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29화 (129/1,132)

< -- 129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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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3번 행성의 서부 파견군 사령부에 도착해 쉬고있던 베흔은 4번 행성의 지부로부터 라호르 시의 분위기가 심상치않다는 급보를 접하고는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카렐 녀석과 관계있는 것 같나?"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5천여명 이상의 병력이 도시의 출입을 강력히 통제하고 샅샅히 수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설에 플레렌 가 사람중의 하나가 칼에 찔렸다는 정보도 있습니다만 아직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망할녀석, 숨으려면 제대로 숨을것이지."

베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를 악물었다. 순간 베흔은 함께있는 네페티 부인보다 카렐을 먼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미운정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도 하지만 그 혐오스러운 녀석은 그의 머릿속에 그토록 굳게 강박관념으로 남아있었다.

"두번째 급보는,"

베흔은 눈을 조금 치켜떴다. 서부 파견군 사령관은 4번 행성의 지부에서 들어온 다음번 서류를 내려놓았다.

"레곤 대공주저하의 행방이 밝혀졌습니다."

"엉?"

급히 서류를 받아든 베흔은 얼마 되지도않는 내용을 꽤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재밌군."

베흔이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어떡할까.....한번 장난 좀 쳐 볼까?"

웃음짓던 베흔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네페티 부인이 카렐과 함께있다는 골아픈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잠시 궁싯거리던 그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져보니 나쁜 것만도 아닌걸. 잘하면 부인을 되찾겠어. 이봐, 황궁에 연락해서 쿠베 여기로 오라고 해. 그리고 파예드 아카데미에 리쿠 학장 연결 좀 해주겠나?"

파견군 사령관을 내보낸 베흔은 그 원수같은 카렐 녀석의 모습을 또한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그 녀석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또하나의 치욕을 한겨준 그의 분신같은 녀석을 생각하고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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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 황후의 체포소식을 들은 베흔은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음을 잘 알고있었다. 황후가 그동안 쥐고 있던 '자신에 대한 비수'도 황후 스스로가 없는 한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던 베흔은 '문제의 자료'들이 혹시나 동부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부 최고제후 샤자한 공에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추궁을 가했지만 샤자한 공은 황후로부터 '모종의 자료' 따위는 절대 받은 바가 없다며 강하게 이를 부인하고 있었다. 별다른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민감한 정세에 괜히 동부의 심기를 거슬러 득될것이 없다고 판단한 베흔은 그들을 추궁하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말았다.

세네피스 황후는 어쨌든 근위대에 체포되었지만 종장인 투르케스크 카파키와 그 장녀인 오르마즈가 이끄는 10만에 달하는 카파키 가 제후군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배신을 했고, 황후까지 체포된 이상 그들에게는 더이상 도움을 기대할 곳이 없었다.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근위대와의 싸움에 끼어들 멍청한 제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파키 가가 조직한 '북부제후연합'은 황후의 체포와 함께 와해되어버렸고, 그간 황후를 통해 단물만을 뽑아먹어온 나머지 4개 북부 상급제후가---2차 혼란기 패전을 통해 이미 패전의 매운 댓가를 잘 알고있던---는 카파키 가에 순식간에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전권과 군 통수권을 위임받은 장녀 오르마즈 레즐린 카파키 경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존심을 접은 그는 베흔에게 세네피스 황후의 목숨을 보장할 것을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했지만 '눈엣가시같던' 카파키 가를 완전히 붕괴시킬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베흔이 이런 협상에 응할 턱이 없었다.

결국 가문만이라도 수호하기 위한 오르마즈의 절박한 최후제안---막내동생인 세네피스와 가문의 후계자인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겠으니 제발 전면전만은 피하자는---까지도 무참하게 거절한 베흔은 카파키 가를 멸문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총 15만이 넘는 최정예 근위대 정규군의 카파키 가에 대한 무시무시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베흔의 '멸문선언'은 뜻밖의 패착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10만여 카파키 가 제후군의 저항은 생각외로 강력했다. 멸문의 위기에 몰린 카파키 가는 직계는 물론이었고 방계들까지 무기를 잡을 수 있는 자라면 거의 전원이 지휘관으로 직접 참전해 그 결사적인 항전을 이끌었고, '북부의 자존심'을 외치는 타 제후지역 시민들 상당수까지 민병대를 결성해 자진해 사령관 오르마즈 휘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북부 최고의, 아니 제국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던 오르마즈의 탁월한 게릴라전법과, 북부 전체를 신출귀몰하는 철저한 시간끌기 작전은 3달만에 원정군인 근위대에 3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양산해내고 말았다.

