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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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페티 부인은 카렐의 가슴에 엎드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부인의 반짝이는 금발머리가 카렐의 가슴을 덮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슴 위에서 잔다는 것이 불편할법도 싶었지만 카렐에 비하면 워낙에 체구가 작은 탓인지 부인은 그의 넓은 가슴위에서 얼굴을 자연스럽게 기댄 채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카렐의 심장박동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어 부인이 가장 좋아한다고 곧잘 말하곤 하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호흡을 한번씩 할 때마다 부인의 부드러운 젖가슴에서 카렐의 단단한 복부로 묘한 자극이 전해져왔다.
7년이라는 짧지않은 기간동안 함께해온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사실상의 부부 그 이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카렐이 보고서를 가지고 간 자리에서도, 오늘처럼 부인이 방문객 신분으로 근위대 병영을 찾은 때에도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못하고 단 몇분이라도 서로를 탐닉하곤 했다.
카렐은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부인의 손을 가볍게 붙들어 부드러운 여우털이 덮힌 담요 속에 가만히 밀어넣었다. 호화찬란한 델루지 저택과는 달리 그냥 병영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고작인 카렐의 관사는 이 조그맣고 약한 귀부인이 잠을 이루기에는 추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자신의 화려한 침실에서보다 소박하고 카렐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있는 이 사령관 관사에서 둘이 함께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부인이 몸을 조금 움츠리자 카렐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인의 알몸 위에 여우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워 주었다.
카렐도 이렇게 누군가와 옷을 벗고 함께 누워있다는 것은 부인이 처음이었다. 카렐에게 그리도 집착하던 실리페 황후도 그의 '징그러운' 몸은 엔간하면 불빛 아래서는 직접 보지 않으려 피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네페티 부인은 그런 황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부인은 잠이 깼는지 카렐에게서 풍기는 피비린내섞인 체취를 맡으며 몸을 조금 뒤척거렸다. 부인은 이런 카렐의 그대로의 모습과, 끔찍했던 과거까지도 모두 웃으며 들어넘겨준 '유일한'---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사람이었다.
"몇시야?"
부인이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카렐에게 물었다.
"12시입니다. 1시간정도 주무셨네요."
"일어나기 싫은데......"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가슴과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나이답지않은 떼를 쓰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이 카렐에게 정표로 선물한 비취목걸이에 코를 대고 카렐의 체취를 다시 느끼고 있었다.
"저택에서 점심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카렐이 부인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키득거리자 부인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카렐의 거친 침대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듯 내려섰다.
"하여간 짖ㅤㄱㅜㅊ은 거 하나는......"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으로 관사 밖으로 나선 둘에게 힐러가 다가와 전문 한 장을 건네주었다.
"사령관님, 근위대장님께서 오후에 오신다고 합니다."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카렐이 문득 네페티 부인을 돌아보았다. 근위대장인 베흔이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은 여지껏 단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베흔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것이 단 5일 전의 일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카렐은 속내를 애써 감추며 힐러에게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알았다."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던 네페티 부인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카렐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지......"
카렐이 부인에게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차를 가리켰다.
"일단 타시죠. 저택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차의 상석에 나란히 카렐과 앉은 네페티 부인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시선을 애써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이 입을 열었다.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시면 됩니다. 전......베흔이 있는 동안은 저택에 얼씬하지 않겠습니다."
카렐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부인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이 불안해하는 부인의 손등을 꼭 쥐어주며 굳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잘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하지만......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부인이 카렐의 어깨에 뺨을 부비며 마치 탄식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가 베흔의 힘을 억누를 수 있게 될때까지......"
말을 꺼내던 카렐 자신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이 남부 구석에 처박혀있는 자신이 도대체 언제 베흔을 뒤집어엎고 근위대를 장악할 수 있을런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네페티 부인이 아직 베흔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놓고있지 못하다는 것은 눈치빠른 카렐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는 '힘있는' 베흔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서오십시오,"
파견군 사령관 카렐의 인사를 받으며 전용 셔틀에서 내려선 베흔은 이곳을 방문한 여느때처럼 병영 밑으로 펼쳐진 근사한 호수의 풍광부터 죽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살고싶은 곳이란 말이야.......후훗, 나도 근위대장에 가디언만 아니라면 여기서 예쁜 마누라데리고 조용하게 양이나 키우면서 살고싶었을텐데......자네만 이런 좋은 곳에서 살게 하자니 영 배가 아픈걸."
베흔이 개를 데리고 양몰이를 하고 있는 황당한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린 카렐은 내심 비웃어주고싶어 미칠지경이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채 머리까지 조아리며 대꾸했다.
"이곳으로 발령내어주신 것을 무한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카렐의 말에는 묘한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베흔은 별 반응도 없이 회의실 쪽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카렐을 비롯한 파견군 사령부 간부들이 그런 베흔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요즘 칼솜씨는 많이 늘어나셨나? 내 하나뿐인 사랑스런 수제자 카렐?"
