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31화 (131/1,132)

< -- 131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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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키 가 주력부대를 꺾은 근위대는 지체없이 종가가 있는 코윈으로 들이닥쳤다. 오르마즈는 이미 패전을 대비해 많은 직계 자녀들을 빼돌린 후였지만 그것마저도 예상한 베흔은 코윈 부근을 빠져나가는 모든 셔틀들과 수송선, 화물선을 뒤져 '상급귀족문'을 지닌 자들은 물론이었고 몇십일간 북부 전체, 아니 제국 전역를 이잡듯이 뒤져 카파키 가의 족보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이유불문하고 잡아들었다.

결국 종가에 머물던 종장 투르케스크 카파키는 물론이었고 40여명에 달하는 그의 직계 후손 전원과, 한발 더 나아가 투르케스크의 형제들의 적생자손들까지, 210여명에 달하는 직계들은 하임달의 결전에서 먼저 죽어간 300여명의 직계친척들과 함께하지 못한 자신들의 운명을 저주할 따름이었다.

이들 중 종장 자신과 그 적생자녀 5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직계 종원들을 코윈의 춥고 황량한 남극에 모아들인 베흔은 그들 모두를 벌거벗긴 채 얼음구덩이에 몰아넣어 동사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무려 5백여명에 달하던, 한때 제국을 호령하던 카파키 가의 직계들은 거의 몰살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켰으면서도 베흔은 어딘지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함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반역음모를 시인하라며 5일간이나 계속된 모진 고문 속에서도 그 지독한 세네피스년은 자신에게 단 한번도 듣고싶어하던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신의 생살이 찢겨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면서도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조차 내놓지 않았다. 적당히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고 시원하게 목을 베어주려던 베흔으로서는 저 망할 여자에게 귀신이라도 씌운것이 아닌가 의심까지 해야하는 지경에 가 있었다.

게다가 분위기파악 못하는 남극성당의 유학자놈들은 한때 자신들의 부제학이던 이년을 처형해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들이붓듯 쏟아내고 있었고, 황후를 처형하기로 자신과 이미 약속을 한 바 있던 황제조차도 그들 유학자 특유의 '무대포'에는 완전히 두손을 들어버렸던 터였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이년의 당당하기까지 한 태도에 결국 완전히 질려버린 베흔 역시도 더 고통스럽고 효과적인 복수방법이 없을까 하고 나름대로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 될 게야."

황궁 처형장에 끌러나온 전 황후 세네피스에게 베흔이 실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주페 태자가 똑똑하긴 했지. 이 상황까지 그대로 예언했으니. 하긴, 그럼 뭐해, 지도 이미 죽었는걸."

몇달간의 감금으로 이미 심하게 여위어있던 세네피스의 아름답던 갈색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엉망이 되어있었고 매혹적인 회색 눈동자에도 피멍울이 져 있었다. 그 뽀얗고 아름답던 얼굴 곳곳은 불에 그을린 화상으로 물크러들어 진물이 흘렀고 부러진 팔다리와 찢겨진 근육과 인대들 때문에 자리에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기둥에 묶여 있었지만 예의 그 번득이는 눈초리만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세네피스 자신이 세 명의 태자들을 참수할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자신의 가족들과 부하들이 이 대상이 된 오늘의 요란스런 처형도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에 불과했다. 아침 일찍부터 처형장 주변에 운집한 시민들은 90여년만에 다시 벌어진 이 '거물들의 처형'에서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지 잔뜩 고대하고 있었다.

처형장 안쪽에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묶여있는 세네피스 카파키 전 황후는 이 모든 처형을 다 지켜본 후에 타르서스 남쪽 끝에 위치한 악명높은 콜 정치범 수용소에 죽는 날까지 갇히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1차로 끌려나온 황후의 심복 30여명에게는 선고된 형량이 제각각이었다. 내무장관이던 구완 슈벨 경을 비롯한 문관들은 대체로 60대 이상의 태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부분이 수명개조 당대세대들인 그들에게 태형 60대는 사실상 타살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태형을 선고받은 16명 중 60대의 태형을 버티고 살아남은건 구완 경을 비롯한 단 세명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채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형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끌려나온 북부출신 무장들 백여명 역시 참혹하게 목이 잘려나갔다.

