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2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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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복장의 다섯 명의 사람들이 심야의 어둠을 뚫고 요동의 슈트란 종가 주변의 넓은 초원의 군데군데 솟아있는 나즈막한 언덕을 느릿하게 넘어오고 있었다. 양가죽을 뒤집어 무두질한 옷에는 땟국물이 잔뜩 묻어나 있었고 얼굴을 가린 털모자 밑으로 잠깐잠깐 드러나는 그을린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대부분의 이지역 유목민이 평상시에 즐겨타는 키작은 과하마가 아닌, 체구가 큰 호마에 올라타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목민이라고 호마를 아주 안 타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것만으로 별로 이상하게 볼 거리는 아니었다. 유목민 특유의 짧은 창과 작은 방패가 말 왼쪽 어깨에 달려있었고 반대편에는 유목민들의 필수무장인 몇개의 투창이 들어있는 낡은 퀴버가 달려있었다.
"겨우 시간을 맞췄군."
베아트릭스가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털모자를 벗어 털며 중얼거렸다. 멀리 슈트란 종가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해가 뜰때까지 여기서 잠깐 눈 좀 붙이자."
베아트릭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뒤따라온 부하들에게 일렀다. 이들 네 명의 부하들은 자신이 이끄는 궁기병대에서 추리고 추려서 뽑은 최고의 용사들이었다. 충분한 수면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궁기병들에게는 빼놓을수없는 사항이었고, 비박이든 뭐든 잠을 자지 않고 내일의 중요한 임무에 임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하들은 말에 싣고온 땔감을 내려 능숙한 솜씨로 불을 붙이고 얼어붙은 땅바닥에 양과 사슴가죽을 깔았다.
"불침번은 어떡할까요?"
"필요없으니까 모두 자. 도시 주변이니까 괜찮을거야."
베아트릭스가 사슴가죽 담요를 덮으며 대답했다. 초원의 추위가 뼛속갚이 파고들어왔지만 그에게는 별로 새로운 경험도 아니었다.
외가에서 지내던 그 좋았던 시절에는 1년에 한번씩 가문 전체가 모여 몇십일간 초원으로 큰 사냥을 떠나곤 했었다. 가문 최고의 궁기병이었던 베아트릭스는 그때마다 혼자 여러마리의 사슴과 늑대를 잡곤 했었고, 때때로 큰 곰과 호랑이같은 맹수들까지 잡아내며 찬사를 독차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사냥시즌에는 겔에서 잘 특권을 지닌 몇몇 원로들을 제외하고는 젊은이들은 초원에서 비박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초원에서의 비박에 익숙치않은 부하들이 이리저리 계속 뒤척거리며 이를 따닥거리며 떨고 있었다.
"따로따로 자지말고 다 붙어서 자."
찬 공기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부하들에게 베아트릭스가 궁여지책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들 네 명이 옹기종기 달라붙어 누우며 일단 찬바람이라도 피하는 모습을 베아트릭스가 짐짓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님은요?"
"훗, 내가 중간에 끼면 너희 사내녀석들 몸에서 열 꽤나 날까?"
잔뜩 경직되어있던 부하들이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들이 잠드는 모습을 확인한 베아트릭스는 그제서야 마지막으로 자신의 담요를 덮고 이 익숙한 초원의 편안함에 지친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는 잘 알고있었다.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오늘밤이 생애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네자드 경과 별당에 나란히 마주앉은 제네르는 중간에 놓여있던 술을 조금 들이켰다. 이 둘에게 주어진 건 별당이라는 폐쇄된 공간과 술 약간이 전부였다. 한 사람이 다 먹어도 취하기에는 부족한 양의 곡주 반 병은 생판 모르던 두 사람이 서로의 가장 은밀한 영역까지 확인하는, 귀족가문간 약혼의 이 마지막 검토단계에서 생길 수 있는 지나친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네자드 님의 생각도 모를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제네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전 사생자 후손인 방계귀족에 미인도 못되고 매력있는 여자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이나이되도록 결혼한번 못했겠습니까."
