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0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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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쪽을 기습하러 떠났던 하지즈 장군의 낙타병부대가 함정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한 알리 경은 공격을 계속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더이상의 적극공세를 중단하고 적당한 힘싸움만 벌이면서 낙타병이 적 측면을 쳐주기만 기다리고 있던 그로서는 이제 더이상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거의 없었다.
"이런 제길,"
이정도로 방어태세가 완벽하다면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할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공격해들어가는 보병들은 아직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리 경은 반대편에서 적군을 지휘하고 있는 페로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은색의 화려한 갑주를 챙겨입은 페로는 당당한 태도로 부하들에게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제네르 하크로딘 경이 적 낙타병을 지휘하던 군단장 하지즈 장군을 생포했습니다."
기사단과 함께 적 낙타병부대를 잡고 돌아온 킵의 보고에 페로가 보일듯말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 큰 이변만 없다면 적은 조만간 물러나겠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려면 무언가 더 큰 '충격'이 필요했다.
"기사단은 지금 뭐하지?"
"하크로딘 단장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적 낙타병부대 패잔병을 추적중이고 라손 바얀 부단장이 지휘하는 5백여기가 지금 이리로 오고 있을 겁니다."
페로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스코프를 작동시켜 멀리 적 중군에 보이는 알리 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새끼도 혼구멍 좀 내줘야겠군."
투구를 눌러쓴 페로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드디어 앞으로 직접 나섰다. 페로는 멀리 뒤에서 말에 올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렐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망가진 몸 때문에 이번 전투에 카렐이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을 모든 지휘관들이 너무나 아쉬워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며 내심 기뻐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페로였다.
하지만 안의 숙소에서 편하게 쉬고있으라고 그리도 일렀건만 결국 저 말안듣는 고집장이는 무장까지 갖춘 채 언제든 전장에 뛰어들 태세로 아까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출진해서 적과 마주치면 저 고집장이는 자신을 구한다고 저몸에 또 뛰쳐나올 것이 뻔했다.
"하여간, 말도 지지리 안들어."
페로가 들릴듯말듯 중얼거렸지만 뒤에서 지켜주고 있는 그의 존재에 내심 든든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과는 반대로 그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이 배어 있었다. 킵을 따라온 3천여명의 창병연대와 백여명의 가디언이 페로의 뒤를 따랐다. 줄곧 페로 주변에서 안보이게 알짱대던 자이납도 슬그머니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2차계획 개시한다."
페로가 손을 치켜들며 각 보병연대 지휘관들에게 알렸다. 그동안 위치를 고수하던 이쪽 보병들이 가디언들의 엄호를 받으며 일제히 연대별로 총 다섯 부대 정도의 반밀집대형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쪽이 공세로 전환했음을 직감한 적병들 사이에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알리 경은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임을 깨달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흩어져있는 자신의 보병들이 각개격파를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 돌진했어야 할 낙타병부대는 이미 궤멸되고 난 후였다. 매복해있던 녀석들까지 합치면 1만 8천에 육박하는 적 보병과 팔백여명의 적 가디언들은 아직 삼만이 훨씬 넘는 자신들의 보병보다 수에서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녀석들의 창병을 깰 마땅한 방안이 아직 나오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일이만의 숫자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알리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8열 방진으로 재정열!"
이쪽에 창병이 아예 없다면 모르겠지만 어느정도의 창병도 있으니 제대로 한번 힘대결을 벌이는 편이 차라리 나을수도 있었다. 일단 적의 진형만 어느정도 흐뜨러뜨린다면 리치가 짧은 시미터와 방패로 무장한 잘 훈련된 이쪽 보병이 더 유리할 것이 확실했다. 장창병을 전위에 포진한 밀집 방진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8백명이나 되는 적 가디언들과, 낙타병을 궤멸시켰는지, 아닌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는 적 기병이었다.
