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48화 (148/1,132)

< -- 148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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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비엔 6번 행성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석양 풍경 속을 말에 오른 한 사람이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근육질의 붉은 말 등에 오른 날렵하고 탄탄한 몸매의 그 여자는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끔 하늘을 올려보며 이유없는 한숨을 내쉬고있을 뿐이었다. 하늘거리는 새하얀 비단 튜닉이 주인의 기분과는 영 딴판인 듯 경쾌하게 내딛는 말의 발걸음과 함께 하늘거렸다.

흑인종의 혈통을 받은 듯 검고 매끈한 그 여자의 얼굴 피부는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고 굳은살이 단단히 배인 손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휴우......"

여자가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올려보며 또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상하리만치 거친 손은 말 뒤에 실린 갑주와 무기들을 보면 그 이유가 쉽게 짐작되고도 남음이었다.

옆을 지나던 농민들이 갑주를 싣고 말을 탄 채 지나가는 이 귀족에게 얼른 길을 비켜주며 고개를 숙였지만 여자는 평민들이 마지못해 하는 인사 따위는 관심도 없는 듯 그쪽에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넓지않은 길을 천천히 말을 타고 지나가던 그 여자의 눈동자가 어느순간 갑자기 한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뭐냐!"

길 옆의 덤불에서 난 인기척에 여자가 말 등에 실려있던 세이버를 번개같이 뽑아들며 흑인종 특유의 탁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 기세에 놀랐는지 덤불에 숨어있던 서너명의 평민 소년들, 아니 거의 청년이라 불러도 됨직한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손에 돌을 하나씩 쥐고있는 것으로 보아서 말을 놀래켜 위에 탄 귀족을 한바탕 곯려줄---철없는 평민 청년들 사이에 종종 담력 테스트로 사용되기도 하던---궁리라도 하고 있던 것이 확실했다.

"무엄한 새끼들!"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칼을 도로 집어넣고는 말 어깨에 얹혀있던 기병용 투창인 자리드 한 개를 뽑아들고 그들의 뒤를 향해 매섭게 말을 몰았다. 거의 어린아이 몸길이에 달하는 5척의 그 육중한 투창은 얼핏 투창이라기보다는 그냥 '창'같은 느낌까지도 주는 물건이었다.

"썅! 도망쳐! 도망쳐!"

상대가 쫓아오자 공포에 질린 그들 청년들이 낮은 돌담을 기어넘어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거의 어른 가슴 높이는 넘어갈 돌담을 기어넘어간 청년들은 말을 탄 상대가 설마 그곳까지 쫓아을까 하며 안심했는지 자리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말 그대로 '착각'에 불과했다. 짧은 구령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오른 그 붉은 말은 돌담을 그대로 훌쩍 뛰어넘어버리고는 방향을 틀어 청년들을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그 깜짝 놀랄 기마술에 멍 해있던 청년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새끼들이!"

고삐를 거의 쓰지 않고 말을 제어하는 그 능숙한 솜씨가 얼핏 유명한 동부기병들을 연상케 했지만 이곳은 그곳과는 전혀 관계없는 남부의 비엔이었다. 청년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하자 여자는 그 중 한 명을 향해 들고오던 자리드를 힘껏 내던졌다. 양 어깨와 허리, 등자가 받쳐주는 하체 힘과 함께 말이 달려오는 속도에 힘을 받은 자리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망치는 청년의 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았다.

"으악!"

청년의 등에 지고 달리던 큰 감자 자루와 가죽 조끼를 차례대로 꿰뚫은 자리드는 목조 창고 벽에 깊숙히 박히며 그래도 힘이 남았는지 그 끄트머리를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순식간에 창고 벽에 '꿰어버린' 그 청년은 갈빗대 부근에 흐르는 피도 잊은 채 자신을 향해 무표정하게 다가오는 그 귀족 무사를 벌벌 떨며 올려보았다.

"네놈 몸통을 맞추는게 훨씬 쉽다는 걸 아나?"

한손에 세이버를 든 여자가 사색이 다 된 청년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청년은 차마 살려달라는 말도 못한 채 두 손을 앞에 모아쥐었다. 그의 모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여자는 브레이서에 달려있던 키를 꽂고는 자리드를 뽑아냈다. 최고의 힘을 받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이 기병용 투창은 던진 사람의 고유 키가 아니면 그 끝부분의 촉 때문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자리드를 뽑아낸 여자는 그것을 퀴버에 들어있던 이십여개의 다른 투창들 사이에 도로 꽂아넣었다.

"감히 플라칼 가문 귀족에게 무엄하게 굴다니,"

여자가 청년에게 으르렁거려보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청년은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라 건드렸음을 깨닫고는 급히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다.

