에게 학계의 거두인 코리온은 도리어 마땅한 공격방법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주페 태자저하께서 생전에 지으셨던 '왕도제언'를 읽었사옵니다."
'주페 태자'라는 말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코리온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주페 태자저하를 되새기게 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닌 듯 싶지 않은가?"
"제가 왜 황후폐하와 함께 나타나지 않았는지 이미 알고계실 줄 압니다만."
코리온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카렐은 자신과 세네피스 황후가 같은 길을 걷고있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코리온 스스로도 매사 직설적인 이 사촌누이의 느낌이 원수같은 큰어머니의 그것과는 어딘지 다름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카렐은 눈가에서 흐르는 피를 한 번 털어냈다.
"자네가 아끼는 소위 개혁파들에게 우산을 씌워주려는건가?"
"차기의 강력한 황제가 될 딸을 생각하신다면 중도파라고 알려져있는 황후폐하도 개혁파들 손을 들어주실수밖에 없으시겠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꽤 솔직하군."
코리온이 다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놈이 감히 내게 화해를 하자고?"
"제 손가락도 손가락이고 남의 손가락도 손가락이오니 어찌 남의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니라고 비웃겠사옵니까."
"표리부동한 어미나 장주 흉내내는 딸이나 그 요사스런 궤변은 별다르지 않군."
카렐의 대답을 성의없이 넘겨버린 코리온은 강당에 만들어진 만찬장 앞쪽의 상석에 헤데론 경과 함께 자리잡고 앉았다. 카렐은 두 손을 단정히 앞으로 하고는 코리온의 뒤쪽에 자리잡고 섰다. 코리온은 카렐이 여전히 황후가 아닌 자신의 뒤를 바싹 따르자 조금 뜻밖인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왕도제언'을 읽어보았다니, 그 느낌이 어떻던가? 똑똑하신 가디언친구?"
코리온이 갑자기 카렐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만찬장에 모여있던 교수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주페 태자의 유작이며 실천적 원리주의학파의 손꼽히는 명저로 알려진 총 33권의 '왕도제언'은 연구목적으로 읽는것조차도 금지된 '절대 금서'중의 하나였고, 그 난해함 때문에 엔간한 원리주의학자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로 유명한 저술이었다. 코리온이 카렐을 공개적으로 망신주려함이 확실했다. 카렐이 잠시 말이 없자 레몬수에 손을 씻던 코리온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던지, 비타협적이니 하는 세간의 흔한 평론서에 나오는 비판은 삼가주었으면 좋겠네."
고개를 가볍게 숙인 카렐이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리 리쿠께서 논학집요에서 말씀하시길 이상주의라는 표현은 범인들이 앞서가는 힘을 폄하하는 수단이라 하였사옵니다. 그에 전적으로 동감이옵니다."
카렐의 구렁이 담넘어가는듯한 답변에 얼굴을 조금 찌푸린 코리온이 이번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리주의도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말인가?"
"그정도의 포용력도 갖추지 못했다면 제가 어찌 이자리에 나섰겠습니까."
코리온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평소 제대로된 웃음이라고는 절대 보이지 않는 그였는지라 만찬장에 모인 학자들이 모두 심하게 놀랐는지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중용은 유학자들에게는 덕목이겠지만 위정자에게는 수단이기도 하죠."
카렐의 뒤이은 속삭임에 코리온이 웃음을 딱 멈추었다. 코리온의 살기어린 시선이 카렐을 휙 돌아보았다.
"네년이 날 이용하겠다?"
"이용이 아닌 공존이겠죠."
"그 천박한 주둥아리를 당장 닥쳐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코리온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카렐 역시 코리온 뒤에 공손하게 읍하고 선 채 그의 비위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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