그들에 이어 가신들 중 마지막으로 형장에 끌려나온 슈로 기사단장 토로 로버넬 경은 곧 사지가 잘리게 될 자신의 운명은 까맣게 잊은 듯 형장 앞에 묶여있는 세네피스 황후의 처참한 몰골에 도리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온몸이 갈갈이 찢어진다해도 황후폐하께 대한 충성은 여전할 것입니다."

토로 경이 이 와중에도 세네피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그 황당한 모습에 황제 옆에 서 있던 베흔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세네피스가 그런 심복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집행해!"

베흔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큰 도끼를 든 노예들이 한때 용맹을 자랑하던 이 기사단장의 건장한 팔다리를 차례대로 사정없이 잘라냈다. 하지만 세네피스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린 채 이를 악물고 그 끔찍한 소리에도 표정하나 흐뜨러지지 않고 있었다. 결국 몸통만 남은 토로 경이 자루에 담겨 바닥에 질질 끌려나가자 노예들이 더러워진 형장을 한 번 청소했다.

다음 차례로 형장에 들어온 건 황후의 5명의 언니오빠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세네피스가 결국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제 남아있는 건 이들과 종장 투르케스크 카파키 뿐이었다.

베흔은 하임달의 결전 직후 종장의 적장자 오르마즈를 홧김에 무참하게 죽여버린 자신의 바보짓을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었다.---물론 죽은 오르마즈 경을 동정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적장자는 중죄를 지은 종장과 그 운명을 함께한다는, 제국의 '룰'을 알면서도 녀석을 너무 편하게 저세상으로 보내준 자신에 대한 뒤늦은 원망이었다. 부녀가 함께 최악의 끔찍스런 죽음을 맞는 광경을 보고 싶었던 베흔으로서는 이만저만 섭섭한 노릇이 아니었다.

이들 카파키 가 종가의 직계자녀들에게 이전에 태자들에게 주어졌던 은총---가디언들의 손에 참수당하는---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공교롭게도' 한번에 목이 잘리지 못했고, 특히나 막내 세네피스를 가장 아꼈던 둘째 언니는 후두부와 어깨를 오가는 무려 7번이나 되는 참혹한 도끼질 끝에 2분이 넘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남기고 힘겹게 이 세상을 떠야 했다. 그 태연하던 세네피스조차도 그 광경에 치를 떨다못해 두번이나 기절해버릴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끌려나온 투르케스크 카파키의 표정은 생각외로 평온했다. 리 리쿠와 함께 제니안 그룹을 이끌던 1세대 유학자 출신이며 한때 남극성당 교리급 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참으로 오랫만에 갖춰입은 흰색 무명포와 두건, 세 개의 줄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정확히 133년 전, 아버지와 형이 바로 이곳에서 당했던 처참한 죽음을 지켜보며 복수를 다짐했던 이후 참으로 오랫만에 갖추어본 유학자의 모습이었다.

바닥에 놓여져있는 자녀들의 목잘린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베흔의 얼굴을 한 번 올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운명이 어찌 이렇게 반복된단 말인가......"

아버지와 형이 바로 이곳에서 죽어가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던 그는 자신에게 뒤이어 벌어질 끔찍한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막내딸의 얼굴을 문득 돌아보았다.

"속된 일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이제 모두 끝났으니.....난 편안하다. 하지만.......네가 내 길을 다시걷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옷 벗겨!"

마치 성인이라도 된 양 떠들어대는 그의 수작에 화가 치민 베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투르케스크에게 다가서려던 병사들은 차마 그의 옷에 손을 대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학표가 새겨진 머플러가 붙은 무명포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유학자들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투르케스크 공의 위엄에 눌린 병사들이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베흔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투르케스크는 결국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벗어놓은 무명포와 머플러, 셔츠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파키 가 방계친척들에게 넘겨졌다. 병사들은 웃옷을 모두 벗은 투르케스크를 쐐기꼴의 형틀에 단단히 묶었다.

"아버님! 이 값은 반드시 치르게 할 것입니다!"

세네피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울부짖었다. 끌처럼 생긴 작은 칼을 쥔 형리가 투르케스크의 등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투르케스크는 딸의 외침을 들었는지 아닌지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인은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나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옳음이 드러나며 스스로를 뽐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되는 법이니......성인은 다투지 않는 까닭에 천하가 그와 맞서 다툴 수 없으니......"