전황이 생각외로 지지부진해지면서 주변 상황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카파키 가에게서 일찌감치 등돌렸던 북부의 나머지 제후들도 준동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옛 우방인 동부쪽의 정세도 심상치않았다.

베흔은 오르마즈와 황후, 그리고 몇몇 핵심인물들을 죽이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렇게 시작한 전쟁에서 근위대가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다면 북부가 다시 결집할 건 불을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베흔으로서는 총력을 투입해서라도 사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면 빨리 전쟁을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베흔이 가장 아끼던 만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부대와, 황제의 부계인 남부에서 파견한 지원군 10만여까지도 투입되면서 일거에 돌변한 전황은 북부 수도인 코윈 초입의 작은 행성에서 벌어진, '하임달의 결전'으로 후세에 알려지게 된 큰 전투에서 판가름나고 말았다.

카파키 가 제후군은 오르마즈 경을 총사령관으로 그가 직접 이끄는 만 오천의 기병대, 부장 바스토프 경이 이끄는 7만의 중보병과 2만의 민병대까지 총 10만여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에 대적하는 근위대는 베흔을 총사령관으로 조페가 지휘하는 13만의 근위대 엘리트 보병, 제파와 롭이 이끄는 만 천여명의 가디언부대와 황제의 부계인 남부에서 파견한 10만의 '전쟁기계' 중장보병까지 무려 25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근위대 보병부대와의 정예도의 차이는 접어두고라도 중급 가디언 1명을 기병 3기 정도의 전력으로 치는 용병술의 상식상, 오르마즈 경은 자신이 처해있는 전력의 열세를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대규모의 전면전은 그로서는 정말로 피하고싶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이 '회전'에 결국 나선 건 동부 최고제후 샤자한 공이 약속한 5만의 동부기병 지원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부가 약속했던 5만 기병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그들을 믿고 기꺼이 전쟁터에 나온 카파키 가의 10만군은 이제 더이상 물러날곳도 잃은 채 적과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4개월된 아기를 태중에 품고있던 오르마즈는 아기를 낙태시켜 '최후의 제물'로 가문의 사당에 바치고 직접 기병대의 선봉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령관의 결연한 의지를 잘 아는 부하들 역시 '폭풍의 군대' 마지막 전사들로 역사에 남을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있었다.

검은 준마에 올라 선두에 서 있던 '검은 사신' 오르마즈의 손에는 일기투에서 가디언을 꺾고 빼앗은 바 있는 긴 창이 굳게 쥐여져 있었다. 그가 입고있는 검은색의 당당한 갑옷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그리도 총애했던 황실 중시조 샤미르 리쿠가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이런 사령관의 모습은 휘하의 기병대는 물론이고 상대방에게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투구를 쓰기 직전 그가 잠깐 보여준 침통한 표정은 얼핏 가문의 전성기인 듯 보여온 지난 90여년간의 세네피스 황후의 집권기동안 그가 겪어온 지독한 죄책감과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야심만만한 막내동생과 복수심에 미쳐있는 아버지가 손을 잡고 저지른 피빛 집권음모를 끝까지 반대했던 그는 이제 그때문에 돌아온 그 끔찍한 댓가를 대신 막아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고마워요. 마에두."

오르마즈가 자신의 옆에서 카파키 가의 검은색 현무 군기를 들고 당당히 말에 올라 있는 남편 마에두 트라티누스 경을 바라보며 억지스러우나마 미소를 지었다. 동부 2제후 트라티누스 가 종장의 남동생인 그는 지원군을 재촉하러 찾아갔던 고향 동부에서 '돌아가지 말라'며 붙잡던 누나와 형제들을 뿌리치고 이곳에 오르마즈와 함께 서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의 남편인 네포프 칼리 경은 군자금을 모아온다며 황제령의 집으로 돌아간 후 이미 연락을 끊어버린 상황이었다.

"미안해요,.....나같이 형편없는 배우자 만나 그동안 속만 썩게 해서."

남편의 손을 꼭 잡아준 오르마즈의 긴 속눈썹에 어느새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제국 제일의 영웅이었지만 가정사엔 무관심하고 겉돌기로 유명했던 오르마즈는 끝까지 자신을 지켜준 남편 앞에서 결국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어떤 길이든 함께갈겁니다."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인 마에두는 자신과 운명을 함께할 오르마즈와 가슴을 맞대고  이제 마지막이 될 키스를 나누었다. 오르마즈는 자꾸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급히 투구를 눌러썼다.

검은 투구를 쓰고 부하들을 향해 돌아선 그는 검고 육중한 창을 치켜들며 땅을 울릴듯한 큰 소리로 포효해보였다.

