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36화 (136/1,132)

< -- 136 회: Part 7. 루피너스의 모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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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아르다가 셔틀에서 제일 먼저 뛰어내린 자이납은 뻣뻣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섯명의 가디언들 모습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그들의 손목에는 하나같이 카렐과 같은 파란색 사파이어빛 팔찌가 번쩍이고 있었고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가디언들보다 좀 더 건장한 체격에 더 위협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 더럽게 재미없게 생긴 놈들일세."

자이납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들 뒷편에 전포를 입고 서 있던 킵이 자이납을 뒤따라 나오던 레곤 대공주와 네페티 부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오랫만에 뵈옵니다. 대공주저하,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총리각하께서는 약간의 문제로 함교에서 못내려오고 계십니다. 휴게실로 안내해드릴테니 잠시 기다리시면 총리께서 직접 찾아뵈올 겁니다."

킵이 두 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대공주와 부인, 푸아킨 경을 모시고 멀어지자 뒤이어 나온 시로와 제네르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솔직히 상전들이 없어져주니까 한짐 덜은 기분이네. 휴우,"

잠시 후 도크 출입문 쪽이 약간 시끄러워지더니 검은 머리, 검은 눈에 화려한 흰색 비단포자락을 펄럭이며 한 키큰 남자가 훌쩍 들어왔다.

"으엑,"

자이납이 혀를 쑥 내밀었다. 반짝이는 사파이어 귀걸이와 목걸이, 루비 팔찌까지 완벽하게 갖춘 악세사리는 이 남자의 높은 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날카롭게 빛나는 매력적인 눈매와 잘 다듬은 짧은 턱수염이 자란 남자다운 마스크에 갈색빛이 감도는 윤기흐르는 피부와 조각상같은 탄탄한 몸매까지, 눈앞에 나타난 깜짝놀랄 미남의 모습에 자이납은 상대가 누굴까 하는 생각도 못한 채 멍 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페로 자이센 총리 각하."

제네르가 페로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자이납도 덩달이 그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카렐 장태자는?"

"곧 나오실겁니다. 몸이 조금 안좋으셔서......"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리의 부축을 받으며 카렐이 느릿느릿 셔틀에서 걸어나왔다.

"카렐!"

페로가 다시 재회한 카렐에게 두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카렐 역시 활짝 웃음을 지으며 페로의 가슴을 힘있게 껴안았다. 서로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주던 둘은 새삼스럽게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도대체 얼마만이야?"

페로의 질문에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날짜는 얼마 안돼. 내꼴이 좀 많이 망가져서 그렇지."

"그런가? 근데......정말로 꼬락서니가 이게 뭐냐?"

도대체 그 망할 자존심 때문인지 같은 말도 듣기좋게 꾸며서 하는 법은 털끝만큼도 모르는 페로였다. 그의 멋대가리없는 한마디에 카렐이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론 겉으로는 그모양으로밖에 표현 못하는 그였지만 페로는 지난번보다도 더 여위고 망가져버린 카렐의 모습에 내심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숨을 내쉰 카렐이 페로에게 작게 속삭였다.

"가자. 급하게 할 말 있어. 단둘이 얘기할곳이 필요한데."

"그래? 알았어."

카렐과 페로는 계속 무어라 서로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수하들도 물린 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캬아, 부럽다......"

자이납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카렐을 부축해 나가는 페로의 뒷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멋진 남자하고 어깨를 맞대고......."

"홀아비니까 한번 꼬셔봐. 킥킥. 나이도 전하하고 동갑이시니까 그리 많지도 않으셔."

우베가 자이납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제네르가 그의 이마를 다시 쥐어박았다.

"닥쳐."

카렐로부터 무려 4만의 서부 정규군이 자신의 영지에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페로는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버린 표정을 애써 추스리며 급히 되물었다.

"그럼......'응징'을 한다던 게 바로 나한테......"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야."

"제기랄......지금 가디언 천명이 고작인데.....타르서스에서 불러올수도 없고.....서부엔 아직 동맹군도 없는데....."

절망스런 표정의 페로가 입술을 꽉 깨물자 카렐이 그의 손을 가볍게 쥐어주었다.

"내가 왜 목숨을 걸고 저기서 서둘러 빠져나왔겠어?"

"어머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자리에 꿇어앉은 카렐이 세네피스 황후의 형상에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자 무사히 돌아온 딸의 모습에 황후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손을 뻗어왔다.

"도대체......내가 너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황후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카렐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정말 많이 여위었구나. 이런 세상에."

"조금만 쉬면 곧 괜찮아질 것이옵니다."

카렐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널 한번 안아주고 싶지만......할수가 없구나."

"며칠 이내로 돌아갈 것이니 맘편히 기다리십시오."