플라칼 가는 이 비엔 6번 행성의 주인이었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 청년이 회개하는지 아닌지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오던길로 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 별......"

시골길로 돌아온 여자가 이를 악물며 언덕너머 멀리 보이는 플라칼 가 종가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것은 여자가 방금 사용했던 무기인 자리드는 물론이고 말등에 실려있는 경갑주와 캡, 어깨에 장착하고 투창을 던지는 특수한 장치인 속칭 '사이클롭스' 까지, 남부 기마무사의 상징과도 같은 묵직한 중장기병의 그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었다.

종가의 유난히 요란스럽게 치장된 대문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창을 들이대는 경비병에게 여자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내보이며 짧게 말했다.

"경기병단 중랑장. 가문 3등급.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가문 3등급'이라는 말에 기겁을 한 경비병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열린 문 사이로 말을 몰아 안에 들어섰다. 그의 행색을 보고는 문 옆에 서 있던 비장 한 명이 그에게 바싹 다가오더니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중랑장님, 분위기가 분위기니.....미리 갑옷을 입고 들어가십시오."

"내가 알아서 해."

건성으로 대답한 베아트릭스는 멀리 보이는 종가 건물을 향해 말을 몰았다.

동부 제 7제후 바툴 가와 남부 제 2제후 플라칼 가 사이에서 태어난 베아트릭스는 여간해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철천지 원수지간에 가까운 남-동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특이한 출생은 물론이고, 남부 제후군에게는 저으기 생소한 '궁기병 부대'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어쨌든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멀리 종가 주변으로 각곳에서 몰려온 플라칼 가 제후군의 지휘관들이 몰고온 말들과 차들, 셔틀이 눈에 띄였다.

원래 동부 경기병들의 전매특허였던 '궁기병'은 그 이름대로라면 마상에서 활을 쏘아야 하지만, 각종 방어구들의 발달에 의해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힌 이후로는 '새로운 개념의 활'인 사이클롭스를 이용해 그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투창을 원거리에서 발사하는 특이하고 전문적인 병종으로 변화했던 터였다. 하지만 동부 경기병들이 주로 0.5스타디아 정도의 거리에서 투창을 쏘고, 필요한 때는 백병전도 겸하는 것과는 달리, 굳이 '궁기병'이라 따로 부르는 이들은 무려 1스타디아에 달하는 유효살상거리를 가진 강력한 사이클롭스를 쓰는 대신 엔간해서는 백병전은 피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문제라면 이 궁기병은 기마병이 발달한 동부에서도 가장 유목민 색채가 짙은 탈라스의 7제후 바툴 가 외에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할 수 없는 부대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젊은시절을 동부의 외가인 바툴 가에서 보내며 그들의 기마술과 전법을 익히고 제국에서도 가장 찾아보기 힘들다는 궁기병 지휘관 중 한명이 된 베아트릭스가 동부 기마병을 본따 비밀리에 만들어진 남부 플라칼 가의 경기병대 휘하 궁기병연대를 이끌게 된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베아트릭스는 갑옷을 입어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만났던 어머니의 침통한 얼굴을 생각하면 차마 몸에 갑옷을 걸치고 저들 싸움에 미친 친척들과 어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베아트릭스는 세이버만을 끌러 튜닉 위에 비껴차고는 그대로 종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다를까 종가의 홀 안에는 각군에 소속되어있는 플라칼 가 지휘관 수백명이 술잔 하나씩을 손에 든 채 왁자지껄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흰색의 단단하고 묵직해보이는 갑옷을 차려입은 제후군의 주력 중장보병단 지휘관들부터 은색의 화려한 갑옷 차림의 중장기병대 지휘관들 사이로 드문드문 경갑 차림의 경보병단 지휘관들과 경기병단 지휘관들이 보였지만 공격적인 성향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플라칼 가문 사람들에게 경보병이나 경기병은 그다지 인기있는 병종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 중간에서 흰 비단 튜닉 하나만 달랑 차려입은 검은 피부의 베아트릭스의 차림새는 이래저래 눈에 안띌래야 안띌수가 없었다.

"어머님께 들렀다 오는 길인가보지?"

직속상관인 경기병단장 히르직스 경이 베아트릭스에게 아는척을 해 보였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베아트릭스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에서 남부로 시집온 베아트릭스의 어머니는 이 호전적인 시댁 덕택에 지금까지 숱한 눈물을 흘려온 사람이었다.

베아트릭스가 태어나기도 전인 3차 혼란기에 두 명의 배다른 오빠가 전사한 것은 모든것의 시작에 불과했다. 베아트릭스의 옛 남편은 제후군에서 꽤나 인정받는 보병단 지휘관이었지만 5차 혼란기 초기에 아내와 장성한 아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보병단 하급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아들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1년 전, 서부와의 영토분쟁에 델루지 가를 대신해 참전했던 베아트릭스의 아버지 역시 제2기사단장으로서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터였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 마지막 남은 혈육까지 전장으로 내보내며 딸의 갑주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 것도 별로 이상한일이 아니었다.

