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38화 (138/1,132)

< -- 138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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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렌 가와 샤디 가의 4만의 제후군을 실은 12대의 수송선은 루쿠스탄 행성계의 공식적인 경계를 넘자마자 곧바로 자이센 가 컴플렉스 측으로부터 경고방송을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들은 별 개의치않고 5번 행성 쪽으로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행성 에너지장벽의 작동이 개시되기 전에 5번 행성의 대기권을 돌파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그때에 늦는다고 공격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포스트위성 수백개를 부수는 동안에 녀석들이 방어준비를 완결한다면 공격에 좀 더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명색이 최고제후와 제4제후의 연합병력이 11번째 제후 하나 손쉽게 요리하지 못한다면 이만저만 망신스런 일이 아닐 터였다.

"대기권 진입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하지즈 장군이 미소를 지었다. 행성 에너지장벽은 이제서야 예열을 시작하고 있었다. 녀석들 어지간히 방심하고 있던것이 확실했다. 제1관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손쉽게 통과한 셈이었다. 12대의 중형수송선은 이 행성의 적도에 위치한 자이센 가의 1번 농업컴플렉스를 향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지상과 공중 에너지장벽 가동되었습니다."

장교가 스캐너를 살피며 보고했다. 뭐, 지상 에너지장벽이야 지상전에서는 어차피 뚫어야 할 관문이었다.

"직경 60 스타디아, 3500급입니다."

"휴우~"

알리 경이 휘파람을 불었다.

"페로 그새끼 확실히 돈은 많구만. 3500짜리라니 시간 좀 걸리겠는걸."

"저희가 가져온 최신장비면 30분이면 돌파가능할겁니다."

하지즈 장군이 득이양양하게 말했다. 그의 큰소리에 괜히 자존심이 상한 알리 경이 불쾌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플레렌 가에서 가져온 최신형 해체장비는 수송선마다 한대씩 12대나 실려있었다. 제국 제일의 하이테크기술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한 서부는 군사장비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령실의 스크린에 거친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이 행성의 지형이 똑똑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기다!"

하지즈 장군이 큰 소리로 외쳤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분지 한쪽에 유리로 지어진 넓고 거대한 컴플렉스 진입로 주변에는 이미 파란색의 반구형 에너지장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알리 경이 관측장교에게 물었다.

"녀석들 배치는?"

"7백여명이 헐겁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키겠다는 건지.......녀석들 뒤에......10대의 수송선도 대기중입니다."

"새끼들,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이군."

하지즈 장군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절벽을 등진 컴플렉스 정면을 둘러선 수백명의 가디언들 안쪽으로 수송선이 빙 둘러 정박해 있었다. 알리 경이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페로 그녀석 정도면 여기하나 버린다고 어차피 큰 손해도 아닐테니......"

공격해들어가는 12대의 수송선이 에너지장벽 약간 바깥쪽에 둥글게 착륙하며 절벽 앞쪽으로 노출된 컴플렉스 전면를 순식간에 포위해버렸다. 수송선의 문이 열리며 수만의 제후군 병사들이 해체장비를 앞세우고 엄청난 함성과 함께 몰려나오더니 요란한 소음과 불꽃이 튕기며 페로의 에너지장벽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푸른빛 중장갑에 방천극으로 무장하고 건장한 백마에 올라탄 당당한 자세로 나온 하지즈 장군은 눈에 낀 스코프를 작동시키며 멀리 안쪽을 살펴보았다.

"페로 녀석 어딨나?"

"조금 왼쪽을 보십시오."

"흠,"

부장이 가리킨 곳에는 은색 갑주를 차려입고 큰 화극을 쥔 채 붉은 준마에 올라 가디언들 중간에서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그 유명한 페로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계셨군."

하지즈 장군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이 떠올랐다. 각자의 무기 하나씩을 든 파란 팔찌의 가디언들이 꽤 널찍한 간격을 두고 1열로 헐겁게 늘어서 있었다. 저정도라면 이쪽에서 보병과 낙타병의 연합공격으로 쉽사리 휩쓸어버릴 수 있을것이 확실했다. 제아무리 잘난 페로 가디언들이라도 수십배가 되는 보병과 낙타병의 연합공격에 배겨낼 리가 없었다.  알리 경이 이미 페로 쪽을 노렸는지 그의 정면쪽에서 보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공훈 세우는데 미쳤군."