"적이 움직입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알리 경이 급히 전방을 살폈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밀집한 5개의 부대가 이쪽을 향해 진격해들어오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양익을 이룬 2개씩의 부대가 5천여 창병으로 이루어진 중군보다 조금 앞서서 진격하는 꼴이 이쪽을 딴에는 포위공격할 생각인 듯 싶어보였다.
"가디언들은?"
"1열에서는 포착이 안됩니다. 보병들의 2열에서 함께 진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알리 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녀석들은 방금전의 1차 충돌에서 꽤 재미를 보았던 가디언과 창병의 연합전술을 계속 써먹을것이 확실했다. 녀석들의 중군의 선두에서 혼자 말을 탄 페로 녀석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썩을 가디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병들과는 달리 보병들과 적당히 섞여있으면 얼핏 구분하기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중군을 분산시켜 좌군과 우군에 집중배치하고 최대한 진형을 넓혀서 녀석들을 포위할 수 있도록 산개해라. 양익부터 격파해들어간다. 미친 페로새끼."
알리 경의 명령에 따라 전열을 재정비해 좌우에 8열의 넓은 방진을 형성한 3만여명의 제후군은 사방으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이쪽의 대규모 보병대에 포위당하는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니나다를까 기세등등하게 진격하던 녀석들의 양익이 이쪽 보병대와 충돌하면서 거의 자리에 멈춰서서 더이상의 진격을 하지 않았고 적 중군만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역 쐐기꼴을 하고 전진해오던 적 진형이 거의 일자형으로 바뀌어버리면서 녀석들의 안행진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적들이 이쪽 보병의 포위망 안으로 제발로 걸어드는 모습에 알리 경이 잠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엉?"
아무 생각없이 적 중군 바라본 알리 경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적 중군 전위의 창병들이 갑자기 좌우로 흩어지더니 페로를 선두로 적의 중군 후위병력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들의 좌군과 우군 사이를 돌파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위였던 창병들이 그 뒤를 이어 후위가 되어 구보로 돌진해들어오고 있었다.
"저놈들은 뭐야?"
스코프에 나타난 녀석들의 진격속도는 보통의 보병이 낼 수 있는 달리기속도가 아니었다.
"가디언들 같습니다! 800여명입니다!"
보좌관이 마치 비명같이 소리를 질렀다. 기겁한 알리 경이 순간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페로 녀석은 중군에 밀집시킨 가디언들 앞에 창병들을 배치시켜 자신의 눈을 감쪽같이 속인 것이었다. 기병은 포착이 쉽지만 보병과 섞여있는 가디언은 사실상 찾아내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용한 페로의 교묘한 눈속임이었다.
"모여! 집결하란 말이야! 뚫리면 끝이다!"
알리 경이 뒤늦게나마 휘하 보병대에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열을 줄여 최대한 넓게 포진해있던 보병들이 단번에 중심으로 보여든다는 것은 그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쐐기꼴 진형을 이룬 8백여 가디언들은 당혹해하고 있는 중군 보병대 중앙을 무서운 기세로 산산조각내며 돌진해들어왔다.
"알리 샤디! 네 이놈!"
가디언들의 선두에서 말에 올라탄 페로는 창을 꼰아잡고 가디언들과 함께 보병들을 베어넘기며 거세게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 무서운 기세에 겁을 덜컥 집어먹은 알리 경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양익을 강화하느라 5천여명으로 줄어들어버린 제후군 중군의 전열이 무려 800명의 순수한 가디언들의 돌격에 무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알리 경을 호위하는 이십여명의 근위기병들과 낙타병들이 주군의 앞을 허둥지둥 막아섰다.
"일단 물러나십시오! 종장님!"
"가소로운 것들!"