베흔이 회의실 상석에 털석 자리를 잡으며 카렐에게 제일먼저 질문을 던졌다. 평소 단 한번도 쓴 적이 없는 베흔의 거북살스럽고 역겨운 표현에 카렐의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지만 평소처럼 철저하게 사무적인 표정으로 베흔에게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일처리가 바빠 그냥 감각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이런이런,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등급없는 가디언'이 그러면 쓰나......아무래도 이 사령부 좋은곳에 처박혀서 실전을 못나가 그런가보군?"
"하지만 대군의 지휘경험과 전략전술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카렐은 철저하게 교과서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베흔이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던지며 평소 카렐이 앉아있던 회의실 상석의 콘트롤판넬을 작동시켰다.
"최근 1년간 실전횟수와 실적은?"
"노예폭동잔당 소탕작전 9회에 204명 사살했고 제후군과 공동으로 수행한 도적집단 소탕작전 58회에 1615명 사살 및 검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실적은 4제후지역 파견군가운데 제일 좋아. 제후들 단속도 완벽하고. 그건 인정하겠는데......도적검거실적이 좋다는게 꼭 좋은얘기는 아니라는 뜻을 알겠나? 예방이 우선이야, 예방."
카렐이 베흔 보라는듯이 드러나게 얼굴을 찡그렸다. 또 어거지로 한꼬투리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5일 전에 왔을때도 똑같은 주제로 한바탕 쏟아내고 갔었던지라 며칠만에 같은 말을 또 들으려니 속이 끓어오르는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잔소리를 이정도에서 접어버린 베흔은 갑자기 서류 몇 장을 꺼내놓았다.
"그런데......중앙본부쪽에 첩보가 좀 들어왔는데.....이쪽에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모레 6번 행성에서 남부쪽 도적떼의 실질적인 수괴놈이 부하들을 모아들이는 큰 자리를 갖는다는거야."
베흔이 내민 서류를 살펴본 카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토벌대를 보내 기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아냐,"
베흔이 카렐의 손에서 서류를 다시 빼앗아들며 심술ㅤㄱㅜㅊ게 쏘아붙였다.
"그쪽에 우리 요원이 들어가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이는 패거리들중에 두 패거리가 우리에게 투항의사를 밝혀왔어. 녀석들을 기습하지 말고.....자객을 보내서 여기 적힌 핵심인물 5명만 죽여. 그러면 나머지는 투항하기로 한 두 패거리가 해결할거다."
카렐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도적떼에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파견군이 주체가 되어 처리되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중앙본부에서 멋대로 작전계획까지 다 잡아놓고 파견군에 '통보'를 하는 셈이었으니 명백한 권한침해였다. 하지만 대놓고 싫은표정을 짓고있는 '막가는' 카렐과는 대조적으로 간부들은 차마 겉으로는 불쾌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히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베흔이 한 뭉치의 서류들을 카렐의 앞에 내던졌다.
"자네가 직접 가주었으면 좋겠군."
"제가......말씀입니까?"
명령을 받은 당사자인 카렐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잠시나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렐이 서류들을 받아들며 침착하게 말했다.
"저희 파견군엔 훈련받은 전문 암살수가 100명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기껏 도적집단 공격하는데 사령관인 제가 직접 간다면......"
"기껏 감각유지정도나 하고있다며? 실전은 언제 뛰어보려고?"
"하지만......"
"지금 항명하는건가?"
목소리를 갑자기 높인 베흔이 팔짱을 끼며 카렐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굳게 다문 카렐의 턱 밑으로 힘줄이 불끈 일어서고 있었다.
"물론 아닙니다."
"좋아, 혼자 처리하긴 힘들테니 정규군 15명만 데려가."
베흔이 내미는 작전계획서에 카렐이 다시 발끈 했다. 자신에게 일을 맡겨놓고서도 베흔은 구체적인 사항까지 모두 멋대로 결정해놓은 모양이었다.
"제가 직접 가는 작전에서 정규군은 도리어 걸림돌입니다. 아예 혼자가던지 차라리 가디언 서너명이....."
"오늘따라 왜이리 잔말이 많지? 앙?"
베흔이 얼굴을 붉히며 또다시 핏대를 올렸다. 카렐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조아릴수밖에 없었다.
서먹한 분위기의 회의가 끝나자 불쾌한 표정의 카렐이 서류들을 주섬주섬 긁어모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카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흔이 발을 탁자 위에 탁 올려놓으며 지나가는듯한 말로 중얼거렸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카렐은 짐짓 못들은 척 서류들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간부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가려던 카렐의 등뒤로 베흔의 다음번 말이 이어졌다.
"오늘은 델루지 가에서 머무르지 않을거야......나도 자존심은 있거든......"
"숙소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카렐의 태연자약한 표정을 바라본 베흔이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여자들은 왜그런지 타고난 연기술이 정말 뛰어나......너같이 말이야......하긴, 넌 따로 연기술까지 배웠지?"