"너희 목숨은 모두 고향에 두고오지 않았더냐!"

오르마즈가 황무지 중앙을 꽉 채운 중군 보병대와 양쪽 계곡에 주둔한 기병대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가슴이 터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오르마즈가 창을 치켜들자 십여만의 북부 최후의 용사들이 이 황량한 벌판이 떠나가라 큰 함성을 올렸다.

"이 하임달의 흙이 우리의 따스한 수의가 되어줄 것이며, 우리의 깃발과도 같은 저 검은 하늘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줄 것이다! 우리의 시체를 북부 동포들이 거두어줄 것일진대 무엇을 더 걱정한다는 말인가!"

큰 소리를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한 오르마즈가 길게 도열해 선 병사들의 앞을 맹렬한 기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북부 군기를 치켜든 남편과 함께 부하들 앞을 거세게 내달리는 이 '검은 사신'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주선 근위대와 남부 병사들을 기세를 일거에 죽여버리기에 충분했다.

"건방진 놈,"

베흔이 얼굴을 찌푸렸다. 적 기병대의 면면을 본 베흔은 사실 조금 당혹해하고 있었다. 몇몇 지휘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병들은 전혀 갑주를 입고있지 않았다. 가디언들을 상대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갑주를 벗어놓은 그들은 빠른 속도와 순발력으로 승부하려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은 '시민'에 불과했고 가디언의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베흔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시간 끌 것 없다! 저 북부 반역자들에게 황상의 뜻을 죽음으로써 알려주자!"

압도적인 승리를 자신한 베흔은 중군 보병대와 양익의 가디언부대에 큰 소리로 공격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근위대 보병대와 남부 중장보병대가 앞장서 일제히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설적인 '하임달의 결전'이 개시되었다.

"기병돌격!"

우군 선두에 직접 선 오르마즈가 천여기의 근위기병들과 함께 기병대 선두에서 근위대 좌익의 롭이 이끄는 5천의 가디언부대를 향해 돌격해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입는 갑주는 물론이고 마갑까지도 모두 벗어던진 이들 기병들은 경기병을 능가하는 무서운 속도로 주로 단병기를 쥔 가디언들을 향해 일말의 머뭇거림없이 돌진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름모꼴의 정연한 대형을 이루고 5, 6열까지의 보병들의 창끝을 사방으로 무시무시하게 돋아낸 중군의 북부보병대 역시---이미 2차 혼란기 때 그 위력을 여실히 증명한 바 있는---마주선 근위대 엘리트보병대와 남부 중장보병대를 향해 각각의 지휘관의 구호에 맞춰 한치의 흐뜨러짐도 없이 육중하게 전진해들어갔다.

그리고 첫번째 충돌이 근위대 좌익, 롭의 가디언 부대에서부터 벌어졌다.

"맙소사! 적 우군 기병대 1만 2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롭의 첫번째 보고에 베흔이 기겁하고 있었다. 중군 보병대 후방에 임시 탑을 세워두고 전황을 살피던 베흔은 왼쪽의 바위계곡에서 끝도없이 쏟아져나오는 어마어마한 적 기병대들의 모습에 자기도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르마즈는 1만 5천의 기병을 균등하게 나누지 않고, 자신이 위치한 우측에 만 이천여기의 기병을 집결시켜놓은 상태였다.

오르마즈가 수세적인 전술로 나올줄로 생각했던 베흔은 그 뜻밖의 보고에 잠시 놀랐지만 사실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무려 5천의 가디언이면 1만 2천의 기병쯤은 충분히 버티어내줄 수 있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상식이었다. 그리고 양익 중 한쪽에 병력을 몰아놓는 정도는 그다지 창조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비교적 흔히 쓰이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쐐기꼴의 유난히 긴 예진을 이루어 돌격해오는 그들 기병대들은 그런 베흔의 믿음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며 견고한 방진을 이룬 5천의 가디언 진영을 순식간에 두토막내며 중앙을 파고들고 있었다. 총사령관 오르마즈 스스로가 앞장서 돌격해온 그들은 롭이 맡고있던 좌익의 가디언부대 오천을 순식간에 박살내면서 그들의 측면지원을 받던 10만의 남부 중장보병대까지 일시에 혼란사태에 빠뜨리고 말았다.

"저 미친놈들!"