히르직스 경이 베아트릭스의 행색을 위아래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네만....."

히르직스 경의 다음 말은 단상에서 들려온 큰 고함소리에 가로막혀 멈춰버렸다.

"모두 주목한다!"

종장 카나르 델루지 플라칼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나르 경은 델루지 가 출신의 어머니와 플라칼 가 출신의 아버지를 둔---사실상 근친혼이라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겠지만---플라칼 가 내에서는 최고의 혈통으로 통하는 인물이었고, 그 스스로도 또다시 델루지 가의 피를 물려받은 부인을 둔, 플라칼 가라기보다는 델루지 가 사람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그런 인물이었다.

"이미 통보받은대로,"

카나르 경이 목에 힘을 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10만에 달하는 우리 플라칼 가 군대는 무도한 적을 응징하기 위해 내일 아침부터 원정준비에 들어갈 것이요. 장군급 주요지휘관들은 이미 그 목표를 통보받았을 것이나 아직 하급지휘관들까지 알릴 상황은 아닌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요."

지휘관들이 저마다 굵은 팔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고함들을 지르는 광경을 보며 베아트릭스는 자기도모르게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다.

플라칼 가의 자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 호전성을 세뇌받는다는 것은 제국 내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들에게 전장에서의 화려한 승리만큼이나 큰 영광은 영광스런 죽음이었고, 전사한 조상의 사당 앞에서 행하는 미래의 전사로서의 다짐은 어린 나이부터 가족에게서 격리되어 집단교육을 받는 모든 플라칼 가문 소년소녀들이 매일아침 거쳐야 하는 일상이었다.

이 모두가 델루지 가문의 영광스런 '칼받이'로서 강요된 것이었지만 그들의 마스터인 델루지 가문은 이 충실한 칼받이들을 단순히 이런 속보이는 세뇌교육으로만 잡아묶어두는 것은 아니었다. 플라칼 가 출신 전사자의 유가족들은 죽은 당사자만큼이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그들의 모든 생계와 교육은 가문이 책임져주고 있었으며, 때때로 그들 중 일부는 델루지 가의 양자로 뽑혀가는, 생애 최고의 영광을 맛볼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용은 종가를 통해 사실상 델루지 가가 지원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역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두 이복오빠, 남편과 아들, 아버지의 죽음으로 꽤 많은 위로금과 연금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베아트릭스의 가문에 대한 봉사의 의무를 면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역시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언젠가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할 운명임을 잘 알고있었다.

"가문에 피의 영광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유치함에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지만 하나같이 전장에 나아가는 듯한 모습으로 이 잔치분위기에 모여든 플라칼 가문 사람들은 술잔을 일제히 치켜들며 단체 최면이라도 걸린 듯 큰 소리로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함성소리는 음정 따위는 무관하게 박자만 막추고 악만 쓰면 제격인 군가 소리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얼음을 섞은 독한 리커잔을 들고 무표정하게 서 있던 베아트릭스는 그 난리통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가 테라스의 선선한 공기 속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늦게오셨군요."

얼굴이 온통 갈색으로 그을린 덩치 한 명이 싱글거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장보병대의 상징같은 온몸을 감싸는 희고 두꺼운 갑옷, 짧은 검을 찬 그 남자의 어깨에는 보병대 중급지휘관인 중랑을 나타내는 역삼각형의 계급장과, 적 장교나 기병을 한명씩 죽였을 때 수여되는 킬마크가 무려 오십여개나 새겨져 있었다.

"승진했군요. 쿤제."

베아트릭스가 다분히 경멸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최악으로 헝클어져있는 베아트릭스의 기분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바싹 다가와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가문 3등급이신 베아트릭스 플라칼 중랑장님 정도까지 가려면 아직 턱도 없죠."

남자는 비단튜닉 밖으로 드러난 베아트릭스의 검고 탄력있는 팔을 자극적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물론 베아트릭스는 이 남자의 '승진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하급제후 스비아토 가문 출신의 이 남자는 플라칼 가 제후군에 지원한 다른 여느 군인들처럼 이 군대에서만 특이하게 빠른 승진과---물론 살아있다는 전제하에서--- 늘상 얻게되는 실전경험, 그리고 억세게 운좋은 놈에게 찾아오는 이 대단한 가문과의 혼인기회를 노리고 찾아온 야심가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녀석은 바로 그 '억세게 운좋은 놈'이 될 예정이었다.