선두에서 달려온 킵과 페다이, 그리고 몇 명의 1등급 가디언들이 알리 경을 막아선 그들 앞에 뛰어올랐다. 단 한번도 가디언들을 상대해본적이 없는 그들은 제대로 저항한번 못해본 채 십여명의 고급 가디언들의 번개같은 공격에 차례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기병 특유의 높이도, 속도도 중장기병에 맞먹는 속도로 달려와 말과 사람을 단 한번에 베어버리는 그들의 참격에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썅! 귀찮게 가로막지 말란 말이다!"
뒤이어 말을 타고 달려온 페로는 급히 몸을 피하려던 알리 경 호위기사의 흉갑을 화극의 도끼날로 박살내며 말 밑으로 떨어뜨려버렸다. 페로 역시도 기마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동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붉은 준마에 올라탄 페로는 거침없이 화극을 다시 휘둘러 그 옆에 있던 낙타병의 머리까지 두토막내버렸다. 그는 다시 말을 몰아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섣부른 보병을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고는 들고있던 창을 휘둘러 또 한 명의 기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5명을 쓰러뜨려버리는 페로의 그 무서운 용맹에 주변을 에워싼 서부 병사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알리 샤디 그 망할놈은 어딨나!"
페로가 창을 치켜들고 쩌렁쩌렁하게 외치자 페다이가 급히 반대편을 가리켰다. 대여섯기의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알리 경이 허겁지겁 우군 쪽으로 달아나는 모양이 보였다. 페로가 급히 말을 몰아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가디언들의 일제기습으로 진형이 무너진 중군을 뒤따라온 5천여 창병들이 매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적 중군이 급격히 붕괴하면서 알리 경의 보병대는 좌군과 우군 양쪽이 순식간에 두동강나버린 셈이었다.
"킵! 이놈들은 창병들에 맡겨두고 넌 가디언부대를 이끌고 적 우군 후방을 무너뜨려라!"
"알겠습니다!"
페로의 가디언들과 중군 창병들이 알리 경의 적 중군을 박살내는동안 창병과 도끼병만으로 이루어진 전사단 양익의 보병대는 양익의 적 보병 밀집방진을 상대로 분전하며 시간을 끌어주고 있었다. 페로에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킵은 8백여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보병들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적 우군 방진 후방에 돌격을 개시했다. 적 중군 진형은 이미 완전히 산산조각나 사방팔방 흩어진 후였다.
"라손 바얀 부단장."
페로가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을 라손을 불렀다. 라손은 다른사람도 아닌 페로의 부름에 잔뜩 흥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적 중군 도주병들을 처리해라!"
"예!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 멀리 북쪽에서 땅을 새카맣게 덮은 채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오백여명의 기사단이 페로의 눈에 들어왔다. 아군 창병들과 적의 흩어진 중군 병사들 사이의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페로는 페다이만을 데리고 말에 올라 분전하고 있었다. 그런 페로를 본 라손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1대대! 2대대는 창병들을 도와 도망하는 적들을 추격해라! 난 페로 경과 함께있겠다!"
라손과 그를 따르는 5명의 기병들이 급히 페로의 양옆을 호위하듯 지키고 섰다. 짧은 기창을 든 라손은 페로에게 겁도없이 덤벼들려던 두 명의 적 보병에게 돌진해 그 특유의 빠른 창을 내리찍어 순식간에 쓰러뜨려버렸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호위가디언들은 다 어디 떨구시고......"
"난 괜찮아. 가디언들은 킵이 다 데려갔다. 어차피 적 중군은 다 흩어졌으니 상관없지않나."
페로가 창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태연하게 대꾸하자 라손은 내심 황당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로 페로처럼 이렇게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가득한 자존심 센 지휘관은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모시기에도 꽤나 골아픈 존재였다.
전면에만 창병을 집중시켜 방진을 형성했던 적 보병대 우군는 중군이 무너지면서 토막난채로 후방을 파고들어오는 가디언 부대의 공격에 뒤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한 밀집방진은 방진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도망병이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적 우군 보병대가 눈에 보일정도로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다. 이제 우군이 붕괴되면 알리 경이 도망치는 날파리처럼 다시 튀어나오기만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페로는 스코프를 작동시켜 카렐이 있던 컴플렉스 정면의 출입구 부근을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전까지 있던 카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투의 총사령관을 맡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못말려."
