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9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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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 그년이......"
코리온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예킨터스 교수가 들고온 초청장을 읽었다. 초청장에는 1월 26일에 있을 예정인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남극성당 수석 부제학의 공식임명, 아니 복직행사에 그를 초청한다는 글이 세네피스 황후 특유의 부드럽고 유연한 필치로 쓰여져 있었다.
"저 요사스런 붓놀림은 여전하군."
코리온이 초청장을 내던지듯 탁자 위에 팽개치며 중얼거렸다.
"남극성당 측에서 참석 여부를 미리 알려달라 하였으니.....다른 일이 있다 알릴까요?"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코리온은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묘한 웃음을 띠었다.
"아냐, 그럴것까지 있나.....130년만에 감방에서 나오셨다니.....명색이 큰어머니께 상견례 정도는 해드려야 정상이겠지. 조만간 새 대제학이 될 양반이시니......"
자신이 내던졌던 초청장을 다시 챙겨든 코리온은 큰 종이를 펼치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큰 붓을 집어들고 힘있게 답신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친구가 페로와 함께 동부로 간다는 말에 라손이 부러운 마음에 반쯤 넋을 놓은 표정으로 제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 내가 총리각하 어디 딴데 한눈 안파시나 감시해줄테니까. 후훗."
가방을 챙기던 제네르가 부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라손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제네르의 경호를 맡은 시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문제생겨서 가는것도 아닌데 왜 갑주하고 말은 가져가라시는거죠?"
"동부쪽 조짐이 좀 이상한 모양이야. 플라칼 가가 움직이려는 것 같던데 목표가 어딘지를 도무지 모르겠어. 전하하고 페로 경하고 요즘 부쩍 자주 그 문제로 상의하시는 것 같던데."
제네르가 허리에 칼을 비껴차며 대답했다.
슈벨 수반이 피곤한 표정으로 합숙소 안에 들어선 건 그때였다. 안에있던 세 사람이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이래저래 정신없구만. 황후폐하는 남극성당에 돌아가시는 일로 정신없으시고.....이쪽은 동부에 간다고 난리고......"
"황후폐하 가셨습니까?"
"조금전에 남극성당으로 가셨다네. 그쪽 인수인계 받으려면 며칠간은 꽤 바쁘실거야. 공식 취임식이 겨우 4일 남았으니까.....깜짝 놀랄 소식하나 알려줄까? 코리온 리쿠 학장이 25일에 남극성당에 온다고 하네. 황후폐하 취임식 참석하러 말일세."
"허,"
제네르 경이 황당한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인간 간덩이가 부었네요. 남극성당 출신들 학살한 게 얼마 전이라고......그 장관을 못봐서 정말 섭섭하기 짝이없네요."
"전하께서도 참석하실테니 아주 재미있는 사촌 상봉이 되겠지."
촛불 옆에 혼자 앉아 책을 읽던 카렐은 외출준비를 마치고 움막에 찾아온 아메스에게 희미한 미소를 띄어보였다. 아메스가 카렐의 옆에 꿇어앉으며 속삭였다.
"새벽 3시인데......왜 안주무시고......"
"30분 후에 동부로 떠나시죠?"
카렐은 아메스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군복을 벗고 페로 관에서 입던 비단포 차림으로 돌아간 아메스의 얼굴은 ㅤㅋㅞㄹ크의 뙤약볕에 많이 그을리고 상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렐은 방 한구석의 상자에서 작은 병을 들고나와 아메스의 앞에 마주앉았다.
"타르서스에서 쓰는 유약입니다. 그을린 피부에는 제격이죠. 하루 정도면 꽤 나아질겁니다."
유약을 조금 손에 묻힌 카렐은 아메스의 뺨과 코, 얼굴 구석구석에 꽤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그 미끌거리는 손길을 즐기며 아메스가 눈을 살짝 감았다. 카렐의 기름묻은 손이 그의 목을 스치자 아메스가 자기도모르게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이 기다렸다는듯이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너무 높으시니까 이럴땐 정말 힘드네요. 후훗."