북부 기병들의 전법을 눈앞에서 확인한 베흔이 자기도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5천의 가디언방진을 일거에 무너뜨린 오르마즈의 기병대 전법은 한마디로 '미친짓'에 가까왔다. 3명씩의 기병이 쐐기꼴로 바싹 붙어 공격해 선두의 1명이 '칼받이'로 죽어가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이 달려오던 속도를 이용해 한 명의 가디언을 협공하는---130년 후 그 조카인 카렐이 다시 이를 변형해 사용하게 될---이 황당한 전법은 죽음을 앞둔 카파키 가문 사람들 스스로가 주축이 된, 죽음을 작정한 이 완전히 미쳐버린 북부 기병대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약이 바싹 오른 베흔은 롭의 부대에 밀집해 대항할것을 명했지만 갑주도 입지않은 적들의 번개같은 돌격은 가디언들이 채 진형을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정규군 보병보다 헐거운 대형으로 주로 양손 단병기를 사용하는 가디언들의 약점을 얄미울정도로 정확히 집어낸 망할 오르마즈 녀석의 수작이었다.

좌측면을 엄호하던 가디언부대가 무너진 상태에서 보병대 좌익을 이룬 남부 중장보병대는 사선 돌격진형으로 거칠게 쳐오는 카파키 가 밀집 장창보병대와 측면을 기습해오는 북부 민병대에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완전히 진형이 박살나버린 좌군의 가디언들은 3명씩 짝을 지어 돌격해오는 기병들에 쫓겨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가디언 좌군은 절대 수습불가능이었다.

결국 베흔은 전투개시 후 단 30여분만에 눈물을 머금으며 남부보병대와 가디언 좌군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해보지못한 끔찍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머릿수가 2배 이상이니 일단 시간만이라도 충분히 끌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당황한 베흔은 그나마 건재한 우익의 가디언부대를 직접 맡아 마지막 저항선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근위대 좌군을 일시에 혼비백산을 만들어놓은 오르마즈의 기병대는 그런 베흔이 합류한 우익 가디언부대까지도 무서운 기세로 덮치고 있었다. 근위대 중군이 북부보병대를 먼저 무너뜨리느냐, 오르마즈의 기병대가 베흔의 가디언부대를 먼저 쓰러뜨리냐를 놓고 벌인 피말리는 시간의 대결이었다.

만 기가 넘는, 서로 죽겠다며 앞다투어 달려드는 광기어린 기병들을 상대하면서 가디언들중에서도 그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한, 한마디로 기가막힌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베흔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가디언으로서는 변칙에 가까운 밀집대형을 짜고 공격을 포기한 채 견고하게 버텨 최소한 돌파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보병대에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고 이것이 전투 전체의 승패를 갈라놓는 분수령이 되었다.

오르마즈에게 애초 약속되었던 5만의 동부기병이 정말로 있었다면 근위대와 남부제후군 모두 산산조각났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부 최고제후 샤자한 공에게 '오르마즈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헛소문을 흘려 배신하도록 만든 베흔의 공작의 승리이기도 했다.

결국 근위대 우군의 가디언들과 근위대 정규군에 제압당한 북부 민병대가 제일먼저 무너졌고 양익을 잃은 적 밀집 장창보병을 맹공한 근위대 보병대는 5만의 병력을, 남부 중장보병대는 총 병력의 절반이 넘는 8만을 잃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치르고서야 그 유명한 '폭풍의 군대' 장창보병대의 마지막 전사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 1열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거의 전열을 이탈하지 않았고, 전열이 무너져 혼비백산 달아나는 적들을 몰아붙이는 그 쾌감도 적에게 선사해주지 않았다.

전설적인 북부보병대는 그들은 그렇게 완전히 전멸했다.

이제 남은 건 그 지독한 기병들이었다. 북부보병들을 결국 무너뜨린 근위대 보병대는 그때까지도 가디언들과 힘싸움중이던 오르마즈의 기병대를 향해 노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령관 오르마즈의 기병대는 5천여에 달하는 가디언을 쓰러뜨리는,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과를 이루었지만 끝내 엄청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수는 없었다.

만 오천의 기병도, 그의 곁을 지키던 천여기의 근위기병들도, 그리고 끝까지 함께 옆을 달리던 남편 마에두까지도 차례대로 모두 쓰러진 후까지 오르마즈는 사방을 둘러싸고 창을 내지르는 근위대 보병들을 상대로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이 전투에서만 혼자 10명이 넘는 가디언을 쓰러뜨린 그였지만 사방을 에워싸고 창을 내질러오는 근위대 보병들을 모두 막아낼수는 없었다. 적 사령관 오르마즈에 걸린 계급상승이라는 어마어마한 먹이와, 5천만 골드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은 이제 혼자 남은 그를 향해 끝도없이 몰려드는 굶주린 근위대 보병들의 이성과 공포를 앗아가버리고 있었다.