하지즈 장군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3천여기의 낙타병들은 당장은 보병들의 뒤에서 2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단 보병들의 공격이 개시된 후 적들의 약점을 치고들어가 적 진형을 흐뜨러놓을 생각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이 낙타병들은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혹은 선봉에서 측면이나 후방 등 적의 취약지점으로 돌진해 적진을 헤집어야 정상이겠지만 전열은 몰살당할 것이 빤한 상황에서 이 비싼 병사들을 내선을 쥔 채 굳건한 방어테세를 잡고있는 저 가디언들의 식사거리로 내주는 건 그다지 경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갑 낙타병들은 가디언들보다 높이에서는 유리하겠지만 전력질주하는 저 가디언들에 비해 발은 느리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물론 그도 옛 '하임달의 결전'에서 명장 오르마즈 경의 기병대가 가디언들을 상대로 거두었던 놀라운 전과---만 오천의 기병이 모두 전사했지만 가디언을 무려 5천이나 몰살시켰던---를 잘 알고있었지만 가문 전체의 몰살을 코앞에 둔 그들 카파키 가 기병대의 처절했던 사투가 몇백번 싸워야 한번 나올둥말둥한 '기적'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있었고, 어차피 유리한 입장인 자신들이 괜한 '사투'를 벌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즈 장군은 건틀렛을 벗고 손에 나기 시작한 땀을 닦았다.

파예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바로 플레렌 가 제후군에 몸담은 하지즈 장군은 18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만에 '장군들의 꽃'이라는 군단장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자신의 빠른 승진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플레렌 가 출신의 어머니 때문이라며 쑥덕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노예폭동 진압과 도적소탕에 누구보다 많은 실전경험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주변의 이런 오해를 털기 위해 항상 위험한 임무를 자청해 나섰고, 스스로의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모범적인 무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플레렌 가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지금은 대병력 지휘는 물론이고 일기투까지도 서부 최고를 자랑하는 그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좌중랑장 쪽에서 뚫었다고 합니다!"

부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하지즈 장군은 침착하게 건틀렛을 다시 팔에 끼웠다. 12대의 해체기는 거의 성능이 비슷하니 조만간 모든 진격로가 확보되는대로 총 진격이 시작될 터였다. 안쪽의 페로 가디언들이 무기를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알리 경의 명에 따르는 보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그냥 군대가 아닌 가디언들이었다. 앞서가는 녀석들은 무조건 죽음이라고 본다면 이녀석들이 다른 군대들과 싸울때처럼 용맹하게 돌진해줄지 확신이 없었다. 병사들에게 억지로라도 함성을 지르게 하는 건 이들 '소모품'들에게 걸 수 있는 유일한 최면이었다.

출발 전 이들에게 한잔씩 돌린 술에 약간씩의 마약을 섞으라고 지시는 해두었지만 극도의 긴장상태에서는 마약조차도 별 효과를 못보일 때도 많았다. 이쪽의 마약이 강할지, 저쪽 가디언들의 테스토스테론과 엔돌핀이 강할지는 어차피 대보아야 알 일이었다.

"진격!"

알리 경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3만 8천의 서부 보병이 고작 7백명에 불과한 페로 가디언들을 향해 속보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보병들의 공격과 함께 적 가디언 뒤에 있던 수송선의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보병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하지즈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달아나려고 저러나?"

멈칫 하던 하지즈 장군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송선은 녀석들이 달아나려는 수단이 아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수송선 안에서 긴 창과 도끼, 장검을 쥔, 제대로 갑주를 차려입은 웬 보병들이 엄청난 함성과 함께 우루루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뭐야!"

보병과 함께 돌진하던 알리 경이 기겁을 하고 놀라고 말았다. 그가 아는 바로는 페로에게는 타르서스 직할군 외에 정규군 조직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몰려나오는 병사들은 지금껏 어느 제후군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선 형태의 검은빛 새 갑주에 거의 정규군같지 않은 거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저놈들 도대체 뭐야!"