아메스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카렐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으며 가슴을 바싹 붙여왔다. 그제서야 카렐과 얼굴높이가 대강 비슷하게 된 아메스는 카렐과 코를 바싹 맞대고는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떠날때까지 시간이 별로 없지만......이젠 황후폐하도 안계시니......"
아메스가 입고있던 비단포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문 쪽을 갑자기 돌아보았다.
"누가 보지는 않겠죠?"
"황제와 황후의 즐거움을 방해할 간큰녀석이 있을지......"
'황후'라는 말에 흥분한 아메스가 카렐의 얼굴을 가슴에 꽉 품어안았다.
"둘만 있으니 이렇게 좋은걸.....그동안 황후폐하때문에......"
아메스가 카렐이 입고있던 튜닉 안으로 손을 밀어넣으며 속삭였다. 아메스의 얼굴 전체를 쥘 전도로 큰 카렐의 손이 그의 귓가와 목의 선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가 어깨 한쪽을 살짝 끌러내렸다.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아메스의 호흡을 느끼던 카렐은 이 미래의 황후의 떨리고있는 입술 전체를 감싸안듯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아메스는 카렐의 관자놀이를 짚은 채 약혼자의 입술에서 오는 부드러운 자극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숨소리가 조금씩 빨라져갔다.
"조금만......더......"
어깨에 입을 맞추던 카렐의 손이 아메스의 가슴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자 아메스가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목욕비누의 향취와 뒤섞인 아직 나이어린 아메스의 부드러운 살냄새를 느끼며 카렐이 눈을 살짝 감았다.
"점점 떠나기 싫어지게 만드시는군요......이러다가 안간다고 하면 어쩌시려구요?"
아메스가 카렐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붙들어두며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움막 밖에서 '단골 훼방꾼' 우베의 큰 고함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아메스 아씨! 출발시각입니다!"
"......알았다. 나가있어."
숨을 한 번 깊게 내쉰 카렐은 아메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사뭇 섭섭한 표정의 아메스가 카렐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아메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카렐이 반쯤 흐뜨러져있던 튜닉을 다시 챙겨입고는 아메스의 벗겨진 비단포도 다시 입혀주었다.
"몸조심하십시오."
카렐이 홍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메스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중얼거렸다.
"곧 다시 볼 수 있을 테니....."
"반드시 아무 일 없어야겠네요."
아메스가 카렐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슈트란 가문에서 열리는 대제례는 23일 아침부터 시작해서 3일간 계속될거다."
대기중에 갑자기 호출령을 받은 베아트릭스는 직속상관인 경기병단장 히르직스 타마르 경의 첫마디에 이번 공격의 목표가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전투, 아니 전쟁이 지난 몇년간 있어온 그저그런 토벌전이나 사소한 분쟁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있었다. 누구처럼 플라칼 가의 사위로 '등용'되어 현재의 지위까지 오른 저 음흉한 표정의 직속상관은 놀란 토끼같이 변해가는 베아트릭스의 표정에 내심 쾌감을 느낄 것이 뻔했다.
"도, 동부 말씀이십니까?"
이번 목표가 자신의 외가이며 고향이 있는 동부임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충격으로 어질어질해오는 머릿속을 애써 숨기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동부에서 몇년이나 지냈지?"
"동부 탈라스에서 태어나서 57세 되던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히르직스 경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상위에 놓인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일을 살피고 있었다. 짐작컨대 자신에 대한 인사기록부나 뭐 그런 류이리라.
"자네의 행동이 플라칼 가 다른 전사들에 비해 별난 것도 이유가 있었군."
히르직스 경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그 웃음을 경멸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확실했다.