페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 우군도 끝장이군요."
라손이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페로에게 말했다. 이미 반 쯤 붕괴되어버린 적 우군의 패잔병들이 뿔뿔히 흩어져 저마다 살길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대오를 잃고 흩어진 보병들은 가디언들이나 기병들에게는 손쉬운 사냥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너진 우군이 있던 곳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도륙장으로 변해버렸다.
패색이 짙어지면서 그나마 건재하게 남아있던 적의 좌군이 조금씩 퇴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때 페로의 시야에 북쪽에서 몰려오는 또다른 일군의 기마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크로딘 단장의 기사단 나머지 병력입니다."
라손이 페로를 올려보며 말했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제네르는 눈 아래와 가슴 위쪽이 모두 피로 범벅이 된 채 치크피스가 떨어져나간 망가진 투구를 궁색하게 쓰고 있었고 흉갑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녀석들 낙타병부대는 흩어진 채 북서쪽으로 완전히 도주했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5대대 2백여기와 보병 2천을 그 일대에 두고 경계임무를 맡겨두었습니다."
제네르가 페로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수고했네. 상태가 많이 안좋아보이는데 이젠 후방에서 쉬고있게."
페로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전장 한복판에서 말에 올라선 페로는 보병, 가디언, 기사단의 연합병력이 대오를 상실한 적 우군 보병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좌군쪽으로 재주좋게 도주한 알리 경이 퇴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네르와 함께 온 3백기의 기사단까지 합류해 이번엔 좌군을 협공하면서 사실상 사방이 완전히 포위된 만 오천여명의 적 보병은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직 전력을 고스란히 보유한 이쪽 보병대들이 기병들과 가디언들의 보조를 받으며 적의 좌군 방진까지 무너뜨리고 있었다. 제네르와 라손을 동반한 페로는 침착한 표정으로 휘하부대가 각개격파당하고 있는 알리 경의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적을 궤멸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조만간 알리 경과 퇴로보장을 조건으로 협상을 시작하심이 좋으실 듯 합니다."
제네르의 말에 페로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자네다운 제안이군."
그의 말에 페로가 말을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까지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조금 더 많은 피가 필요해. 더 죽일 수 있다면 최대한 죽인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아."
페로가 눈을 부릅뜨며 손에 쥐고있던 긴 화극을 치켜들었다. 양쪽의 도끼날이 붙은 이 섬뜩한 창은 하지즈 장군도 그 비슷한것을 썼듯이 창술의 최고수준에 달한 전문가만이 쓸 수 있는 무거운 무기였다. 그 끝의 도끼날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고 살점과 함께 떨어진 머리카락 약간이 달라붙어 있었다.
페로의 눈에서 살기를 읽은 제네르가 전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페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님은 제네르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 잔혹한 사나이에게 '중단할 때'가 가까와졌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물론 페로도 제네르가 말한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결코 살육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필요하기만 하다면 절대 주저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페로는 제네르를 힐끗 돌아보았다.
'정말 쓸만한 녀석이군.'
페로가 내심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유난히 사람욕심많은 페로로서는 동부 출신인 이런 쓸만한 녀석을 왜 아직까지 자신이 곁에 두지 못했을까 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녀석은 이제 완전한 카렐의 사람이었고, 녀석의 카렐에 대한 충성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자신과 카렐과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카렐에게는 사람을 끄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이 처참한 전장 한복판에 서 있던 그는 뜬금없이 카렐의 얼굴과 그 가슴이 너무도 그립다는, 이 상황에는 조금 안어울리는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무너져가는 좌군 중앙에서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던 알리 경은 멀리에서 자신의 진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페로 녀석의 얼굴을 발견했다. 녀석은 대여섯명의 기병들만을 동반한 채 달아나는 아군 보병들이 우굴거리는 중간에서 대담하게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진퇴양난에 빠져있었다. 전열의 보병들은 그럭저럭 벼텨주고 있었지만 후방과 측방이 문제였다. 저놈의 가디언과 기사단들은 퇴로를 철저하게 차단한 채 방진을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었다. 중군이 토막났던 그 순간 모든것이 결정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이 대군의 지휘관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라도 싶은 수치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젠장할......응?"
