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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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의 명령으로 시행된 '암살작전'은 최악의 실패로 그 끝을 맺고 있었다.
겨우 두 뼘 높이 조금 넘는 바위 틈새를 결사적으로 기어가며 카렐이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따라와! 여기만 빠져나가면 돼!"
카렐이 뒤를 따라오는 세 명의 부하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곳곳의 돌조각들에 긁힌 카렐의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지만 당장 뒤를 잡을듯이 따라오는 도적떼들의 고함소리에 도저히 멈출수는 없었다.
"살았으면 대답해!"
도저히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카렐은 부하들에게 다시 악을 썼다.
"예! 대장님 발이 보입니다!"
"저도 보입니다!"
"저.....전......으, 으악!
카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신통하게 잘 따라와준, 겨우 스물 아홉 살의 어린 신병 유리녀석이었다.
"발목을 잡혔습니다!"
"유리! 말 좀 해!"
카렐의 고함소리는 유난히 가는 유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가려지고 있었다. 그는 어린 청년의 처절한 외침을 머릿속에 그대로 새기며 계속 앞으로 향했다. 카렐로서도 유리를 구할 길은 없었다.
델루지 저택에 있는 네페티 부인에게 지원군 4천을 보내줄것을 요구한 지 이미 30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휘하의 파견군부대는 너무 멀었지만, 바로 인근에 델루지 가 제후군 5군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출동만 했다면 이미 두세번도 넘게 이곳을 덮쳤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10분 이내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던 부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제후군이 오는 기색 또한 없었다. 그 뒤로 몇번이나 통신을 시도했지만 어찌된일인지 부인은 카렐의 연락을 받지조차 않고 있었다. 부인마저 베흔 손에 당했다고 생각한 카렐은 이곳만 빠져나가면 앞뒤 볼것없이 그 망할 베흔의 목부터 비틀어버리고 나서 근위대고 나발이고 때쳐치고 멀리 개척지로 도망쳐버리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베흔이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어느정도 불길한 예상은 했었지만 그가 말했던 '모임'따위는 전혀 없었다. 대신 동굴 입구에 미리 매복중이던 3백여명의 도적들과, 어디가 어딘지도 구분못할 미로같은 동굴 구석구석에 매복하고 있던 2백여명의 폭도들이 카렐과, 이 사령관만 믿고 따라온 15명의 불쌍한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썩을! 다 나때문이야, 나때문이라구......"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며 카렐이 처절한 자책을 퍼붓고 있었다. 도적떼를 초반에 정면돌파하지 않은 건 부하들을 모두 살려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지원군이 온다는 그 희망 때문 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미처 손쓰지 못하는 새 병사들은 차례대로 죽어나갔고, 지원군 또한 오지 않았다. 이 모두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버린 카렐은 차라리 이 돌틈새에서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거의 패닉 상태까지 다달아 있었다.
"썅!"
돌에 긁힌 카렐의 눈언저리에서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도 앞쪽 어딘가에서 들어오고 있는 쌀쌀한 바깥공기는 일순간에 정신을 확 들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다왔어! 힘내!"
"놈들이 유리 시체에 걸려서 더이상 진행을 못하고있는 모양입니다!"
유리 바로 앞에 위치했던 부하 센드로의 목소리였다. 아이러니였다. 무식한 도적녀석들은 바싹 기어야 한 명이 겨우 통과가능한 이 돌틈에서 자신들이 잡아죽인 근위대원의 시체때문에 옴쭉달싹못하고 있었다.
"빨리 따라와! 여기 진동이 심상치않다!"
카렐의 옆에서 돌 하나가 주저앉고 있었다. 몸 한 부분이라도 그곳에 있었다면 아무리 강한 카렐이라도 산산조각났을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무른 지반으로 이루어진 이 크지않은 굴에서 수백의 사람들이 엉켜 싸우며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약한 바위들이 들썩이기 시작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다왔다! 밖이 보여!"
