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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14화 (114/1,132)

< -- 114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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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젠 에너지장벽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경기가 나겠어."

시로에게 왼팔의 상처를 내보이며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많이 벌어졌습니다. 출혈이 심한데요."

"느긋하게 조심조심 뽑고있을 시간은 없었다구."

카렐이 단검자루를 입에 꽉 깨물었다. 누워있던 매트리스가 온통 붉게 물들 정도로 피가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이납을 돌보아주고 있던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신음소리에 다가왔다가 바닥에 고인 많은 피를 보고 놀라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이납은 어떻습니까?"

카렐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에게 물었다.

"괘, 괜찮은 것 같아......농담도 하고......"

"그럼 됐군요. 하지만 병원을 갈 수가 없으니.....휴. ㅤㅋㅞㄹ크에서 아예 의사를 데리고올걸 그랬나."

시로가 두꺼운 응급밴드로 피가 쏟아지는 카렐의 팔을 힘껏 동여맸다. 단검을 입에 문 카렐의 눈에서 눈물이 찔금 솟았다. 보다못한 네페티 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꼭 품어안아주었다. 카렐이 많은 피를 흘리는 모습을 처음으로 직접 본 부인의 표정이 놀랄만큼 창백해져 있었다.

조종석에서 베네루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글쎄, 별수없이 대도시로 가야겠군. 남극 부근에서 제일 크고 혼잡스런 도시 있으면 아무데나 가."

"남극이면 파예드 아카데미 부근입니다."

푸아킨 경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북극엔 플레렌 가 종가가 있어. 이바닥에서 어딜가나 매한가지지."

행성 지도를 살피던 베네루스가 이곳 남반구에서 가장 진한 빛을 띠고있는 한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라호르 시가 가장 번화한 곳이니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코리온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뒤에 읍하고 선 두겐 공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제후 세호 가와 3제후 발 가를 제외한 10제후까지 나머지 가문들이 모두 지지를 표시한 후였고, 세호 가는 그들의 특성상 지지도, 거부도 하지 않은 채 눈치만 살필 것이 뻔했으니 당장으로서는 별 걱정할바가 아니었다.

발 가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입장이겠지만 그쪽에는 네페티 부인이 얽혀있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나 발 가의 수장인 사우드 사예브 발 부인은 네페티 부인의 이모였고 권모술수에 능한 만만치않은 여자였다. 네페티 부인을 잡아내지 못한 이상, 이번에 메디스 시에서 벌어진 일을 그냥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모두 저의 부족한 탓입니다."

망설이던 두겐이 결국 입을 열었다. 2차 학란을 일으킨 후 코리온이 직접 주도한 '정치-철학적' 장악은 이미 거의 성공단계에 와 있었지만 두겐 자신의 손으로 처리되었어야 할 네페티 부인과 카렐, 베흔은 모두 어딘가에 살아있었다. 서부를 완전장악하려는 코리온의 계획 전체를 어긋내놓은 두겐으로서는 입이 열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루쿠스탄 행성계에 대한 공격준비는 어찌되어가고 있소?"

코리온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한숨 돌린 두겐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샤디 가 제후군 만 오천명이 푸스타트에 집결을 끝냈고 저희 플레렌 가 제후군 4군단 2만명이 내일 그들을 돕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그쪽은 종장 알리 경이, 저희 쪽은 제후군 최고의 명장인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이오니 염려 놓으셔도 될 것입니다."

"2개 가문 연합부대고, 플레렌 가가 숫자는 많으나 샤디 가 쪽은 종장이 지휘관이니 지휘권에 혼란이 있을수도 있겠군."

"으, 음......그, 그럴수도......"

코리온의 지적에 두겐이 머뭇거리며 잠시 눈치를 보았다.

"그대의 보좌관인 샤드니 경이 군문에 복귀하고 싶어했으니 이번 공격의 지휘관으로 삼게나."

"알겠습니다."

코리온의 지시에 두겐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 자이센 그자는?"

"지금 발 가와 루쿠스탄의 자기 영지를 오가고 있는 듯 합니다. 이기회에 녀석을 함께 없애버리면 앞으로의 행보가 많이 쉬워지리라 생각됩니다."

"만만한 녀석이 아닐세."

코리온이 두겐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코리온의 그 말에 두겐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언짢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지난번의 두 번의 실패로 코리온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꽤 금이 간 것이 확실했다. 페로가 대단한 놈이란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는 바로는 페로는 최소한 무장은 아니었다.

