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 회: Part 5. 흰 국화 한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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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십시오!"
유시프 장군의 목소리에 카렐이 전열을 공격하던 부하들쪽으로 달려갔다. 장교들이 쥔 시미터는 아예 공격거리도 닿지 못했고 각각 2명씩 총 4명이 길지않은 창을 들고 2명의 낙타병들을 맹렬히 위협하고 있었지만 위에서 내리지르는 창의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이쪽의 창은 낙타병을 상대할만한 긴 창이 아니고 민간인을 위협할 때 쓰는 것이 고작인 짧은 창에 불과했다. 그들은 병사들이 할룩스를 작동시키는 것만 가까스로 저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1명은 창에 찔려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물러나!"
카렐의 고함소리와 함께 유시프 장군이 낙타병 옆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낙타의 뒤쪽을 공격하는 줄 알고 낙타병이 반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창을 힘껏 휘둘렀지만 그의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그 병사는 조금 더 윗쪽을 바라보았어야 했다. 카렐의 칼은 그의 머리를 향해 공중에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낙타 머리보다도 더 높이 뛰어오른 카렐이 영문도 모르고 있는 낙타병의 머리를 순식간에 세로로 두동강내버렸다.
"저놈 막아!"
유시프 장군이 갑자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잠깐새 포위망을 빠져나간 마지막 낙타병 분대장이 네페티 부인이 숨어있는 바윗틈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적으로 마주한것만 아니라면 정말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의, 소름끼칠정도로 놀라운 녀석이었다.
"이, 이런!"
기겁을 하고 놀란 카렐이 앞서가는 낙타를 ㅤㅉㅗㅈ아 다리에 최대한의 힘을 가해 달려가기 시작했지만 녀석은 이미 부인이 있는 바위틈에 거의 다달아 있었다. 겁에 질린 네페티 부인이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는 급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엇!"
부인의 얼굴을 확인한 낙타병이 기겁을 하고 놀라 급히 낙타를 멈춰세웠다. 낙타의 큰 발굽에 완전히 밟힐뻔했던 네페티 부인이 호흡까지도 멎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최고.....제후님?"
그순간 뒤ㅤㅉㅗㅈ아온 카렐의 큰 손이 녀석의 손에 쥐여있던 낙타의 고삐를 나꿔채 무서운 힘으로 잡아당겼다. 힘에서 밀린 낙타가 그대로 바닥에 모래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낙타병도 그 충격에 공중을 한바퀴 빙 돌아 땅바닥에 나딩굴렀다. 하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직한 그 낙타병 분대장은 순간적인 낙법으로 바닥을 한바퀴 구르고는 자리에서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자인 듯 약간은 가는 갈라진 목소리가 캡 아래에 쓴 마스크 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낙타병은 네페티 부인의 얼굴과 카렐을 번갈아 쳐다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몸놀림을 보아 판단력뿐만이 아니고 순발력 또한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깟놈이 알 바 없다."
칼을 치켜들고 녀석을 덮치려는 카렐의 팔을 네페티 부인이 허둥지둥 붙들었다.
"나, 난 최고제후 네페티 발 플레렌이다, 분대장."
"지금 네가 ㅤㅉㅗㅈ는 게 누군지 아나?"
카렐이 네페티 부인의 팔을 뿌리치며 그 분대장에게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저녀석이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싸움만으로도 카렐이 절대 자신의 상대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터였다. 카렐이 살기에 찬 눈으로 병사를 쏘아보자 병사가 벌벌 떨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전 그냥......반란을 획책한 장교들하고 그 괴수인 여자 한 명을 추적하라고......"
카렐이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그 병사의 얼굴이 또다시 공포로 물들었다.
"죽이지 마, 저녀석이 무슨 죄야?”
네페티 부인이 거의 결사적으로 카렐의 팔을 붙들었다. 그는 눈앞의 낙타병 분대장을 향해 목소리를 가다듬어 최대한 언성을 높였다.
“네놈! 지금 꿇지 않고 뭐하나!”
부인의 눈짓을 받은 그 병사가 가지고있던 무기와 할룩스를 잽싸게 옆에 집어던지며 카렐과 부인의 앞에 넙죽 꿇어앉아 고개를 숙였다.
"제길,"
애타는 얼굴로 자신의 팔을 붙든 네페티 부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카렐이 결국 긴장을 풀며 그 분대장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성난 지휘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항복한 분대장을 사정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휴우,"
카렐이 가쁜 숨을 고르며 죽은 병사의 옷자락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평소와 달리 극도로 지쳐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이유를 잘 아는 네페티 부인이 카렐의 피묻은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괜찮아? 핏기가 하나도 없어."
"그럴겁니다."
