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 회: Part 6.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 >
Part 6. A Mantis On The Bloody Rose (피빛 장미 위의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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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메디스의 지하도시에 도착한 베흔 일행은 뜨거운 사막공기를 벗어나 제법 선선한 지하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모두 살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시차 때문에 이곳은 이미 저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외부인의 모습에 발 가 소속의 경비병이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플레렌 가 영지가 사실상 '공포정치'에 가까운 상황에 접어들면서 행성 내에서 유일한 발 가 영지인 이곳으로 도망쳐오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이들도 한참 골머리를 썩고있던 차였다.
"신분확인하겠습니다."
베흔은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했다. 같은 서부제후 영지인 이곳에 들어오면서 신분확인까지 당하리라고는 그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경비병도 조금 이상함을 느꼈는지 짧은 창을 고쳐쥐며 다시 힘을 주어 물었다.
"신분증 없으십니까?"
누가보아도 살기가 등등한 5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마주한 경비병이 잔뜩 긴장의 끈을 잡아당기며 눈을 치켜떴다. 경비병의 눈짓을 받은 십여명의 초소내 동료 경비병과 분대장이 무기를 집어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베흔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깟 경비병 십여명 죽이는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문제를 일으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린 가디언들이요."
베흔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루토가 등급과 이름이 안보이게 주의하며 자신의 황금색 팔찌를 내보였다. 그 무서운 근위대 팔찌를 마주한 분대장이 벌벌 떨며 한 발 물러나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근위대분들을 몰라뵙고....."
"여관이 어디있지?"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시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외부손님들이 많아 싼 호텔엔 빈방이 없을텐데요. 지하 2층으로 가시면 조금 비싼데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십시오."
우베와 함께 도착한 카렐이 메디스 시 주기장측 경비초소에 앞에 다달은 건 베흔이 지나가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탈취한 셔틀을 통제구역 밖에 버려두고 속도가 빠른 아르다가 셔틀로 갈아탄 일행은 그곳까지 맹렬히 추격해온 제후군 수색셔틀을 어렵지않게 따돌리고 여기저기 인구밀집지 주변을 빙빙 돌아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네이든 경이시군요, 며칠 안보이시더니,"
방금전 베흔 때문에 한바탕 식은땀을 흘렸던 초소 경비병이 오랫만에 다시 만난 카렐에게 갑자기 친한 척을 해보였다. 워낙에 귀족이라고는 도통 드문 곳이다보니 귀족이라는, 그것도 황제령에서 왔다는 존재 자체가 이들에게 제대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카렐은 소문이라도 주워모을 겸 이곳을 '빈손으로' 지나가는 법이 결코 없었다. 오늘도 그 경비병의 눈은 얼마 정도를 건질까에 대한 생각인지 기분나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여느때처럼 카렐에게서 작은 금조각을 넘겨받은 경비병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휴, 사막 지질 연구하러 오셨다더니.....제대로 다녀오셨군요, 모래도 잔뜩 뒤집어쓰셨고.....옷도 망가지셨고.....뒷분들은......"
"내 연구동료들이라네."
카렐이 짐짓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3명의 지휘관들과 자이납이 경비병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금덩이에 기분이 한참 좋아진 경비병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어휴, 말도 마십쇼, 방금전에 황실 근위대 가디언이라면서 웬 덩치 5놈이 여자하고 같이 지나가던데 어찌나 살벌하게 생겼던지......이런 조용한 동네에 그런 괴물같은 놈들이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요. 꿈에 나올까 무섭네요."
카렐이 순간 멈칫 하고 있었다. 베흔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도망온 모양이었다. 유시프 장군도 많이 놀란 표정이었지만 애써 표정을 다잡고 있었다. 카렐이 그 경비병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자네 이런 얘기 어디 딴데다가 절대 하지 말게. 자네 황제령에 안가봐서 모르나본데, 그놈들은 자기들에 관해 떠드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칼로 쳐죽이는 놈들이야. 근위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그런 녀석들은 무조건 오냐오냐하고 없는 인간들처럼 대하는 게 상책이야."