투르케스크의 등에서 피와 체액이 흘러내리자 구경꾼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남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요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요 남에게 이기는 사람은 힘이 강한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굳센 사람이며......"

투르케스크의 목소리가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산 채로 등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이 유학자의 처절한 눈동자는 홀로 살아남은 불쌍한 막내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베흔은 온몸을 엄습해오는 두 부녀의 무시무시한 교감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베흔은 저 망할 여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둘수밖에 없는 현실을 또한번 원망하고 있었다. 130여년만에 두번째로 시행된 이 참혹한 형벌에 구경꾼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선 근위대 병사들까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고, 충격을 받은 몇은 정신을 잃고 업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구경꾼 무리의 제일 앞에 서 있던 한 키큰 남자만은 이 광경을 무표정하게, 아니 약간의 미소마저 띤 채 올려보고 있었다. 얼핏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긴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대군의 황족문과 한쪽 귀에 달린 연두색의 페리도트 귀걸이, 흠잡을데 없는 귀품넘치는 얼굴의 그 남자는 주변의 모든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고 까무라치는 와중에도 고개한번 돌리지 않은 채 형틀에서 끔찍하게 죽어가는 유학자와 그 앞에 처참한 몰골로 묶여있는 전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가는 법이니......"

굳은 미소를 지은 코리온은 손에 끼고있던 주페 태자의 페리도트 반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목젖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치료받고 오니 행복하지? 내 마지막 선물이다."

콜 수용소에 세네피스를 직접 끌고온 베흔은 그가 갇힐 밀실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승리감을 느껴보려 했지만 마음 한곳이 찜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투르케스크 공은 상체의 피부를 거의 다 벗겨낼때까지 숨이 붙어있었지만 세네피스 이년은 자신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형틀에서 맥없이 늘어지며 숨을 멈추던 그 참혹한 순간까지도 한번도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베흔은 이년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정말로 승리한것이 맞나 하는 자괴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앞으로 이곳에서 고통을 느끼며 나머지 세월을 보낼 이년이 빨리 죽지 않게 하려면 치료는 해주고 들여보내는것이 낫다 싶었다. 그다지 건강하지도 못한 이년이 고문 후유증으로 며칠만에 죽어버리면 그로서도 이만저만 허탈한 일이 아닐 터였다. 뭐 그게 아니어도 문도 없는 벽 속에서 이년이 버둥거려 봤자 삼십년 사십년 살아남을 턱도 없겠지만.

얼굴에 화상패치를 붙인 채 골절된 팔다리에 프레임을 한 전 황후 세네피스는 건장한 간수의 등에 업혀와서는 이 어두컴컴한 옛 술창고 안에 앉혀졌다. 세네피스의 여전히 번득이는 눈동자가 구멍 옆에 서 있던 자신을 다시 노려보는 모습에 베흔은 다시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저년의 눈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베흔은 저년의 '절망스런 눈'을 한번이라도 꼭 보고싶었다.

수하들을 뒤로 물린 베흔이 자신에게 바싹 다가오자 그를 다시한번 노려본 세네피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 존재는 네놈에게 평생 짐이 될거다. 사람들은 계속 널 비난하겠지."

"아니."

베흔이 짧게 대답했다.

"넌 곧 잊혀질거야. 너혼자 이 안에서 영광스럽던 옛날이나 그리며 살아야겠지?"

"그렇게 될까,"

세네피스가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베흔은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 망할 년은 도무지 굴복할줄을 몰랐다. 하지만 베흔에게는 이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 숨겨놓았던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네년의 딸은 내가 잘 데리고 있어."

베흔의 회심의 한마디에 살기로 번득이던 세네피스의 눈이 갑자기 커지고 있었다. 그는 베흔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소릴 하는거냐? 이 망할 녀석,"

"유전자 은행에서 없어졌던 난자로 만들어진 네 딸 말이야."