칼을 다시 꽂아넣은 카렐은 엉망이 된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 앞에는 네 구의 낙타병 시체와 한 명의 장교 부상자, 그리고 죽은 낙타 한마리가 있었다. 유시프 장군이 이성을 잃은 채 린치하고 있는 동료들 틈새에서 흙투성이가 된 낙타병 분대장을 가까스로 끄집어냈다.
"유시프 장군."
"예."
"낙타들 갑옷 벗겨. 큰 낙타니까 두세 사람 정도씩은 타고갈만할거다. 녀석들 갖고있던 장비나 물하고 식량 챙기는거 잊지 말고."
카렐은 바닥에 쓰러져 부상을 입고 신음하던 제후군 지휘관 앞에 천천히 다가갔다. 오른쪽 가슴을 창에 찔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그 여자 중랑은 거의 살 가망이 없어보였다. 물론 당장 산다고 해도 가다가 죽을 것이 확실했다. 그가 쉰 목소리로 네페티 부인과 카렐에게 중얼거렸다.
"최고제후님을 지키다 죽어 영광입니다......"
목구멍에 피가 차 올라오는지 그의 목소리가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유시프 장군이 난감한 얼굴로 카렐을 올려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렐은 망토 속에서 몰래 단검을 뽑아들었다.
"이게......끝이겠죠?"
그가 카렐에게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끔찍하게 많은 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을 네페티 부인이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는지 뒤로 돌아서버렸다. 자리에 무릎꿇고 앉은 카렐은 쓰러져있던 그 중랑을 무릎 위에 눕히고는 품에 꼭 끌어안아주었다.
"걱정 말게. 이제 낙타가 있으니 함께 갈 수 있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카렐은 짐짓 웃음을 지으며 그의 왼쪽 뺨을 가볍게 톡 두들겼다.
"예?"
그가 반사적으로 왼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카렐의 단검은 서슴없이 오른편 목의 급소을 내리찔렀다. 순간 움찔 한 유시프 장군은 괴로워하던 중랑의 고개가 맥없이 뒤로 떨어져버리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카렐의 파란색 긴 단검은 이미 그의 목을 꿰뚫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유시프 장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렐에게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이제 장교들은 8명으로 줄어있었다.
"다시 갈 준비하자."
카렐이 짐짓 무덤덤한 얼굴로 단검을 닦아 다시 허리에 꽂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킨대로 낙타 갑옷 벗기고, 주머니로 쓸만한거 있으면 좀 가져와."
"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도 식사 좀 해야겠다."
바닥에 떨어진 낙타병의 시미터를 집어든 카렐은 죽어 쓰러져있는 낙타의 배를 그대로 갈랐다. 배 밖으로 쏟아져나온 내장들을 뒤적거리던 카렐은 그중에 제일 큰 간을 잘라내 한쪽으로 치워놓고 나머지 부분들을 능숙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이 죽은 낙타가 '식량'임을 깨달은 지휘관들이 너나할것없이 달려들어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함께 살점을 잘라냈다.
"오늘 저녁은 꽤 푸짐하겠는걸."
"밀수업자놈들하고 만나봤는데 말씀입니다,"
우베가 제네르의 눈치를 있는대로 보며 말을 꺼냈다.
"해 줄수는 있지만 그 댓가로 2000골드를 달라고 합니다."
제네르가 말라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로가 약간 흥분한 듯 우베에게 언성을 높였다.
"2000골드면 돈도 아니지, 당장 에너지장벽만 풀리면 그까짓 2000골드가 문제야? 일단 외상으로라도 해봐. 더 줄 수도 있다고."
시로의 격앙된 고함소리에 우베가 쭈ㅤㅉㅣㅅ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밀수업자놈들은 현금이 아니면 절대 거래하지 않습니다. 몇배를 더 얹어줘도죠."
우베의 대답을 어차피 예상하고 있던 제네르가 평소 습관대로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적어넣으며 짧게 물었다.
"지금 우리 가진 돈은?"
"380골드."
우베가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후,"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네르 일행도 파예드 아카데미 귀빈 자격으로 온 것이니 거의 가진 돈이 없었고, 공용 여객선을 타고 보통 귀족 행세를 하며 2,3일 머물 예정으로 이곳에 온 카렐 역시 그렇게 많은 현금을 가져왔을 턱이 없었다.
"우리한테 팔 만한 물건 있나?"
"셔틀이요."
우베의 말도안되는 대답에 조종사 베네루스가 대뜸 그를 곱지않는 눈길로 째려보았다.
"셔틀 팔면 뭐 타고 전하 구하러가게? 그리고 보통 셔틀도 아니고 저런 초고가 셔틀이 쉽게 팔리겠어? 그거 말고."
"셔틀 안의 무기장에 무기하고 갑주가 실려있지만 이런 시국에 무기 암시장에 팔러다니기도 위험하고.....다 팔아도 그값은 안될텐데요. 누가 단장님꺼 슈로 기사단 갑주 사겠습니까?"