네자드 경이 씁쓸한 웃음을 짓는 제네르를 힐끗 바라보았다.
"제가 별로 맘에 안드시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인것같군요."
네자드 경이 술 한 모금을 삼키며 대답했다.
"개혁파 하크로딘 직제학의 이름은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 사람과 이렇게 마주할줄이야....."
네자드 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의 태도로 보아 그다지 나쁜 남자는 아닌 것 같다는 기대감이 제네르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제네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가능하다면......오늘밤은 이대로 그냥......"
네자드 경이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신가보죠?"
제네르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쓴웃음을 지은 네자드 경이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말했다.
"제가 첫 결혼 하기 전에도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죠. 그래도 결국은 가문의 뜻대로 전 부인과 결혼했죠......나쁘지는 않았어요. 정말 좋은 여자였죠. 막상 정이 드니까 그때는 제 사람이다 싶더군요. 물론 이젠 제 곁을 떠났지만."
술 한 모금을 다시 들이킨 네자드 경이 중얼거렸다.
"저나 당신이나.....벗어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오늘밤을 어떻게 지나간다고 어차피 해결될 문제도 아닐겁니다. 이젠 운명으로 받아들일밖에요."
네자드의 차분한 목소리에 제네르는 도저히 반박할 말을 찾아낼수가 없었다. 그의 침착하고 매너있는 태도와 말투로 보아 이 상급귀족은 꽤 괜찮은 남자임엔 틀림이 없었다. 그 엄청난 신분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네르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고있던 술잔을 훌쩍 비워버린 네자드는 제네르의 손에 들려있던 거의 비어버린 술잔을 받아 옆으로 치워놓았다.
"어쨌든.....당신같은 현명하고 똑똑한 여자를 만나게되어 정말 행복합니다."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껴안아오는 이 낯선 남자의 온기를 느끼며 제네르는 당장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어두워진 슈트란 가 종가의 정원을 혼자 산책하던 페로는 한구석의 정자에 멍 하니 앉아있던 시로를 발견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페로를 발견한 시로는 급히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일이십니까. 주무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시차 때문에."
짧게 대답한 페로가 문득 시로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검은 피부색 때문에 잘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퉁퉁 부어있는 그의 눈만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헛된 꿈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아."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페로가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페로가 자신의 속내를 이미 알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로는 한참 후에야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총리각하께선......이 비참함을 이해못하시겠죠. 아니, 통쾌하시겠죠?"
페로는 오늘따라 건방지게 구는 시로 녀석의 말에 괜히 부아가 확 치밀어올랐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에 입에 평소같은 욕지거리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마리안과 첫날밤을 보내던 그 때, 카렐이 흘렸다는 눈물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방을 카렐에게 지키도록 했던 그 명령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도 이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아직까지도 당시의 자신이 잘못 행동한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지금의 시로에게도 빨리 단념하도록 하는 것이 도리어 자비로운 행동이라는, 그때의 자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제네르 경 방금 별당에 들어가더군."
시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오버드레스 입은 모습은 처음봤어. 키가 커서 그런가 꽤 잘 어울리더군. 맨날 군복이나 갑주입은 모습만 보다가 말이야......"
"그만하십시오."