수송선에서 몰려나오는 모양으로 보아 적 정규군은 족히 만 명은 넘는 것이 확실했다. 그들이 먼저 서 있던 페로 가디언들의 중간중간을 채우며 서자 맹렬히 돌격하던 서부 보병들이 움찔 하고 있었다.

"진격!"

중앙에서 말에 올라있던 페로가 들고있던 긴 창을 앞으로 겨누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명령과 함께 오백여명 정도씩의 쐐기꼴로 정열한 코아 전사단 중무장 창병들이 5열까지 들고있던 긴 창을 일제히 앞으로 겨누며 가디언들과 함께 전진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후열의 경무장 보병들이 한발한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저 끔찍스럽기까지 한 고슴도치같은 진형은 한때 '폭풍의 군대'로 불리웠던, 이제는 사라진줄로 믿고있던 옛 북부제후군의 주특기 밀집 장창보병대였다.

"적 장창보병 약 만 명과 경보병 3천여명입니다!"

알리 경의 참모가 스캐너를 살피며 말했다. 방패와 시미터, 드물게 창으로 무장한 이쪽의 보병들이 적들의 예상치않은 장창돌격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창을 들고 대오를 이룬 상대에게 단병기인 칼을 든 상대가 정면에서 선제공격을 해서는 안되는 것은 정석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창이다보니 낙타병들도 함부로 돌격할수가 없었다. 기병보다 높이는 있지만 속도가 떨어지는 낙타병은 장창병에게는 특히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하지즈 장군은 자신들의 적이 '그냥 가디언들'이 아니고 무려 7백명의 가디언들로 강화된 보병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리 경! 일단 보병이 뚫어주어야겠습니다! 한곳만 뚫리면 저희가 파고들겠습니다!"

하지즈 경이 낙타병들을 정지시키며 알리 경에게 말했다. 내선을 쥐고 있는 페로에게 우회공격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생존성이 강한 보병들에게 기대를 거는수밖에 없었다.

"뭐하나! 돌격이다!"

말에 올라탄 알리 경이 창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3배나 되는 병력으로 단번에 밀어붙여 한곳이라도 무너지기를 바라는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곳만 뚫리면 낙타병이 그 뒤는 해결해줄 터였다.

가디언들과의 싸움만을 생각하고 딴에는 머리를 써서 경보병 위주로 부대를 구성했던 알리 경이나 하지즈 장군이나 이순간 자신들 휘하의 주력이 경장 시미터보병이 아니고 그 유명한 남부의 '전쟁기계' 중장보병들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공통된 아쉬움에 빠져있었다. 하기사 그네들도 하임달 결전에서 북부제후군에 꽤나 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진격! 진격하란 말이다! 뒤처지는 녀석은 참수한다!"

머뭇거리던 병사들이 각자 초급지휘관들의 거의 협박에 가까운 독려에 방패를 굳게 쥐고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는 창끝을 향해 내달렸다. 돌격하고 죽으나 물러나다가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서부 보병들과 전사단 장창병들 사이에 첫번째 충돌이 벌어지면서 비명소리, 함성과 함께 뽀얀 먼지가 컴플렉스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즈 장군이 침을 꿀꺽 삼키며 1차 돌격의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다. 보병들은 창으로 만들어진 장벽에 정면으로 달려들어 죽던가, 아니면 그들의 1열 중간중간을 채운 가디언들의 비호같은 공격에 쓰러지고 있었다.

"전진! 전진! 여유를 주지 마라!"

서부 보병대의 첫 돌격을 이겨낸 그들 전사단 창병들은 주로 북부 출신으로 이루어진 전사단 지휘관들의 명령에 거의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며 1차 돌격에 쓰러진 적병을 짓밟고 앞으로 전진해나갔다. 넘어지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진 서부병사들에게는 후열에서 따라오는 경보병들의 무서운 난도질이 뒤이어졌다.

"간격을 유지해! 간격! 빈 자리를 채워라! 어물거리는 놈들은 목을 벤다!"