네페티 부인이 살아난 것이나, 메디스 시에서 부인을 잡아내지 못한 것은 운이 없어서 그랬다고 쳐도 대대적인 '전투'가 될 루쿠스탄 공략에서 아무리 가디언이라해도 그 40배나 되는 정예보병을 당해낼리는 없었다. 메디스 시 공격에서도 최소한 공격 자체는 실패가 아니었다.

어쨌든 두겐은 무능한 페데레스 사령관의 후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 있었다. 무어라 더 말하려는 두겐의 귀에 밖에서 울리는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코리온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뒤로 돌아섰다.

"무슨 일인가?"

"두겐 공께 페데레스 사령관의 급전이옵니다."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급전'이라는 말에 거의 노이로제증상을 보이던 두겐이 코리온의 눈치를 급히 살폈다.

"급전이라니?"

"총리대신 페로 슈트란 자이센 경이 방문을 청하옵니다."

두겐은 하마터면 윽 하고 소리를 낼 뻔 했다. 하지만 코리온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입가에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두겐이 다시 물었다.

"나? 아니면 학장님?"

"총리대신 자격으로 최고제후에 대한 일상적인 방문이라 합니다."

'그 유명한' 페로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두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코리온을 만날 계획이 없다는 것은 서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한 그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표현이었다. 또한 서부 제후 자격이 아닌 총리대신 자격으로 만나겠다는 것은 이제 갓 서부 최고제후가 된 두겐 자신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수작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겐은 코리온의 갈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꿈틀대고 있는 것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재밌어지는걸,"

코리온이 엷은 웃음을 지었다.

"녀석이 내가 아니고 자넬 만나고 싶어한다고? 그러니 더 만나고싶어지는걸. 아니면 날 만나고싶은데 그놈의 잘난 자존심때문에 자네 이름만 갖다붙인건가? 어쨌든 여길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듣던대로 정말로 간큰녀석이군."

"들어오라고.....할까요?"

두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못 오게 할 이유가 없겠지."

평소같은 근엄함으로 돌아간 코리온이 학장실 한구석의 화로에 있던 차주전자에서 차 한잔을 부어 그 향기에 코를 가져갔다.

차 향기에 취한 채 눈을 반 쯤 감고있는 학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잠시 넋놓고 바라보던 예킨터스 교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두번째?"

코리온이 찻잔을 입에 댄 채 예킨터스 교수를 향해 눈을 조금 흘겨떴다.

"근위대장 베흔이 북극의 지부로 돌아갔다는 첩보입니다."

"예상대로군."

"덮칠까요?"

두겐이 성급하게 입을 열자 코리온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근거로?"

코리온의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진 두겐 공이 조금 머뭇거렸다.

"어쨌든 녀석은 손님이니.....그냥 놔두게나. 오백이나 되는 부하들이 지키고 있을테니.....한 번 제대로 당해봤으니 덮친다고 쉽사리 잡혀주지도 않겠지."

"누님이 함께있을지 모릅니다."

"네페티 부인은 이제 별 가치가 없네. 이미 그 도시에선 달아났으니."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녀석이 이탈허가신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일단은 그냥 놔둬. 대신 페로 자이센 그자가 돌아갈 때 함께 풀어주게나."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코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학장실 밖으로 보이는 파란색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굳은살 하나 없는 그의 부드러운 손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렸다.

남부 제일의 미남으로 꼽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수려한 얼굴생김이나, 검은 무명포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그의 탄탄하고도 날씬한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 더 붙들어두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유학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문약해보이는 모습은 커녕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날카로움, 강인함까지도 겸비하고 있는, 누가보기에도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황당한 과거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아카데미의 여자 생도들, 아니 서부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을 뛰어넘어 신처럼 인식되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충실한 수하인 하심 예킨터스 교수조차도 하급교수시절 그를 그리도 흠모하던 여자 생도중의 하나였고 250살이 가까와지는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찻잔을 쥔 코리온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여러 수하들을 죽 둘러보았다. 싸움 따위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그였지만 이제 수십만의 대군이 그의 통제아래 놓여있었고 저 껍데기뿐인 최고제후 두겐 공을 뛰어넘어 서부 전체가 사실상 그의 손에 쥐여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역시 다른 세칭 권력가들처럼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서부의 아름다운 미녀들을 침실에 끌어들일 수도, 아니 침실에 드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었지만 여지껏 단 한번도 그런 추한 짓에 몸을 맡겨본일이 없었다. 아니, 스승이던 주페 태자를 만나 원리주의 유학자의 길을 택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여자를 가까이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6명의 부인들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코리온은 학장실 한구석의 책장을 열고는 그 한쪽에 놓여있던 주먹만한 작은 기계를 집어내렸다. 손때가 많이 탄 듯한,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이 기계는 영상을 간직하는, 구식 홀로그램 재생기였다. 떨리는 시선을 한 채 이 오래된 기계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코리온은 조심스럽게 그 작동스위치를 눌렀다.