시로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부인까지도 죽인 총리각하같은 분이 뭘 아시겠습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끝낸 시로가 비틀거리며 행랑채쪽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페로는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썅, 제깟놈이 날 훈계하려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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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성당에서도 십경과정과 더불어 가장 수재들이 많이 모인다는 육서과정의 입학시험을 수우와 나란히 통과한 페로는 6달 후에 시작될 생도로서의 생활을 기다리며 집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19살이 된 페로는 더이상 전같이 철없는 소년이 아니었다. 이미 엔간한 가디언과 맞먹을 정도로 커져버린 아들 페로의 키가 아버지 슈막을 넘어선 건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한결 어른스러워진 용모는 그 잔인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제국 최고의 매력남으로 손꼽혔던 할아버지 '블러드' 투모카프 자이센과 너무나 닮았다는 평이 자자했고, 이미 여러 명문가에서 미래의 사윗감으로 점찍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광배근하고 흉배근은 아주 좋으십니다. 도련님, 대신 하퇴근을 좀 더 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큰 크래모어를 쥐고 웃통을 벗은 채 검술연습을 하던 페로를 다룬이 평소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이 귀한 가문의 외동아들답지않게 어릴때부터 칼싸움에 유난히 관심이 많던 이 매력적인 청년은 남극성당 입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까지도 매일 두세시간씩 가디언 수련장을 직접 찾아와 땀을 흘리곤 했다. 칼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는 페로의 역삼각형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불룩한 가슴에 굵은 땀방울이 가득 맺혀있었다. 노예 한 명이 수건으로 그의 몸에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페로는 노예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듯이 집어들고 얼굴의 땀을 직접 닦았다.
"나이에 비해 몸이 빨리 자라시는군요. 도련님."
"그런가?"
페로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칼을 집어들었다.
"여자들에게도 인기 좋으시겠습니다."
미소지은 페로는 다룬의 말을 굳이 부인하지 않은 채 다시 칼을 휘둘러 앞에 있던 더미의 목을 정확히 후려쳤다. 그 때 수련장 한귀퉁이에 이곳에 엔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페로의 배다른 형 우제크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탄탄하고 균형잡힌 남자다운 몸매의 페로와는 대조적으로 비둔한 몸을 한 이 남자는 평소같으면 알아서 멀찌감치 피해갔을 이 부담스러운 동생에게 먼저 다가오고 있었다.
적장자인 페로보다 무려 35살이나 많은 이 남자는 어찌보면 그다지 모난 데 없는 평범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제정신박힌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뻐하고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이 오만방자한 동생과는 썩 좋은 관계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데서 천한 가디언들같이 옷을 벗고 땀이나 흘리고 있다니."
우제크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러시는 형님께선 늘어진 뱃살 좀 어떻게 해보시죠."
페로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더미를 다시한번 내리치며 대꾸했다. 동생의 시건방진 말에 우제크는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비 작은어머니가 널 찾더군."
그제서야 휘두르던 칼을 멈춘 페로는 무표정하게 형을 쏘아보았다.
"그 여자가 절 왜찾는답니까?"
우제크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스무살이 가까와오는 지금까지 페로는 아버지의 첩들을 '그 여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 우제크의 친모인 첫번째 소실 페노이도 페로에게는 '그 여자들'중 한명일 뿐이었다.
"너 남극성당 붙었다고 선물 마련하신 모양이야."
"훗,"
페로가 기가 막힌 듯 다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0시 정도에 주무신다니까 그 전에 가봐."
페로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불쌍한 더미만 사정없이 두들겨대고 있었다.
얼굴을 있는대로 일그러뜨린 페로는 거의 발길을 끊다시피 했던 안채에 참으로 오랫만에 들어서고 있었다. 슈막의 첩 11명과 서자들이 살고있는 이곳은 원래는 페로가 어머니인 네베드 부인과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네베드 부인이 쓰던 안채 큰방은 첫째소실 페노이의 차지가 된지 오래였고 누나인 크낙스가 쓰던 안채 뒷쪽의 별당 건물은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아홉번째 소실 가비의 방으로 쓰이고 있었다. 수련장에서 입던 땀냄새나는 훈련복을 그대로 입은 페로는 애시당초 '그 여자들' 앞에서 예의 따위를 차려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큰 베개에 기대앉은 가비는 슈막이 타르서스 지방장관으로 있던 때 데려온, 평민 출신의 여자였다. 타르서스인다운 가무잡잡한 피부에 검고 큰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의 도발적인 외모를 지닌 이 여자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꽤 꼼꼼하고 다정다감한 면이 있는 여자였다.