지금까지 오랜시간 정성들여 키워온 전사단 정규군들을 첫 전투에 데리고나온 조페가 1열의 창병들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하임달의 결전' 당시 베흔 휘하에서 오르마즈 경의 밀집장창보병대와 맞서 싸웠다가 5만의 근위대 병력을 잃었던 당사자인 조페는 지금은 당시 북부제후군이 썼던 바로 그 같은 보병을 지휘하게 된, 약간은 아이러니한 입장이었다. 그로서도 참으로 오랫만에 치르는 첫 대규모 실전이니만큼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병사들은 기대만큼 잘 싸워주고 있었다.

제일 후열의 페로의 노예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진 병사들과 포로들을 급히 후방으로 빼내가고 있었다. 중장 창병과 단병기로 무장한 경장보병, 가디언의 조합은 카렐과 페로가 손잡으면서 앞으로의 근위대 정규군이나 제후군들과의 실전을 대비해 마련한 방안이었다. 한때 북부제후군의 주력이기도 했던 밀집 장창보병은 북부출신들이 비교적 많은 전사단에서 가장 도입하기 적당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실전에서 검증받는 날이었다.

"창병을 1열로 내세워! 집결시켜 공격해라! 보병들이 엄호한다!"

알리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보병들 중간중간에 가디언들을 위협하기 위해 배치했던 소수의 장창병들을 집결시켜 활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한군데라도 뚫어야 했다.

"안되겠다."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지즈 장군이 얼굴을 찌푸렸다. 적들에게 가디언들이 보강되어있는 상황에서 짧은 무기 위주로 무장한 서부 보병들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해보였다. 알리 경은 늦게라도 창병들을 모아 창 대 창으로 대적하려 하는 듯 싶었지만 누군가 나서서 진형을 한구석이라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적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저 소름끼치는 밀집 장창대을 대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장군님! 북쪽 절벽 밑으로 얕은 수로가 있습니다. 그쪽이 적병 배치가 헐거우니 낙타병이 연합하면 돌파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참모의 보고에 스캐너를 살핀 하지즈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보고대로 지형이 험한 그곳에는 비교적 소수의, 1천여명 정도로 보이는 장창병들이 견제만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낙타병을 총집결시켜 돌파하면 족히 뚫을 수 있을것이 확실했다. 그는 뒤에 모여선 낙타병들에게 손을 번쩍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낙타병 총 진격이다! 목표는 2시 방향의 수로다!"

목표지점인 수로는 컴플렉스에서 험한 바위언덕들 뒤로 연결되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옛날에 쓰다가 버려진듯한 거대한 곡물사일로들 몇 개가 흉물스럽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즈 장군과 3천기의 낙타병들은 최고속도로 수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수로쪽에 헐겁게 배치되어있던 적 창병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창끝을 바닥에 고정시켜 낙타병들에게 겨누었지만 밀도가 낮아 이쪽 역시 중장 낙타병로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듯 싶어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얼마 되지 않는 창병들은 땅을 새카맣게 덮으며 돌진해오는 이쪽의 기세에 혼비백산하며 결국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몇 운없는 낙타병들이 고집스레 자리를 지킨 창병들의 손에 나동그라지며 쓰러졌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1열의 창병을 어렵지않게 돌파한 낙타병부대는 다시 2열의 경보병들을 무서운 기세로 사방에 흩어놓았다.

"계속 돌격해! 적 보병대 측면까지 돌격한다!"

3천이나 되는 낙타병들의 일제돌격에 컴플렉스 북쪽 방어선 한쪽이 너무도 손쉽게 뚫리고 있었다. 용기를 얻은 하지즈 장군은 서부 보병들과 대적중인 전사단 주력 장창보병대 측면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돌격해들어갔다. 적들이 의외로 너무 쉽게 진로를 내주었다는 생각을 못한 건 아니었지만 당장은 그것을 따질 여유는 없었다.

"장군님! 장군님! 뒤, 뒤쪽에서......"

후위의 낙타병부대 쪽에서 이상한 보고가 들려오는 것을 하지즈 장군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적진 깊숙히 파고들어간 후였다. 하지즈 장군은 급히 타고있던 말을 돌렸다.

"뭐야? 저건!"