"아, 아.....그렇군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경비병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대장님께도 말씀드려야겠네요,"
"그래야 할 걸세. 입조심이 상책이야. 정말 조심해야 돼."
카렐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등까지 다정하게 두들겨주자 그의 세심한 '배려'에 어느새 말려들어간 경비병이 겁에 질린 열굴로 연신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경비병과 헤어진 카렐은 잔뜩 경계하는 태세로 여관을 향해 걸었다. 재수가 엄청나게 없다면 지금 이순간 베흔과 다시 만날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주치면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어버릴수밖에 없는 이 지하 카타콤베 안에서 만남은 곧 싸움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관까지 베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자신의 방을 찾아간 카렐은 급히 문을 걸어잠궜다.
"전하! 돌아오셨군요!"
기다리던 제네르와 푸아킨 경, 시로가 무사히 돌아온 카렐에게 급히 절을 올렸다. 그들 하나하나를 껴안아준 카렐은 심하게 지친 듯 별 말도 없이 자신의 잠자리인 니치 위에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카렐을 따라온 서부제후군 지휘관들은 유학자의 상징인 무명포 차림으로 있던 제네르의 존재에 어지간히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무려 5개의 줄이 새겨진 직제학의 머플러를 들고 있던 제네르에게 자기도모르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더 놀란것은 이런 유학자인 제네르가 일개 가디언인 카렐에게 '전하'라는 극존칭까지 써가며 절을 올리고있다는 사실이었다.
제네르가 카렐과 함께 온 일행들을 돌아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네페티 부인께선 어디계십니까?"
"이 도시 어딘가에 있겠지."
"예?"
"지금 이순간부터 이 여관방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말게."
어리둥절해하는 그들에게 카렐이 이 황당한 상황을 설명하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제네르가 약간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기회일수도 있겠습니다. 전하와 시로가 놈들을 선제공격해 다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시로가 베흔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어주는 새 전하께서 나머지 네 녀석을 없애버리면......저희도 옆에서 돕겠습니다."
제네르의 계획에 시로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큰 도끼를 힘있게 움켜쥐어보였다.
"나도 그럴 생각이네."
긴장이 풀린 카렐이 옆구리가 많이 아픈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소금기가 엉기고 그을린 카렐의 얼굴은 그 며칠새 살이 쏙 빠져 약간 여위어보이기까지 했다.
카렐이 움푹 들어간 피곤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일단 놈들이 어디있는지부터 찾아야 하니까.....우리중에 녀석들한테 얼굴 안 드러난 사람이 누구 있지?"
모두를 한번씩 다 둘러본 푸아킨 경이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카렐이 얼굴을 찌푸렸다. 베흔을 먼저 찾아내 정확히 기습하지 못한다면 계획 전체가 어그러질수도 있었다. 방 안에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베네루스입니다."
셔틀 조종사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베가 갑자기 씨익 웃으며 카렐을 돌아보았다.
두겐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코리온은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지만 예상대로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두겐은 저 얼음같은 학장이 얼굴을 찌푸린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이 노한 것인지를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서부인들에게는 가히 신과 같은 존재인 저 학장은 그가 알기로는 여지껏 단 한번도 공개적으로는 '화'라는 것을 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두겐 공, 큰 실수를 하시었소."
코리온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두겐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제......"
"5일만 있으면 저 잔학무도한 자이센 가를 정벌하는 큰 대사가 있을 것인데.....집안단속 하나 제대로 못하시다니....."
"황공하옵니다."
겁에 질린 두겐이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대답했다.
"어쨌든 누님은 가문으로부터 주살되셨다 알려졌으니 사실상 이제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소인과 샤드니가 플레렌 가를 굳건히 장악하고 있사오니 설사 누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누님 때문에 서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네페티 부인때문에 이러는것이 아니요."
코리온이 책장을 넘기며 짐짓 건성 중얼거렸다.
"어쨌든 지나간일이니.......그 일은 일단은 잊도록 하겠소."