'사실상의 정실'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을 뭣 보듯 하는 페로에게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첫째소실 페노이만 빼면 나머지 10명의 '작은어머니들'은 페로의 그 오만방자함과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적장자로서 그럭저럭 존중해주고 있었지만 가비는 특히 그중에서도 페로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그런 이 여자의 '호의' 역시도 첩들 중 유일하게 아이가 없는 이 여자의 히스테리 때문이라고 제멋대로 단정지놓은 후였다.
"검술훈련하다가 왔구나."
가비가 그제서야 페로의 땀냄새를 맡았는지 별로 싫어하는 내색 없이 중얼거렸다. 페로와 가비는 작은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마주앉았다.
"배고플텐데......그나이엔 뭘먹어도 시원찮지."
"가디언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왔습니다."
"가디언들하고?"
가비가 보일듯말듯 얼굴을 찌푸렸다. 가디언들과 유난히 가깝게 지내는 페로의 행동은 집안에서도 그다지 곱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페로가 가디언 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이유는 실상 따로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독살당할 위험을 넘겼던 페로로서는 방에서 혼자 받는 독상이 항상 불안한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집단배식을 하는 가디언들과 함께 먹는 편이 어느모로 보아도 가장 안전한 방책이었다.
페로의 위아래를 죽 훑어본 가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정말 다 컸구나.....남극성당 생도라니.....장가보내도 되겠네."
"선물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가비의 판에박힌 말들에 진절머리가 난 페로가 대뜸 물었다. 성의를 완전히 무시할수는 없으니 준비했다는 선물만 대강 받아챙기고 빨리 자리를 비우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가비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이마를 탁 쳤다.
"아아, 그렇지, 나좀 봐,"
몸을 조금 일으킨 가비는 갑자기 불을 껐다. 어리둥절해진 페로에게 가비가 어둠 속에서 말을 건넸다.
"너 놀래켜줄려고 그래. 준비할동안 기다려."
페로가 어둠 속에서 있는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19살의 페로에게도 가비의 이런 황당할정도의 유치함은 기가막힐 지경이었다.
'무슨 애도 아니고.....'
페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비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부시럭거리고 있긴 했다. 자포자기한 채 어둠 속에서 멍 하니 앉아있던 페로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건 꽤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게.....내 선물이야."
낮은 속삭임과 함께 가비가 페로의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기겁을 한 페로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페로의 살에 와닿는 감촉은 틀림없는 여자의 '알몸'이었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고싶지 않아?"
가비의 부드러운 손등이 어둠 속에서 페로의 목덜미를 어루만져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려던 페로의 허벅지 위에 가비가 살며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딱 하룻밤만 허락할께. 내 선물이야. 딱 하룻밤 뿐이야."
아직 제대로된 여자경험이라고는 한번도 없던 페로에게 한참 농익은 가비의 노골적인 유혹은 정신을 아찔하게 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전......"
페로의 다분히 형식적인 저항을 뿌리친 가비는 그의 바지 속으로 스스럼없이 손을 밀어넣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페로가 갑자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최고인걸.......내 예상대로야......네 아빠하고는 비교도 안돼......전부터 널 먹고싶어 미칠지경이었어."
콧소리섞인 그 가는 속삭임에 그나마의 형식적인 저항마저도 멈춰버린 페로는 가비의 탐스러운 가슴에서 풍겨나오는 진짜 여자의 살냄새에 완전히 취해가고 있었다. 그는 이 뜻밖의 '선물'을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 생각해야 할 판단력마저도 완전히 상실해버린 후였다. 자신을 가볍게 떠미는 가비의 손길에 맥없이 바닥에 드러누운 페로는 자신의 위에 몸을 기울여오는 이 성숙한 여인의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올지는 당장은 그의 생각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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