"베흔새끼 덕택에 웬 호강이야."

우베가 키득거리며 호텔의 널찍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이곳 아켐 4번 행성 유일의 환락도시---물론 그래봤자 북부의 환락컴플렉스 앞에서는 비교할바도 아니겠지만---라호르에 도착한 일행은 이곳에 위치한 109층의 고급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카렐의 평소 생활태도대로라면 이런 비싼 호텔은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지만 안전을 위해서 한동안은 이편이 낫다는 제네르의 고집 덕택에 나머지 사람들까지 덕 좀 보게 된 셈이었다. 다행이라면 지난번에 베흔에게서 뜯어냈던 현금 덕에 식대 포함해 하루 숙박료가 엔간한 노동자 한달 수입인 100골드나 되는 이곳 스위트룸을 감당할 정도의 돈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침실이 4개니까......나하고 제네르 경, 자이납이 한방을 쓰고 수레드, 발리, 페나페 자네들이 한방을 쓰게나. 시로, 우베, 푸아킨 경, 베네루스가 한방을 쓰고......메인 침실은 네페티 부인께서 쓰십시오."

"아냐, 어떻게 나혼자 독방을 써......"

네페티 부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부인께서 편하게 주무셔야 다른 사람도 편하게 잡니다."

부인에게 웃음지어보인 카렐은 이곳 105층의 큰 창을 활짝 열었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저녁의 선선하고 쾌적한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제네르가 카렐의 왼팔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밴드 속으로 보이는 붕대에 얼룩져있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오다가 꿰맸으니 괜찮아지겠지. 며칠간 고생들 많았으니 오늘밤은 맘껏 놀고 즐겨들보게나. 대신 자정 전까지만 들어와."

테라스의 카우치에 앉아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고있는 유시프 장군을 발견한 카렐은 그의 옆에 나란히 자리잡고앉았다.

"처자식이 영 걱정입니다."

"그건 걱정 말게나. 여기 통제가 풀리는대로 처자식들도 황제령에 갈 수 있게 해 주겠네. 타르서스가 자이센 총리 영향권아래 있고......여기하고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거기쯤에 새로 정착하면 될거야. 페나페도 부인이 있다고 했으니 함께 가면 되겠지. 발리는?"

"그친구는 아직 총각입니다. 가족도 다른 제후지역에 있고......별 문제없을겁니다."

"어쩐지, 제네르 경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던걸. 임자있는 몸이니 헛물켜지 말라고 자네가 말 좀 해주게나."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을 건넨 카렐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입니까?"

유시프 장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큰일이네, 그녀석 홀딱 빠졌던데."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나타난 제네르의 모습에 유시프 장군이 무슨 죄라도 지은 양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유시프 장군이 자신의 눈을 피하며 허겁지겁 사라지는 모습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제네르가 카렐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잡고 앉았다.

"뭣때문에 저러죠?"

"모르겠는데,"

카렐이 말린 고깃조각을 질겅질겅 씹으며 건성 대답했다.

"네페티 부인이 전하 상처에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카렐이 들고있는 마른 고기를 함께 씹던 제네르가 그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입을 열었다.

"워낙 곱게만 지내신 분이시니 피를 보고 놀라셨을게야."

"단순히 피 때문만은 아니겠죠."

제네르가 사뭇 진지하게 입을 물었다.

"부인을......이제 어떡하실거죠?"

"일단 아들에게 보내드려야겠지."

카렐이 다분히 사무적으로 대꾸하자 제네르가 약간 능글맞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실거면 아까 베흔과 함께 보내시지 왜 모시고오셨습니까?"

헛점을 찔린 카렐이 쓴웃음을 짓자 제네르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부인을 잘 이용하시면 장기적으로 남부와 서부를 장악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겁니다. 세나우스 2세도 같은 목적으로 서부 최고제후를 남편으로 삼은적이 있었죠. 전하께서 부인을 거두시는 게 이래저래 이득입니다."

제네르다운 철저하게 계산적인 조언에 카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카렐은 멀리 아래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제네르가 항상 품에 품고다니는 수첩을 꺼내들며 말을 이었다.