황후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카렐은 어머니의 곱지않은 시선이 가끔식 뒤에 서 있는 네페티 부인 쪽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황후의 형상이 카렐의 얼굴을 다정하게 품에 껴안고 있었지만 평소의 황후는 이렇게 드러내놓고 자식에게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이 결코 아님을 카렐 역시 잘 알고있었다.

"돌아오면 전처럼 옆에서 날 재워주려무나."

황후의 조금은 심하게 들리는 말들에 함께 서 있던 아메스가 보일듯말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약혼자인 아메스가 카렐의 집에 드나드는 것도 '태자가 쉬는데 귀찮게 한다'며 매번 신경질을 부리곤 하던 황후였지만 정작 자신은 걸핏하면 카렐이 자고있는 침실에까지 시도때도없이 찾아가 '혼자있으니 잠이 안온다'며 그의 침대 한구석까지 전세내듯 차지하곤 해 온 터였다.

"물론입니다. 어머님."

짐짓 다정한 표정으로 대답을 내놓은 카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에 있던 대공주에게 황후와의 대화를 넘겨주고 빠져나왔다.

카렐을 뒤따라나온 페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아메스가 황후폐하 덕택에 스트레스 꽤나 받겠군."

"절대 그런 일은 없을거야."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페로가 그를 문득 돌아보았다.

"날 믿어. 내게 아메스는 네 또다른 모습이야."

"이게 좋아해야하는 말인지 아닌지 영 헷갈린다."

"좋아할 말이야. 정말이야."

카렐이 페로의 귀에 대고 키득거렸다. 카렐의 넉살에 심각한 표정의 페로도 결국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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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페로가 수련장에 들어온 '이상한 여자아이'를 처음 만난 건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은 엄마 네베드 슈트란 부인과 누나 크낙스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여느때처럼 목검을 들고 누나가 자주 검술 연습을 하곤 하던 수련장 대청으로 가던 페로는 누군가 토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구석진 단풍나무 아래를 돌아보았다.

"이년 또시작이네."

수련장의 가디언 합숙소 관리인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한 꼬마아이를 내려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화장실가서 토하던가 이게 뭐야."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먹은것을 게워내던 그 여자아이는 많이 지친 듯 옷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않은 채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관리인이 뒤에서 대기하던 노예를 손짓해 불렀다.

"이년 데려가서 좀 씻겨. 생기긴 무슨 가죽만 남아갖고......기껏 먹여놓은거 다 토해놓기나 하고.....골칫거리가 따로 없다니까."

노예의 팔에 질질 끌려가던 그 창백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어린 페로는 얼굴을 찡그릴수밖에 없었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은 심하게 헝클어져있었고 유난히 하얀 얼굴은 백짓장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묘한 무지개빛 광채를 뿜는 회색의 희한한 눈동자는 어린 페로의 뇌리에도 그대로 각인될만큼 선명한 느낌을 남기고 있었다.

다음날도 수련장 대청으로 혼자 목검놀이를 하러 가던 페로는 어제 그 여자아이가 토하고 있던 단풍나무 밑을 문득 바라보았다. 엄마와 누나가 죽고 난 후 그와 놀아줄 사람은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가문 적장자였던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명문 자이센 가의 새 후계자가 된 페로에게 종장이며 아버지인 슈막은 위험한 바깥출입은 물론이고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엄격히 통제할것을 지시해놓은 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모든 자유를 빼앗긴 이 7살 소년의 뒤에는 항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하인들의 눈이 따라다니기 일쑤였다. 그런 페로에게 낙이라고는 수련장 대청에 넘쳐나는 번쩍이는 신기한 무기들과 더미들, 그리고 자신의 목검놀이 상대를 해 주는 착한 가디언 다룬이 전부였다.

단풍나무 밑에는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또래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던 페로에게 난생처음으로 호기심을 끌어낸 그 여자아이는 사실 '호감'이라기보다는 '역겨움'으로 더 기억되고 있었다. 나무 밑에서 토하고있던 그 몰골을 기억만해도 페로는 속에서 구역질이 치솟아올라올 것만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페로는 어제의 그 단풍나무를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페로는 아직 별로 든 것도 없는 자신의 작은 머리를 굴려 그 아이의 정체를 나름대로 추정하고 있었다.

가디언 수련장 내니까 일단 가디언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그의 머리로는 여자가 가디언 아이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노예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어린 노예들은 집 밖의 외거노예집에서 지내다가 어느정도 크면 저택에 들어오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런것을 알 턱이 없는 7살의 어린 페로는 노예는 무조건 다 큰 어른이라는 방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페로의 머리로는 그 괴상한 여자아이의 정체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모르겠다.'