베흔이 카렐의 떨리는 눈꼬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런데......내가 아는 한 여자는 별로 그러지를 못하더군......뭐, 워낙에 거짓말에 서툰 여자니까......200년이 넘게 알고지냈지만 그렇게 표정연기가 서툰 여자는 정말 처음봤어. 하기야, 그걸 몇년이나 지나서야 눈치챈 눈먼 남자도 한심하긴 매한가지지만."
카렐의 머릿속이 아찔 해 왔다. 지난번 왔을 때, 베흔이 이미 사실을 눈치챈 것이 확실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려 했지만 카렐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베흔의 무표정한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하지만.....한쪽이 조용히 포기하고 조용히 물러나주기만 한다면.....어차피 그런 사적인 문제는 당사자들만 조용히 입다물면 끝나는것 아니겠나? 솔직히 둘 다 그리 떳떳지는 못한 신세에 말이야."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바싹 들이민 베흔이 카렐에게 냉랭하게 말을 건넸다. 베흔이 무얼 말하려하는지는 말하나마나한 일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통 모르겠군요."
서류가방을 챙겨든 카렐은 씩씩거리고 있는 베흔을 회의실에 남겨둔 채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카렐는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떼며 터벅터벅 관사 쪽으로 걷고 있었다. 베흔이 자신에게 '조용히 떠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답지않은 행동이었지만 일이 커져봤자 베흔에게도 좋을 건 없었으니 그로서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터였다. 이른 저녁의 어둠 속을 혼자 걷던 카렐은 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잠시 떨려오는 숨을 가다듬었다.
'부인이.....위험할지 모르는데.....'
결국 올것이 왔음을 깨달았지만 카렐로서도 당장 뾰죽한 수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저 잔혹한 남자가 한눈을 판 네페티 부인을 저대로 용서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부인에게 알려야 하나......"
카렐이 나뭇가지를 꽉 움켜쥐었다. 남을 속이는 데 서툰 부인이 결국 눈치빠른 베흔에게 속내를 들켜버린 셈이었으니 그런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고 별다른 수가 날 리도 없었다. 어쩌면 겁에 질린 부인이 도리어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조금만 두고봐야겠어....."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컴컴해지고 있는 초저녁의 하늘을 올려보았다. 부인도 부인이었지만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눈앞이 막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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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구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제후군 셔틀의 조종사를 베어버린 베흔은 울부짖는 네페티 부인을 억지로 끌고 대기중이던 자신의 전용 헬리오스 셔틀로 갈아탔다.
"당장은 제가 야속하실테지만 앞날을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을 알게되실겁니다."
기쁜 표정의 베흔이 부인의 앞에 차가운 쥬스잔을 내밀며 그답지않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너덜너덜해지고 색이 바래버린 옷은 물론이고 동상이 다 낫지 않은 물크러진 손과 발갛게 익어버리고 거칠어진 얼굴까지, 3일새 망가져버린 부인의 몰골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살아돌아온 부인을 확인한 베흔에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하 가디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베흔은 울고있는 네페티 부인을 힘있게 품에 안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인은 그런 베흔의 포옹에도 아랑곳없이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카렐이......목숨을 걸고 날 구해줬어요....."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르죠."
베흔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런데......"
"부인을 정말로 구해드린 건 접니다. 어차피 그자리에 계셨어도 제후군에 잡혀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부인의 양 어깨를 꽉 붙든 베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마치 협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네페티 부인은 그런 베흔의 협박에도 아랑곳없이 웅크려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인은 헝겊으로 얼기설기 감싼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카렐이 동상을 막기위해 손수 정성스레 감아준 것이었다.
남부에서 카렐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던 베흔은 이 상황에서 부인을 달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때도 베흔는 '카렐이 무사하다' 는 말 한마디만을 해 준 채 부인에게 가는 일체의 정보를 차단해버리는 방법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부인의 저항을 미리 막아냈던 터였다.
소금기가 엉긴 부인의 거칠어진 얼굴 위로 눈물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카렐......"
"젠장할,"
베흔의 속에서 무언가가 욱 하고 치솟아올라왔지만 지금은 괜히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조용히 기다리면 시간이 모든것을 해결해줄 테니까.
"어디로 갈까요?"
루토가 조종석 쪽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울고있는 부인을 일단 내버려두고 조종석 쪽으로 다가온 베흔이 조종사에게 물었다.
"일단......플레렌 가에서 이곳 이탈 허가를 받을때까지는 잠깐 어디 피해있어야겠다. 지부는 감시받고 있을테니 위험하고......제후군 손이 안닿을만한 곳 어디 없겠나?"
"음......반대편 적도에......발 가 영지가 조금 있습니다. 발 가는 부인의 모계인데다가 아직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쪽이 나을 듯 합니다. 메디스라고 소도시가 하나 있군요."
지도를 살피던 루토가 냉큼 대답했다.
"좋아. 일단 그쪽으로 가서 상황을 지켜봐야겠다."
베흔의 명령에 그의 검은빛 헬리오스 셔틀이 메디스의 지하도시---제네르와 시로 일행이 지금 머무르고 있을---쪽을 향해 기수를 서쪽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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