"결혼 경험 때문에 황후 자격요건은 안되니.....아메스도 있고......둘째 지위인 황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인의 부모 모두 세습귀족이시니 자격은 충분하지요. 황비면 최고제후나 총리와 동격이니 부인의 격에도 적당하고."

카렐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미천한 신분의 솔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고 있음을 잘 아는 제네르가 어느새 시무룩해진 카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 헌법인 윰 포고령은 내용의 추가는 가능했지만 '개정'은 엄격하고 금하고 있었고 그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까지의 어떤 황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카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나우스 2세 시절에 서부제후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계급제 시행에 따른 후속조치로 보완된 '2차 추가령'은 제국의 모든 관직은 물론이고 황실의 은밀한 내명부조직까지도 모두 서열화하고 그 자격요건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내명부에서는 품계가 없는 황후, 총리와 동격인 1품의 황비, 부총리와 동격인 2품의 황빈 2명까지 모두 4명이 황제의 '공식적인' 배우자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즉위 후 이 4자리를 놓고 벌어질지도 모를 귀족가문간 과다한 경쟁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이 4명은 황제의 즉위 전에 모두 책봉이 완료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계급제가 원수죠,"

제네르가 손에 들고있던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카렐이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네는?"

"저요? 후훗, 생각해보니 저도 계급 덕을 본 사람중에 하나군요. 귀족이 아니었으면 남극성당에도 못들어갔을테니......"

"하핫, 남극성당이라.....좋지. 아마 역대 황족중에 나만큼 가방끈 짧은 사람도 없을걸?"

'무학'의 카렐이 낄낄대며 웃자 제네르 경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보자, 황족중에 머리가 제일 좋은 사람이라면......코리온 리쿠 학장하고 주페 태자하고 둘이 엎치락뒤치락 할걸요. 둘 다 지능지수 측정불능이라면서요? 후훗, 전하는요?"

"묻지 마. 그런거 재본 적 없어. 지적 열등감 불러일으키지 말라구."

카렐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을 피해버렸다.

제네르가 먼 사막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보면 참 재밌죠? S혈통이 황족이 된 건 천재가 많이 태어나서인데, 정작 그 혈통에서 나온 천재중에 아직 황제가 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첫번째 황족 천재였던 샤미르 리쿠도 그랬고.....그 뒤로도......어쨌든 선대 황제 세 분이 모두 학장처럼 그렇게 머리 자체가 특별나신 분들은 아니었지않습니까?"

"그런가?"

카렐은 '황족의 지능'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지 계속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제네르는 그런 카렐을 몰아붙이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전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전하를 보면 발현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하고.....발현자이긴 하지만 학장같이 거부감 들 정도로 지식에만 파고드는 스타일이 아니신건가요?"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다니까."

"아까 전하 팔에 '수혈금지'라는 문신 되어있는 것 봤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카렐은 아직까지 밴드로 단단히 동여매고 있는 자신의 팔꿈치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눈썰미좋은 유학자가 그새 그것까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카렐이 팔을 주물럭거리며 대답했다.

"어릴때 인조혈액 수혈받다가 거부반응으로 죽을 뻔 했거든. 파충류 피가 섞여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던데."

"같은 문신이 리쿠 학장 팔에도 새겨져있죠. 주페 태자저하한테도 있었구요."

흠칫 놀란 카렐이 제네르를 휙 돌아보았다. 한때 코리온과 주페 태자 밑에서 생도로 있었던 제네르는 멍 한 표정의 카렐을 올려보며 잠시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잘 알려져있지 않은 비밀인데.....그게 S혈통 발현자의 가장 큰 약점이랍니다."

"......"

"그래서 주페 태자저하도 틈날때마다 피를 뽑아두곤 하셨죠. 급할 때 당신이나 조카 코리온이 같이 쓸 수 있을거라구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시겠지만......전하와 리쿠 학장은 지금 세상에서 유일하게 피를 나누어 쓸 수 있는 진짜 '혈육'일 겁니다."

"그걸 즐거워해야하는건지, 아닌건지."

카렐이 또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상처입은 팔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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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트 6의 중심 내용들이 슬슬 시작되겠네요.

대강 따져보니 다음편쯤에서는 '약간' 놀랄 부분도 등장할 듯.....

그리고 저를 고심하게 했던 '문제의' 부분이 이번 주말쯤에 터질 것 같네요. 흠, 심난하군......

조아라에서 보따리 쌀 일만 안생기길.....^^;;;

(눈치빠른 분들은 어쩌면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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