다룬이 직접 나무를 깎아 진짜 칼처럼 만들어준 작은 목검을 허리띠에 꽂아넣고 페로는 마치 무사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게 텅 빈 수련장 대청에 들어섰다. 대청에 들어선 이 꼬마의 얼굴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번쩍이는 '진짜 무기들'을 보고는 가벼운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후와,"

큰 배틀액스에 다가간 페로는 무기들에 절대 손대지 말라는 며칠 전 다룬의 신신당부도 까맣게 잊고는 그 날을 더듬더듬 만지고 있었다.

"너 다친다."

느닷없는 가는 목소리에 지레 놀란 페로의 손가락이 도끼날 위를 스치면서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명문가 적장자인 페로가 '손을 벤 건' 난생 처음 당해보는 일이었다. 자신에게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페로의 얼굴이 순간 울 듯이 일그러들고 있었다.

"것봐, 만지지 말랬지."

대청 한구석의 기둥에 기대앉아 꽃잎을 가지고 놀고있던 계집아이가 페로에게 다시 말했다. 바로 어제의 회색빛 눈동자의 아이였다. 태어나 단 한번도 놀림이라고는 당해본 일이 없던 귀공자 페로가 이 정체모를 계집아이의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손을 벤 것도 모두 저 미친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이씨!"

목검을 집어든 페로가 가만히 있던 여자아이의 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여자아이가 갖고놀던 꽃잎이 하늘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지자 페로는 그것마저도 발로 꾹 밟아버렸다. 태어나 단 한번도 맞아본일도 없던 페로는 목검에 맞는다는것이 얼마나 아픈것인지,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머리를 얻어맞은 여자아이가 울 생각도 못한 채 멍 하니 페로를 올려보고 있었다.

"뭘봐!"

페로가 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여자아이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페로가 거칠게 휘두르는 목검에 계속 얻어맞고 있었다. 놀란 여자아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지만 페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은 이 집안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말 안듣는놈은 무조건 두들겨패라'는 것 뿐이었다.

여자아이의 울음소리에 수련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가디언 교관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페로 도련님!"

다룬이 날뛰는 페로를 급히 안아들었다. 다른 교관이 바닥에서 울고있던 여자아이를 급히 일으켜세웠다.

"카렐 너! 도련님한테 무슨짓한거야!"

페로에게 목검으로 얻어맞아 엉망이 된 여자아이는 자신이 왜맞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며 눈물을 훔쳐냈다.

"몰라요, 전 그냥....."

다룬이 페로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순간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주인 슈막이 안다면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큰 사건이었다.

"이 망할 년! 네년이!"

다룬이 여자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여자아이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전......"

여자아이가 너무나 기가막힌지 다시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어린 가디언들을 혼낼 때 쓰는 채찍을 들고나온 교관 가디언이 여자아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다룬의 옆에 서서 이 모든것을 지켜보던 어린 페로는 자신을 놀렸던 여자아이가 얻어터지는 모습이 내심 통쾌하기도 했지만 그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눈곱만한 양심은 무언가 잘못된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조금씩 던지고 있기는 했다.

"네년이 감히 도련님 손에서 피를 냈어? 빨리 빌지 못해?"

"제가 안그랬어요, 정말이예요,"

여자아이가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어린 페로는 가디언들의 이 '과잉행동'이 페로의 상처를 이 계집아이의 책임으로 돌려서 주인의 책임추궁을 피하려는 수작임을 이해할 정도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결국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그 비쩍 마른 여자아이는 가디언들의 손에 멱살이 잡혀서 바닥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처음의 통쾌감이 어느새 묘한 죄책감으로 바뀌어버린 페로는 가디언 숙소 한구석의 더러운 철창에 짐승처럼 갇히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갑자기 수련장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룻밤새에 그 '이상한 여자아이'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린 어린 페로는 그 다음날도 여느때처럼 점심시간에 맞춰 수련장 대청으로 달려갔다. 어제의 사고 때문인지 대청에는 15살쯤 되어보이는 견습 가디언 한명이 무기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도련님, 그거 손대시면 위험합니다."

대뜸 단검을 집어드는 페로의 겁없는 모습에 새파랗게 질린 견습 가디언이 그의 손에서 칼을 재빨리 빼앗아들었다.

"이씨, 감히 내껄 뺏어?"

페로가 목검으로 죄없는 견습 가디언의 팔을 힘껏 쳤지만 나이는 어려도 가디언인지라 7살 꼬마가 휘두르는 목검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약이 바싹 오른 페로가 대뜸 신경질을 부렸다.

"아빠한테 이를거야."

