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23화 (123/1,132)

< -- 123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

.

.

감겨있던 카렐의 회색 눈동자가 조금 열렸다. 침대맡에 서 있던 네페티 부인이 아직 잠이 덜 깬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피곤했나봐. 낮잠을 이렇게 깊이 자고."

"피를 많이 흘리면 원래 잠이 많아지죠."

가볍게 웃어보인 카렐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몸은 좀 어떤데?"

"그냥저냥 참을 만 합니다."

카렐은 아직 붕대가 단단히 감겨있는 왼팔을 더듬으며 끄응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부인이 그의 옆을 파고들어오며 말했다.

"사람들 다 점심 먹었어. 네껀 저기 놔뒀어."

부인이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뚜껑덮인 큰 접시를 가리켰다.

"가져다줄까?"

"일어나서 먹죠."

큰 기지개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렐은 굳어진 몸을 좌우로 비틀어보며 탁자에 다가갔다. 접시에 들어있는 간과 염통조각은 이미 먹기좋은 크기로 잘려있었다. 부인은 잘 닦아 품에 품고있던 큰 사과 한 개도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말이 좀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카렐이 식사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던 부인이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근 며칠동안이 내가 태어난 이래로 제일 행복했어."

부인의 말뜻을 이해한 카렐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그의 팔짱을 끼며 바싹 붙어앉았다.

"항상 네가 내 곁을 지켜주고.....살펴주고......걱정해주고......앞으로도 그럴거지?"

"물론이죠."

카렐은 씽긋 웃으며 서부 여인 특유의 움푹 패인 눈동자와 짙은 다크서클이 남아있는 부인의 파란빛 아름다운 눈매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때맞춰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베입니다."

카렐의 명을 받고 옛 동업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우베는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카렐의 앞에 꿇어앉았다. 카렐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먼저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녀석들도 행성 에너지장벽 문제에 관해서는 대책이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곳 4번 행성은 식량자급이 안되는 곳입니다. 비상식량을 제외한 비축식량이 바닥나면서 이틀 전부터 수베르 행성계의 플레렌 가 영지로부터 식량을 들여오고 있다고 합니다."

"방식은?"

카렐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이틀에 한번씩 식량을 실은 콘테이너 화물선이 와서 포스트행성 궤도 바로 밖에 식량 콘테이너를 내려놓으면 이쪽 화물선이 가서 내용물을 확인하고 거둬들여옵니다."

"그러면, 쓰고난 콘테이너는?"

"오늘치 화물선부터는 궤도 밖에서 식량 콘테이너와 교환할겁니다. 아마도."

"경계가 꽤 삼엄하겠군."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그나마......나가는 건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하겠죠."

우베가 어깨를 으쓱 했다.

"출발지는?"

"남극의 헤게보스 터미널입니다."

손톱으로 탁자를 똑똑 두들기던 카렐이 우베에게 다시 물었다.

"콘테이너 규격하고 구조 아나?"

"높이 50척 정도쯤 되는 장방형 금속제 박스입니다. 내부는......3층 정도로 구획되어있겠지만 싣고온 화물 종류에 따라 아닌것도 있을겁니다."

"돌려보내는 콘테이너엔 뭐가 실리지?"

"들어오는 것하고 균형이 맞아야 하니까......압축 이산화탄소하고 수화된 슬러지 등등이 실리겠죠. 무게는 같겠지만 부피는 많이 줄어들어서 나갈겁니다."

"그럼 빈 콘테이너도 같이 나간다는 뜻인데......그 중 하나에 우리 셔틀을 끼워넣을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운송업자 중 한명을 연결시켜준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보는밖에요. 모레 나가는 화물이 있다고 했으니......"

고개를 끄덕인 카렐이 우베를 내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놓치면 끝장이다. 아마 3일 이내에 루쿠스탄 공격이 개시될 듯 한데 그보다 늦으면 대비할 여유가 없어."

3번 행성의 서부 제3제후 발 가 종가에 도착한 페로는 종장 사우드 사예브 발 부인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사우드 부인은 페로의 예상대로 4번 행성의 자신의 영지가 박살난 데 대해 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아니, 내심 플레렌 가가 자신들의 함정에 말려든 데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의 전형적인 서부인의 외모를 한 이 여자는 네페티 부인의 큰이모였고, 서부 제후들 중에서도 가장 모략과 음모에 능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제국의 40개 상급귀족가 종장들 중 페로를 제외하면 유일한 독신자이기도 했다. 물론 가문을 뒤이을 많은 후계자를 두어야 하는 종장으로서의 의무는 이미 이혼한 3명의 남편들과의 사이에 둔 3명의 장성한 자녀들을 통해 이미 이루어놓은 후였지만.