"이익,"

창 한 개가 오르마즈의 겨드랑이를 찌르면서 그의 운명은 결정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이상 창을 휘두를 수 없게 된 오르마즈를 향해 수십의 창날이 일제히 그와 그의 애마 '절영'을 향해 밀고들어왔고, 그 중 한 개가 말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애마 '절영'과 함께 오르마즈는 이미 자신이 쓰러뜨린 수십의 근위대 병사들의 시체 위로 처참하게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이 망할 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던 오르마즈에게 천천히 다가온 베흔이 떨리는 목소리로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사이트가 깨지고 비버가 떨어져나간 오르마즈의 투구 사이로 허탈하기까지 한 미소를 품고있는 그의 얼굴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할 만큼 했으니......후회는 없군......"

사방에 흩어진 휘하 기병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져있는 남편의 시체를 돌아보며 오르마즈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오르마즈를 내려다보며 베흔이 이를 갈고 있었다.

베흔은 지금 자신의 승전이 누군가에게 '승전'이라고 감히 내놓지도 못할 치욕스러운 것임을 잘 알고있었다. 7만의 북부 보병대를 꺾기 위해 지원군까지 무려 보병 13만이 전사한 건 넘어가더라도, 무적이라 여겼던 근위대 가디언부대 전력의 절반인 5천여명이 단 한번의 전투에서, 그것도 '시민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은 두고두고 근위대의 최악의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 확실했다. 어마어마한 장기간에 걸쳐 육성되는 가디언은 보병이나 기병들처럼 단기간에 충원이 가능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베흔은 앞으로 최소한 수십년간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시달리게 될 근위대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아찔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흙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있는 이 용맹했던 적을 노려보며 베흔은 또한번 이를 빠드득 갈았다. 보병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적 사령관의 머리에서 투구를 벗겨냈다. 베흔이 그리도 혐오하던 회색 그레이오팔 눈동자와, 다갈색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도 이젠 끝이야. 제1 개국공신님."

베흔이 마지막 자존심을 추스리려는 듯 오르마즈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오르마즈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조금은 멍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망할 녀석때문에 그간 명성이든, 명예이든 모두 '두번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해온 베흔이었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이미 깨져버린 노란빛 스코프를 낀 채 베흔을 흐릿하게 올려보던 오르마즈 경은 그 회색빛 시선을 고향 코윈이 있는 먼 하늘을 향해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그레이오팔 눈빛은 유난히 많은 빛깔의 무지개빛 톤이 어우러져 반짝이고 있었다.

보병들이 그를 포박하기 위해 들것과 수갑을 가져오고 있었다. 베흔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들을 가로막았다. 쓰러져있는 오르마즈를 매섭게 노려보던 그는 핏자국이 아직 생생한 자신의 플람베르쥬를 높이 치켜들었다.

"고맙군......옛 동지......"

자신의 목을 단번에 베어주려는 것으로 생각한 오르마즈가 웃음까지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한때나마 같은 길을 걸었던 그의 옛 모습을 떠올린 베흔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베흔의 갈등은 그의 격노 속에 얼마못가 파묻혀버리고 있었다.

"내가 네놈에게 쉽게 죽는 자비를 베풀 것이라 생각하나?"

베흔의 쌀쌀맞은 대답에 오르마즈 경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칼을 치켜든 베흔은 이미 쓰러져있는 적의 허벅지를 그 우둘두둘한 플람베르쥬로 거칠게 내리찍었다.

“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적의 몸에서 다시 칼을 뽑아든 베흔은 그의 다른 허벅지, 팔과 손발까지 모두를 돌아가며 당장 죽지않을 곳만 골라 마구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사지가 거의 산산조각날 정도로 난도질당한 적이 칼에 찔린 쇼크가 아닌, 과다출혈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진 적 지휘관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던 제파나 조페조차도 그 뜻밖의 잔혹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대장의 행동에 너무도 놀라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근위대와 베흔에게 최악의 치욕스러운 승전을 선사한 카파키 가의 용맹한 자손은 온몸을 산산조각낸 상처들로 한발한발 파고들어오는 끔찍한 죽음을 느끼며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기를, 이 마지막 항전이 곧 몰락할 가문이 되살아날 작은 씨앗이 되기를 기원할 따름이었다.

황량한 전장에 난도질당한 채 버려진 이 전사는 그시간 낯선 동부 어딘가에 머무를 자이센 가 출신의 한 이름없는 젊은이가 자신과의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은 근위대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세력가로 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125년 후, 그 젊은이가 카파키 가의 피를 받은, 자신과 너무나 비슷한 전사의 가장 큰 동반자가 되는 광경을 결국 살아서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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