베흔은 그제서야 제대로된 승리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네피스의 긴 눈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매섭던 기세가 사라져버린 그의 눈은 처음으로 '절망'을 보이고 있었다. 베흔이 그런 세네피스를 놀리듯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서른 여섯 살이야. 이름은 카렐이고. 너하고 신통할 정도로 닮았어. 네 그 해괴망측한 눈깔까지 말이야. 아참, 키는 꽤 크군. 나도 인정하지만 제법 미인이야. 괴물같이 살아서 그렇지."

충격을 받은 세네피스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을 따름이었다.

"그녀석 지가 장태자라는 것도 모르고 살고있지. 바보같은 것. 매일 두들겨맞고, 가끔씩은 칼에도 찔리고, 불에도 지지고......네가 5일 동안 당했던 고문이 그년한테는 26년동안 일상이었지. 앞으로도 그럴테고......아니, 안그럴지도 모르겠군. 오늘 돌아가는 길에 그년도 죽여버릴까 생각중이거든.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네가 골라주겠어? 때려죽일까? 아니면 지 외할아버지처럼 생껍질 벗겨서? 아니면 불에 태워서?"

세네피스는 더러운 흙벽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을 계속 헐떡거리고 있었다. 베흔은 그의 멱살을 확 움켜쥐고는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미안하지만 너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후훗......하지만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피는 못속인다고 유학자 어미 앞에서 '논어'까지 읊어대더군. 난 또 가슴이 철렁 했지 뭐야. 그날 네년이 그 꼬마녀석 더럽다고 짓밟는 거 구경하다가 완전히 배꼽빠지는줄 알았어."

그제서야 '옛 일'을 떠올린 세네피스가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베흔이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붉게 충혈된 세네피스의 눈에는 어느새 약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바로 베흔이 바라마지않던 그 통쾌한 순간이었다.

"그애를......죽이지 마.....제발....."

"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세네피스가 아무 말도 못한 채 흐느끼는 모습에 베흔의 가슴이 드디어 승리감으로 벅차올랐다. 그는 세네피스를 벽에 그대로 동댕이치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벽 막아!"

베흔의 명령에 간수들이 달려들어 벽돌로 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막혀가는 벽 안에서 세네피스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때 황후까지 내며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카파키 가는 이제 제국 역사상 최초로 멸문의 화를 당한 상급귀족가로 남게 되었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GOE병영에 도착한 베흔은 즉시 카렐의 토굴로 향했다. 카파키 가를 상대해 싸우느라 꽤 오랫동안 이녀석을 직접 찾아본적이 없었다. 제파 녀석을 시켜 오늘은 하루 종일 죽도록 두들겨 패 놓으라고 지시를 내려놓았으니 아마도 굴 안에서 초죽음이 되어 뻗어있을 것이 확실했다.

굴 앞에 선 베흔은 안에서 풍겨나오는 짙은 피냄새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입구의 엉터리 나무 발을 거칠게 걷고 들어간 베흔은 짐작대로 털가죽 침상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엎드린 채 헐떡거리고 있는 카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베흔의 출현에도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베흔은 카렐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모릅니다."

말을 하는 카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베흔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고는 카렐의 뒷덜미에 가져갔다. 카렐은 워낙 일상적인 행동인지라 별로 놀라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베흔에게는 일상적인 협박이 절대 아니었다. 그에겐 이 망할 씨까지도 제대로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순간 욱 하고 피를 토한 카렐이 입을 움켜쥐었다. 그의 큰 손 사이로 붉은 피와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을 가린 그의 손은 얼굴을 모두 가리고도 한참 넘을 정도로 컸다. 그의 목덜미에 댄 칼을 내리찍으려던 베흔은 순간적으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검을 쥐고있는, 역시 무지막지하게 큰 자신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젠장,"

베흔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 어미처럼 두고두고 괴롭히는 게 나아.'

한참을 머뭇거리던 베흔은 단검을 다시 칼집에 꽂아넣었다. 심하게 매질을 당한 카렐은 많이 괴로운지 연신 몸을 비틀고 있었다. 온몸의 살갗과 근육이 찢어져 속살이 보기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편하게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건 녀석을 더 행복하게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흔은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카렐의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믿었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카파키 가도, 앞으로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 발칙한 세력도 앞으로 절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26년 전, 카렐을 끌고가는 자신을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던 자이센 가의 어린 소년의 모습 따위는 이제 지워져버린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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