"수비병 중 70명 정도가 전사하고 40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90명은 달아났다고 들었소. 뭐, 4번 행성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겠지. 주민들도 400명 정도만 남기고 모두 빠져나갔다더군. 하지만 시내를 둘러보니 민간인 시체가 수백구 있는걸로 보아서 점령후에 조직적인 학살도 있었던 것 같고."

페로의 말에 사우드 부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페로는 그의 이런 표정변화가 죽은 병사나 민간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고 생각보다 너무 적게 죽었다는 데 대한 실망 때문임을 잘 알고있었다.

"플레렌 가가 더 강력한 응징을 하겠다고 했으니......"

"그러진 못할겁니다."

페로의 걱정에 사우드 부인이 딱 잘라 대답했다.

"서부인은 일체의식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지역하고는 틀리죠. 다른 지역 사람들 보기엔 서부인들이 호전적이고 매일 아웅다웅하는 듯 해 보이겠지만 우린 종교적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는 우리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릴 대대적으로 공격한다면 플레렌 가도 꽤나 난처한 입장에 처할 겁니다."

페로는 이런 부인의 여유만만함이 어딘지 맘에 들지 않았지만 대놓고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페로는 그들에겐 '외지인'이었고 협력관계라는 것도 결국은 필요에 의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사우드 부인이 페로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총리 각하의 영지는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경계를 꽤 강화했으니 함부로 범접치는 못할겁니다."

"인접한 푸스타트의 4제후 샤디 가가 플레렌 가에 꽤 친한데......"

"그렇긴 해도 우릴 공격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전력엔 못미치니....바보짓은 않겠죠."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도 페로 역시 이유없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영지에 돌아가는대로 정보망을 새로 정비해 제후군들 움직임을 제대로 살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페로에게 술잔을 내밀며 사우드 부인이 다시 말을 건넸다.

"총리각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간 가디언 카렐이라고 알고있던 그 사람이 정말로 장태자라면 저희 발 가도 지지를 미룰 아무런 이유가 없겠죠. 하지만......"

"하지만?"

페로가 약간은 긴장한 얼굴로 사우드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초기단계에서 저희 가문이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나 크겠군요. 그정도는 아시겠죠?"

"기득권은 항상 먼저 지지한자의 차지요."

페로는 사우드 부인이 내민 술잔을 받아들며 짐짓 냉랭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총리각하는 절반 동부 분이시고, 각하 배후를 동부제후들이 지키고 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노릇이죠. 설사 일이 모두 잘 풀린다해도 서부에서 혼자 변절자 노릇을 한 우리 발 가가 나중에라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죠?"

"그건 지금부터 발 가가 얼마나 기여를 많이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겠소?"

페로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저 종장의 번들거리는 매서운 시선을 넌즈시 무시해 버리며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페로의 빈 잔에 술을 다시 찰랑찰랑하게 채워주며 사우드 부인이 말을 이었다.

"국구 자리를 예약받으셨다고 그러셨죠?"

살짝 치켜뜬 페로의 긴 검은색 속눈썹이 순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페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 사우드 발 부인이 한 톤 낮춘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부인 자리는 아깝게도 비어있군요."

50.

"어머님이 나때문에 앓아누우셨다니 정말 큰일이야."

제네르와 나란히 앉아있던 카렐이 중얼거렸다. 이 불안한 날의 오후도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네페티 부인이 '어머니'라는 말에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강건하신 분도 못되시는데.....식음을 전폐하셨다니"

"전하에 대한 집착이 강하신 분입니다."

제네르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실수밖에 없겠지. 어느정도는 이해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테라스 쪽을 향해 걸었다. 제네르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황후폐하에 대해서는 각별이 유의하시는 것이 좋을겁니다."

"알고있네......차가운 피를 가지신 분이란 것도."

제네르가 흠칫 놀랐다. 카렐이 어머니인 세네피스 황후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표현한 건 처음이었다. 카렐은 그런 제네르의 눈빛을 읽은 듯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내 어머니이시니.....어쩌겠나."

갑자기 문이 홱 열리더니 우베가 호들갑을 떨며 뛰쳐들어왔다.

"얘기 끝났습니다! 모레 출발하는 화물선에 실릴 콘테이너 하역하는 놈인데 2500골드만 주면 콘테이너 안쪽에 셔틀 한대 들어갈만한 비밀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우리한테 2500골드가 있던가?"