"종장님께서 이번 전쟁이 끝나는대로 바로 식을 올리는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쿤제 스비아토 중랑이 베아트릭스의 맨살을 여전히 어루만지며 묘한 자세로 바싹 달라붙어왔다. 베아트릭스도 군인으로서 크고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쿤제의 워낙 큰 덩치에 구석으로 밀려날수밖에 없었다. 몸을 연신 더듬는 약혼자의 손길에 그는 갑옷을 입지 않고 들어온 것을 오늘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종장님 허락으로 윗층에 방 하나를 비워놓았습니다. 분위기도 적당하니......"

"성적인 욕구 발산은 전투력과 반비례한다는 원칙을 아직 배우지 못했나보지? 쿤제 스비아토 중랑?"

베아트릭스의 사무적인 응대에 쿤제가 저으기 실망한 듯 뒤로 조금 물러났다. 베아트릭스도 내심 이 남자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베아트릭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평균이라고 내놓기도 민망한 자신의 형편없는 외모나, 곰살맞은 짓이라고는 털끝만큼도 할 줄 모르는 멋대가리없고 뻣뻣한 성격만 보아서는 하고많은 플라칼 가 여자들 중 하필 자신을 '배정'받은 이녀석도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쟁이 코앞인데."

쌀쌀맞게 쏘아붙인 베아트릭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종장은 틀림없이 오늘 당장이라도 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 뻔했다. 물론 이 남자 역시 다른 플라칼 가문의 사위들처럼 태어날 아기의 '마지막 성'을 무조건 부인에게 양보하고 그 2세를 가문에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을 것이 확실했다.

물론 대부분이 하급제후 출신으로 뛰어난 무공을 세워 이 가문의 사위 혹은 며느리가 된 자들에게 있어 자손들에게 남부 제2제후인 배우자의 명예로운 성을 물려준다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었고 그들 스스로가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태어날 자식 역시 이 호전적인 가문의 소모품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나중문제였다. 어쨌든 플라칼 가문으로서는 그들 뛰어난 전사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또 한명의 '전사'를 얻는것이기도 했다.

"종장님께서 최대한 많은 자손을 얻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련하시겠어.'

베아트릭스가 내심 조소하며 옆으로 돌아섰다.

매번 전쟁을 벌일때마다 가문의 구성원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전사를 얻는 것은 가문의 지상과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칼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쉽게 그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주는 독특한 전통을 갖고있었다. 누구든지 그 부모 중 한명이 플라칼 가의 구성원이기만 하다면 서자이건 사생아이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가문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으로서의 집단교육---물론 '소년단'이라는 준군사조직에 편성되어 받는 교육이랍시고 군사훈련이나 별반 다를바도 없지만---과 생계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미혼자로 남아있는것은 죄악시되었고 베아트릭스같이 배우자 사후에 즉시 재혼하지 않고 남아있는것도 물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외자를 낳는것은 다른 가문에서라면 손가락질당할 일이었지만 이 가문에서만은 은근히 장려까지 되고 있었고, 가문의 고위자들이 열 명이 넘는 부인 혹은 남편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의 병영에서 합숙에 들어가며 일체의 사적인 만남은 금지될 것이오. 최적의 공격시기가 가까와지면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니 그때까지 칼날을 갈며 그대들에게 돌아올 전장에서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도록 하시오."

종장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또한번 함성을 올렸다. 곧 플라칼 가문의 일원이 될 쿤제 역시 술잔을 치켜들며 남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가문의 피를 받은 자신보다도 한술 더 뜨는듯한 그의 행동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린 베아트릭스는 술잔을 쥔 채 그 요란스런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가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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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정파일에 있는 것이지만 조금만 되짚고 지나가겠습니다.

제 설정상 정규군의 계급체계는

● 병 :

보병

중등보병

상등보병

■ 준사관급 :

분대장, 기병

보궁수, 마궁수(소대장급. 보병 40명 혹은 기병 5기. 현대군의 소위, 중위 정도의 초급장교지만 여기서는 준사관급..)

◆ 장교급 :

비장 (제대장, 보병 120명, 혹은 기병 20기. 현대군의 대위 정도.)

중랑 (중대장, 보병 4백, 혹은 기병 1백.. 현대군의 소령 정도.)

교위 (대대장, 보병 1~2천, 혹은 기병 3백. 현대군의 중령 정도.)

중랑장 (연대장, 보병 5천, 기병 1천. 현대군의 대령~준장 정도.)

★ 장군급 :

장군 (군단장, 보병 1만 5천~, 기병 3천~, 현대군의 소장 정도.)

대장군

상장군

*‘중랑장’의 경우는 역사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중간간부급으로 분류된 때도 있었고 최고지휘관급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된바도 있던, 조금은 복잡미묘한 직위입니다만 제 설정에서는 중상급 지휘관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합니다.

편제된 병력은 대략의 규모이며 제후에 따라 그 규모는 천차만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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