방금 지나쳐온 뒷쪽 사일로의 벽 한쪽이 쓰러지면서 그 안에서 우루루 몰려나온 흰색 갑주를 입은 족히 천여기의 중장기병들이 낙타병부대의 후위를 이미 덮치고 있었다. 후방에서 무방비로 돌진하던 낙타병들 중 상당수가 이미 녀석들의 배후공격으로 비명과 함께 낙타에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기병에 비해 속도에서 뒤지는 낙타병은 난전에서는 기병보다 유리할수도 있었지만 뒤에서 공격당할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들 기병들의 등뒤로 가디언들과 수천의 창병이 더 몰려오고 있었다. 일부러 길을 터준 적들이 어느새 후방을 틀어막아버린 것이었다.

먼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던 천여명의 창병들도 갑자기 도주를 멈추더니 미리 준비해두었던 장애물과 창을 일제히 세우면서 돌격하는 낙타병들의 앞을 다시 막아섰다.

"제기랄, 녀석들 기병부터 잡아라! 저정도면 상대할만하다!"

말을 돌린 하지즈 장군이 스스로 창을 꼰아잡고 선두에서 적 기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1대1의 난전으로 이끌어간다면 낙타병으로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기사단 녀석들을 상대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의 명령에 수로 쪽에 정신을 팔고있던 낙타병들이 일제히 기수를 돌려 후방의 적 기사단을 향했다. 뒤돌아선 낙타병부대의 양측면으로 족히 2천여는 됨직한 창병들이 또다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이런 망할! 뭐이렇게 많아!"

사방이 장창병들에게 에워싸인 하지즈 장군이 대뜸 욕을 내뱉었다.

창을 굳게 움켜쥔 하지즈 장군은 적 기사단의 선두에서 달려오던 푸른 망토를 두른 조그만 체구의 기병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방천극을 뻗었다.

"어라, 되게 빠르네,"

라손은 기겁을 하며 하지즈의 창을 피했지만 하마터면 뒤에 함께 타고있던 킵이 얼굴을 제대로 얻어맞을 뻔 했다. 넓적하고 예리한 창날에 초승달 모양의 도끼날이 붙은 중량무기인 극은 스치는것만으로도 그 살기가 온몸을 타고 느껴질 정도로 위력적인 무기였다. 다른 가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워낙에 말타기가 서툰 킵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달아났다가 순식간에 다시 재집결한 1천여 창병들과 매복해있던 2천여 창병들, 기사단과 함께온 2천여 녀석들까지 합쳐 무려 오천여명의 이들 선발된 정예 창병들에게 순식간에 완전히 포위된 낙타병부대는 이제 눈앞의 천여명의 기사단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낙타병은 기병들에 비해 높이에서 유리했지만 문제는 옆에서 협공하고있는 적 창병들이었다. 수십여기의 낙타병들이 후방을 돌파하려다가 창병에 당해 허망하게 낙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위세등등하게 전진하던 낙타병들은 눈깜짝할새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킵이 이끄는 백여명의 가디언들이 사방에 흩어져 조금이라도 대열을 이탈한 낙타병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달려들어 낙타 다리를 베어놓았다. 5열로 포위진을 이룬 창병들과 천여명의 기사단은 퇴로가 막혀버린 낙타병들을 토끼몰이하듯 수로 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외곽의 창병들이 낙타병들을 몰아붙이면서 특유의 돌파력을 상실한 그들이 조금씩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그새 동쪽 한구석에서는 기사단과 낙타병간에 부분적인 근접전도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난전 상태로 번지지는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그들 기사단의 모습이 하지즈 장군의 속을 바싹바싹 태워놓고 있었다. 이쯤되면 보통의 중장기병들이라면 중심부로 미친 듯 돌격해올 터였지만 저녀석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돌격에 미친 보통의 중장기병들의 모습과는 어딘가 틀렸다. 저놈들은 보병들의 손에 낙타병들의 대오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장기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이 다른 기병들처럼 돌격해 들어와 벌일 거친 난전만을 기다리던 하지즈 장군은 저들의 얄밉기까지 한 모습에 어느새 바싹 말라붙어버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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