"주인님께서 절대 무기에는 손대지 못하시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카렐이 얻어터지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던 견습 가디언은 이 골치아픈 꼬마의 생떼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완전히 삐져버린 페로는 수련장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들여다보았지만 이럴때 자기 편이 되어주어야 할 다룬은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목검을 휘두르며 할일없이 수련장을 어슬렁거리던 페로의 눈에 어제의 그 철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이상한 여자아이'는 아직까지도 그 안에 있었다. 페로가 조심스럽게 철창에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 여자아이가 누워있다말고 벌떡 일어나 페로를 노려보았다.

새벽에 내린 비로 철창 바닥에 깐 나무판자 역시 흠뻑 젖어있었고 그 새벽비를 다 맞았을 아이의 몰골은 한마디로 형편없었다. 비를 맞아 헝클어진 머리에 땟국물이 꼬질꼬질해진 계집아이의 꼬락서니는 단풍나무밑에서 토하던 그때보다 더 흉해진 몰골이었다.

또한번 호기심이 발동한 페로가 철창 안의 이 여자아이를 무슨 동물원 짐승이라도 구경하듯 유심히 지켜보았다. 철창 한쪽에 누군가 갖다놓은 듯 죽 한그릇이 놓여있었지만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하긴 빗물과 뒤섞여 꿀꿀이죽 비슷하게 되어버린 저것을 먹고싶을 마음이 드는 인간이 더 이상하겠지만.

"어제부터 여기 있던거야?"

페로가 용기를 내 먼저 말을 걸었다. 여자아이가 감기라도 걸린 듯 콧물을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은 어디서 자고?"

페로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여자아이가 조금은 기가막히다는 듯 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올려보았다.

"여기서 자지 어디서 자?"

"잠을 이불 속에서 자지 여기서 어떻게 자? 아빠가 밖에서 자면 죽는댔어."

"안죽어. 니 아빠 거짓말장이야."

말을 끝낸 여자아이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목이 끊어질까 싶을정도로 한참 기침을 하고 난 아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철창에 기대 맥없이 주저앉았다.

"니 이름이 뭔데?"

페로가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카렐."

"성은?"

"가디언은 성이 없댔어."

"니가 가디언이라고?"

"응."

페로는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짓말 마. 계집애가 무슨 가디언이냐?"

"몰라. 사람들이 나보고 특별난 가디언이래."

어린 카렐은 아직 '가디언'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별 생각도없이 건성 대답했다. 페로로서는 자기도 가디언이라며 말도안되는 고집을 피우는 저 여자아이에게 계속 따지고들 건덕지도 없었다.

"몇살인데?"

"7살."

페로는 이 조그만 여자아이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말이 조금 기가막힌지 아이의 위아래를 새삼스레 다시 훑어보았다. 비를 맞아 많이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특이한 무지개빛을 뿜는 반짝이는 큰 눈에 어깨까지 내려온 적갈색머리, 갸름한 얼굴과 오똑한 콧날은 페로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몇몇 또래 친척 여자아이들보다도 페로의 호기심을 끄는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었다.

철창 옆에 돋아난 잡초를 가지고 혼자 장난을 치던 어린 카렐은 저 밉살머리스런 사내아이가 자리를 떠나지도 않은 채 계속 자기를 쳐다보자 기분이 나쁜지 옆으로 휙 돌아앉아버렸다.

"너 나랑 친구해."

페로가 목검을 대뜸 카렐에게 겨누며 말했다.

"싫어."

카렐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이씨,"

페로는 이 말안듣는 여자아이에게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 여자아이는 자기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난 네 주인 아들이야."

"알아."

카렐이 여전히 잡초로 장난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넌 내 명령을 들어야 돼."

"주인님 아들이지 주인님도 아닌데 내가 니말을 왜들어?"

페로의 얼굴이 순간 울그락불그락해졌다. 평소의 페로같았으면 목검을 치켜들고 어제처럼 두들겨 패기라도 했겠지만 철창 안에 들어있는 여자아이를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도리어 약이 오르고 있는 쪽은 페로였다. 여자아이가 다시 기침을 시작했다. 밤이슬을 맞은 몸에 새벽비까지 그대로 맞은 탓이 확실했다. 몇분동안 쉴새없이 기침을 한 여자아이는 완전히 탈진한 듯 널빤지바닥에 웅크린 채 도로 드러누워버렸다.

"너 나랑 친구하면 여기서 꺼내줄께."

페로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을 접었다. 감겨있던 카렐의 눈이 반짝 빛을 뿜으며 페로를 올려보았다.

"니가 어떻게 꺼내줘?"

"친구 해줄거야 안해줄거야?"

"......꺼내주면 해줄께."

대답도 없이 휙 돌아선 페로는 바로 수련장 관리인에게 달려갔다. 그 인간은 아직까지 자신이 떼를 써서 안통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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