움찔 한 알리 경이 갑자기 할룩스를 붙들었다. 내내 참담한 소식만 쏟아지던 그의 할룩스로 어디선가 들어본 반가운 목소리가 들어왔다.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있던 알리 경의 표정이 갑자기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종장 알리 경과의 연락을 마치고 난 샤디 가 제후군 비장 사파르 샤디는 뒤에 도열해 선 삼십여기의 낙타병들과 기병들을 문득 돌아보았다. 이곳에 정찰대장으로 처음 투입되었던 그는 이미 사흘동안의 작전수행으로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지만 아군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이 상황에서 뒤에서 지켜만보고있을수는 없었다.
휘하 정찰기병들과 함께 흩어진 낙타병들 몇을 가까스로 추스려들인 그는 이곳에 며칠간 정찰하면서 찾아낸 샛길을 통해 뒤를 쫓는 적 기사단의 눈을 따돌리고 이곳 전장 가까이 다시 접근해들어와 있었다.
"최악은 면해야 돼."
사파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장의 패전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더라도 최소한 종장이며 큰아버지인 알리 경이 적의 손에 능멸당하는 꼴만은 용납할수가 없었다.
그는 소속조차 제각각인 부하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삼스레 확인했다. 샤디 가 소속 병사들에게는 종장 알리 경을 구해야 한다는, 플레렌 가 소속 병사들에게는 적에게 무참하게 무너진 하지즈 장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침착하게 설명하며 성공시 돌아갈 큰 포상도 아울러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큰아버지 알리 경이 내린 명령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페로와 그 옆에 있는 많지않은 기병들을 모두 죽여버린다면 곤경에 처해있는 좌군이 활로를 뚫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들이 살아돌아오기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것만은 말하지 않았다. 물론,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저들 낙타병 정도면 충분히 눈치채고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다행히 적에게는 자신과 같은 결사대를 막을 빠른 경기병이 없었다.
"모두 준비는 됐겠지."
정찰대장답게 경장에 창 하나만을 쥔 사파르는 자신의 말의 목을 한번 툭툭 두들겨주었다.
"모두 갑주를 벗어라. 말이나 낙타도 마찬가지고."
그의 말을 알아들은 부하들이 모두 무거운 갑주를 벗어 스스럼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이제 이것만으로도 중장갑을 차려입은 저녀석들보다는 속도상 유리한 위치에 서는 셈이었고 발빠른 가디언들도 따라붙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몸이 가벼워진 그들은 서로를 한번씩 마주보았다.
"가문과 명예를 위해."
사파르가 창을 치켜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과 페로와의 사이는 약 2스타디아, 무거운 갑주를 떨군 상태에서 전속력으로 말을 몰면 3, 40초 이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떠안을 사파르 스스로가 그 선두에 섰다.
"한번에 모두 몰려들면 혼란스러워진다. 선두부터 4기가 타겟을 공격하고 나머지는 주변을 막는다. 행여 그들이 실패할시는 다시 그 뒤의 4명이 합류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사파르의 명령에 그들 기병들이 스스로 알아서 4명 정도씩의 팀을 이루어 사파르의 뒤에 도열했다. 숨어있는 절벽 너머, 밉살머리스러운 페로 쪽을 다시한번 확인한 사파르가 깊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뒤의 부하들을 떨리는 눈길로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돌격!"
큰 함성을 외친 사파르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숨어있던 절벽 틈새에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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