플라칼 가에서도 거의 이단아에 가까운 베아트릭스의 이런 희한한 전력은 그의 철없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비록 직계 상급귀족은 아니었지만 걸출한 무용으로 가문 내에서 촉망받는 중장기병대 지휘관으로 가문 2등급까지 올랐던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과 첫번째 부인이 죽은 후 꽤 오랫동안을 독신으로 지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동부 탈라스에 갔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7제후 바툴 가 근위기병대 초급지휘관으로 있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아니 가문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망할 '년'에게 홀려버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 가문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자유결혼이라고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플라칼 가문의 구성원으로 그런 큰 죄를 저지른 아버지는 결국 여자를 위해 가문과 남부을 버리고 도망치듯 동부로 떠날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처가살이를 시작한 아버지는 동부에서 외동딸인 베아트릭스를 낳았고, 바툴 가의 용맹한 사위로서 처가의 총애를 받으며 제후군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지만 가문을 버렸다는 그 죄책감은 아버지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모든 죄를 용서하고 혼인도 인정해줄 테니 가족과 함께 남부로 돌아오라는 종장의 권유를 끝내 뿌리치지 못한 아버지는 끝까지 귀향을 반대하는 아내와 딸을 설득해 모두 데리고 남부로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귀향은 그만큼의 큰 댓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버지는 제2기사단의 중랑장으로 발령받아 집을 떠나야 했고, 어머니는 남부인들이 사람 취급도 않는 '동부 야만족 유목민'으로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며 친구하나 없는 외토리신세가 되었고, 그동안 스스로를 '동부인'으로 여기고 살아왔던 57세의 베아트릭스는 이 낯설고 기이한 남부 가문을 자신의 새 가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뼈아픈 세뇌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당초 전사로서의 아버지만을 원했던 가문은 함께 '딸려온' 딸이 동부에서 배워온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과 궁기병으로서의 소질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이 지금의 베아트릭스를 플라칼 가의 중랑장으로서 이자리에 있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플라칼 가의 후손인 그 딸이 다른 가문의 자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다른 친척들이 거치는 유년기부터의 집단교육과 세뇌를 거치지 않은 덕에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한 번 걸러내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생각없는 제3자 눈에는 꽤나 로맨틱하게 보였을 부모님의 '출신을 초월한 사랑'은 당사자들에게는 물론이고 그 자식인 베아트릭스에게도 어정쩡한 이방인 신세를 안겨주고 만, 저주스럽기까지 한 운명의 근원이었다. 이 모두가 부모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제례'에 참석해본 적도 있겠군?"
"젊은이들에겐 매년 1월에 그냥 지나가는 요란스런 행사일 뿐입니다. 먹을게 많다는 것하고.....가문간 혼담이 집중적으로 오가는 때라는것 밖에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히르직스 경이 대제례에 관해 물어보고 있다고 생각한 베아트릭스는 최대한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대제례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도 동부에 있을 때 매년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을 따라 지역별로 열리던 소규모의 대제례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지만---물론 정치적인 의미 따위는 관심없이 그냥 축제분위기에 휩쓸렸을 따름이었다---괜히 '남부와의 원한' 운운하며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고있을 상관의 기분을 그르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동부에 들어가 동부 유목민처럼 활동하라면 당연히 가능하겠군."
히르직스 경이 웃으며 던진 말에 베아트릭스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짐짓 그답지않은 너털웃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남부에서 더 오래 살았다보니.....이젠 억양도 많이 틀려졌고....."
"자네에게 스파이짓을 하라는 건 아냐."
베아트릭스의 속이 빤히 보이는 대답에 히르직스 경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파일 한 개를 내밀었다. 파일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베아트릭스의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히르직스 경이 눈을 부릅뜨며 힘있게 말했다.
"가문의 명령이다."
베아트릭스는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자신을 끌어안고 흘리던 그 처절한 눈물이 그의 머릿속을 다시한번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제게 맡겨주셔서 영광입니다. 가문의 자손으로 영광스럽게 죽겠습니다."
맘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베아트릭스는 등뒤에서 이들이 쏟아낼 자신에 대한 조소와 비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까지 준비를 마치도록 해."
베아트릭스가 단장실 밖으로 모습을 감추자 옆방에서 이 모든 대화를 듣고있던 플라칼 가 제후군 사령관 헤즈 플라칼 경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믿을만하겠지?"
"겉으로는 반항적으로 보여도 명령을 어길 녀석은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그 어미도 감시하에 있으니 딴생각은 죽어도 못할겁니다."
히르직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베아트릭스의 인사파일을 들치며 헤즈 경이 안됐다는 듯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이녀석까지 죽으면 그 일가 전체가 전멸이군?"
"배신자 핏줄에겐 어차피 예정된 결말이죠."
히르직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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