카렐이 뒤를 따라 기어오는 두 명의 부하들에게 힘을 주려는 듯 힘있게 말했다. 제일먼저 출구를 접한 카렐은 바닥에 등을 댄 채 그 구멍 밖으로 상체를 겨우 뽑아냈다. 지상에서 사람 키 정도 올라와 있는 절벽의 바위틈새였다.
"이, 이런!"
생각없이 위를 올려본 카렐이 거의 버둥거리며 구멍에 걸려있는 다리 한 쪽을 애써 뽑아냈다. 하지만 그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큰 바윗덩이 하나가 그의 명치 조금 위, 가슴을 정통으로 내리찍고는 턱마저도 깨부수고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바위의 엄청난 크기로만 보아서는 카렐의 허리가 뒤로 꺾여 부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엔간해서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카렐이 결국 거친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아윽,"
부서진 턱으로 피와 끈끈한 체액이 흘러내렸지만 카렐은 온몸을 발버둥쳐 구멍 밖으로 나머지 다리도 빼냈다.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카렐의 엉망이 된 몸이 흙바닥 위에 볼쌍사납게 나딩굴렀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카렐은 가슴에 가해지는 엄청난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의 코와 입을 가릴 것 없이 피가 정신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숨을 들이쉴때마다 가슴 속에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카렐은 구멍 밖으로 손를 내민 부하 네단에게 겨우 팔을 뻗었다.
"손.......잡아."
카렐이 부서진 턱으로 겨우 입을 열며 네단의 흙묻은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굴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몸이.....몸이 끼었습니다!"
아직 굴 속에 파묻혀있는 네단의 공포와 고통에 질린 얼굴이 카렐의 붉게 변한 눈동자에 반사되고 있었다. 네단의 뒤에 있던 센드로는 이미 구하기 틀려버린 것이 확실했다. 네단의 어깨와 몸통을 있는힘을 다해 붙든 카렐은 마지막 힘을 최대한 쥐어짜내 그의 몸을 거칠게 뽑아냈다. 으득거리며 다리뼈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퍼졌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엉?"
카렐이 굴에서 끄집어낸 네단의 뺨을 두들겼다. 한쪽 다리가 완전히 뒤로 돌아갈 정도로 심각한 골절이었지만 네단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 약간 멍 한 얼굴이었다.
"가, 감각이......"
네단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너져내리는 바윗덩어리의 무게에 목이나 척추가 부러져버린 것이 확실했다.
"됐어.......돌아......가자,"
카렐이 비틀거리며 네단을 어깨에 둘러멨다. 나머지 도적떼들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부서진 흉곽이 폐를 압박하는 듯 찢어지는 고통이 카렐의 가슴과 목을 압박해왔다. 카렐의 입으로 또다시 한덩어리의 피가 쏟아졌다. 그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진동은 지독한 통증으로 카렐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대장님......전.......그게......뭐더라......집이요, 아니, 센드로가......"
네단 또한 의식이 희미해지는지 의미없는 단어들을 한마디씩 늘어놓고 있었다.
"멀지 않다......조금만......참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 차를 이곳 사방 구석에 무려 6대나 대기시켜두었던 카렐은 자신이 '잘한 짓'이 결국 이것 하나 뿐임에 또한번 분통해하고 있었다. 차를 숨겨둔 곳에 겨우 도착한 그는 온몸이 마비되어버린 네단을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네단은 카렐의 부서진 턱과 찢어발겨진 앞가슴을 빛을 잃어가는 탁해진 눈동자를 굴리며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차를 출발시킨 카렐은 도저히 제대로 운전할 정도의 의식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카렐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제후군 5군단의 좌표만을 입력해놓고는 완전히 탈진해 운전석에 맥없이 드러눕고 말았다.
"제발.....한번만......안아주십시오,"
옆에 있던 네단이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카렐은 이 불쌍한 부하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소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카렐은 팔을 뻗어 죽어가는 네단을 한 번 꼭 껴안았다. 카렐의 턱과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네단의 흰 얼굴에 피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힘들어서.....쉬고싶습니다."