이번엔 제네르가 우베를 째려보았다. 그가 수첩을 닫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볼토만 남아있었어도 손을 써보는건데......대책이 없군......"
제네르의 시선이 한쪽에서 말을 할까 말까 눈치만 보고 있는 푸아킨 경을 향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는 확실했다. 침통한 표정의 제네르가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차악'밖에 없겠군요."
제네르의 황당한 선택에 시로와 우베가 움찔 했다.
근위대 지부에서 식음도 거른 채 침통에 빠져있던 베흔에게 뚱딴지같이 우베의 연락이 들어온 건 이미 밤이 깊어가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우베 역시도 이곳에 베흔이 직접 와 있다는 말에 저으기 놀란 모양이었지만 양쪽 모두 지금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 덕분인지 우베도 '안전보장약속'을 그다지 어렵지않게 받아낼 수 있었다.
빌린 셔틀을 타고 북극 부근의 근위대 지부에 협상사자 자격으로 도착한 우베는 거의 송장에 가깝게 변해있는 창백한 베흔의 모습에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지만 여느때처럼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접견실에 마주앉았다.
"무슨 일이냐?"
베흔이 만사가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우베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죽상을 하고 있는 베흔에게 말을 붙였다.
"도움을 구하러 왔습니다."
"뭐라구?"
너무나 기가막힌지 베흔은 차마 화낼 생각도 못한 채 눈살을 찌푸리며 우베를 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대고 우베가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우베는 하마터면 뒤로 벌렁 넘어갈 뻔 했다. 탁자를 꽝 하고 후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베흔은 접견실이 공중으로 날아갈 정도의 큰 소리로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네놈이 감히 날 놀리는거냐!"
베흔의 그 무시무시한 손바닥에 정통으로 맞은 탁자 한구석이 통째로 부서져 있었다. 그 서슬퍼런 기세에 잠시 얼굴의 핏기까지 싹 가셨던 우베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눈을 부릅떴다.
"네페티 부인께선 살아계십니다."
우베의 이 한마디에 베흔이 그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평소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베흔의 초록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베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들이 인질로 잡고있나?"
"아닙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전 도움을 구하러 온 겁니다."
잠시 아무 말 없던 베흔이 생전 들어본 적 없던 따뜻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도움?"
"현금 2천 골드가 급히 필요합니다."
우베의 대답에 베흔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이새끼들이 이젠 근위대 돈까지 벗겨먹으려 들어?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저희라고 겨우 2천골드 푼돈을 벗겨먹으려고 이런 바보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부인께선 지금 살아계십니다......아마도."
"아마도?"
베흔이 다시 살기가 어리기 시작한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2천 골드는 저희가 쓸 것이 아니고 부인을 살리는데 쓰일 돈입니다."
말을 끝낸 우베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베흔이 그 큰 손으로 우베의 멱살을 통째로 붙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너희가 돈 쓸 필요 없어. 당장 내가 구할테니까. 부인이 어디있는지나 당장 말해. 아니면 여기서 살아서 못나갈거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우베가 베흔의 눈을 째려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덩치만해도 자신의 두배는 족히 될 베흔의 손아귀에 잡힌 자그만 우베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탁한 목소리로 다시 강조했다.
"그깟 푼돈때문에......부인의 목숨을 놓고 도박을 하고 싶으신가요?"
우베를 째려보던 베흔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지난번에도 보았지만 허풍에 순발력으로 똘똘 뭉친 이 콩알만한 녀석이 자신의 위협 따위에 쉽게 굴복할 만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베흔도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근위대를 등쳐먹기 위한 금액치고 2천골드는 너무도 작은 액수였다.
우베를 바닥에 사정없이 동댕이친 베흔이 바깥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지부장!"
"옛!"
문을 열고 급히 들어온 지부장이 베흔에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3천 골드 갖고들어와. 현금으로. 당장."
"예?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씩씩거리는 베흔을 자리에 쓰러진 채 말없이 올려보던 우베는 눈앞의 잔혹한 사나이가 이번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그답지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나간 지부장이 현금이 잔뜩 든 가방을 들고 다시 나타나기까지 채 십분이 걸리지 않았다. 지부장으로부터 가방을 받아 우베의 앞에 내려놓은 베흔은 사뭇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행여 딴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면......네놈은 잡히는즉시 생껍질을 벗겨 죽여버릴 줄 알아라. 천 골드는 덤이다. 구하려면 제대로 구해라."
베흔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은 우베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이미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을 '정말로' 산채로 껍질을 벗겨 죽인 일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방을 받아든 우베는 베흔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올리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망치듯 지부를 빠져나가는 우베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베흔이 옆에 서 있던 지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통제구역을 담당하는 플레렌 가 제후군 쪽에 동요가 있을거다. 녀석들의 최근동향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서 알리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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