카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돈관리'를 맡은 제네르를 바라보았다. 원래 우베가 관리하던 일행의 자금은 워낙 놀기좋아하는 우베 녀석의 성격 덕택에 어제부터 제네르의 주머니로 넘어가 있었다.

"오늘까지 숙박비 빼고나면 정확하게 2503골드 있습니다."

제네르가 카렐의 눈치를 있는대로 보며 대답했다.

"환장하겠군. 것봐. 내가 이런 비싼데 오지 말쟀잖나."

"3골드는 남지 않습니까."

난처해진 제네르가 자기 뺨을 어루만지며 그답지않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카렐이 이번엔 베네루스 쪽을 돌아보았다.

"셔틀 연료비는?"

"연료가 바닥나서 재충전하려면 300골드 필요합니다."

"젠장, 여기 안왔어도 어차피 부족했군."

난감해진 카렐이 머리를 싸쥐었다. 300골드면 엔간한 평민 노동자의 2, 3달 수입에 해당하는, 적지않은 돈이었다.

"여기......"

네페티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카렐에게 부인이 손목에 차고 있던 블루 다이아몬드 팔찌를 스스럼없이 끌러 내놓았다.

"이거......남부에서 5000골드 넘게 주고 산 거야. 이거 팔아서 돈 마련해."

"하지만 이건......부인이 제일 아끼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은 카렐이 우베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베, 지인들한테 돈 좀 꿀 수 있겠나?"

우베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곳에서 죄를 짓고 달아났던 전적이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이번에는 아예 이곳을 도망가겠다는 사람에게 돈을 꿔줄리가 만무했다.

네페티 부인이 머뭇거리는 카렐의 손에 자신의 팔찌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난 괜찮아. 이거 말고도 다른 거 많아. 나중에 네가 더 좋은 거 사줘."

++++++++++++++++++++++++++++++++++++++++++++++++++++++++++++++++++++++++++++++++++++++++++++

# 이 부분을 읽던 제 친구들이 의문을 제기한 경우가 있어 미리 적습니다.

Q. 서부인은 아랍인을 모델로 했다면서 왜 네페티 부인과 샤드니는 유럽인 같은 파란눈에 금발이냐?

A. 일단 셈 족으로 흔히 불리는 아랍인 중에도 유색 동공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아랍상인들을 ‘색목인’이라 불렀던 것이 그때문입니다. 다만 중세 투르크인들의 서진으로 인해 몽골리안 계통과 혼혈이 발생하면서 형질상 열성에 속하는 이 유채색눈동자의 빈도가 많이 줄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랍에서는 아직까지도 유채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 특히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마호멧의 에메랄드’라고 부를만큼 훌륭한 혈통의 상징으로 치고 있습니다. (선지자 마호멧이 녹색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 공통적으로 녹색이 포함된것도 그때문입니다.)

익숙치않은 한국인이 보면 외계인 같은 기분을 받을만큼 완전한 녹색입니다. 참고로 제 글에서는 베흔이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란색 눈동자 역시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채색 눈동자는 주로 아랍의 상류층에서만 볼 수 있으며, 대다수의 아랍인들은 검은눈에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발 역시 어렵지않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지중해를 면한 북아프리카나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에서는 꽤 흔합니다.

그리고 네페티 부인과 샤드니는 그 순수한 셈 족이 아니고 현 러시아쪽인 슬라브계열의 피도 조금 섞인 것으로 설정되어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둘은 ‘짤없는’ 서부인입니다. ^^

그다지 중요한 네타가 아니니 미리 밝히는 것이지만 네페티 부인과 샤드니는 혈통상 친남매관계입니다. 네페티 부인의 아버지인 바니샤드 아유브 플레렌 공이 막내아들 샤드니를 '모종의 이유'로 셋째동생 칼림 플레렌에게 입양보낸 것입니다. (꽤 나중에 나올 내용입니다. ^^)

두 사람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있습니다.

# 그리고 제 설정상에 제국은 성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국가입니다.

동성간 혼인은 거부감없이 인정되며, 근친혼 역시 상류층에서는 어느정도 선에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고대의 대다수 계급제 국가와 마찬가지로 상류층은 폐쇄적인 계급내 혼인으로 인해 근친혼이 빈번합니다. 제국내의 상급귀족은 고작 8천명에 불과한데다가 주로 비슷한 수준의 가문끼리 혼인을 맺기 때문에 상급귀족들은 이렇게저렇게 몇다리 따져보면 'X촌' 관계로 얽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지나치게 가까운 근친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사회 의식적인 거부감이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잡설이 조금 길군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