코리온의 낮은 한숨소리와 동시에 학장실 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무거운 위압감에 한숨을 내쉬던 두겐은 코리온이 넘기고 있는 책장의 내용을 아무생각없이 올려보고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코리온이 보고있던 책에는 경전에 쓰여있어야 할 고대어 대신 각종 그래프와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기호들이 가득 쓰여있었다. 그리고 표지에는 '기원 416년도 전반기 위상수학 관련 논문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학장이 이곳 나딤 도서관의 책 모두를 이미 암기하고 있다는 믿기지않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코리온이 보는 책은 항상 '새로나온 책들'이었고, 심지어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천박한 학문으로 치부하는 지리, 경세나 자연과학 등에 관련된 책들도 심심찮게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어쨌든 곰팡내나는 옛날 경전들만 붙들고 입씨름에나 열중하는 훈고 원리주의 학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코리온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사실 이 희한한 학장이 물리학박사와 화학박사, 의학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정도는 그 머리를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덧붙여서 상당한 운동신경과 체력, 자연과학지식이 필요한 1급 셔틀면허와 스페이스 항해사면허, 그리고 취미로 즐기는 승마에도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있는 사실이었다.
책을 보며 잠시 조용하던 코리온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반역도들과 함께있던 것이 검은옷입은 자라 하시었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누군지는 익히 알겠소이다."
코리온이 피익 웃음을 지었다.
"내 그자가 죽을 것이라 착각을 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소이다. 그 천박한 살인마 칼잡이가 아직 이곳에 살아있다니.....생각만해도 온몸에 구더기가 돋을 것 같소."
코리온이 갑자기 종이를 펼치더니 작은 붓으로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두겐 또한 이 학장이 글을 쓸 때는 침묵을 지켜야 함을 잘 알고있었다. 두겐 옆의 샤드니 역시 그의 주공처럼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평소의 그의 필치처럼 빠른 속도로 글을 써낸 코리온은 책상위에 작동되어 있던 행성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눈을 흘겨떴다. 평소처럼 반쯤 열린 그의 눈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말을 던졌다.
"발 가는 여전히 시큰둥하오?"
"예. 아직 별 움직임이 없사옵니다."
코리온이 다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기회주의 가문인데다 자신과 사이도 좋지 않은 2제후 세호 가문이야 어차피 기대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3제후 발 가가 이쪽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건 마치 코리온으로서는 목구멍에 걸린 큰 가시같이 잔뜩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35만에 달하는 원리주의 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서부제후들의 지원 정도면 충분히 근위대와 페로를 동시에 상대해낼 수 있을줄로 생각했던 그로서는 힘으로든 설득으로든 발 가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제 보낸 내 서한에도 아무 답변이 없고?"
"그러하옵니다. 듣자하니......"
"듣자하니?"
하심의 대답에 순간 조금 긴장한 코리온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페로 자이센 총리가 지금 발 가 종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훗,"
코리온이 갑자기 코웃음을 치기 시작했다. 발 가 종장 사우드 부인이 양쪽을 쥐고 한참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코리온의 눈가에 갑자기 살기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소인배는 소인배구려.....아무래도 그들에게 두겐 공이 최고제후로서의 권위를 한 번 보여주심이 어떨까 싶소,"
코리온의 선택이 결국 '설득'이 아닌 '힘'이 되었음을 깨달은 두겐 공이 지도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 행성의 유일한 발 가 영지, 메디스 시가 마치 오점처럼 그 적도 한구석에 붉은빛 점을 남겨두고 있었다.
"수비병 이백 정도에 불과한 도시니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거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두겐에게 코리온이 갑자기 손짓을 보냈다.
"예?"
"하지만 명심할 게 있소......발 가는 도리어 우리가 그곳을 공격해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니 어찌 말려들 수 있겠소."
어리둥절해하는 두겐에게 코리온이 방금 쓴 글을 내밀자 샤드니가 대신 나아가 그 글을 받아들었다. 코리온의 빛나는 눈동자가 샤드니의 부드러운 푸른 눈동자를 잠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샤드니가 다시한번 고개를 조아리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어보였다.
"사막에서 달아난 공의 사촌누이가 어쩌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소. 세작을 풀어 도시를 수색하고, 그 여자가 있으면 공격하시오. 서부인으로서 감히 '퍼더'에 의해 가문에서 주살되려 한 자를 보호한다면.....그정도 댓가는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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