미소를 띠어보인 네단이 지친 듯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깊은 호흡을 내쉬며 닫혀버린 네단의 눈은 그 뒤로 영원히 열리지 않았다.
반 쯤 의식을 찾은 카렐이 눈을 떴을 때 병상 옆에는 부관 힐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렐은 입술을 놀리려 했지만 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정신 드셨으면 말씀 좀 해보십시오"
의사가 반쯤 열린 카렐의 눈을 뒤집어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대로 의식을 찾으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의식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희미한 상태일겁니다."
의사 말마따나 카렐은 구름 속에 파묻혀있기라도 한 듯 몸도 정신도 멍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카렐은 힐러를 향해 결사적으로 입술을 놀렸다. 물론 부서진 턱을 죄고있는 프레임 때문에 말을 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힐러 녀석이 버둥거리는 사령관의 모습에 그제야 눈치를 채고 카렐에게 바싹 귀를 가져갔다.
"말씀하십시오! 예?"
"네페티 부인은......무사하신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께 무슨 일 있습니까?"
이미 판단력이 흐려진 카렐은 힐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부인이 자신을 돕겠다고 나섰다면, 그리고 그것이 중간 어딘가에서 막혔다면 베흔이 개입되었음이 틀림없었다.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지원군이 오지 않았을 리가 절대 없었다. 카렐의 생각에 베흔은 그러도고 족히 남을 인간이었다.
카렐은 힐러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찢어질듯이 고통이 엄습하는 폐를 울려 쉰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당장......부인이 어찌되셨는지......알아보란 말이다.....부인께 내 안부도......"
"아, 알겠습니다."
힐러가 마지못해 델루지 가 쪽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카렐의 정신이 다시 아득해지고 있었지만 부인의 안위도 모른 채 이대로 의식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목에 걸고있던 비취목걸이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부인의 생존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이대로 죽어버려도 그로서는 안타까울 것이 없었다.
근위대 의사가 카렐의 목에 박은 파이프로 다시 죽은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애써 의식을 유지하려 자꾸 몸을 움직이는 카렐을 의사들과 의무병이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뜯어말리고 있었다.
"제발 움직이지 마십시오, 사령관님, 흉곽이 완전히 산산조각났었습니다. 접합이 아직 완전치않으니 제발 안정하십시오,"
델루지 가와 통화를 끝낸 힐러가 난감한 표정으로 카렐 앞에 돌아왔다. 의사와 무어라 귀엣말을 주고받은 힐러가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겨우 붙들고있던 카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어......기억이 나실지 모르지만 사령관님은 15시간 전에 제후군 초소 앞에서 발견되셨습니다. 초병의 멱살을 잡고 난동을 부리셔서.....제후군들이 겨우 붙들어서 이곳에 모셨습니다."
"그래서......부인은.....어찌됐다는 거야......"
답답해진 카렐이 힐러를 재촉하자 그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사령관님의 뇌에 문제가 생기신것이 아니신지......"
"뭐?"
카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부인께선 어젯밤 내내 베흔 대장님의 경호를 받으면서 델루지 저택에서 잘 주무셨답니다. 오늘 일과도 예정대로 아무 문제없이 모두 마치셨고.....기분도 종일 꽤 좋으셨다고 하고......지금은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베흔 대장님과 함께 극장에 가셨다고 합니다. 사령관님 안부를 궁금해하신 일은 없다고 합니다만......"
카렐이 갑자기 호흡을 멈춘 건 단순히 가슴에 가득 찬 죽은 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취목걸이를 단단히 쥐고있던 카렐의 손에서 마치 마비라도 온 듯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배신을 깨달은 카렐은 마지막까지 결사적으로 붙들고있던 의식을 스스로 놓아버리고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카렐은 다시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바이탈사인이 위험한 상태로 떨어지고 있다는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그의 머리 위에서 의사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안되겠다, 재수술해야겠어, 큰 병원으로 옮길테니까 의료셔틀 대기시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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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내일은 100회 돌파와 파트 5 완결 두가지 사건이 있는 날이 되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